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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균열의 그림자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3-04 20:40:19

아침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스며들었다. 

수연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향긋한 향이 퍼졌지만, 마음은 어제 카페에서 느낀 

낯선 시선 때문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표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저를 보던 그 여자,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맞을까요?”

서류를 정리하던 우혁이 고개를 들었다.

“아는 얼굴 같았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하지만… 눈빛이,  뭔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짧은 정적이 흘렀다. 우혁은 곧 담담히 말했다.

“괜한 불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가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그녀의 가슴 속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시각, 박지현은 숙소 창가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쥔 커피는 식어 있었고, 시선은 어제의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틀림없어. 그 얼굴, 그 눈빛… 차수연이야.”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은 줄 알았던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리고… 저 남자는 뭐야?”

지현의 입술이 얇게 굳어졌다. 

수연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편했는데, 

그녀 곁에서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남자의 존재는 

또 다른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좋아. 네가 정말 수연이라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야겠지.”

며칠 뒤, 봉사단 의료진이 현지 보건소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우혁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지현과 마주쳤다. 

그녀는 일부러 먼저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강우혁 대표님 맞으시죠?  기사에서 본 적 있습니다.”

우혁은 순간 낯설어했지만 곧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

“네, 맞습니다. 여기까지 소문이 났군요.”

“저는 서울 ○○병원 흉부외과 의사 박지현이라고 합니다.  이번 봉사단에 합류했어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지현은 일부러 손을 내밀었다. 

우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악수를 받았다. 

그녀의 눈빛은 매끄럽게 웃고 있었지만, 

속 깊은 곳에 감춰진 날카로움이 번득였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우혁은 그날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수연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어딘가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박지현… 어디서 들은 이름 같아요. 하지만…”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그 여자가… 저를 알아볼 수도 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떨렸다.

우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직 모를 겁니다.  설령 알게 된다 해도,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그의 단단한 어조에 그녀는 잠시 안도했지만, 마

음 한켠에서는 이미 무언가 균열이 일어나는 듯했다.

다음 날, 지현은 일부러 시장 근처를 서성이다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봤다. 수연이 천천히 걷다가 

우혁의 팔에 살짝 기대는 모습. 두 사람의 웃음.

‘정말 수연이 맞네. 그런데… 저 남자와 저렇게 가깝다니.’

지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좋아. 네가 얼마나 기억을 잃었는지… 직접 확인해주지.’

바람이 세게 불며 바닷가의 파도를 일으켰다. 

평화롭게 이어지던 두 사람의 시간에,  차가운 그림자가 스며들고 있었다.

시장 거리를 걷던 수연은 미묘한 기시감에 발걸음을 멈췄다. 

주변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낯선 기운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한 여자가 또렷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지현이었다.

차갑게 빛나는 시선이 파고들자, 수연의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심장이 반응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낯익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수연 씨, 괜찮습니까?”

옆에 있던 우혁이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저 여자… 어제 카페에 있던 사람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흔들렸다.

우혁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확인하더니,  잠시 눈빛을 가라앉혔다.

“저쪽으로 갑시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수연은 안도감과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그러나 뒤를 따르는 시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후, 우혁은 투자자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보건소 봉사 현장에서 박지현과 마주쳤다. 

그녀는 하얀 가운을 입은 채, 능숙하게 환자를 돌보며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대표님, 또 뵙네요.”

지현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박 선생님.”

우혁은 짧게 인사만 건넸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봉사 끝나고 의사들끼리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대표님도 함께하시죠. 

지역 보건 문제에 대해 들으시면 사업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매끄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단순한 동료애가 아닌 

묘한 호기심으로 번쩍였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동행이 있어서요.”

우혁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지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동행이라… 혹시, 그날 카페에서 뵌 분?”

우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곧 다시 굳어졌다.

“그 문제는 사적인 부분입니다.”

지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에는 냉기가 섞여 있었다.

“사적인 문제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간 직접 확인하게 될 겁니다.”

그날 저녁, 수연은 거실에서 차를 마시다 

문득 불안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잠시 뒤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눈앞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봉사 가운을 벗은 채 단정한 차림의 박지현이었다.

“혹시… 잠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지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탐색하는 듯 예리했다.

수연은 당황스러웠다. 낯설지만,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저… 저를 아세요?”

지현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하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네요.  혹시 서울 쪽에서 사신 적 없으세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울렸다. 하지만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수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대답을 피했다.

“저는… 기억을 잃어서요. 아무 것도 몰라요.”

지현은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기억을 잃었다고요? 흥미롭네요.”

바로 그때, 현관 안쪽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우혁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현은 태연한 척 웃었다.

“아, 대표님. 우연히 지나가다 뵈어서요. 

귀찮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여기는 제 사적인 공간입니다. 

다시는 허락 없이 오지 마세요.”

우혁의 단호한 말에 지현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돌아서는 눈빛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맞아. 네가 차수연이야.  그리고… 아직 아무 것도 기억 못 하고 있군.’

문이 닫히자, 수연은 긴장한 얼굴로 우혁을 바라봤다.

“저 여자가… 날 안다고 했어요. 정말일까요?”

우혁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누가 뭐라 하든 지금 당신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저와 함께.”

그 말에 수연의 눈가가 젖었다. 이름도, 

과거도 없는 자신을 ‘여기 있는 사람’으로 받아주는 

그 한마디가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밖에서는 파도가 요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세 사람의 운명이 얽히기 시작하며, 

이제 더 이상 평온만은 허락되지 않을 듯했다.

밤이 깊어도 박지현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숙소에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망설였다. 화면 위 이름 하나가 반짝였다.

민도혁.

오랫동안 손가락은 버튼 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통화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 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지현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차수연, 살아 있습니다.”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웃음은 낮지만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살아 있다고? 어디서?”

“속초입니다. 기억을 잃은 것 같아요. 곁에는 한 남자가 함께 있더군요.  꽤나 지켜주려 애쓰는 눈치였습니다.”

도혁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느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의미심장하군. 사라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지. 

살아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또 하나의 기회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현의 목소리에는 긴장과 동시에 묘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면… 그 상태가 오래가야겠지. 

아니면 영원히. 병원으로 돌아오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넌 그녀 곁에서 계속 상황을 지켜. 필요하다면 흔들어 놓아.”

통화가 끊기자, 지현은 휴대전화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눈빛에는 질투와 욕망, 그리고 도혁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야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 시각, 오피스텔 안.

거실에 앉은 수연은 작은 화분을 두 손에 들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가져온 허브 화분이었는데, 

그녀는 흙을 고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식물이 이렇게 향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마치 살아 있는 증거 같아서.”

우혁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행동 하나에도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기억을 잃어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이었지만, 

순간순간 흘러나오는 깊은 눈빛은 단순한 소녀가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건, 그렇게 소소한 것들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수연은 잠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표님이 있어서… 제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걸 더 잘 느껴요.”

그녀의 고백 같은 한마디에, 우혁은 단단하던 표정이 서서히 무너졌다.

늦은 밤,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닷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고, 멀리서 파도 소리가 잔잔히 울려왔다.

“기억이 돌아오면…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겠죠.”

수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두렵습니까?”

우혁이 물었다.

“네. 혹시… 지금의 제가 사라질까 봐.”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보여주는 순수함, 

그러나 본능처럼 몸에 남아 있는 전문성. 

그 두 얼굴이 기묘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기억이 돌아온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당신이 지금 제 곁에 있다는 사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수연의 심장을 깊게 흔들었다.

그러나 같은 순간, 멀리 다른 방에서는  또 다른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박지현은 노트북 앞에서 도혁에게 받은  지시를 곱씹으며 손가락을 세게 물었다.

“차수연… 넌 예전처럼 빛날 수 없어.  이번에는 내가 널 무너뜨릴 거야.”

창밖 파도는 거세게 부서지고 있었다.

평화로웠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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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이 병원 건물의 유리벽에 부딪혀 반사될 때, 윤지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오늘은 ‘라벤더 정원’ 개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몇 년의 시간 끝에 완성된 그 공간은 단순한 식물원이나 추모공간이 아니었다.그건 ‘두 사람의 약속’이 물리적인 형태로 세상에 남은, 살아 있는 증거였다.정원 입구에는 아직 봉인된 현판이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그녀의 시야에 환한 보라빛이 스며들 듯 번졌다.바람에 흩날리는 향기가 익숙했다.라벤더. 언제나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불러오는 향기.기념식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였고,언론의 카메라가 세워지며 조명이 켜졌다.지아는 여전히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차수연이 썼던 펜.잉크는 거의 말라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늘 품고 다녔다.그 펜은 기억의 무게 를 지닌 물건이었다.“윤 원장님, 잠시 후 10분 남았습니다.”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지아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푸른 하늘 위로 얇은 구름이 떠 있었고, 그 틈으로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교수님, 대표님… 오늘은 당신들의 약속이 완성되는 날이에요.”정원은 병원 한가운데 자리했다.유리 온실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어디서도 볼 수 없는 따뜻한 구조였다.라벤더 화단은 빙 둘러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고,중앙에는 작은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그 의자는 그들 의 자리였다.의도적으로 이름표는 붙이지 않았다.누구의 자리라 규정하기보단,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상징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식이 시작되자 병원 관계자들과 언론, 환자 가족들,그리고 오랜 동료들이 자리를 채웠다.지아는 단상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라벤더 정원은, 단순히 한 병원의 상징이 아닙니다.이곳은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버티고,그리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의 흔적을 품은 공간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지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87화. 잉크가 새긴 목소리

    가을비가 그친 병원 정원에는 낙엽이 절반쯤 물들어 있었다.윤지아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며칠째 이어지는 회의와 연구 일정 때문에 몸은 지쳤지만, 머릿속은 이상하게 또렷했다.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끝난 이야기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일 수 있다.라벤더 프로젝트의 자료를 정리하던 중이었다.기록실 한쪽 서랍, ‘Private’이라 손글씨로 적힌 파일박스를 옮기다 무언가 작은 노트 하나가 떨어졌다.가죽 표지, 모서리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볼펜으로 눌러 쓴 이름.차수연.그녀는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렸다.표지를 열자, 안쪽에 잔잔하게 번진 잉크 자국이 있었다.‘201X년 3월, 봄비가 처음 내리던 날부터.’그 문장 하나로 이미 마음 한가운데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했다.지아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그 안에는 의료 기록이 아닌, 한 사람의 온전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사람의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익숙하게 들리던 구두의 리듬이 사라지고 나니 복도는 너무 길다.그가 떠난 게 아니라, 내 하루에서 사라진 것 같다.”“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그 사람과의 대화뿐 아니라내 안의 목소리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구나.”지아는 손끝으로 글자 자국을 천천히 따라갔다.잉크가 눌린 자리에 손톱이 걸렸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필압에서 느껴지는 건 고통보다도 다짐에 가까웠다.다음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나는 여전히 그가 심장 수술 때 쓰던 펜을 사용한다.그 펜은 잉크가 조금씩 새고 있지만, 그 새는 흔적이 마치 그 사람의 목소리 같다.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옆을 스친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다음 장을 넘겼다.종이 한쪽이 반쯤 찢어져 있었고, 거기엔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나는 아직도 그를 ‘대표님’이라 부를까,아니면, 그가 마지막에 바랐던 대로 우혁 씨라고 불러야 할까.”지아는 속으로 답했다.둘 다 맞아요. 그건 존경과 사랑이 동시에 남아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88화. 폭풍 속의 버팀목

    밤은 깊었지만, 수연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피스텔 창문 너머로 흩뿌려진 불빛들이 검은 하늘 위에서 은근한 떨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 민도혁의 날 선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혁이 남긴 한 마디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어쩌면… 그때 저를 살린 사람이 교수님일지도 모릅니다.”그 말이 진실일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기억 속 흐릿한 얼굴이 분명 누군가의 생존을 의미했지만,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79화. 기억의 그림자

    늦은 밤, 병원 기록실.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서류 더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수연은 여전히 오래된 차트를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페이지마다 스며든 잉크 냄새가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들은 분명히 현실의 파편인데, 이름을 붙이려 하면 흩어져 버렸다.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조여왔다. 그녀는 메스를 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 심장이 멎어가는 환자, 절망 속에서도 끝내 맥박을 되살리던 순간. 그때 들려왔던 비명 같은 심전도 소리와 환자의 가슴이 다시 뛰던 울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35화. 심장을 겨누는 음모

    밤이 내려앉은 병원 본관 앞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리고, “차수연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연신 날아들었다. 그 중심에 민도혁이 서 있었다. 완벽하게 맞춘 수트 차림, 눈썹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그는 마치 자신이 정의의 대변자인 듯 미소를 지었다.“차수연 교수는 불과 몇 달 전, 환자를 수술 도중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오늘 봉사 현장에서 잠시 보여준 행동은 그 죄를 덮기 위한 쇼에 불과합니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저지른 자를 두 번 다시 수술실에 세울 수 없습니다.

  •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29화. 그림자의 주인

    밤이 깊었지만 오피스텔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우혁은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가 방 안에 감돌았다. 그의 눈가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손끝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여기… 드디어 연결이 잡혔습니다.”그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접속 로그를 확대했다. 수연이 다가와 숨을 죽였다. 화면에는 외부 계정이 남긴 접속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병원 본관 서버실, 특정 시각. 그리고 이 접속은 관리자 권한을 가진 계정으로만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이 계정이 사용된 기기의 고유 번호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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