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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초상화 속의 여자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9 13:12:36

자정 정각, 강태성 회장의 저택 정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세아는 혼자 걸어 들어갔다. 도헌에게는 "차에서 기다려요"라고 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목을 놓기 전에 안쪽 맥박 위를 엄지로 한 번 눌렀다. 이름 대신 하는 인사였다.

서재 문이 열리자 와인 향이 먼저 닿았다. 강태성은 벽난로 앞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칠십 가까운 나이에도 등이 곧았고, 눈은 도헌과 똑같이 사람을 재는 눈이었다.

"혼자 왔구나. 한도식의 딸답게 무모하고."

"어머니는 어디 계시죠."

"앉아라. 서서 듣기엔 긴 이야기다."

"앉지 않겠습니다."

"그럼 서서 들어라."

그가 벽에 걸린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세아와 같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은서. 스물여섯에 내 비서였다. 지금 네 나이쯤이지. 낮에는 완벽했고, 밤에는 내 서재에서 이 자리에 앉아 나와 와인을 마셨다."

세아의 눈썹이 움직였다.

“……비서였다고요.”

"그래. 지금 네 위치와 똑같이. 도헌이 이 구도를 만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아이는 내 안목을 물려받았다. 가장 위험한 여자 앞에서 가장 약해지는 취향까지."

"어머니를 가두셨습니까."

"가두다니. 은서는 내가 아니라 네 아버지를 택했다. 그래서 그 둘을 떼어 놓았을 뿐이다. 3년 전 한도식이 쓰러진 날, 은서를 이 집으로 데려왔지. 기억이 흐려지는 약과 함께."

세아의 손끝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목소리는 오히려 낮고 단단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소유죠."

"사랑과 소유가 다르다고 믿는 건 젊은 사람의 특권이다."

강태성이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와인잔을 든 손이 천천히 올라와 세아의 턱 가까이에서 멈췄다. 닿지는 않았다.

"거래를 하자. 네가 이 집에 머물면, 은서를 한도식에게 돌려보내겠다. 계약서의 을이 도헌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이다. 낮에는 내 비서로, 밤에는."

"그 다음 말은 하지 마세요."

세아가 그의 손목을 쳐 내렸다. 서늘한 목소리가 서재를 갈랐다.

"저는 한 번 정한 계약자 말고는 밤에 곁에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조항은 제가 직접 썼고요."

강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음이 걷히고 처음으로 분노가 스쳤다.

"오만하구나."

"어머니를 데려오세요. 아니면 제가 찾겠습니다."

"찾아라. 이 집 안 어딘가에 있으니."

그가 서재의 안쪽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아는 문을 열었다.

문 너머는 침실이었다.

두꺼운 커튼과 낮은 조명, 침대 위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초상화보다 야위었고 머리는 반쯤 희었다. 하지만 목선과 옆얼굴이 같았다. 세아가 매일 거울에서 보던 선.

“……엄마?”

여자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러다 세아의 얼굴 위에서 조금씩 맺혔다.

“……세아?”

그 목소리에 세아의 무릎이 꺾였다. 어머니의 손이 떨며 올라와 뺨을 감쌌다.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열 살 때 이후로 처음이구나. 이렇게 컸니."

"엄마, 가요. 지금 나가요."

"안 돼. 문 앞에 사람이."

"제가 있어요."

그때 현관 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고함, 구두 소리, 그리고 누군가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르는 소리. 침실 문이 열렸다.

도헌이었다.

이마에 피가 흐르고 셔츠 소매가 찢겨 있었다. 그가 방을 훑고 세아를 발견하자 숨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지, 내가 그러겠다고 한 적은 없어."

“……그 이마.”

"괜찮아. 어머님이야?"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헌이 어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도헌입니다. 한도식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도식 씨가?”

"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문밖에서 강태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헌. 아비 앞에서 칼을 겨누는구나."

도헌이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돌아섰다. 세아의 어머니를 등 뒤에 두고, 부자의 눈이 마주쳤다.

"칼이 아니라 비켜 달라는 겁니다."

"그 여자 때문에?"

"이 여자들 때문에요."

도헌이 낮게 말했다.

"저는 평생 아버지가 가르친 대로 가진 걸 지키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제가 고른 사람을 지키겠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강태성이 소리 내어 웃었다.

"좋다. 가라. 어차피 77조는 이미 내 손에 있고, 24시간은 흘러갔다. 너희 계약은 끝났다."

세아는 숨을 멈췄다. 도헌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끝나지 않았어. 부칙이 있으니까."

새벽 3시. 도헌의 안가.

어머니는 최 이사가 마련한 의료팀과 함께 한도식 회장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두 사람이 마주한 순간을 세아는 문틈으로 보았다. 서로의 이름만 부르며 손을 잡는 두 노인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안가의 욕실에서 나온 도헌은 이마에 거즈를 붙인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세아가 구급상자를 들고 그의 앞에 앉았다.

"가만히 있어요."

"명령이야?"

"부탁이에요. 늘 당신이 하는 방식으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아가 거즈 끝을 매만지는 동안 도헌은 눈을 떼지 않았다. 손끝이 이마에서 뺨으로, 턱선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이 그의 목에서 멈췄다. 맥박이 거기서 빨리 뛰고 있었다.

"오늘 겁나지 않았어요?"

"겁났지."

"뭐가요."

"당신이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

세아가 구급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파 위로 한 무릎을 올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맞댔다.

"저는 오늘 한 번도 안 무서웠어요. 당신이 올 거라는 걸 알아서요."

“……세아.”

"그런데 지금은 무서워요."

"뭐가."

"당신이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게요."

도헌의 숨이 멎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그런 사람 안 돼도 돼. 내가 있잖아."

"그 말, 한 번만 더 해 줘요."

"내가 있어."

그녀가 입술을 포갰다. 오늘 밤의 입맞춤은 거칠지 않았다. 오래 참은 사람이 마침내 물에 닿았을 때처럼 길고 깊고 조용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따라 올라가 목덜미를 받쳤다. 가운 끈이 풀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세아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드러나는 가슴 위에 입술을 눌렀다. 그가 낮게 숨을 들이켜며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오늘은 내가 정해도 돼요?"

"전부 정해."

"그럼 첫 번째. 눈 감지 마요."

"당신이 만든 규칙은 항상 내가 못 지키는데."

"그래서 만드는 거예요."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낮췄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숨이 엉키고, 이름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소파가 낮게 울렸고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지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세아의 목이 젖혀졌다. 창 너머 새벽 불빛이 그녀의 어깨에서 흔들렸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부르며 쇄골에 이마를 묻었고, 그녀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오래, 아주 오래 그의 체온 안에 머물렀다.

동이 틀 무렵, 세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병원의 한도식 회장 번호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가늘게 들렸다.

"세아야. 하나만 말해 줄게. 너, 제77조 읽었니?"

“……아직요.”

"읽지 마. 읽기 전에 도헌이한테 먼저 물어라."

"뭘요."

"그 조항을 쓴 사람이 정말 네 아버지인지."

통화가 끊겼다. 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헌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약 없이, 악몽 없이.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 평화가 이상하게 가슴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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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조를 쓴 사람은 누구예요?”아침 햇살이 안가 거실의 유리창을 가로질렀다. 도헌은 막 눈을 뜬 참이었다. 세아는 소파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간밤의 온기가 남은 어깨 위로 그의 셔츠가 헐렁하게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병원에서 연락 왔어?”"어머니가 읽지 말고 먼저 당신에게 물으라고 하셨어요. 조항을 쓴 사람이 정말 아버지냐고."도헌의 시선이 처음으로 옆으로 미끄러졌다. 1화에서 세아를 정면으로 훑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대답해요."“……내가 썼어.”세아의 숨이 얕아졌다."한도식 회장님은 동의만 하셨어. 병상에서 눈을 뜨신 날 내가 조항 초안을 보여 드렸고,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셨지. 자기가 쓰게 했다고 말씀하신 건 당신이 나를 덜 미워하게 하려던 거야.""왜 거짓말을 시켰어요.""그 조항의 진짜 목적을 당신이 알면 안 됐으니까.""진짜 목적이 뭔데요."도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3년 동안 잠들지 못한 남자의 얼굴이 아침 빛 아래 낱낱이 드러났다."나는 위험한 사람이야, 세아. 아버지의 피를 받았고, 아버지가 가르친 방식으로 컸어. 가진 걸 지키려다 가두고, 놓치기 싫어서 숨기고. 당신 아버지를 숨긴 것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 방식이었어."“…….”“77조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묶는 조항이야. 계약이 새어 나가면, 당신이 위험해지면, 내가 먼저 떠나야 하도록. 내가 당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나를 막을 장치가 필요했어.”침묵이 길었다. 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보다 먼저 올라온 건 이상한 아픔이었다.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제일 못 믿고 있었다."그럼 아버지가 쓰게 했다는 말은요.""내가 당신 아버지 이름을 빌렸어. 미안해.""봉투 안에는 뭐가 더 있어요."“……그건 못 말해. 읽힌 건 민재 손이고, 내용은.”"도헌.""세아, 제발.""한 번만 더 피하면 저 나갈 거예요."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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