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왜.”
카일 레온 에스트라드의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집무실을 갈랐다. “내 꿈에 있었지?” 세이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대답할 말을 고르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꿈에서 보았던 남자가 현실에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데. 그 남자 역시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꿈속의 카일은 분명 세이아를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사람처럼.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 하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푸른 눈동자에 반가움은 없었다. 경계. 의심.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당혹감. 세이아는 문득 생각했다. ‘꿈속에서는 그렇게 애틋하게 쳐다보더니.’ 현실에서는 사람을 범인 취급한다. 묘하게 억울했다. 세이아는 천천히 수정함을 든 손을 내렸다. “그 질문은 제가 하고 싶은데요.” 카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무슨 뜻이지?” “대공 전하께서 먼저 제 꿈에 계셨으니까요.” “내가?” “정확히 말하면.” 세이아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곳이 제 꿈인지, 전하의 꿈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 “꿈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건가?” 그 말에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공 전하.” “왜.” “저한테 싸움을 거시는 겁니까?”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사람의 자존심을 굉장히 정확하게 건드리시네요.” 카일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에드윈이 작게 헛기침했다. “둘 다.” 그러나. 어느 쪽도 그를 보지 않았다. 카일은 세이아를. 세이아는 카일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카일이 먼저 물었다. “어디까지 봤지?” “어디까지라니요?” “내 꿈에서.” 세이아의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흰 꽃밭.” 카일의 눈빛이 변하지 않았다. “거대한 호수.” “…….” “무너진 신전.” 그 순간. 아주 미세하게. 카일의 턱이 굳었다. 세이아는 놓치지 않았다. “검게 갈라진 하늘도 봤습니다.” “그만.”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카일은 알고 있다. 그 장소를. 세이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전하.” “…….” “그곳이 어디입니까?” “모른다.” “거짓말.” 카일의 눈매가 좁아졌다. “나를 거짓말쟁이로 보는 건가?”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으니까요.” “…….” “그리고.” 세이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는 사람의 꿈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숨기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는 꽤 익숙하다는 뜻이죠.” 카일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인정하시는 겁니까?” “그 장소를 안다.” 세이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디죠?” “모른다고 했다.” “방금 안다고 하셨잖아요.”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카일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는 그곳을 열다섯 해 동안 봤으니까.” “…….” 세이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얼마나요?” “열다섯 해.” “그 꿈을요?” “그래.” 세이아는 눈을 깜빡였다. 카일의 나이는 스물일곱. 그렇다면. “열두 살 때부터?” “그래.” 세이아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열다섯 해.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반복되는 악몽은 있을 수 있다. 강한 기억이나 충격이 무의식에 남아 같은 장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열다섯 해 동안 같은 장소를 보는 것은 다르다. “매일 밤입니까?” “처음에는 아니었다.” 카일은 천천히 창가로 돌아섰다. “일 년에 한두 번.” 햇빛이 그의 은빛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았다. “몇 년이 지나면서 횟수가 늘었다.” “언제부터요?” “스무 살 무렵.” “최근에는?” 카일이 잠시 침묵했다. “매일.”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매일이라고요?” “한 달 전부터.” 한 달. 세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귀걸이에 손을 올렸다. 자수정이 이상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시기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럼.” 세이아가 물었다. “저는 언제부터 보셨습니까?” 카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잠깐만요.” 세이아가 손을 들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열두 살 때부터 저를 봤다는 말씀입니까?” “비슷하다.” “비슷하다니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저라고 확신하죠?” 카일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금빛 머리카락. 보랏빛 눈. 그리고. 자수정 귀걸이. “머리카락.” “…….” “목소리.” 카일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세이아의 귀에 머물렀다. “그 귀걸이.” 세이아의 손끝이 자수정 위에서 멈췄다. “이걸 봤다고요?” “그래.” “꿈에서?” “항상.” 카일이 가까워졌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어느새 둘 사이에는 몇 걸음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아무리 가까이 가도.” “…….” “네가 돌아보려고 하면 꿈이 깨졌다.” 세이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열두 살의 카일. 꿈속에서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바라보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다. “그런데 어젯밤.” 카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으로 네 얼굴이 보였다.” 세이아의 심장이. 쿵. 뛰었다. “그리고 오늘.”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현실에 나타났군.” “제가 나타난 게 아니라 전하께서 찾아오신 겁니다.” “결과는 같지.” “전혀 다른데요.” 카일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세이아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방금 웃으셨습니까?” “아니.” “웃으셨는데.” “착각이다.” “대공 전하께서는 거짓말도 자연스럽게 하시네요.” “네가 너무 많은 걸 보는 거겠지.” “…그건.”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부정하기 어렵네요.” 그 순간. 카일의 눈빛이 아주 잠깐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곧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 가지 더 있다.” “뭐죠?” “꿈속에서.” 그의 시선이 자수정으로 향했다. “누군가 네 귀걸이를 빼고 있었다.” 세이아의 웃음이 사라졌다. “…누가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뭘 봤습니까?” 카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짧게 말했다. “피.” “…….” “귀 아래부터.” 그의 시선이 세이아의 귓불에서 목으로 내려갔다. 아주 천천히. “목을 타고 흘렀다.” 세이아는 무의식적으로 목을 만졌다. “그리고?”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카일이라고?” “그래.” “살려 달라고?” 카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떻게 알았지?”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먼저 나왔다.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었다. 그런 장면을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왜 알고 있었지? 세이아가 생각에 잠기려던 순간. 카일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던 수정함에 닿았다. “그건 뭐지?” “아.” 세이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미 숨길 단계는 지났다. 그녀가 수정함을 열었다. 사락. 하얀 꽃잎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이걸 어디서 얻었지?” “역시 아시는군요.” “어디서 얻었냐고 물었다.” “꿈에서요.” 카일의 눈빛이 변했다. “어젯밤.” 세이아가 꽃잎을 들어 보였다. “전하가 있던 꽃밭에서 제 손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현실에 있지?” “저도 그걸 알고 싶습니다.” 카일은 꽃잎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번 있었다.” “꿈에요?” “그래.” “같은 꽃이?” “수없이.” 세이아는 에드윈을 돌아봤다. “아버지.” 에드윈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가 수정함을 받아 들었다. 마력을 흘려보내자. 보랏빛 빛이 꽃잎을 감쌌다. 그리고. 안쪽에서. 은빛과 금빛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 에드윈의 표정이 굳었다. “꿈의 잔재가 아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현실의 식물도 아니야.” 카일이 물었다. “그럼 무엇입니까?”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에드윈은 꽃잎을 빛에 비춰 보았다. “다만.” “…….” “아주 오래된 신성의 흔적이 있습니다.” “신성?” 세이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신전에서 사용하는 신성력과는 달라.” 에드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훨씬 오래됐어.” 그는 잠시 꽃잎을 바라보다 수정함을 닫았다. “이건 나중에 기록과 대조해 보마.” 세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일을 바라봤다. “그런데.” “왜.” “전하께서는 저 때문에 트리비아에 오신 게 아니라고 하셨죠.” “그래.” “그럼 원래 용건은 뭡니까?” 카일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북부를 지배하는 대공의 얼굴이 돌아왔다. 카일은 책상 위의 검은 봉투를 집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봉투가 열렸다. 안에서 여러 장의 문서가 나왔다. “북부 병사 마흔세 명이 잠든 뒤 깨어나지 못했다.”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마흔세 명?” “그래.” 카일이 첫 번째 문서를 펼쳤다. 병사의 이름. 나이. 발견 시각. 증상. “맥박은 있습니다.” “호흡도?” “정상이다.” “마력핵은요?” “이상 없다.” “독이나 저주는?” “발견되지 않았다.” 세이아는 빠르게 문서를 넘겼다. 한 장. 두 장. 세 장. 전부. 비슷했다. 잠든 뒤. 깨어나지 않는다. 육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생명력만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세이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들기 전에 공통적으로 한 말은 없었습니까?” 카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있다.” “뭐죠?” “검은 안개.” 세이아의 손이 멈췄다. “전부?” “마흔세 명 모두.” “…….” 세이아는 천천히 문서를 내려놓았다. “꿈에 갇힌 겁니다.” 에드윈의 표정도 굳었다. 카일이 물었다. “확실한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백 퍼센트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세이아는 문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육체가 정상인데 의식만 돌아오지 않고, 잠들기 직전 같은 환상을 봤다면 가능성이 높아요.” “깨울 수 있나?” “무엇이 붙잡고 있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성공 가능성은?” “그것도 확인해야 압니다.” “실패하면?” 세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못 돌아올 수 있죠.” 카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인가?” “쉽게 말한 게 아닙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꿈속에서 죽는다고 현실의 육체가 바로 죽지는 않습니다.” “그게 위로가 되나?” “전하를 위로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카일이 입을 다물었다. 세이아는 이상하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이 남자. 꿈속에서는 자신을 보자마자 끌어안더니. 현실에서는 말끝마다 시비다.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세이아가 문서를 내려놓았다. “한 가지 확인해 볼 게 있습니다.” “뭐지?” “손 주세요.” 카일의 눈썹이 올라갔다. “손?” “네.” “왜.” “전하에게 남은 꿈의 흔적을 확인해 보려고요.” “접촉해야 하나?”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럼.” “하지만 이게 제일 빠릅니다.” 카일은 잠시 세이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크고. 검을 오래 잡은 사람답게 마디가 단단한 손. 세이아가 그 손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왜 웃지?” “생각보다 순순히 주셔서요.” “네가 달라고 하지 않았나.” “꿈속에서는 말을 별로 안 들으셨거든요.” 카일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꿈속의 내가 뭘 했지?” “궁금하십니까?” “말해.” 세이아는 일부러 잠시 생각했다. “나중에요.” “세이아.” 처음이었다. 현실의 카일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아의 손이 멈췄다. “…제 이름.” 카일 역시 미세하게 굳었다. 잠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이아가 먼저 웃었다. “자연스럽게 부르시네요.” “…….” “열다섯 해나 불러서 그런가?”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이아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손 안 주실 겁니까?” 카일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세이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쿵. “……!”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쿵. 세이아의 심장. 쿵. 카일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되게 선명하게. 쿵. 쿵. 같았다. 완전히. 같은 박자였다. 세이아의 웃음이 사라졌다. “…전하.” “나도 느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같은 생각인 것 같군.” 카일의 시선이 세이아의 손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은빛 빛이 번졌다. “……!” 세이아의 손등 위로. 작은 문양이 떠올랐다. 깃털. 아니. 깃털의 절반처럼 보였다. 동시에. 카일의 손등에도. 똑같은 빛이 피어났다. 반대쪽 절반. 세이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일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단단한 손가락이 가느다란 손목을 감쌌다. “놓으세요.” “조금 전에.” 카일의 시선이 내려갔다. 세이아의 얼굴. 목. 그리고. 심장이 있는 쪽으로.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를 보시는 겁니까?” “네 심장.” “…대공 전하.” “소리가 들렸다.” 카일이 다시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나와 같은 박자로 뛰었다.” 세이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제 심장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한 걸음. 세이아가 가까워졌다. “전하께서 가까이 계셨나 봅니다?” 카일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먼저 내 손을 잡았지.” “전하께서 지금도 제 손목을 잡고 계신데요.” “…….” “그러게.” 세이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왜 아직도 안 놓으세요?” 카일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을 아주 잠깐 스쳤다. 너무 짧아서. 착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세이아는 꿈을 보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아주 작은 변화에 익숙했다. 그녀의 눈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설마.” “…….” “놓기 싫으십니까?” 카일의 눈빛이 달라졌다. “도발하는 건가?” “그렇게 들렸어요?” “그래.” “그럼.” 세이아가 웃었다. “전하께서 너무 쉽게 도발당하시는 거겠죠.”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곳. 거친 엄지 끝이. 아주 느리게 스쳤다. “…….” 이번에는. 세이아의 숨이 멎었다. 단순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손목 안쪽에서 시작된 열기가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쿵. 심장이 다시 뛰었다. 카일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번에는.” 그가 낮게 말했다. “네가 빨라졌군.”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방 배우시네요.”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모르겠군.” “좋은 스승을 만나셨나 봅니다.” “그건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세이아가 웃으려던 순간이었다. 파앗——! 문양이 강하게 빛났다. “……!” 머릿속으로. 장면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너지는 하늘. 피로 젖은 신전. 검게 물든 거대한 날개. 그리고. 은빛 머리카락. 카일. 그가 자신을 품에 안고 있었다. ‘눈을 감아.’ 누군가 말했다. ‘이번에는.’ 세이아의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지킬 테니.’ “…아.”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세이아가 휘청였다. “세이아!” 카일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훅. 세이아의 몸이 그대로 그의 품 안으로 끌려갔다. 단단한 가슴. 뜨거운 체온. 얇은 드레스 너머로. 그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전해졌다. 세이아는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짚었다. 쿵. 또. 같은 박자. 카일의 한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이 허리선을 넓게 받쳤다. 쉽게 떨어질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세이아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카일의 얼굴이 바로 위에 있었다. 평소의 냉정함이 사라져 있었다. “괜찮나?” 낮고 쉰 목소리. 세이아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전하.” “왜.”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혼자 설 수 있나?” “확인해 보려면.” 세이아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를 감싼 팔로 내려갔다. “전하께서 먼저 손을 떼셔야겠는데요.” 카일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바로 놓지 않았다. 세이아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대공 전하.” “왜.” “생각보다 손이 느리시네요.” “…….” “꿈속에서도 이랬습니까?” 카일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꿈속의 내가.” 그가 낮게 물었다. “너를 이렇게 잡았나?” 세이아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보다 조금 더.” 카일의 눈빛이 변했다. “어떻게?” “궁금하세요?” “…….” “직접 꿈에서 확인하시죠.” 세이아가 웃었다. 그제야. 카일의 팔이 천천히 풀렸다. 손끝이. 허리선을 스치며 떨어졌다. 찰나의 접촉.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자리에 열기가 남았다. 세이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카일 역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조금 전보다 호흡이 깊어져 있었다. 에드윈이 그들을 바라보다 낮게 물었다. “둘 다.” 그제야 두 사람이 동시에 아버지를 보았다. “무엇을 봤지?” 세이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신전.” “또?” “검은 날개.” 그녀는 잠시 카일을 바라봤다. “그리고.” “…….” “전하께서 저를 안고 있었습니다.”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세이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 “전하께서도 같은 걸 보셨죠?” “비슷하다.” “뭐가 달랐는데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 전하.” 에드윈까지 재촉했다. 한참 후. 카일이 세이아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내가 본 너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숨을 쉬지 않았다.”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내 품에 있었고.” 카일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피투성이였다.” “…….”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죽어 있었다.” 침묵.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은 순간. 같은 장소. 같은 두 사람. 그런데. 자신이 본 장면과. 카일이 본 장면이 다르다. 혹은. 같은 장면의. 서로 다른 순간이라면? 에드윈이 말했다. “손을 보여 다오.” 세이아와 카일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문양.” 두 사람은 각자의 손을 내밀었다. 은빛 문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세이아의 손등에 절반. 카일의 손등에 절반. 에드윈은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봤다. 그러다. “가까이.” 세이아가 물었다. “손을요?” “그래.” 세이아와 카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세이아가 먼저 피식 웃었다. “왜요?” “뭐가.” “아까는 그렇게 잘 잡으시더니.” “세이아.” “이제는 손 가까이 대는 게 어려우십니까?”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 순간. 그가 세이아의 손을 잡았다. “……!” 이번에는. 손가락까지 얽힐 정도로. 깊게. 세이아의 눈이 커졌다. 카일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 정도면 되나?” “…전하.” “왜.” “은근히 지기 싫어하시네요.” “누구에게 배운 건지 모르겠군.” “좋은 스승이라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이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카일의 손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 순간. 파아아앗——! 두 문양이 연결됐다. 깃털이라고 생각했던 선이 서로 이어졌다. 하나. 둘. 그리고. 완전한 형태. 은빛 날개. 눈부신 빛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위로 펼쳐졌다. “…….” 에드윈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세이아가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 대답이 없었다. “이 문양 알아?” 에드윈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말도 안 돼.” 카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엇이 말입니까?” 에드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은빛 날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전. 가문의 가장 깊은 기록에서. 단 한 번 본 적 있는 문양.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니. 다시는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증표. “이 문양이.” 에드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왜.” 세이아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다시 나타난 거지.” “다시?” 세이아와 카일이 동시에 물었다. 그 순간. 탁. 수정함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하얀 꽃잎. 꿈에서 현실로 따라온. 단 하나의 꽃잎. 그것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락. 한 장이었던 꽃잎 옆으로. 또 하나의 꽃잎이 피어났다. 그리고. 또 하나. 사락. 사락. 눈앞에서. 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은빛과 금빛이 섞인 빛 속에서. 마침내. 새하얀 꽃 한 송이가 완전히 피어났다. 그리고. 꽃의 중심에. 처음 보는 문양이 나타났다. 날개. 두 사람의 손에 떠오른 것과. 똑같은. 은빛 날개. 에드윈이 숨을 삼켰다. “…문이.” “아버지?”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열리고 있어.” 세이아의 보랏빛 눈이 흔들렸다. “무슨 문?” 에드윈은 천천히 딸을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신계의 문.” 그 순간. 카일과 세이아의 맞잡은 손 사이에서. 심장이 뛰었다. 쿵. 하나. 쿵. 또 하나. 두 사람의 심장이. 다시. 완전히 같은 박자로 울렸다. 그리고 아주 먼 곳. 인간의 꿈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감겨 있던 무언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찾았다.』“그리고.”아벨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을 관통한 검은 검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입가로 피가 흘렀지만, 조금 전까지 끊어질 듯 희미하던 심장 소리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씩, 자신이 아직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듯 뛰었다.쿵.“하루로는…… 부족하군.”그 말을 들은 노아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졌다. 울고 있던 아이가 웃어야 할지 더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벨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살 거지?” 다급한 질문에 아벨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달랐다. 그 사실을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내려다봤다.“가능하다면.”“그렇게 말하지 마.”노아가 코끝을 훔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살고 싶다고 했잖아.”“그래.”“그럼 그걸로 해.”아벨의 붉은 눈이 조금 흔들렸다. 노아는 아직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자신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살아갈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나는 노아가 된 지 얼마 안 됐어. 그래도 아직 할 게 많아.”노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밖에도 나가 보고 싶고, 음식도 먹어 보고 싶고, 왜 웃는지도 더 알고 싶고…….”잠시 고민하다 아벨을 바라봤다.“너도 하나씩 찾으면 되잖아.”“……내가 하고 싶은 것을?”“응.”아벨은 그 말이 낯선 듯 오래 바라봤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검은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라시엘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주어진 문장은 언제나 죽여라, 지켜라, 기다려라, 깨어나라 같은 명령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살고 싶다.”아벨이 다시 말했다.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확인하듯.“그 다음은…… 아직 모르겠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어.”세이아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벨의 심장과 검을 이어 주던 검은 선에는 분명 금이 갔지만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검은 검끝이 먼저 균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새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 피처럼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드러났다. 남자는 검은 신관복도, 갑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오래된 흰 셔츠와 검은 바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 정말 관에서 눈을 뜬 직후 그대로 이곳까지 걸어온 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가 성역 바닥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누구도 그를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남자가 지나온 자리의 작은 꽃이 고개를 숙였다. 허공에 떠 있던 빛의 알갱이 몇 개가 꺼졌고, 세이아는 자신의 심장이 아주 잠깐 평소보다 느리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 현상이 정말 아벨 자신의 힘 때문인지, 손에 들린 검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주위에 ‘끝’에 가까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노아가 세이아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저 사람.”작은 목소리가 떨렸다.“나를 알아.”아벨의 붉은 눈이 곧장 노아에게 향했다. 헤르미아도, 라시엘도, 자신을 향해 검을 들고 있는 카일도 처음에는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막 이름을 얻은 어린 신에게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그 순간 검신 위로 검은 글자가 번졌다.『노아를 죽여라.』아벨이 검을 들어 올렸다.카일의 루미에르가 동시에 움직였다.챙―!은빛과 검은빛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성역 전체가 흔들릴 만큼 강한 충격이 터졌다. 세이아의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고, 노아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카일의 발이 바닥 위를 길게 밀렸다.그의 눈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순수하게 검과 검이 부딪친 힘만으로 카일을 한 번에 밀어낸 상대는 드물었다. 그것도 지금의 카일은 제0의 굴레에서 힘을 되찾았고, 세이아와 함께 새롭게 만든 루미에르를 쥐고 있었다.아벨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비켜.”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낮고 쉰 목소리였다.카일은 검에 힘을 더했다.“싫은데.”“그 아이는 신이다.”“방금 태어났어.”“그래서 지금 죽여야 한다.”카일의 눈빛이 차갑게 내
“드디어.”검은 관 안에서 남자가 눈을 떴다.붉은 눈동자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자신의 가슴 위에 놓인 검이었다. 칠흑보다 어두운 검신 위로 방금 새겨진 듯한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노아를 죽이는 자.』남자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오랜 잠에서 깨어난 몸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고, 새하얀 머리카락은 관의 가장자리를 넘어 바닥까지 길게 흘러내렸다.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굳어 있던 관절이 삐걱거렸다.그런데도 검을 쥐는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마치 수백 번.아니.수천 번 같은 검을 쥐었던 것처럼.우우웅―.검이 낮게 울었다.남자의 손등을 타고 검은 선이 올라왔다.『새로운 신이 태어났다.』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속삭였다.남자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그래서.”갈라진 목소리가 폐허 안에 울렸다.“이번에 내가 죽여야 할 신이 태어났군.”자신이 한 말인데도 어딘가 이상했다.정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인지.아니면 검이 자신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인지.알 수 없었다.남자는 검신 위의 문장을 손가락으로 쓸었다.『노아를 죽이는 자.』“노아.”처음 듣는 이름.그런데.가슴 어딘가가 욱신거렸다.“내가 너를 죽여야 하는 모양이군.”검이 다시 울었다.우우웅―.남자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번졌다.“또.”그가 중얼거렸다.“누군가 내 역할부터 정해 놨어.”그 순간 관 안에 고여 있던 검은 액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자가 맨발로 지면을 밟자 주변을 둘러싼 수백 개의 봉인이 일제히 반응했다.쩌적.쩌저적―!남쪽에서도 가장 깊은 지하.신의 흔적조차 오래전에 끊긴 폐허였다.벽에는 수많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용을 죽이는 자.』『왕을 죽이는 자.』『불멸자를 죽이는 자.』『창조자를 죽이는 자.』누군가의 이름은 없었다.오직.무엇을 죽여야 하는지만 있었다.남자는 천천히 벽을 훑어보다가 가장 안쪽에서 걸음을 멈췄다.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빈자리.그가 가까이 다가간 순간.검이 스스로
라시엘이 손을 내밀었다.“당신은 지쳤습니다.”그 말은.너무 정확했다.세이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지쳐 있었다.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이 무너졌다. 하나의 계약을 끊으면 그 아래 더 오래되고 깊은 계약이 나타났다. 이름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더니 이번에는 이름조차 존재하기 전의 공백이 세계를 삼키려 했다.언제까지.새로운 답을 만들어야 할까.언제까지.누구도 버리지 않겠다고 버텨야 할까.누군가가 무너질 때마다 자신이 손을 뻗어야 하고, 누군가가 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자신이 먼저 다른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만 같았다.잠깐이라도 멈추면.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그런데.한 번쯤은.정말.전부 내려놓고 싶었다.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곳.다시는 잃지 않아도 되고.다시는 누군가를 살릴 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곳.라시엘의 손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쉬어도 됩니다.”다정한 목소리였다.그래서 더 위험했다.세이아의 보랏빛 눈이 흔들렸다.그 순간.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싫으면 쉬어.”세이아가 고개를 돌렸다.카일이 서 있었다.제0의 공백이 밀려오는 방향을 막듯 세이아보다 반걸음 앞에.그의 몸 윤곽도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끝이 희미하게 투명해졌고, 어깨의 형태마저 불안정했다.그런데도 세이아를 바라보는 푸른 눈만은 선명했다.“카일.”“당신이 지쳤다면.”카일이 말했다.“그만해도 돼.”세이아의 입술이 떨렸다.라시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들었습니까?”그러나 카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하지만.”푸른 눈이 세이아를 똑바로 바라봤다.“사라질 필요는 없어.”라시엘의 표정이 멈췄다.세이아 역시 숨을 멈췄다.카일은 한 손을 내밀었다.“내가 대신 전부 해결하겠다는 말도 아니다.”“그럼…….”“그냥 쉬어.”세이아의 손을 잡았다.“내 옆에서.”눈물이 떨어졌다.세이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처음으로.쉬는 것과
『창조자는 삶을 소유하지 않는다.』문장이 완성되는 순간.라시엘의 가슴이 갈라졌다.콰아아앙―!금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빛이 황실 성역을 가득 채웠다. 검은 심장에 생긴 균열은 가느다란 선으로 끝나지 않았다. 목을 타고 어깨로, 다시 등 뒤로 번지더니 열세 장의 날개 전체를 순식간에 뒤덮었다.쩌적.쩌저적.『복종하라.』『희생하라.』『창조자를 위해 죽어라.』날개마다 새겨져 있던 명령의 문장들이 하나씩 부서졌다.검은 글자가 재처럼 흩어졌다.그와 동시에 열두 날개의 몸을 짓누르던 힘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리네아가 바닥을 짚고 있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움직여.”떨리는 손이 천천히 들렸다.한 마디.한 마디.자신의 몸에 다시 명령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로한도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명령의 사슬을 끊으며 상처 입었던 날개 뿌리는 여전히 피투성이였지만, 온전히 남아 있는 붉은 날개에서 다시 흰 불꽃이 피어났다.“드디어.”거친 숨 사이로 웃음이 섞였다.“저 재수 없는 명령이 좀 조용해지는군.”다른 날개들도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몸 깊숙이 남은 검은 흔적까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오래된 습관도.무릎을 꿇으라는 힘에 먼저 반응하던 육체의 기억도.아직 남아 있었다.그러나 분명 달라졌다.이제 라시엘이 한마디 한다고 해서 그들의 몸 전체가 곧바로 굴복하지는 않았다.라시엘은 갈라진 자신의 가슴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피는 흐르지 않았다.상처 안쪽에는 검은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그 깊은 곳에서 거대한 눈이 번뜩였고, 수천 개의 입과 손이 균열 바깥을 향해 몸부림쳤다.『틀렸다.』수많은 목소리가 겹쳤다.『창조한 자가 주인이다.』세이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가슴 한가운데가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세 개의 창조의 핵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부담은 분산되었다. 엘리아와 네이라, 에드윈, 리네아와 로한까지 힘을 보탰다.그래도 대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입가로 보랏빛 피가 흘렀다.무
“드디어.”검은 카일이 말했다.“둘만 남았군.”세이아는 움직이지 않았다.검은 바다가 발목을 삼키고 있었다. 차가운 물결이 종아리까지 차올랐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보다 선명한 것은 눈앞의 남자였다.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깃털이 흩날렸다. 푸른색이어야 할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등 뒤에는 열세 장의 검은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까지 라시엘과 닮았다.그런데.방금 자신을 부른 목소리만큼은 분명 카일의 것이었다.“카일.”세이아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그래.”그가 대답했다.“내 이름을 알고 있군.”세이아의 손끝이 떨렸다.“저를 기억합니까?”“기억하지.”“어디까지요?”“전부.”검은 카일이 천천히 걸어왔다. 발밑의 바다는 그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을 맞이하듯 양옆으로 갈라졌다.“네가 처음 내 꿈에 들어왔던 밤.”한 걸음.“푸른 숲.”또 한 걸음.“에메랄드빛 호수.”세이아의 숨이 잠시 멎었다.그건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기억이었다.“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검은 카일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내 벗은 등을 훔쳐봤던 순간까지.”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훔쳐본 적 없습니다.”“그렇게 당황하는 것도 기억나는군.”“그때는 전하께서 먼저…….”세이아는 말을 멈췄다.지금 따질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기억을 꺼내는 바람에 잠깐 정말 카일과 대화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그리고 바로 그 틈을 노린 것처럼.검은 손이 세이아의 목을 향해 뻗었다.“……!”세이아가 상체를 뒤로 젖혔다.손끝이 목선을 스쳤다. 곧바로 보랏빛 힘이 터졌다.콰앙―!검은 카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반응은 좋군.”세이아는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손끝으로 쓸었다.“누구입니까?”“방금 카일이라고 불렀잖아.”“당신은 카일이 아닙니다.”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무엇을 보고 그렇게 확신하지?”“카일은 저를 시험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