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8화. 균열의 그림자

Auteur: 데이지
last update Dernière mise à jour: 2026-03-04 20:40:19

아침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스며들었다. 

수연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향긋한 향이 퍼졌지만, 마음은 어제 카페에서 느낀 

낯선 시선 때문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표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저를 보던 그 여자,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맞을까요?”

서류를 정리하던 우혁이 고개를 들었다.

“아는 얼굴 같았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하지만… 눈빛이,  뭔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짧은 정적이 흘렀다. 우혁은 곧 담담히 말했다.

“괜한 불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가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그녀의 가슴 속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시각, 박지현은 숙소 창가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쥔 커피는 식어 있었고, 시선은 어제의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틀림없어. 그 얼굴, 그 눈빛… 차수연이야.”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은 줄 알았던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리고… 저 남자는 뭐야?”

지현의 입술이 얇게 굳어졌다. 

수연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편했는데, 

그녀 곁에서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남자의 존재는 

또 다른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좋아. 네가 정말 수연이라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야겠지.”

며칠 뒤, 봉사단 의료진이 현지 보건소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우혁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지현과 마주쳤다. 

그녀는 일부러 먼저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강우혁 대표님 맞으시죠?  기사에서 본 적 있습니다.”

우혁은 순간 낯설어했지만 곧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

“네, 맞습니다. 여기까지 소문이 났군요.”

“저는 서울 ○○병원 흉부외과 의사 박지현이라고 합니다.  이번 봉사단에 합류했어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지현은 일부러 손을 내밀었다. 

우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악수를 받았다. 

그녀의 눈빛은 매끄럽게 웃고 있었지만, 

속 깊은 곳에 감춰진 날카로움이 번득였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우혁은 그날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수연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어딘가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박지현… 어디서 들은 이름 같아요. 하지만…”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그 여자가… 저를 알아볼 수도 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떨렸다.

우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직 모를 겁니다.  설령 알게 된다 해도,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그의 단단한 어조에 그녀는 잠시 안도했지만, 마

음 한켠에서는 이미 무언가 균열이 일어나는 듯했다.

다음 날, 지현은 일부러 시장 근처를 서성이다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봤다. 수연이 천천히 걷다가 

우혁의 팔에 살짝 기대는 모습. 두 사람의 웃음.

‘정말 수연이 맞네. 그런데… 저 남자와 저렇게 가깝다니.’

지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좋아. 네가 얼마나 기억을 잃었는지… 직접 확인해주지.’

바람이 세게 불며 바닷가의 파도를 일으켰다. 

평화롭게 이어지던 두 사람의 시간에,  차가운 그림자가 스며들고 있었다.

시장 거리를 걷던 수연은 미묘한 기시감에 발걸음을 멈췄다. 

주변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낯선 기운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한 여자가 또렷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지현이었다.

차갑게 빛나는 시선이 파고들자, 수연의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심장이 반응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낯익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수연 씨, 괜찮습니까?”

옆에 있던 우혁이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저 여자… 어제 카페에 있던 사람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흔들렸다.

우혁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확인하더니,  잠시 눈빛을 가라앉혔다.

“저쪽으로 갑시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수연은 안도감과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그러나 뒤를 따르는 시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후, 우혁은 투자자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보건소 봉사 현장에서 박지현과 마주쳤다. 

그녀는 하얀 가운을 입은 채, 능숙하게 환자를 돌보며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대표님, 또 뵙네요.”

지현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박 선생님.”

우혁은 짧게 인사만 건넸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봉사 끝나고 의사들끼리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대표님도 함께하시죠. 

지역 보건 문제에 대해 들으시면 사업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매끄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단순한 동료애가 아닌 

묘한 호기심으로 번쩍였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동행이 있어서요.”

우혁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지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동행이라… 혹시, 그날 카페에서 뵌 분?”

우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곧 다시 굳어졌다.

“그 문제는 사적인 부분입니다.”

지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에는 냉기가 섞여 있었다.

“사적인 문제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간 직접 확인하게 될 겁니다.”

그날 저녁, 수연은 거실에서 차를 마시다 

문득 불안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잠시 뒤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눈앞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봉사 가운을 벗은 채 단정한 차림의 박지현이었다.

“혹시… 잠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지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탐색하는 듯 예리했다.

수연은 당황스러웠다. 낯설지만,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저… 저를 아세요?”

지현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하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네요.  혹시 서울 쪽에서 사신 적 없으세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울렸다. 하지만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수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대답을 피했다.

“저는… 기억을 잃어서요. 아무 것도 몰라요.”

지현은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기억을 잃었다고요? 흥미롭네요.”

바로 그때, 현관 안쪽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우혁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현은 태연한 척 웃었다.

“아, 대표님. 우연히 지나가다 뵈어서요. 

귀찮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여기는 제 사적인 공간입니다. 

다시는 허락 없이 오지 마세요.”

우혁의 단호한 말에 지현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돌아서는 눈빛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맞아. 네가 차수연이야.  그리고… 아직 아무 것도 기억 못 하고 있군.’

문이 닫히자, 수연은 긴장한 얼굴로 우혁을 바라봤다.

“저 여자가… 날 안다고 했어요. 정말일까요?”

우혁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누가 뭐라 하든 지금 당신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저와 함께.”

그 말에 수연의 눈가가 젖었다. 이름도, 

과거도 없는 자신을 ‘여기 있는 사람’으로 받아주는 

그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밖에서는 파도가 요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세 사람의 운명이 얽히기 시작하며, 

이제 더 이상 평온만은 허락되지 않을 듯했다.

밤이 깊어도 박지현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숙소에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망설였다. 화면 위 이름 하나가 반짝였다.

민도혁.

오랫동안 손가락은 버튼 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통화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 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지현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차수연, 살아 있습니다.”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웃음은 낮지만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살아 있다고? 어디서?”

“속초입니다. 기억을 잃은 것 같아요. 곁에는 한 남자가 함께 있더군요.  꽤나 지켜주려 애쓰는 눈치였습니다.”

도혁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느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의미심장하군. 사라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지. 

살아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또 하나의 기회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현의 목소리에는 긴장과 동시에 묘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면… 그 상태가 오래가야겠지. 

아니면 영원히. 병원으로 돌아오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넌 그녀 곁에서 계속 상황을 지켜. 필요하다면 흔들어 놓아.”

통화가 끊기자, 지현은 휴대전화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눈빛에는 질투와 욕망, 그리고 도혁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야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 시각, 오피스텔 안.

거실에 앉은 수연은 작은 화분을 두 손에 들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가져온 허브 화분이었는데, 

그녀는 흙을 고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식물이 이렇게 향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마치 살아 있는 증거 같아서.”

우혁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행동 하나에도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기억을 잃어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이었지만, 

순간순간 흘러나오는 깊은 눈빛은 단순한 소녀가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건, 그렇게 소소한 것들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수연은 잠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표님이 있어서… 제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걸 더 잘 느껴요.”

그녀의 고백 같은 한마디에, 우혁은 단단하던 표정이 서서히 무너졌다.

늦은 밤,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닷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고, 멀리서 파도 소리가 잔잔히 울려왔다.

“기억이 돌아오면…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겠죠.”

수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두렵습니까?”

우혁이 물었다.

“네. 혹시… 지금의 제가 사라질까 봐.”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보여주는 순수함, 

그러나 본능처럼 몸에 남아 있는 전문성. 

그 두 얼굴이 기묘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기억이 돌아온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당신이 지금 제 곁에 있다는 사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수연의 심장을 깊게 흔들었다.

그러나 같은 순간, 멀리 다른 방에서는  또 다른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박지현은 노트북 앞에서 도혁에게 받은  지시를 곱씹으며 손가락을 세게 물었다.

“차수연… 넌 예전처럼 빛날 수 없어.  이번에는 내가 널 무너뜨릴 거야.”

창밖 파도는 거세게 부서지고 있었다.

평화로웠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었다.

Continuez à lire ce livre gratuitement
Scanner le code pour télécharger l'application

Latest chapter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51. 기록은 기억을 이기는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응급호출음이 한 번 울리고 끊겼다. 뒤이어 더 급한 톤으로 두 번, 세 번. 인공심박기 알람과 겹쳐 소리가 엇박자로 복도를 찢었다.“소아응급! 다발성 외상, 흉부 타격 의심! 집도의 호출!”전달음은 짧고 선명했다. 수연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녀는 흰 코트를 의자 위에 던져두고 복도를 내달렸다.소아응급실은 이미 작은 소란으로 들끓고 있었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들것 위에서 희미하게 몸을 떨었고, 보호자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청진기의 차가운 금속이 피부 위에 닿자 아이의 숨은 더 얕아졌다.“산소 마스크, 사이즈 작은 거. 포화도 떨어지는 중이에요. 흉부 X-ray 곧장, 혈액 가스 채혈 들어갑니다.”간호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잡는 사이, 수연은 손끝으로 늑골 라인을 따라 압통을 확인했다. 손상 부위가 좁지 않았다. 깊은 호흡을 요구하자 아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기흉 가능성 높습니다. 흉관 삽입 준비.”“마취는” 레지던트가 묻자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국소로 충분합니다. 시간 없어요. 흉부 전벽, 삼각지점 잡고… 여긴 제가.”손이 들어가고, 금속이 살을 벌렸다. 짧은 신음 뒤로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스스’하고 새어 나왔다. 모니터 파형이 조금씩 안정되며 포화도가 회복선을 그리기 시작했다.“좋아요. 더 깊이 가지 마세요. 흉관 고정.”보호자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지만, 수연은 차분함을 놓지 않았다.“지금부터는 시간이 도와줄 겁니다. 저는 옆방 환자 확인하고 곧 돌아올게요.”그녀가 장갑을 벗는 순간, 의무기록실 쪽 복도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전산팀장이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이들과 설전을 벌이는가 싶더니, 카메라를 든 누군가가 뒤섞여 들어왔다. 불청객이었다. 재킷 깃에 달린 보도기관 배지가 번쩍였다.“촬영은 불가합니다.” 수연이 외투 소매로 입구를 막아섰다. “환자와 보호자의 동의 없이 카메라를 들이미는 건 인권침해에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50. 다가오는 고백

    해가 완전히 기울자 도시 위로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네온사인은 무심하게 반짝였지만, 오피스텔 안의 공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수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등 위로 떨어진 조명이 희미하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시선은 한참 동안 창밖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우혁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입술을 열었다.“교수님.”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굵직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아니… 수연 씨. 이제는 당신에게 꼭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그의 눈빛은 결심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수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밤마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파편들, 준호가 남긴 증언의 조각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확신이 지금 눈앞의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그날, 다섯 해 전….” 우혁이 말을 이으려던 순간, 날카로운 진동음이 방 안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휴대전화였다. 병원 비상 호출이었다.수연은 본능적으로 전화를 집어 들었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급했다.“교수님, 응급실입니다! 대량 출혈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교통사고로 심폐정지 상태,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순간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혁의 고백은 한순간에 멈춰 섰고, 수연의 눈빛은 단호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준비해 주세요. 곧 내려가겠습니다.”응급실은 전쟁터였다. 피로 얼룩진 스트레처 위에 실린 환자는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고, 의료진의 손길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심장 압박을 이어가는 레지던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흘러내렸다.“흉부 손상 심각합니다! 맥박 잡히지 않습니다!”“혈압 측정 불가!”그 순간, 수연이 들어섰다. 흰 가운 자락이 휘날리며 수술 준비 구역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고, 손끝은 떨림 하나 없이 움직였다.흉부 절개 준비하세요. 대동맥 손상 의심됩니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49. 너의 심장이 기억하는 순간

    아침 햇살은 병원 유리창을 스치며 희미하게 복도를 채웠다. 밤새 이어진 응급 상황의 긴장감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환자실 앞에 서 있는 의료진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차수연은 새벽부터 한 걸음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단 한순간도 집중을 놓지 않았다.병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나오는 간호사가 작게 말했다.“교수님, 환자가 다시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짧게 대화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수연의 발걸음은 무겁게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계음이 일정한 리듬을 그리며 울리고 있었고, 하얀 시트 위의 박준호는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이 수연을 붙잡았다.“교수님….”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인식이 담겨 있었다.수연은 의자에 앉으며 낮게 응답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준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목소리에 힘을 조금 실었다.“저… 말해야겠습니다. 오래 묻어둔 이야기라…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수연은 숨을 죽였다. 그가 전하려는 말이 지난밤 중단되었던 그 진실과 이어져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그날… 제 심장은 이미 멎어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포기했죠. 하지만 교수님만은 끝까지 손을 떼지 않았습니다. 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뜨겁고 단호한 손길을.”수연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러나 준호의 다음 말은 그녀의 눈빛을 더욱 흔들어놓았다.“그리고… 제 옆에서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목소리로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하던 사람이. 그 사람의 절박함이… 제 심장을 붙잡아준 힘이었을지도 모릅니다.”수연의 손끝이 떨렸다. 기억 속 파편과 준호의 말이점점 맞춰지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어젯밤 그녀가 거의 확신에 이르렀던 바로 그 목소리.“그 사람… 누구였나요?”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준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대답을 이어가려 했지만,갑자기 문이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48화. 침묵 속의 진실

    밤은 도시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지만, 병원 복도는 결코 잠들지 않았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환자의 신음과 기계음이 뒤섞여 이어졌고, 긴급 호출을 알리는 경보음은 때때로 공기를 갈라냈다. 긴 하루가 저물었음에도 차수연의 어깨에는 피로 대신 긴장이 감돌았다. 그녀는 회복실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며 박준호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문틈 사이로 비친 그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의식은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다리던 듯 수연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조여왔다. 다섯 해 전의 조각난 기억과 오늘의 장면이 겹쳐져, 마치 시간이 원을 그리듯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문이 열리자, 간호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환자가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수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곁에 섰다. 준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열리더니, 그녀를 향해 멈췄다.“…교수님….” 그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분명했다. “다시… 또 살려주셨군요.”수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말, 바로 다섯 해 전에도 똑같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녀는 손끝이 떨리는 걸 애써 숨기며 차분히 답했다.“당신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된 건… 제 손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 끝까지 버텨준 덕분이에요. 너무 오래 말하지 말고 쉬세요.”그러나 준호는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그날…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포기했는데… 교수님만… 제 심장을 붙잡고 있었죠. 옆에서… 울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발… 살려 달라며…”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억 속 파편과 그의 증언이 겹쳐졌다. 그날 심장을 움켜쥐던 자신의 손, 그리고 옆에서 들리던 간절한 목소리.“누구였나요?” 수연은 낮게 물었다.준호는 입술을 떨며 힘겹게 대답했다.“…그 사람이….”말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모니터 경보음이 울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간호사들이 급히 몰려왔다.“혈압 급강하! 산소 공급 유지하세요!”수연은 곧장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47. 기억의 수술실

    수연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이제 확신해요. 제가 그날 살려낸 환자가 준호 씨라면, 왜 제 기억은 그렇게 지워져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들렸던 또 다른 목소리는 대체 누구였을까요.”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눈빛 속에 깊은 고뇌가 스쳐갔다. 마치 무언가 알고 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는 듯한 기묘한 침묵이었다.수연은 그의 눈빛에서 미묘한 떨림을 읽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회복실 상황을 보고했다.“교수님, 환자가 의식을 되찾으려 합니다.”수연은 급히 들어갔다. 준호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선이 그녀를 비추는 순간,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교수님… 다시… 살려주셨군요.”그 말에 수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다섯 해 전에도 그가 같은 말을 했었다.회복실 밖으로 나온 수연은 숨을 고르며 우혁을 향해 중얼거렸다.“기억이… 점점 또렷해져요. 하지만, 이상해요. 분명 그날, 준호 씨의 곁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제가 손을 놓지 못하도록 붙잡던….”말을 멈춘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혁은 그대로 서 있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멀리서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도혁의 그림자는 더욱 서늘해지고 있었다.“차수연, 기억을 되찾는 게 두렵지 않나? 그게 결국 널 무너뜨릴 열쇠가 될지도 모르지.”도혁의 낮은 중얼거림은 어둠 속에 묻혔지만, 그의 눈빛은 확실히 결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회복실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고요했다. 환자의 심박 모니터가 규칙적인 파형을 그리며 작은 비프음을 냈고, 그 소리가 마치 생명이 붙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울려 퍼졌다.박준호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희미하게 눈을 떴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그의 시선이 수연을 붙잡았다.“…교수님….”그 목소리는 마치 다섯 해 전의 그날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46화. 흔들리는 증언

    법정 안은 시작부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공기 자체가 무겁게 내려앉아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판사가 입장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시 앉자마자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본 법정은 새로운 증거를 제출합니다. 당시 수술실 내 CCTV 전체 기록입니다. 여기에는 피고인 차수연이 차트를 확인하고, 환자 상태를 인지한 뒤에도 무리하게 수술을 강행한 장면이 명확히 담겨 있습니다.”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됐다. 화면 속 수연은 차트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간호사와 짧게 대화를 나눈 뒤, 곧바로 수술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겉보기엔 확실히 무리한 강행처럼 보였다. 방청석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검사는 목소리를 높였다.“피고인은 이미 환자가 수술을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선택을 했고, 결과적으로 환자는 사망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과실 아닙니까?”시선이 모두 수연에게 몰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영상은 단편적인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당시 환자의 심장은 언제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했습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의사라면 누구라도 수술을 선택했을 겁니다.”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냉담했다.검사는 비웃듯 말을 이어갔다.“책임을 피하려는 궤변일 뿐입니다. 의사라면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합니다. 차수연 교수, 당신의 오만이 한 생명을 앗아간 겁니다.”법정 안은 술렁였고, 판사가 망치를 두드리며 정숙을 명했다. 하지만 수연의 마음속은 거칠게 요동쳤다.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끝내 지켜내지 못한 환자에 대한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그때, 변호인 측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재판장님, 제출된 영상은 분명히 조작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본 파일의 메타데이터 분석을 요청합니다.”판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원본 분석을 위해 자료를 확보하겠습니다.

Plus de chapitres
Découvrez et lisez de bons romans gratuitement
Accédez gratuitement à un grand nombre de bons romans sur GoodNovel. Téléchargez les livres que vous aimez et lisez où et quand vous voulez.
Lisez des livres gratuitement sur l'APP
Scanner le code pour lire sur l'applicatio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