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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질문 한 번에, 한 겹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5 13:45:51

"대표님, 제77조에 뭐라고 쓰셨어요?"

차 안의 공기가 멈췄다. 도헌의 팔이 세아의 허리에서 천천히 풀렸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건 말 못 해.”

"박지윤은 알고 있대요. 제 아버지도 알고 계시고요. 저만 몰라요."

"세아."

"계약서 제3조, 과거를 묻지 않는다. 그건 이미 깨졌잖아요."

“77조는 과거가 아니야. 미래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세아는 한참 그의 눈을 보다가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옆자리에 앉았다.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갔다. 몸은 아직 그의 체온을 기억하는데도.

“……좋아요. 오늘 밤 10시에 얘기해요.”

"세아, 지금은."

“10시 전에는 계약 시간이 아니니까, 아무것도 안 들을래요.”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헌은 허공에 뜬 손을 한참 만에 내렸다.

밤 10시 정각.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거실에는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고, 탁자 위에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도헌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재킷도 넥타이도 없이, 셔츠 소매를 걷은 채로.

"왔네."

"네."

"묻고 싶은 거, 전부 물어도 돼."

세아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안에는 짙은 와인색 슬립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퇴근길에 일부러 갈아입은 옷이었다. 도헌의 시선이 어깨의 가는 끈에서 멈췄다가, 천천히 허리선을 따라 내려갔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 옷은 반칙인데.”

"조건이 있어요."

"뭔데."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 거짓말하거나 대답을 피하면."

세아가 그의 앞에 서서 셔츠의 맨 윗단추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한 겹씩 벗어요. 대표님이."

도헌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제가 묻는 쪽이니까요. 대답하면 제가 한 겹 벗고, 피하면 대표님이 벗는 거예요. 멈추고 싶으면 제100조라고 말하면 되고."

"당신, 정말."

그가 낮게 웃었다. 놀랐고, 즐거웠고, 위험했다.

"좋아. 시작해."

세아가 그의 맞은편,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한쪽 다리를 천천히 꼬았다. 슬립의 가장자리가 허벅지 위로 미끄러졌다. 도헌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첫 번째 질문. 제77조, 언제 쓰셨어요?"

“……계약서 처음 만든 날.”

"대답했네요."

세아가 한쪽 귀걸이를 풀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작은 소리가 선명했다. 도헌이 그것을 눈으로 따라갔다.

"두 번째. 그 조항은 저한테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둘 다.”

"그게 대답이에요?"

"당신이 판단할 몫이야."

"피한 걸로 칠게요."

도헌이 한숨을 내쉬며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 드러난 목선과 쇄골이 스탠드 불빛 아래 어두운 금빛으로 보였다. 세아의 숨이 아주 조금 얕아졌다. 벗기는 쪽이 아니라 보는 쪽인데도 열이 올랐다.

"세 번째."

그녀가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입술을 혀끝으로 닦았다. 그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박 대리, 아니 박지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그런데 제 곁에 뒀고요."

“……그래.”

"왜요."

"당신이 누굴 믿는지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리고."

"그 애가 당신 곁에 있으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니까."

세아의 눈이 흔들렸다. 거짓이 아니라서 더 아팠다. 그녀는 말없이 슬립의 한쪽 끈을 어깨에서 내렸다. 천이 팔 위로 미끄러졌다. 도헌이 숨을 들이켰다.

“……반칙이야, 세아.”

"규칙이에요."

"당신이 이러면 질문이 들리지 않아."

"그럼 대답은 더 솔직해지겠네요."

그가 일어섰다. 한 걸음에 그녀 앞까지 와서 탁자 양쪽에 손을 짚었다. 갇힌 쪽은 세아였다. 가까운 얼굴에서 와인과 밤 냄새가 났다.

"네 번째 질문은 내가 해도 돼?"

“……안 돼요.”

"그럼 대답 안 하고 그냥 벗을게."

그가 셔츠를 어깨에서 벗어 던졌다. 단단한 가슴과 어깨선이 불빛 아래 드러났다. 어젯밤 그녀가 남긴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세아의 시선이 거기 머물렀다. 입술이 말랐다.

“……마지막 질문.”

"해."

"저를 사랑해요?"

도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렸다. 그가 천천히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눈을 감았다.

"제13조."

“…….”

"먼저 말하면 진다고 했지."

"이미 졌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77일째 밤에 말할 거야. 그날, 제77조를 읽고 나서도 당신이 내 앞에 서 있으면."

그가 눈을 떴다.

"그때 가장 먼저 말할게. 누구보다 먼저."

세아의 눈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질문 놀이는 거기서 끝났다. 규칙도 승패도 사라졌다.

탁자 위의 와인잔이 흔들렸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올리자 슬립이 허벅지 위로 구겨져 올라갔다. 그녀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입술이 목선을 따라 내려가 어깨의 남은 끈을 이로 살짝 당겼다. 세아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침대로……."

"여기서 먼저."

"안 돼요, 나, 서 있을 수가."

"그럼 안고 있을게."

도헌이 그녀를 안은 채 벽 쪽으로 걸었다. 등이 서늘한 벽에 닿았다. 그 차가움과 그의 뜨거운 입술의 낙차에 세아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그 소리를 입술로 받아 삼켰다. 손은 허벅지 안쪽을 느리게 쓸었고, 세아는 숨이 끊길 듯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천천히, 도헌.”

"응."

"천천히 하는 척하지 말고요."

그가 낮게 웃다가 숨을 흘렸다.

“……정말 당신은.”

그 뒤의 시간은 말이 없었다. 벽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카펫으로, 불빛이 흔들리고 슬립이 바닥에 떨어졌다. 서로의 이름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고, 맞닿은 피부 위로 땀이 흘렀다. 세아가 그의 위에서 고개를 젖혔을 때, 그는 눈을 감지 않고 끝까지 그녀를 보았다. 그 시선에 그녀의 몸이 먼저 무너졌다.

새벽 2시.

세아는 카펫 위에서 그의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눈을 떴다. 도헌은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약 없이.

탁자 밑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와인잔 사이에 떨어진 작은 봉투였다. 그가 셔츠 주머니에서 흘린 것이었다. 겉에는 손글씨가 있었다.

[제77조. 77일째 밤 전에 열지 말 것.]

세아는 오래 그것을 바라보았다. 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방금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려고 이 모든 것을 감춘 채 자신을 안았다.

그녀는 봉투를 집었다. 그때 현관 도어락이 짧게 울렸다.

삐, 삐, 삐—

도헌이 눈을 떴다.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낮고 가벼운 목소리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형,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아직 안 자나 보네."

강민재였다. 그의 시선이 소파 위에 걸린 와인색 슬립과, 셔츠 한 장만 걸친 세아의 맨다리에 천천히 닿았다.

“……역시. 형 방에서 자는 건 비서가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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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조를 쓴 사람은 누구예요?”아침 햇살이 안가 거실의 유리창을 가로질렀다. 도헌은 막 눈을 뜬 참이었다. 세아는 소파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간밤의 온기가 남은 어깨 위로 그의 셔츠가 헐렁하게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병원에서 연락 왔어?”"어머니가 읽지 말고 먼저 당신에게 물으라고 하셨어요. 조항을 쓴 사람이 정말 아버지냐고."도헌의 시선이 처음으로 옆으로 미끄러졌다. 1화에서 세아를 정면으로 훑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대답해요."“……내가 썼어.”세아의 숨이 얕아졌다."한도식 회장님은 동의만 하셨어. 병상에서 눈을 뜨신 날 내가 조항 초안을 보여 드렸고,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셨지. 자기가 쓰게 했다고 말씀하신 건 당신이 나를 덜 미워하게 하려던 거야.""왜 거짓말을 시켰어요.""그 조항의 진짜 목적을 당신이 알면 안 됐으니까.""진짜 목적이 뭔데요."도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3년 동안 잠들지 못한 남자의 얼굴이 아침 빛 아래 낱낱이 드러났다."나는 위험한 사람이야, 세아. 아버지의 피를 받았고, 아버지가 가르친 방식으로 컸어. 가진 걸 지키려다 가두고, 놓치기 싫어서 숨기고. 당신 아버지를 숨긴 것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 방식이었어."“…….”“77조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묶는 조항이야. 계약이 새어 나가면, 당신이 위험해지면, 내가 먼저 떠나야 하도록. 내가 당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나를 막을 장치가 필요했어.”침묵이 길었다. 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보다 먼저 올라온 건 이상한 아픔이었다.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제일 못 믿고 있었다."그럼 아버지가 쓰게 했다는 말은요.""내가 당신 아버지 이름을 빌렸어. 미안해.""봉투 안에는 뭐가 더 있어요."“……그건 못 말해. 읽힌 건 민재 손이고, 내용은.”"도헌.""세아, 제발.""한 번만 더 피하면 저 나갈 거예요."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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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하지 마세요, 대표님."서재 문이 열렸다. 문턱에 선 남자는 회색 코트 차림에 오른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세아는 그 얼굴을 알았다. 아버지 곁을 20년 지킨 사람, 최진우 이사였다. 3년 전 사고로 죽었다고 들은 사람이었다.“……최 이사님?”"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놀라시는 건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이걸 보셔야 합니다."그가 태블릿을 책상 위에 세웠다. 화면이 켜지고, 가죽 의자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강태성 회장이었다. 도헌과 같은 눈매인데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아들아. 새벽부터 부산스럽구나."도헌의 손이 펜 위에서 멈췄다."계약서를 고치려는 모양인데, 그 종이는 원본이 아니다. 원본은 3년 전부터 내 금고에 있어. 너희가 쓰는 건 사본에 불과하지."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렇다면 회장님은 왜 지금 전화를 거셨죠? 사본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을 텐데요."화면 속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영리하구나, 한도식의 딸답게.""사본이 무의미하다면 최 이사님을 이 새벽에 여기 보내실 이유가 없어요. 서명이 무서우신 거죠. 우리가 같은 종이에 이름을 올리는 게."침묵이 흘렀다. 노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굳었다. 도헌이 세아를 보았다. 놀라움 뒤로 낮은 웃음이 스며들었다.“……이게 내가 반한 사람이야, 아버지.”"도헌, 네가 그 아이 때문에 무엇을 잃는지.""잃을 건 이미 잃었어요. 3년 전에."도헌이 펜을 들어 세아가 적은 부칙 아래에 이름을 휘갈겼다. 세아가 그 옆에 자기 이름을 겹쳤다. 두 사람의 서명이 한 줄 위에서 엉켰다. 시계가 정각 6시를 알렸다.화면 속 강태성이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좋다. 그럼 이것도 보거라."카메라가 옆으로 돌았다. 병실이었다. 침대에 누운 한도식 회장, 그 곁에 서 있는 여자. 긴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한서린이 그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세아의 숨이 멎었다."서린 양은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다.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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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조를 읽은 사람이 있어.”도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세아는 침대 끝에 서서 휴대폰 화면을 내밀고 있었다. 새벽빛이 그의 맨어깨 위로 차갑게 번졌다."서린이 보낸 거예요. 민재가 봉투를 가져갔대요."“……열었겠지. 그 녀석은 열어.”"조항에 뭐라고 쓰셨어요. 이제 말해 줘요. 읽힌 이상 비밀이 아니잖아요."도헌은 오래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제77조. 본 조항이 계약 당사자 외 제3자에게 열람된 경우, 계약은 그 시점으로부터 24시간 후 자동 종료된다. 종료 후 갑은 을에게 접근하지 않으며, 을의 가족에 대한 보호 권한 일체를 을에게 이양한다."세아의 입술이 벌어졌다.“……접근하지 않는다고요? 당신이?”"당신 아버지가 쓰게 하셨어. 계약이 새어 나가면 강태성의 칼끝이 당신으로 향할 거라고. 그때는 내가 당신 곁에서 떨어져야 당신이 안전하다고.""그래서 77일째 밤이 아니라.""이 조항은 원래 77일째에 읽게 할 생각이었어. 그때쯤이면 당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빨리, 이렇게 읽힐 줄은."시계는 5시 52분을 가리켰다. 세아가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24시간이면, 내일 새벽 6시 전까지네요.”"세아.""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계약상으로는.""그래서 보내야 해. 지금이라도 당신을 병원으로 보내고, 나는.""싫어요."대답은 짧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세아가 침대 위로 한 무릎을 올렸다. 가운 끈이 느슨하게 풀리며 어깨선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의 턱을 손끝으로 올렸다."계약이 끝나기 전 24시간이 남았어요. 제1조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였죠. 그건 틀렸어요."“……뭐가.”"오늘은 낮도, 밤도, 전부 당신 거고 내 거예요. 제가 정한 규칙이에요."도헌의 숨이 목에서 걸렸다."세아, 지금 그런 말을 하면.""하면요?"“6시 알람이 울리기 전에 내가 당신을 못 보내.”"안 보내면 되죠."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그날 하루는 이상하게 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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