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메종 베르니에가 철수하겠답니다.”
밤 열한 시, 브랜드 담당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루미에르 재개장의 핵심 브랜드가 빠지면 나머지 여섯 곳의 조건부 계약도 연쇄 해지될 판이었다.
“이유는요?”
담당자는 위조품 소문과 오찬 사고 탓에 파리 본사가 태림의 통제 능력을 믿지 못해 철수하려 한다고 전했다.
회의실 상석의 나리가 팔짱을 꼈다.
“원래 우리랑 급이 안 맞던 브랜드예요. 다른 곳 찾으면 되죠.”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베르니에가 빠지면 독점 구역 조항 때문에 세 브랜드가 같이 나갑니다.”
“형님은 공식 담당도 아니잖아요.”
“공식 담당이 그 조항도 몰라요?”
나리는 대답 대신 건우를 봤다.
“오빠, 저 오늘 약 먹었어요. 자꾸 몰아세우면 회의 못 해요.”
건우는 내게 눈짓했다.
“은채야, 잠깐 나가 있어.”
“계약서 원본은 읽었어?”
“전략실에서 대응할 거야.”
“새벽 한 시까지 답을 못 주면 자동 해지야.”
“그래도 당신 권한은 없어.”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좋아. 권한 있는 분들이 해결하세요.”
회의실을 나왔지만 건물을 떠나지는 않았다. 지하 자료실 옆 빈 사무실에 앉아 아크파트너스 전용 보안망을 열었다.
메종 베르니에는 태림보다 먼저 아크와 아시아 구조조정 조건을 협의한 회사였다. 그들은 ‘E. Seo’라는 투자자가 나라는 사실은 몰라도, 내 검토 없이는 철수 결정을 확정하지 않기로 약정했다.
재하가 영상 통화 화면에 나타났다.
“손 다친 사람이 자정에 일하면 산재 처리해도 됩니까?”
“아크 대표가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데 무슨 산재야.”
“태림 구하는 일도 이제 아크 업무입니까?”
“브랜드와 현장 직원은 지켜야 해. 대신 조건을 바꿀 거야.”
나는 계약서에 세 조항을 추가했다. 전 물류 공급업체 독립 감사, 위조품 피해 전액 보상, 루미에르 원기획자의 지식재산권 확인.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베르니에는 위약금 없이 철수하고 우선협상권은 아크로 넘어오게 했다.
파리의 법무이사에게 암호화 메일을 보냈다.
‘태림의 현재 발표자를 신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검증 가능한 조건을 신뢰하십시오.’
십 분 뒤 답이 왔다.
‘E. Seo가 감사를 통제한다면 철수를 보류하겠습니다.’
“잡았습니다.”
재하가 웃었다.
“아니. 직원들이 잘릴 시간을 미룬 거야.”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대표라 다행이네요.”
수정 요청이 이어졌다. 재하가 또 내 돈부터 넣느냐고 묻자, 나는 고용 대상을 협력사 파견 인력까지 넓혔다.
“내 돈으로 직원들의 시간을 사는 거야.”
우리는 새벽 내내 다른 여섯 브랜드와 부속 합의서를 맞췄다. 마지막 전자 서명이 찍힌 시각은 오전 다섯 시 오십이 분이었다.
나는 모든 메일의 발신자 이름을 아크 법인 계정으로 돌렸다. 태림 안에서 내 정체가 드러날 때는 아직 아니었다.
아침 여덟 시, 다시 회의실에 들어가자 박수 소리가 들렸다.
“백 실장이 밤새 본사를 설득했습니다.”
전략팀 임원이 발표했다. 화면에는 내가 만든 조건표가 나리의 성과로 올라가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나리는 피곤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태림에 대한 진심을 알아준 것 같아요.”
나는 맨 뒤에 서서 물었다.
“본사 담당자 이름이 뭐죠?”
“기밀이에요.”
“통화는 몇 시에 했고요?”
“메일로도 충분히 협상할 수 있어요.”
“그 메일에 추가된 감사 조항은 읽었어요?”
나리의 눈이 흔들렸다. 건우가 끼어들었다.
“결과가 나왔으면 됐어.”
“누가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안 중요하고?”
건우는 아크가 중재한 일을 나리가 연결한 해외 인맥 덕분이라고 짐작했다.
아크를 나리의 인맥으로 생각하다니. 나는 설명하는 대신 그의 확신을 기록했다.
명희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사회가 백나리를 브랜드전략실장으로 정식 선임했다. 오늘부터 임원 대우야.”
“축하해 주세요, 형님.”
“계약 내용을 이해하고 받은 자리라면 축하했을 텐데.”
나리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실장실이 필요해서요. 형님이 쓰던 작은 방을 쓰기로 했어요.”
“내 자료가 있는 곳이에요.”
“공식 직원도 아닌 분께 전용 사무실이 있었던 게 더 이상하죠.”
나는 건우를 바라봤다.
“당신이 허락했어?”
“당분간 비어 있는 회의실을 쓰면 되잖아. 회사 공간이야.”
“내가 밤새 회사를 살린 방도 회사 것이니까 빼앗아도 된다는 거네.”
그는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리가 새 명패를 손끝으로 닦았다.
“상자들은 오늘 안에 가져가세요. 남으면 폐기 처리할 거예요.”
“내 노트와 원본 도면은 개인 자산이에요.”
“회사에서 만든 건 다 회사 거죠. 오빠도 그렇게 말했어요.”
건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복도 상자마다 봉인 번호를 매기고 사진을 찍었다. 무엇이 없어질지 이미 아는 사람처럼.
문을 열자 내 책과 자료 상자가 복도에 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나리의 황금색 명패가 놓였다.
나는 마지막 서랍에서 어머니의 루미에르 원본 도면만 챙겼다. 그 아래 붙여 둔 작은 봉인 스티커는 뜯겨 있었다.
누군가 이미 원본 도면을 펼쳐 봤다. 그리고 초승달 표식 한 장이 사라져 있었다.
“대표님, 개장 테이프를 잘라 주십시오.”일 년 뒤, 루미에르관의 문 앞에서 나는 가위를 받지 않았다. 대신 화재 희생자 유족과 복원팀 막내 직원에게 양쪽 손잡이를 건넸다.“이 문은 제가 혼자 연 게 아니니까요.”금빛 테이프가 끊어지자 복원된 아치 너머로 햇빛이 쏟아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벽에는 서지안의 원본 설계와 이름, 그 아래에는 화재 희생자들의 명패가 같은 높이로 놓여 있었다.기자가 물었다.“태림을 인수한 최종 목적을 이룬 겁니까?”“인수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지워진 책임과 이름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 목적이었어요.”“향후 경영권을 가족에게 승계할 계획이 있습니까?”“태림의 자리는 혈연이 아니라 검증된 절차로 정합니다.”새 전문경영인과 직원 대표가 내 옆에 섰다. 아크는 최대주주로 감시와 투자를 맡았고, 일상 경영은 독립 이사회가 책임졌다. 누구도 한 사람의 호의에 회사를 기대지 않았다.위조 상품 피해 고객에게는 보상이 모두 끝났고, 해고될 뻔했던 협력사 직원들도 새 공급망에 복귀했다. 루미에르의 첫해 수익 일부는 화재 안전기금과 신진 디자이너 지원에 쓰기로 했다.“서지안 이름을 브랜드로 만들려는 겁니까?” 한 기자가 물었다.“아니요. 이름은 소유물이 아닙니다. 지원 사업도 심사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운영합니다.”나는 어머니의 명예마저 내 권력을 장식하는 간판으로 쓰지 않았다.서문석은 어머니 사진 앞에 흰 꽃을 놓았다.“지안아, 네 딸이 나보다 낫구나.”“엄마가 들으면 당연한 소리라고 했을걸요.”외조부가 웃었다.“오늘 그 녀석도 왔느냐?”“초대했어요. 올지는 본인이 선택하고요.”건우는 행사가 거의 끝날 무렵 일반 초대객 출입구로 들어왔다. 태림 임원 배지도 수행원도 없었다. 그가 지난 일 년간 세운 협력사 회복센터 직원들과 나란히 서서 박수를 쳤다.우리는 일 년 동안 서른두 번 만났다. 미술관에서 시작해 시장 골목과 도서관, 서로의 일터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 다툰 날에는 시간을 달라고 말했고, 다음 약속 시각을
“커피를 마셔도 아무것도 약속하지는 않아요.”내 말에 건우는 의자를 당기던 손을 멈췄다.“약속을 받으러 온 게 아니야.”“용서했다는 뜻도 아니고요.”“알아.”우리는 회사도 본가도 아닌 작은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았다. 그가 내 취향대로 주문하려 하자 나는 먼저 메뉴를 골랐다. 건우는 자연스럽게 주문을 고쳤다.“예전엔 내가 뭘 마시는지 안다고 생각했지.”“틀린 걸 알아도 묻지 않았어요.”“당신이 맞춰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그건 믿음이 아니라 편리함이었죠.”“맞아.”나는 가장 오래 남은 응급실 밤을 꺼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 정말 괜찮다고 믿었느냐고 물었다.건우는 확인하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듣지 않았다고 했다. 호텔 사진에 침묵한 것도 회사를 핑계로 내가 견딜 거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같은 계산을 또 하게 되면 즉시 말하겠다고 했다.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결과까지 숨기지 않겠다고.사과를 듣자 상처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제 자기 의도를 선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그 정확함이 내가 확인하고 싶던 변화였다.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반지도 편지도 없었다. 계약이 끝난 뒤 다른 지역의 협력사 회복팀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기차표만 있었다.기차표는 다음 날 것이었다. 건우는 곁에 남아 기다리는 일도 압박일 수 있어 떠나려 했다고 설명했다.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또 혼자 정했느냐고 묻자 그의 얼굴이 굳었다. 떠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에, 나는 떠나 달라고 한 적부터 물었다.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묻는 것부터 해야 했다.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여기 남아도 될까?”“회사로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알아. 그건 내가 요구할 수 없어.”“내 대답은 아직 남았고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건우는 기차표를 접지 않은 채 말했다.“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해.”피하지도, 붙잡지도 않는 고백이었다.고백은 너무 늦었고, 나는 그 늦음을 없던 일로 만들 생각이
“이 보상금, 건우 씨 개인 자산에서 나온 겁니까?”법무팀장은 답을 망설였다. 나는 서지안 저작권 반환 등기와 화재 피해 보상 명세를 다시 펼쳤다.“사실대로 말하세요.”“신탁이 매각한 이건우 씨 지분 배당권과 자택 처분금입니다. 회사 책임분과 분리해 부족액을 채웠습니다.”“왜 제게 보고하지 않았죠?”“서 대표님께 알리는 조건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감사위원회 승인은 받았습니다.”나는 건우를 계약 종료 면담에 불렀다. 기록 담당자와 직원위원도 동석했다. 마지막 날까지 계약 조건을 흐리고 싶지 않았다.“보상과 IP 반환을 왜 숨겼어요?”“숨긴 게 아니라 필요한 절차에만 보고했습니다.”“당신 이름을 빼 달라고 했잖아요.”“서지안 선생의 이름을 되찾는 문서에 제 이름이 앞설 이유가 없습니다.”태림 책임분까지 왜 개인 자산으로 채웠느냐고 묻자, 건우는 회사 책임분과 자신이 재직 중 묵살한 지연 손해를 분리했다고 설명했다.집까지 팔 필요는 없었다는 내 말에 그는 필요의 기준을 낮춰 잡으면 피해자가 또 양보해야 한다고 답했다.직원위원이 정산표를 확인했다. 건우는 법원이 인정한 최저액이 아니라, 실제 대출이자와 폐업 비용을 기준으로 배상액을 올렸다. 어느 항목에도 관계 회복 비용이라는 이름은 없었다.“내가 알면 마음이 움직일까 봐 그런 건가요?”건우가 잠시 침묵했다.“그 가능성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어.”기록 담당자가 있는 자리에서 반말이 나온 걸 깨달은 그가 말을 고쳤다.“죄송합니다. 이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보상을 하면 과거가 지워질 거라고 생각해요?”“아니요. 피해가 줄어들 뿐입니다.”“나와 다시 시작하지 못해도 계속할 수 있어요?”“이미 그렇게 해 왔습니다.”그 대답에는 원망도 자랑도 없었다. 계약직 사원으로 출근한 반년, 거절한 피해자를 다시 설득하지 않고 입금으로 증명한 날들, 내게 보내지 않은 보고서가 그 뒤에 있었다.나는 확인을 위해 화재 피해자 보상위원회 기록을 직접 봤다. 건우는 한 유족이 돈을 거절하자
“대표님 판단으로 개장이 무산되면 누가 책임집니까?”비상 이사회가 새벽 세 시에 열렸다. 중단된 정산 화면은 붉었고, 일부 이사는 내가 누른 비상 키부터 문제 삼았다.“제가 책임집니다.”건우가 마이크를 켰다.“중단을 권고한 실무자는 접니다. 고객 정보가 외부 계좌로 넘어갈 위험을 확인했습니다.”“자문이 대표 대신 판단했다는 겁니까?”“아닙니다.”건우는 화면에 자신의 보고서를 띄웠다.“선택지를 보고한 뒤 서은채 대표가 결정했습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제가 공을 가져갈 일도, 책임을 대신 빼앗을 일도 아닙니다.”나는 그를 대신해 감사하지 않았다.“중단하지 않았다면 십일 분 뒤 고객 결제정보 칠만 건이 파산 업체의 압류 서버로 복제됐습니다.”보안팀 분석이 뒤따르자 이사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은 문제는 사십팔 시간 안에 대체 정산망을 세우는 일이었다.건우가 네 가지 복구안을 제시했다. 가장 빠른 것은 그가 과거 계약한 업체에 예외 접속을 요구하는 안이었다.직원위원이 고개를 저었다.“그 업체는 전 대표님 인맥입니다. 다시 개인 관계에 기대는 방식은 싫습니다.”“합리적인 반대입니다.”건우는 제 안을 직접 화면에서 지웠다.“제 참여 자체가 업무를 방해한다면 지금 물러나겠습니다. 인계 자료는 모두 남기겠습니다.”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는 나를 보며 붙잡아 달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나는 직원위원에게 물었다.“이건우 자문이 지시권 없이 기술 인계만 맡는 안에는 반대합니까?”“그 조건이라면 아닙니다.”“그럼 사람에 대한 호오가 아니라 합의한 역할대로 갑니다.”대체안은 국내 결제사 두 곳에 거래를 나누고, 태림 직원이 직접 브랜드 코드를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더 들지만 어느 한 사람이나 업체에도 권한이 몰리지 않았다.건우는 직원들에게 자신이 만든 코드표부터 의심하라고 했다. 예전 예외 항목이 섞였을 가능성도 먼저 밝혔다.실제로 신입 사원이 수수료 우회 코드를 찾아냈다. 지우면 속도가 삼십 퍼센트 떨어지고 자문 실적도
“이 조항이면 저와 단둘이 대화할 수 없습니다.”건우가 자문 계약서의 첫 장을 읽었다. 면접위원 네 명과 법무 담당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필요한 대화는 기록 담당자 입회하에 합니다.”“이의 없습니다.”“계약 기간은 육 주. 의결권과 인사권은 없고, 제 승인 없이 외부 연락도 금지합니다.”“알겠습니다.”“우리 관계를 이유로 예외를 요구하는 순간 계약은 끝나요.”건우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예외를 기대하고 지원하지 않았습니다.”나는 그가 낸 지원서의 실패 항목을 펼쳤다.“위조 납품 보고를 묵살한 일을 전문성 부족으로 적었네요.”“시스템을 알아도 불편한 보고를 듣지 않으면 쓸모없는 전문성입니다.”“같은 상황이면 이번에는 어떻게 합니까?”“보고자를 업무에서 배제하지 않고 독립 감사에 동시에 전달합니다. 대표님이 반대해도 기록을 남기겠습니다.”“내 판단도 틀릴 수 있다는 뜻이죠?”“예. 다만 최종 결정은 대표님 몫이고, 저는 반대 의견과 근거만 공개하겠습니다.”직원위원 한 명은 건우의 지시로 해고될 뻔한 사람이 이 방에도 있다며 어떻게 함께 일하겠느냐고 물었다. 건우는 불편하다는 의견만으로도 자신이 물러나는 게 맞다고 답했다.“사과 한마디로 넘어가겠다는 뜻입니까?”“아닙니다. 사과를 받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가진 시스템 지식을 인계하고,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돕고 나가겠습니다.”위원들은 익명 표결을 했다. 찬성 셋, 조건부 찬성 하나. 내 표는 마지막까지 봉인됐고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조건부 찬성을 던진 직원은 매주 진행 상황을 전 직원에게 공개하고, 나와 사적으로 만난 정황이 생기면 바로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못 박았다.건우는 자신이 만든 불신이니 검증받는 기간도 자기 몫이라며 조건을 받아들였다.그 대답은 계약서보다 먼저 경계를 세웠다.“한시 자문 계약을 승인합니다.”내가 서명란을 돌려주자 건우가 말했다.“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기회가 아니라 업무니까.”
“희생자 이름은 빼는 게 어떻겠습니까?”루미에르 추모 공간의 최종 시안에서 시공사는 작은 명패들을 지우려 했다. 유족이 불편해할 수 있고 개장 분위기가 무거워진다는 이유였다.“동의받은 이름은 모두 남깁니다.”“고객들이 명품관에 와서 사고부터 보게 됩니다.”“태림이 무엇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는지도 보게 되겠죠.”나는 서지안의 이름을 맨 위가 아니라 다른 희생자와 같은 크기로 배치했다.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상처보다 크게 쓰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때 한 유족이 시안을 들고 찾아왔다. 화재로 동생을 잃은 야간 직원의 누나였다.“우리 애 이름은 빼 주세요.”“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사람들이 불쌍하다고 구경할까 봐 싫어요.”나는 설득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 빈자리도 만들지 않을게요.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말씀해 주세요.”“서 대표 어머니 이름은 남기면서요?”“설계자로 빼앗긴 이름을 작품에 돌려놓는 겁니다. 추모 명단은 가족의 선택이고요.”유족은 한참 시안을 보다가 이름 대신 동생이 쓰던 작업 번호만 새겨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선택을 그대로 반영했다.시공사가 물러간 뒤 외조부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네 어미라면 저 아치부터 한 치 옮겼다고 싸웠을 게다.”“그래서 원본 도면대로 돌렸어요.”“너도 고집은 똑같구나.”서문석은 추모 벽 앞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십칠 년 전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하고, 누명이 씌워진 뒤에도 먼저 손 내밀지 못했던 사람이었다.“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사과했어요?”“무덤 앞에서는 수백 번 했지. 살아 있을 때 못 한 사과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래도 계속 오셨잖아요.”“용서받으러 온 게 아니다. 내가 잊지 않으려고 왔지.”외조부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한 장을 꺼냈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다투던 날 적은 말이라고 했다.“지안이가 그러더구나. 사랑한다면서 왜 내 결정을 네가 하느냐고.”“건우 씨에게 했던 말과 같네요.”“그래서 네게 돌아오라 강요하면서도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