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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지하 서재, 제0조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31 13:10:45

새벽 4시 40분, 강태성의 저택 뒷담.

"엄마는 여기로 가셨어요."

세아가 가리킨 곳은 정원 끝의 낡은 와인 저장고 문이었다. 도헌이 낮게 물었다.

"어떻게 알아."

"어릴 때 엄마가 자주 그린 그림이 있었어요. 계단 아래 문이 하나 있는 집. 그때는 상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민재가 건넨 마스터키가 자물쇠에 들어가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 안쪽은 석조 계단이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폭이었다. 도헌이 먼저 내려가고 세아가 그의 셔츠 자락을 쥐고 뒤따랐다. 열 계단쯤 내려갔을 때 위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경비였다.

도헌이 돌아서서 세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계단 옆 오목한 벽감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숨 쉬지 마.”

"쉬어야 사는데요."

"작게."

세아의 등이 서늘한 돌벽에 닿았고, 앞은 그의 체온이 눌렀다. 도헌의 숨이 이마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이 갈 곳을 잃고 그의 가슴 위에 얹혔다. 심장이 손바닥 아래서 거칠게 뛰었다. 불빛이 계단 위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굳은 채 서로의 숨소리만 들었다.

“……서준.”

"조용히."

"심장 소리가 너무 커요."

"당신 거야, 내 거야."

"모르겠어요. 겹쳐서."

경비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런데도 도헌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엄지가 그녀의 턱선을 따라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머물렀다.

"지금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아?"

"알아요."

"어머님이 저 아래 계신데."

"그러니까 더, 지금 아니면 못 할 것 같아서요."

세아가 먼저 입술을 올렸다. 소리를 죽인 입맞춤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 뒤에서 위로 올라와 블라우스 아래 맨살 위에 닿았다. 손바닥이 등을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자 세아의 숨이 목에서 끊겼다. 그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소리 내면 안 돼."

“……그럼 막아 줘요.”

그가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억눌린 숨이 서로의 입안에서 섞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셔츠 단추 사이로 파고들었고, 그의 무릎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돌벽의 차가움과 그의 몸의 열이 한꺼번에 밀려와 세아의 무릎이 풀렸다. 그가 허리를 받쳐 안았다.

“……여기서 더 하면 나 못 멈춰.”

"알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몇 번째 이자예요, 이게."

"복리라니까."

세아가 숨이 새는 웃음을 흘렸다. 도헌이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 이끌었다. 두 사람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서둘러 정리하고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철문이 있었다. 문틈으로 주황빛이 새어 나왔다. 도헌이 문을 밀자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밀려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서류함, 한가운데의 긴 책상,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여자가 있었다. 이은서였다.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눈이 살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가죽 서류철이 열려 있었다.

“……엄마.”

"왔구나. 생각보다 빨랐네."

은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아를 본 눈에 눈물이 맺혔다가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혼내려고 온 거 아니지?"

"서명을 왜 하셨어요."

"위임장 말이니? 그건 강태성이 시킨 게 아니야."

세아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스스로 했다. 그 서류가 법정에 가면 가짜 서명이라는 증거가 되니까. 네가 그걸 알아볼 거라는 것도 알았고. 한도식의 딸이니까. 아니, 내 딸이니까."

“……일부러 틀린 서명을 하셨다고요?”

“20년을 기다렸다. 강태성이 방심하는 순간을.”

은서가 서류철을 세아 쪽으로 밀었다. 첫 장에는 빛바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야간 특약서 — 갑 강태성, 을 이은서. 기간 100일.]

도헌의 숨이 멎었다. 세아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아래 조항들이 이어졌다.

제1조. 갑은 을을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곁에 둔다.

제3조.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제7조. 사내에서는 절대 들키지 않는다.

제13조. 먼저 마음을 주는 쪽이 진다.

세아의 손이 떨렸다. 전부 똑같았다.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이건.”

"도헌이 너한테 내민 계약서의 원본이야. 28년 전, 내가 스물여섯에 서명한."

"서준은 이걸 어떻게."

"아버지 서재에서 봤어."

도헌이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열두 살 때 우연히. 그때는 의미를 몰랐는데,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어. 너를 곁에 두려 했을 때 이 문장들이 저절로 나왔어.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아버지의 방식을 그대로 복사한 거였어."

"그게 가장 큰 죄예요."

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도헌아, 너는 한 군데를 고쳤더구나. 제13조."

“…….”

"우리 계약서에는 '먼저 마음을 주는 쪽이 진다'가 아니라 '먼저 마음을 주는 쪽이 갇힌다'였어. 이 단어 하나로 아버지는 20년 동안 나를 가두는 걸 정당화했지. 그런데 네 계약서에서는 세아가 직접 고쳐 썼잖니. 진다고. 그리고 나중에는 이긴다고."

세아가 숨을 삼켰다.

"그 한 글자가 이 판을 끝낼 열쇠였어. 20년 전에는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 조항을 네가 고쳤다. 그래서 나는 사라진 척하고 여기 온 거야. 강태성의 마지막 약점이 여기 있으니까."

은서가 서류함의 맨 아래 칸에서 두꺼운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오래된 녹음테이프와 사진, 약 처방전이 가득했다. 그리고 맨 위에는 강태성의 필체로 쓴 문서가 있었다.

[제0조. 본 계약의 을이 갑의 아이를 낳는 경우, 아이의 모든 권리는 갑에게 귀속된다.]

세아의 시야가 흔들렸다. 도헌이 옆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은서가 눈을 감았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서명했는데, 그가 이 조항을 몰래 넣었어. 그날 이후 나는 한도식에게 도망쳤고, 도식 씨가 나를 받아 줬고, 세아가 태어났다."

"그럼 저는."

"도식 씨의 딸이야. 몇 번을 말해도 모자라지만. 그런데 강태성이 3년 전 도식 씨를 노린 진짜 이유는 회사가 아니었다. 이 조항을 근거로 네 친권을 주장하려던 거였어."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아는 오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신 오래 눌려 있던 무언가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계약서가 전부 거짓이었군요. 제 이름도, 제 편도."

"아니."

도헌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계약서는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그걸 고친 건 당신이야. 문장은 복사했어도 당신이 거기 쓴 한 줄이 이 계약을 다른 것으로 만들었어. 제13조는 이제 당신 거야."

세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후회가 있었고, 후회보다 깊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웃었다.

"그럼 저도 지금 고칠게요. 제0조."

"뭘?"

"제0조. 이 계약의 모든 아이는, 낳든 안 낳든,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것이다."

은서가 소리 없이 웃으며 눈가를 훔쳤다. 도헌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 조항은 내가 서명할게.”

"당연하죠. 당신이 갑이니까요."

그때 위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철문이 쾅 닫히고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어서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울렸다.

"역시 여기였구나, 은서."

강태성이었다.

“20년 전처럼 순순히 문을 잠가 줘서 고맙다. 이번에는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와 줬군.”

철문 너머로 가스가 새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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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 정각, 강태성의 저택 서재.벽난로 불은 꺼져 있었다. 초상화 속 이은서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앞에 앉은 강태성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책상 위에는 위임장 한 장과 만년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세아는 혼자 걸어 들어갔다. 도헌은 정문 밖 차 안에 있었다. 귀에는 작은 수신기가 꽂혀 있었고, 그의 낮은 숨소리가 그 안에서 들렸다."앉아라.""서서 읽겠습니다.""고집은 어미를 닮았구나."세아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한진정밀 지분 포함, 태성그룹 18퍼센트의 의결권 전부를 강태성에게 위임한다는 문서였다. 서명란은 둘이었다. 위임인 한세아, 그리고 그 아래 증인란.증인란에는 이미 서명이 되어 있었다.세아의 눈이 멈췄다. 낯익은 필체였다. 모서리가 살짝 기우는 글씨. 3개월 전 편지에서 본, 아버지의 글씨였다.“……이건.”"네 아버지가 오늘 오후에 서명했다. 병실에서.""거짓말.""전원이 끊긴다고 했지, 협박이라고 한 적은 없다. 한도식은 스스로 서명했어. 딸을 살리려고."세아의 손끝이 서늘해졌다. 귓속 수신기에서 도헌의 숨이 짧게 끊기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한 번 길게 숨을 쉬고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펜을 주시죠.""현명하구나."세아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한진정밀 로고가 새겨진, 1화의 그 펜이었다. 강태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서명란 앞에서 펜촉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 서류의 증인 서명, 아버지가 직접 쓰신 건 맞죠.""내가 지켜봤다.""그럼 됐어요."세아가 웃었다. 1화에서 도헌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가면이 아니라 칼날 같은 웃음이었다."아버지는 왼손잡이세요."강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사고 이후 오른손에 힘이 안 들어와서 글씨가 달라지셨다고 하셨죠. 이 서명은 편지와 같은 오른손 필체고, 필압이 너무 정확해요. 쓰러진 3년 동안 근력이 빠진 손으로는 불가능한 선이에요."“…….”"그리고 편지 필체는 3개월 전 것이었어요. 모서리가 기운 글씨, 그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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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21화. 서준이라는 이름으로

    새벽 3시, 병원 7층 705호.문을 열기 전 세아는 도헌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3년 동안 가슴에 묻어 둔 장면 앞에 선 사람의 손이었다."같이 들어가요."“……내가 먼저 들어가야 해.”"그럼 제가 뒤에서 손 잡고 있을게요."도헌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었다. 침대 위에서 한도식 회장이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야윈 얼굴에 눈빛만은 3년 전 회장실의 그 눈이었다. 곁에는 이은서가 앉아 그의 손을 쥐고 있었다.도헌은 문턱에서 멈췄다. 세아의 손을 놓고 침대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회장님. 3년 전 그날 저는.""자네가 안 도망쳤다면."한 회장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낮고 갈라졌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내 딸은 지금 여기 없었을 걸세."도헌이 고개를 들었다."쓰러지는 순간에도 나는 의식이 있었네. 눈은 못 떠도 귀는 열려 있었지. 자네가 38초 만에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강태성의 사람이 와서 서류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도 들었고."“…….”"자네가 서류를 들고 나간 건 도망이 아니었어. 그 서류가 홍기범 손에 넘어가면 세아가 먼저 다쳤을 거야. 자네는 그걸 몸으로 막은 거고, 나는 그걸 알았네."도헌의 어깨가 무너졌다. 세아는 문가에서 숨을 죽였다. 그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보았다. 한 회장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얹었다. 3년 전 풀려 버렸던 그 손이 이번에는 단단히 쥐었다."제77조는 어떻게 된 겁니까.""자네가 초안을 쓰고, 내가 병상에서 한 줄을 보탰지. 마지막 문장.""제4항이요?""아니. 제2항."세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다만 파기하지 않는다면, 갑은 을에게 평생의 갱신을 청구한다."도헌이가 이 조항을 쓴 날 내게 물었지. 이 아이를 평생 묶어 둬도 되겠느냐고. 나는 이렇게 답했네. 묶는 게 아니라 청구하는 거라면 허락하겠다고. 선택은 세아가 하는 거니까."이은서가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이 사람, 입은 거칠어도 딸 일에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20화. 제3항, 마지막 비밀

    "제3항, 읽어 봤어?"새벽 1시 20분. 도헌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아의 손에는 푸른 글씨가 아직 남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당신이 종이를 집었을 때부터.""그럼 문자도 봤겠네요.""봤어."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시트가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달빛이 어깨와 가슴의 선을 따라 얕게 흘렀다. 세아의 시선이 잠깐 거기 머물렀다가, 이내 단단하게 그의 눈으로 돌아왔다.“3년 전 병실에 처음 들어간 사람. 그게 당신이죠.”"맞아."“8화에서 말했잖아요. 그날 병원에 있던 사람이 당신이었다고. 거기서 말을 끊었고요.”"끊은 게 아니라 못 했어."도헌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목소리가 낮고 갈라졌다."아버지가 쓰러진 날 밤, 나는 한진정밀 회장실에 있었어. 인수 서류를 들고. 당신 아버지가 서명하기 직전에 나를 불러서 말씀하셨어. 오래 해 온 일을 넘기는 게 무섭다고. 그리고 내 손을 잡으셨지. 그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내가 가장 먼저 느꼈어."세아의 숨이 얕아졌다."구급차는요.""내가 불렀어. 11분이 아니라 38초 만에. 그런데 기록에는 11분 뒤로 남아 있어. 홍기범이 내 호출 기록을 지웠거든. 그리고 나는."그가 말을 삼켰다.“……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 아버지가 시킨 대로 서류를 들고 먼저 나왔어. 쓰러진 사람을 두고. 3년 동안 잠을 못 잔 이유야. 눈을 감으면 그 손이 풀리는 감각이 돌아와서.”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고 그의 앞에 앉았다. 손을 뻗어 그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그 얘기를 77일째에 하려고 했어요?""아니. 평생 안 하려고 했어."“…….”"그런데 당신이 계약서를 열었으니까.""당신, 진짜."세아가 이를 악물다가 숨이 새는 웃음을 흘렸다. 눈가가 젖었다.“3년 동안 그걸 혼자 안고, 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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