Mag-log in『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
검은 존재의 목소리가 꽃밭 전체에 스며들었다.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무엇을.” 검은 안개 속. 여섯 장의 날개가 천천히 펼쳐졌다. 검게 썩은 깃털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하나. 둘. 셋. 기분 나쁠 정도로 많은 눈이. 모두 세이아를 향했다. 『당신이.』 낮은 웃음. 『첫 번째 날개를 직접 죽였다는 것을.』 순간. 바람이 멎었다. 세이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도.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도. 바로 옆에 서 있는 카일의 숨소리조차. 오직. 한 문장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내가. 첫 번째 날개를. 죽였다. “…뭐라고?” 세이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검은 존재가 웃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군.』 “헛소리하지 마.” 이번에는 카일이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은빛 검끝이 검은 존재를 향했다. 『첫 번째 날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이름은 카일이다.” 검은 존재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 『이름.』 킥킥. 금속 긁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할보다 이름을 먼저 말하는군.』 “그래서?” 『이번에는 꽤 다른 모양이야.』 카일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들었다. 그 순간 세이아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카일이 돌아봤다. 세이아는 검은 존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방금 말.” 그녀가 천천히 물었다. “무슨 뜻이지?” 『어느 부분을 묻는 거지?』 “내가.” 세이아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 “첫 번째 날개를 죽였다는 말.”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세이아.” “확인해야 합니다.” “저것이 진실을 말한다고 누가 보장하지?” “아무도요.” 세이아가 대답했다. “그래도 듣기는 해야죠.” 검은 존재가 즐거운 듯 웃었다. 『역시.』 “뭐가?” 『그 눈은 같군.』 세이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누구랑.” 『과거의 당신과.』 순간.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번쩍였다. 피로 물든 손. 은빛 검. 누군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 세이아의 몸이 휘청였다. 카일이 즉시 허리를 받쳤다. “세이아.”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인다.” “잠깐만.” 세이아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본 장면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사라졌다. 너무 빠르게.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잘라낸 기억처럼. “뭘 봤지?” 카일이 낮게 물었다. 세이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검.” “검?” “제가 들고 있었어요.” 카일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세이아가 숨을 골랐다. “누군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못 봤어요.” 검은 존재가 웃었다. 『정말 못 봤을까.』 세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면.』 수십 개의 황금빛 눈이 일제히 휘었다. 『보고 싶지 않은 걸까.』 “닥쳐.”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은빛 검기가 꽃밭을 갈랐다. 검은 안개가 크게 찢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모였다. 『화가 났나?』 “네 말이 길어서.” 『당신은 원래도 그랬지.』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그 여자가 당신을 죽이려 했을 때도.』 세이아의 숨이 멎었다. 『검 한 번 들지 않았으니까.』 “카일.” 그녀가 그를 바라봤다. 카일도. 처음 듣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기억납니까?” “아니.” 짧은 대답. 그러나.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른다. 그런데. 몸 어딘가에서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세이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쿵. 둘의 손등에. 은빛 문양이 떠올랐다. 절반의 날개. 그리고. 기억이 터졌다. ⸻ 『카일.』 세이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 비가 내렸다. 아니. 비가 아니었다. 검은 재였다. 무너진 신전 아래. 은빛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카일. 그가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 돼.』 세이아가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검을 들어야 해.』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카일.』 『네가 날 죽여야 끝난다면.』 그가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슬픈 미소. 『그럼 끝나지 않아도 돼.』 『그러면 모두 죽어.』 『그래도.』 카일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세이아의 손 안에 들린 검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네가 직접 나를 죽이게 두지는 않아.』 세이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왜.』 카일이 웃었다. 『네가 살아야 하니까.』 장면이. 흔들렸다. 그리고. 뚝. 끊겼다. ⸻ “세이아!” 카일의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숨이 가빴다. 가슴이 미친 듯 뛰었다. “헉….” 카일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나를 봐.” 세이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현실과 꿈이. 겹쳐 보였다. 지금의 카일. 과거의 카일. 둘 다. 같은 눈이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눈. “괜찮아?” “…모르겠어요.” 솔직한 대답. 세이아는 카일의 제복을 붙잡았다. “방금.” “뭘 봤지?” “전하가.”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제 검을.” “…….”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댔어요.”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왜.” “저 대신 죽으려고.” “그랬군.” 너무 담담한 대답. 세이아가 그의 옷깃을 더 세게 잡았다. “그랬군이 다예요?”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화라도 내든가요.” “내가 나한테?” “…아.” 카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상한 주문을 하는군.” 세이아가 그를 노려봤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당신 표정이.” “뭐가요.” “내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라.” 세이아가 입을 다물었다. 카일의 시선이. 그녀가 자신의 옷깃을 움켜쥔 손으로 내려갔다. “손도.” “….”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고.” 세이아가 뒤늦게 손을 놓았다. “그건.” “왜.” “그냥.” 카일이 낮게 웃었다. “좋군.” “뭐가요?” “이번에는 내가.” 한 걸음. 그가 가까워졌다. “그 말을 듣는군.” 세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자주 하잖아.” “그냥.” “그걸.”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맥박 위에 놓였다. 쿵. 쿵. 이번에는. 세이아의 심장이 빨랐다. 카일이 느꼈다. “빠르군.” “…상황 때문입니다.” “그래?” “네.” “내가 가까워져서가 아니라?”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방 배우셨네요.” “스승이 좋다며.” “수업료가 비싸다고도 했고요.” “지불하지.” “뭘로요?” 카일의 푸른 눈이. 조금 깊어졌다. “원하는 걸 말해.” 세이아가 순간 멈췄다. 농담처럼 받아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카일의 얼굴은. 농담이 아니었다. “전하.” “왜.” “그런 말.” 세이아가 조금 웃었다. “여자한테 쉽게 하지 마세요.” “아무 여자한테나 안 한다.” “….” “당신에게 한 거다.” 세이아의 웃음이 멈췄다. 순간. 검은 안개가 크게 일렁였다. 『역겹군.』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기억도 없는 것들이.』 검은 존재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또 같은 짓을 반복하다니.』 콰아아아——! 검은 안개가 폭발했다. 카일이 세이아를 뒤로 밀었다. “내 뒤에 있어.” “싫습니다.” “세이아.” “제 꿈이기도 합니다.” “아니.” 카일이 검을 들었다. “내 꿈이다.” “그럼.” 세이아의 보랏빛 마력이 손끝에 모였다. “제가 손님이네요.” 수십 개의 보랏빛 실이 허공에 나타났다. “손님한테 싸움 시키는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카일이 그녀를 돌아봤다. 세이아가 웃었다. “같이 하죠.” “….” “왜요?” 잠깐. 카일의 입가가 올라갔다. “여전하다고.” “또 그 말.” “기억은 없는데.” 그가 검을 세웠다. “몸은 기억하는 모양이군.” 세이아의 마력이. 동시에 움직였다. 촤아악——! 보랏빛 실들이 검은 존재의 팔과 날개를 묶었다. “지금!” 카일이 바로 달려들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세이아가 어디를 묶을지. 어느 순간 힘이 들어갈지. 이미 아는 사람처럼. 은빛 검이. 검은 날개를 베었다. 촤악! 기괴한 비명이 터졌다. 『아아아악——!』 검은 안개가 뒤집혔다. 세이아는 또 다른 실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왼쪽. 카일도 같은 순간. 왼쪽으로 움직였다. “….” 세이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았다. 카일도. 그녀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전하.” “왜.” “우리.” 또 하나의 날개가 떨어졌다. “생각보다.” 세이아가 웃었다. “합이 좋은데요?” 카일이 검은 존재의 공격을 막았다. 쾅! “생각보다가 거슬리는군.” “그럼 아주 좋다고 할까요?” “그쪽이 낫다.” “전하 은근 칭찬 좋아하시네요.” “당신한테 듣는 건.” 검이 움직였다. 촤악! “나쁘지 않군.” 세이아가 순간 웃었다. 그 짧은 틈을. 검은 존재가 노렸다. 슈우욱——! 날카로운 검은 창이. 세이아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세이아!” 카일이 몸을 돌렸다. 훅. 세이아의 허리가 잡혔다. 몸이 강하게 당겨졌다. 콰앙——! 창이.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꽂혔다. 충격으로. 세이아의 등이 은빛 나무에 닿았다. 그 앞. 카일이 몸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한 손은 나무를 짚고. 다른 팔은. 세이아의 허리를 감싼 채. “….” “….” 가까웠다. 너무. 숨이 서로의 입술 근처에 닿을 정도로. 카일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다친 데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없나?” “없어요.” “확실해?” “네.” 카일의 손이 움직였다. 허리. 옆구리. 상처가 있을 법한 곳을 확인하듯. 손바닥이. 천천히 스쳤다. 얇은 옷감 너머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세이아의 숨이 한순간 멎었다. “카일.” 이번에는. 전하가 아니었다. 카일의 눈빛이 변했다. 세이아도. 뒤늦게 자신이 뭐라고 불렀는지 깨달았다. “….” 하지만. 정정하지 않았다. 카일의 손이. 허리선에서 멈췄다. “왜.” 낮은 목소리. 세이아가 천천히 말했다. “확인하는 손치고.”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좀 오래 머무는 것 같은데요.” 카일이 바로 떼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아직 확인 중이다.” “뭘요?” 카일의 시선이. 세이아의 눈에서. 입술로 내려갔다. “당신이.” 목소리가 낮아졌다. “정말 괜찮은지.” 세이아의 심장이 뛰었다. 쿵. 그의 가슴과 자신의 가슴 사이. 거리는 거의 없었다. 세이아가 손을 들어. 카일의 제복 앞섶을 잡았다. “이 정도면.” “뭐가.” “확인되었을 것 같은데.” “아직.” “욕심이 많으시네요.” “당신이 생각하는 쪽은 아니다.” “제가 뭘 생각했는데요?” 카일이 잠시 말을 잃었다. 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뭐가.” “놀리는 게 재미있어요.”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 순간. 그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세이아의 웃음이. 아주 조금 멈췄다. “세이아.” “네.” “계속 그러면.” “뭘요.” 카일의 시선이. 다시 입술에 닿았다. “나중에는.” 한 뼘. 반 뼘. “내가 참지 않아도.” 숨결이 섞였다. “불평하지 마.” 세이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협박입니까?” “경고.” “저는.” 세이아가 작게 웃었다. “경고를 잘 안 듣는데.” 카일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알고 있다.” 그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코끝이 닿았다. 세이아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복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입술과 입술 사이. 숨결 하나. 그때. 『반복하는군.』 검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둘의 눈빛이 동시에 변했다. 콰아아앙——! 카일이 세이아를 품 안으로 끌어당긴 채 몸을 돌렸다. 검은 날개가 나무를 갈랐다. 쾅! “정말.” 세이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타이밍이 나쁘네요.” 카일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닌 것 같은데.” “전투나 하세요.” 카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명령인가?” “네.” “따르지.” 그가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세이아와 카일이 동시에 움직였다. 보랏빛 실. 은빛 검. 두 힘이.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싸운 것처럼 정확하게 맞물렸다. 세이아가 날개 두 장을 묶었다. 카일이 베었다. 카일이 몸을 낮추는 순간. 세이아의 마력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검은 존재의 가슴을 꿰뚫었다. 콰아앙——! 『아아아아——!』 괴성이 터졌다. 검은 날개 여섯 장이. 하나씩 부서졌다. 세이아가 마지막 실을 당겼다. “카일!” “알아.” 은빛 검이. 검은 존재의 중심을 갈랐다. 촤아아악——!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흩어졌다. 정적. 세이아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끝?” 카일이 검을 내리지 않았다. “아니.” “왜요?” “너무 쉽게 사라졌다.” 그 말과 동시에. 흩어진 안개가. 이번에는 꽃밭 전체로 번졌다. 사락. 하얀 꽃들이. 하나씩 검게 변했다.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익숙했다. 문서. 북부 병사들. 잠들기 직전 보았다는. 검은 안개. “카일.” “알아.” 그도 알아차렸다. “병사들이 봤다는 안개.” “이거예요.” 안개가. 그들의 발목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이아가 마력으로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보랏빛 힘을 먹듯. 더 짙어졌다. 『첫 번째 날개.』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꿈의 주인.』 카일이 세이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만.” 세이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뒤에 있으라는 말.” “지금은.” “싫어요.” “세이아.” “같이 보자면서요.” 카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세이아는. 이번에는 그의 옆에 섰다. “무엇을 보여주든.” “…….” “같이 봐요.” 카일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잠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검은 안개가. 두 사람 주위를 완전히 감쌌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 신전. 무너진 하늘. 피. 세이아는. 자신을 보았다. 새하얀 옷. 금빛 머리카락. 보랏빛 눈. 그리고. 손에 든 검. 바로 앞. 카일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피투성이. 그런데도. 웃고 있었다. 『해.』 과거의 카일이 말했다. 과거의 세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해야 해.』 『싫다고 했잖아.』 『세이아.』 『다른 방법을 찾을 거야.』 『시간이 없어.』 『그래도.’ 세이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을 죽이지 않아.』 카일이. 웃었다. 『그럼 내가 한다.』 그의 손이 올라왔다. 세이아의 검날을 잡았다. 피가 흘렀다. 그리고. 자기 가슴으로. 천천히 당겼다. 『안 돼!』 세이아의 비명. 그러나. 늦었다. 푹. 검이. 카일의 가슴을 꿰뚫었다. “…!” 현재의 세이아가 숨을 삼켰다. “카일.” 옆을 바라봤다. 그도. 장면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굳어 있었다. 검은 존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봤나.』 『당신이 죽였다.』 세이아의 몸이 떨렸다. 아니. 자신이 찌른 게 아니다. 카일이. 자기 손으로. 그런데. 세이아의 손에는 검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검이. 그를 죽였다. 『당신 때문에.’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첫 번째 날개는 죽었다.’ “…아니야.” 세이아가 낮게 말했다. 『무엇이 아니지?』 “저건.”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찌른 게.” “아니다.” 카일이 말했다. 세이아가 그를 바라봤다. 카일은.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가 했다.” 『결과는 같지.’ 카일의 푸른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 『무엇이 다르지?』 “선택한 사람이.” 그가 말했다. “다르다.” 세이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카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이 날 죽인 게 아니야.” “하지만.” “내가 선택했다.” “카일.” “그러니까.” 그가 세이아의 손을 잡았다. “그걸 당신 죄로 만들지 마.” 세이아의 목이 꽉 막혔다. “그렇게 쉽게.” “쉽지 않아.” 카일이 말했다. “나도.”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저 선택을 했는지 모르니까.” 세이아는. 그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주 잡았다. “그럼.” “같이 알아내요.” 카일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 둘의 손등에. 은빛 날개가 나타났다. 파아앗——! 검은 기억이 크게 일그러졌다. 『어리석군.’ 검은 존재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안개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같은 선택을 하게 될 텐데.’ 세이아가 이를 악물었다. “누가.” 『무엇?』 세이아가 카일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이번에도.” 보랏빛 눈이. 검은 안개를 노려봤다. “같은 선택을 한다고 했지?” 『운명은 반복된다.’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그 말.” 카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세이아는. 검은 안개를 향해 말했다. “제가 제일 싫어합니다.” 카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도.” 은빛 날개가. 완전히 펼쳐졌다. 콰아아아——! 빛이 검은 안개를 밀어냈다. 『아직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그러니까.” 세이아가 말했다. “다 기억하고.” 카일이 검을 들었다. “다른 답을 고르지.” 두 힘이 동시에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꿈 전체가 무너졌다. ⸻ “……!” 세이아는 눈을 떴다. 숨이 거칠었다. 익숙한 천장. 자신의 침실. 그리고. 뜨거운 체온. “….” 눈을 깜빡였다. 가까웠다. 너무. 세이아는. 카일의 가슴 위에 엎드려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카일의 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깊게 감싸고 있었고. 다른 손은. 목덜미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다리까지. 소파 위에서 어색하게 얽혀 있었다. “….” “….” 카일도. 막 눈을 뜬 상태였다. 푸른 눈동자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세이아를 바라봤다. 둘의 숨결이 섞였다. 꿈속보다. 현실이 더 뜨거웠다. 세이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왜.” “깨어난 것 같습니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를 감싼 팔로 내려갔다. “왜 아직 안 놓으세요?” 카일도 내려다봤다. 그런데. 팔은 풀리지 않았다.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 “또 확인 중입니까?” 카일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그래.” 세이아가 순간 말을 잃었다. “뭘.” “당신이.” 낮은 목소리. “살아 있는지.” 세이아의 표정이 멈췄다. 카일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서. 아주 조금 위로 올라갔다. 등 중앙. 심장 박동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세이아의 가슴이. 그의 가슴과 더 가까워졌다. 쿵. 쿵. 둘의 심장이. 같은 박자. 카일의 눈이. 세이아의 입술로 내려갔다. 세이아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살아 있죠?” 그녀가 아주 작게 물었다. “그래.” “그럼.” 세이아의 손이. 카일의 셔츠 위에 올라갔다. 심장 바로 위. “전하도.” 쿵. “살아 있네요.”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목덜미를 감쌌다. “카일.” 이번에도. 이름이 먼저 나왔다. 푸른 눈이 순간 깊어졌다. “…다시.” “뭘요?” “한 번 더 불러.” 세이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싫다면요?” 카일이 몸을 아주 조금 일으켰다. 둘 사이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럼.” 목소리가 낮았다. “다른 방법으로 듣지.” 세이아의 숨이 흔들렸다. “…어떻게요?” 카일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 “궁금한가?” 세이아가 웃었다. “조금.” “그럼.” 그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알려 줄 수도 있는데.” 입술 사이. 숨결 하나. 세이아의 손가락이. 그의 셔츠를 살짝 움켜쥐었다. 카일의 엄지가. 목덜미를 천천히 쓸었다. 그 순간. 쾅쾅쾅! “세이아!” 에드윈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둘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 “….” 세이아가 눈을 감았다. 카일도.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대답해!” “살아 있어요!” “문 연다!” “잠깐!” 하지만. 이미 늦었다. 쾅! 문이 열렸다. 에드윈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멈췄다. 소파. 카일. 그 위의 세이아. 허리를 감싼 팔. 목덜미에 놓인 손. 그리고. 지나치게 가까운 두 얼굴. “….” “….” “….” 침묵. 세이아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 “그래.” “이건.” “그래.” “꿈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에드윈의 시선이. 카일의 손으로 내려갔다. “과정이.”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상당히 길어 보이는구나.” 카일이. 이번에는 바로 세이아를 놓았다. 세이아가 몸을 일으켰다. “오해예요.” “무엇을?” “….” 생각해 보니. 뭘 오해했는지도 설명하기 애매했다. 그 순간. 카일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백작.” 에드윈이 그를 바라봤다. “중요한 걸 봤습니다.”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 “무엇을요?” 세이아의 장난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가.” 입술이 조금 굳었다. “카일을 죽이는 장면을 봤어요.” 에드윈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카일이 정정했다. “정확히는.” 그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내가 세이아가 들고 있던 검에 스스로 찔렸다.” “…….” “그리고.” 카일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향했다. “저것들은 그 책임을 세이아에게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저것들?” “검은 안개.” 세이아가 말했다. “북부 병사들이 봤던 것과 같았어요.” 에드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확실하니?” “네.” “그 안에 존재가 있었고?” “여섯 장의 검은 날개.” 에드윈의 얼굴이 변했다. 세이아가 바로 알아차렸다. “아버지.” “…….” “알죠?” 에드윈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추방된 날개.” 세이아와 카일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그게 뭡니까?” 카일이 물었다. 에드윈은 대답하기 전에. 두 사람을 바라봤다. “먼저.” 그의 시선이. 세이아와 카일의 손으로 내려갔다. “그 꿈에서 들은 말을 전부 말해 줘.” 세이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운명은 반복된다.』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아버지.” “왜?” “저희.” 세이아가 말했다. “북부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지금?” “네.” “이유는.” 세이아는. 꿈에서 본 검은 안개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흔세 명의 병사들. “저것들이.”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이미 북부에 있으니까요.” 카일의 표정도. 전장의 대공처럼 차갑게 변했다. “출발은.” “내일 새벽.” 카일이 말했다. 세이아가 눈썹을 올렸다. “누가 결정했습니까?” “나.” “저도 가는 사람인데요?” “그래서.” 카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싫나?” 세이아가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아니요.” “그럼.” “다만.” 세이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아까보다 조금 멀어진 카일을 향해. “북부에서는.” “왜.” “제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카일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꿈에서만 아니었나?” “조건이 늘었습니다.” “마음대로군.” “싫으면.” 세이아가 웃었다. “병사들은 제가 혼자 구하겠습니다.” 카일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안 돼.” “왜요?” “당신을.”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혼자 보내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세이아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꿈속의 말. 현실의 카일은. 기억하지 못해야 했다. 그런데. “전하.” “왜.” “방금.” 세이아가 천천히 물었다. “꿈속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뭐?” 에드윈도. 카일을 바라봤다. 세이아의 심장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쿵. 카일의 푸른 눈 깊은 곳에서. 은빛 빛이. 아주 희미하게 스쳤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카일 자신도. 놀란 듯 멈췄다. 하지만. 말은 이미 이어지고 있었다. “너를 먼저 보내지 않는다.” 세이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쿵. 심장. 그리고. 그 순간. 대공성에서 수백 리 떨어진 북부. 잠들어 있던 마흔세 명의 병사가. 동시에. 눈을 떴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목소리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꿈의 주인이.” 잠깐. 입가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오고 있다.”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세이아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벨로아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평소라면 늦은 시간까지 여관에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야 할 마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사람들은 모두 문을 잠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검은 장막이 드리운 북쪽 하늘에서는 달빛조차 내려오지 않았다.마을 전체가 거대한 그림자 아래 갇힌 것 같았다.세이아는 침대 위에 이불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누군가 밖에서 보면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뒤 여행용 망토를 걸쳤다.허리에는 작은 단검을 찼다.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무기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아무것도 들지 않고 적이 부른 장소로 향하는 것보다는 나았다.세이아는 마지막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카일이 문밖에 서 있었다.그가 떠나는 발소리도 들었다.그런데 이상했다.카일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었다.특히 세이아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면 더욱 그랬다.‘아직 복도에 있는 건 아니겠지.’세이아는 조용히 기척을 살폈다.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기사들의 발소리도.카일 특유의 묵직한 마력도 없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창틀 위로 올라섰다.방은 여관 이층이었다.바닥까지 거리는 높지 않았다.세이아가 손끝을 움직이자 보랏빛 마력이 창 아래로 길게 늘어났다.빛은 투명한 계단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세이아는 소리 없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발이 땅에 닿는 순간 계단은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망토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북쪽의 버려진 종탑.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위치를 알 수 있었다.멀리 검은 장막 아래로 오래된 탑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탑 위에는 금이 간 종이 매달려 있었다.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종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세이아는 마을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집집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가끔 커튼 틈 사이로 사람의 눈이 보였다.그러나
“적어도 질투는.”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뺨을 감쌌다. 거칠게 검을 잡아 온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옅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정작 그녀의 피부에 닿는 손길은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웠다. “온전히 내 감정인 것 같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세이아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카일의 엄지가 뺨 아래를 느리게 스쳤다. 턱선. 그리고 입술에서 손가락 하나 떨어진 곳까지.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이상하게 숨이 얕아졌다. “…전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세이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손은 안 떼십니까?” 카일의 시선이 자신이 만지고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떼야 하나?”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 “그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세이아가 웃었다. 그러나 카일은 웃지 않았다. 푸른 눈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눈. 코. 그리고. 입술. 그곳에서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세이아는 이제 그 시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또 보시네요.” “뭘.” “제 입술.”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예전이라면 부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래.” 너무 쉽게 인정했다. 세이아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왜.” 카일이 물었다. “보면 안 되나?” “…안 된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럼 됐군.” 그의 손이 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세이아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막상 손길이 떨어지고 나니. 조금 아쉬웠다. 그 사실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공 전하.” “왜.” “꿈에서 돌아오고 난 뒤로 조금 뻔뻔해지신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군.” “설마 저라고 하시려고요?” “당신 말고 누가 있지?”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까.” 세이아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수업료는 비쌉니다.” “내겠다고 했잖아.” “무엇으로요?”
마차 유리창에 붙어 있던 검은 깃털이.사락.천천히 재로 변했다.기다리고 있습니다.핏빛으로 번졌던 글씨도 뒤따라 흐려졌다.두 번째 날개가.마지막 한 획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세이아와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덜컹.마차가 어두운 길을 달렸다.밤은 깊었고.수도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는 사람 사는 불빛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오직 마차 앞에 매달린 마도등만이 희미한 빛을 뿌렸다.세이아는 창문에서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그리고.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카일이 아직 잡고 있었다.조금 전.‘누구도 먼저 보내지 않는다.’그렇게 약속하며 맞잡은 손.은빛 날개 문양은 이미 희미해졌지만.체온은 그대로였다.세이아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카일의 시선이 바로 내려왔다.“왜.”“아직 잡고 계셔서요.”“놓으라고 했나?”“아니요.”“그럼.”카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그대로 있지.”세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대공 전하.”“왜.”“꿈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금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뭐가.”“예전 같으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먼저 놓으셨을 것 같아서요.”카일의 엄지가.자신도 모르게 세이아의 손등을 한 번 쓸었다.그리고.움직임이 멈췄다.두 사람 모두 그것을 느꼈다.“….”“….”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이것도 기억 때문입니까?”카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모른다.”“정말요?”“그래.”“아까부터 전하께서는 모르는 게 너무 많으시네요.”“당신은 다 아나?”“적어도.”세이아가 그의 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제가 잡고 싶은 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죠.”카일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세이아는 그 반응을 보고 웃었다.“왜요?”“아니.”“또요?”“당신이.”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생각보다 거리낌이 없군.”“전하한테만 그런 것 같습니다.”카일의 손에.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전하?”“그런 말.”낮은 목소리였다.“쉽게 하
“꿈의 주인이 오고 있다.”마흔세 명.잠들어 있던 북부 병사들이 동시에 눈을 뜨고.같은 말을 했다.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에드윈이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침실 안에는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세이아는 카일의 손등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은빛으로 빛나던 날개 문양 아래.검은 깃털 하나가 떠 있었다.작았다.그러나.불길할 정도로 선명했다.“아버지.”“보고 있다.”에드윈이 가까이 다가왔다.“대공 전하.”“말씀하십시오.”“손을 조금만.”카일이 손을 내밀었다.에드윈이 마력을 흘려보냈다.보랏빛 빛이 검은 깃털을 감쌌다.순간.치이익——!“……!”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에드윈이 급히 손을 뗐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반응했어요.”“그래.”“아버지 마력에?”“아니다.”에드윈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향했다.“네게.”“…저한테요?”“내 마력이 이 문양을 건드리는 순간.”그가 낮게 말했다.“안쪽의 힘이 네 쪽으로 움직였어.”세이아는 잠시 카일의 손을 바라보았다.그러다.손을 뻗었다.“잠깐.”카일이 즉시 손을 뒤로 뺐다.세이아가 눈썹을 올렸다.“왜요?”“위험할 수 있다.”“그래서 만져 보려는 겁니다.”“말이 앞뒤가 안 맞는군.”“전하께서 위험하다고 피하기 시작하면 오늘 해 뜨기 전에 북부는 못 갑니다.”“세이아.”“그리고.”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아까도 말씀드렸죠.”“뭘.”“전하 혼자 지키는 건 금지라고요.”카일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그건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지금부터 설명하면 되겠네요.”“나는 설명보다 네가 손을 거두는 쪽이 좋다.”세이아가 피식 웃었다.“싫은데요.”그리고.이번에는 묻지 않았다.카일의 손목을 잡았다.“세이아.”그 순간.쿵.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검은 깃털이 번쩍였다.파아아앗——!“……!”세이아의 시야가 뒤집혔다.⸻사아아아—은빛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세이아가 눈을 떴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검은 존재의 목소리가 꽃밭 전체에 스며들었다.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무엇을.”검은 안개 속.여섯 장의 날개가 천천히 펼쳐졌다.검게 썩은 깃털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하나.둘.셋.기분 나쁠 정도로 많은 눈이.모두 세이아를 향했다.『당신이.』낮은 웃음.『첫 번째 날개를 직접 죽였다는 것을.』순간.바람이 멎었다.세이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도.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도.바로 옆에 서 있는 카일의 숨소리조차.오직.한 문장만이 머릿속에 남았다.내가.첫 번째 날개를.죽였다.“…뭐라고?”세이아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검은 존재가 웃었다.『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군.』“헛소리하지 마.”이번에는 카일이었다.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은빛 검끝이 검은 존재를 향했다.『첫 번째 날개.』“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내 이름은 카일이다.”검은 존재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이름.』킥킥.금속 긁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역할보다 이름을 먼저 말하는군.』“그래서?”『이번에는 꽤 다른 모양이야.』카일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검을 들었다.그 순간 세이아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잠깐만요.”카일이 돌아봤다.세이아는 검은 존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방금 말.”그녀가 천천히 물었다.“무슨 뜻이지?”『어느 부분을 묻는 거지?』“내가.”세이아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첫 번째 날개를 죽였다는 말.”카일의 표정이 굳었다.“세이아.”“확인해야 합니다.”“저것이 진실을 말한다고 누가 보장하지?”“아무도요.”세이아가 대답했다.“그래도 듣기는 해야죠.”검은 존재가 즐거운 듯 웃었다.『역시.』“뭐가?”『그 눈은 같군.』세이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누구랑.”『과거의 당신과.』순간.머릿속에.장면 하나가 번쩍였다.피로 물든 손.은빛 검
『찾았다.』낮고 기이한 목소리가 울렸다.그 순간.수정함 안에서 피어난 새하얀 꽃이 크게 흔들렸다.사락.은빛 꽃잎 사이로 금빛이 번졌다.세이아와 카일은 동시에 굳었다.방금 들린 목소리는.에드윈의 것도.카일의 것도.물론 세이아의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분명.바로 곁에서 속삭인 것처럼 선명했다.『찾았다.』다시.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세이아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아버지.”“나도 들었다.”에드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세이아의 손은 아직 카일의 손 안에 있었다.조금 전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던 은빛 날개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그리고.쿵.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세이아가 눈을 내리깔았다.맞잡힌 손.커다란 카일의 손 안에 자신의 손이 완전히 들어가 있었다.이제는 놓아도 될 텐데.이상하게.둘 다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대공 전하.”“왜.”“언제까지 잡고 계실 겁니까?”카일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네가 먼저 놓지 않았는데.”“전하께서 먼저 잡으셨잖아요.”“네가 가까이 대라고 했다.”“아버지가 그랬죠.”“결국 네 손이다.”세이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원래 이렇게 말이 많으셨습니까?”“당신 앞에서는 그런 모양이군.”세이아가 잠시 말을 잃었다.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온 대답이었다.카일도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에드윈이 낮게 헛기침했다.“내가.”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여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면 좋겠군.”세이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뺐다.“잊은 적 없어요.”“그래 보이지 않았다.”카일도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나.세이아의 손끝에는 아직도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이상했다.평소라면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거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순간부터 먼저 경계했을 것이다.그런데 카일에게는.놀라기는 해도.싫다는 생각이 늦게 들었다.아니.정확히는.싫지 않았다.그 사실이 더 문제였다.세이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