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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성은 그대로 윤씨입니다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5 07:54:09

“여기, 본인 이름 쓰시면 됩니다.”

창구 직원의 말에 채이는 펜을 고쳐 잡았다.

본인 이름. 그 쉬운 일 때문에 지난 며칠이 이렇게 복잡해졌다. 윤세리로 호텔에 들어갔다가, 윤채이로 혼인신고서를 쓰게 됐으니까.

가방 안에는 오늘 아침 최종 확인을 마치고 각자 서명한 계약 원본이 들어 있었다. 수현이 고친 문장도 빠짐없이 반영돼 있었다.

옆에 선 도진은 서류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끝을 잡고 있었다. 검은색 펜으로 적힌 그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이 같은 종이 안에 놓였다. 채이는 빈칸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확실합니까?”

도진이 낮게 물었다. 채이는 펜을 내려놓았다.

“네. 대표님은요?”

“확실합니다.”

“그럼 이제 자꾸 물어보시면 제가 불안해져요.”

그가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접수가 끝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페 음료가 나오는 시간보다 조금 더 걸렸을 뿐이었다.

정숙에게는 전날 저녁에 직접 말했다. 서로 필요한 것이 있는 결혼이고, 좋은 조건만큼 자신이 해야 할 역할도 있다고. 어머니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물어본 것은 집의 크기나 돈의 액수가 아니었다.

너 싫다는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니.

채이는 지금까지는 그랬다고 답했다. 아직 모르는 부분까지 좋다고 꾸미지 않았다. 정숙은 신랑을 만나겠다며 딸의 손을 잡았다. 채이는 도진과 일정을 상의해 날짜를 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청 문을 나서자 삼월 끝의 바람이 불었다. 채이는 코트 앞섶을 여몄다. 법적인 가족이 생겼지만 햇빛도 보도블록도 그대로였다.

“사진은 안 찍습니까?”

도진이 물었다.

“증빙 사진이요?”

“기념 사진입니다.”

채이는 잠깐 망설이다 휴대폰을 들었다. 팔을 뻗자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 어색하게 화면 안에 들어왔다. 도진은 채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되 닿지는 않았다.

“대표님, 웃으셔도 돼요. 실적 발표 아니에요.”

“윤 대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표정을 보고 웃는 순간 사진이 찍혔다. 채이는 확인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 다시 보려면 혼자 있을 때 보고 싶었다.

***

오정환 비서실장은 두 사람을 보고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혼인신고 접수 확인했습니다. 오후 일정은 조정해두었습니다.”

“제 반차는 팀에 신청해뒀어요.”

채이가 급히 말하자 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 대리님 일정이 아니라 대표님 일정 말씀입니다.”

민망해서 물컵을 들었더니 비어 있었다. 정환이 말없이 물을 따라주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실수가 더 선명하게 남을 것 같았다.

문지현 준법지원팀장은 두 사람의 관계와 업무상 조치를 차례로 확인했다. 배우자 역할의 대가가 있다는 사실은 필요한 범위에서 확인했지만, 개인 문서 원본을 회사 인사 파일에 넣지는 않았다.

“회사에 신고할 것은 혼인 관계와 이해충돌 관리입니다. 개인 보수는 회사 비용과 섞이지 않게 해주세요.”

“제 개인 자금으로 처리합니다.”

도진의 답에 지현은 체크했다.

“윤 대리님 평가는 기존 업무 기록과 팀 평가를 기준으로 별도 책임자가 확인합니다. 대표님이 특별한 혜택을 지시하셔도 그대로 집행하지 않겠습니다.”

“특별한 불이익도요.”

채이가 덧붙였다. 지현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혹시 개인적인 요구가 업무 지시처럼 느껴지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채이는 받아든 명함을 수첩 첫 장에 끼웠다. 도진이 옆에 있는데도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들었다.

면담을 마친 도진이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잠시 뒤 채이의 휴대폰에 약정대로 입금 알림이 떴다. 120,000,000원.

채이는 화면을 끄지 못했다. 숫자 사이의 쉼표를 세 번 확인했다. 도진은 그녀가 휴대폰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은행에서 전화 오면 어떡하죠?”

“입금 사유를 설명하면 됩니다.”

“결혼했다고요?”

“약정 보수라고요.”

채이는 입술을 꾹 눌렀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웃음이 났다. 어머니의 다음 치료비를 마련할 때 통장 세 개를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됐다. 그 사실이 천천히 현실이 되었다.

정환이 일정표 한 장을 내밀었다.

“회장님께는 오늘 대표님이 직접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도진이 채이를 보았다.

“맞선에 다른 이름으로 왔다는 사실까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이름 정확히요.”

“윤채이 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반듯했다.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 네 시, 마케팅1팀 휴게 공간에서 가장 먼저 소리를 낸 사람은 정유나였다.

“뭐? 네가?”

민재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놓칠 뻔했다. 현수 과장은 커피가 입에 든 채로 채이를 봤다. 채이는 준비한 말을 끝까지 했다.

“오늘 혼인신고했어요. 식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려고요.”

“잠깐만. 너 연애한다고 한 적도 없잖아.”

“말할 타이밍을 좀 놓쳤어.”

남편의 신원은 말하지 않되 거짓 연애사를 만들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짧게 답했더니 유나의 눈이 더 커졌다. 은정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축하해. 급하게 결정하느라 챙길 것도 많았겠네.”

“감사합니다.”

“업무 일정에 조정할 거 있으면 미리 말하고. 신혼여행은?”

“당장은 없어요.”

“알았어. 내일 설치 안내 초안 검토는 그대로 할까?”

“네. 수정본 올려뒀습니다.”

팀장이 웃었다.

“그럼 일 얘기 끝. 이제 유나 씨 질문 받아줘.”

유나가 기다렸다는 듯 의자를 당겼다.

“뭐 하는 분인데? 잘생겼어?”

“일하고…… 반듯하게 생겼어.”

“직업이 일하는 사람이야?”

민재가 참던 웃음을 터뜨렸다. 채이도 웃었다. 자신의 평소 자리가 아직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였다.

“배우자는 개인 얘기 공개하는 걸 조심스러워해. 내가 준비되면 더 얘기할게.”

“그래. 사진 강요는 안 할게. 대신 밥은 사.”

“그건 살게.”

현수가 축하한다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민재는 편의점에서 사둔 작은 초콜릿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리본도 없는 축하 선물이었지만 채이는 가방 바깥 주머니에 따로 챙겼다.

자리로 돌아오자 팀 공유 폴더에 알림이 떴다. 결혼 전에 올린 설치 안내 초안에 유나의 문구 수정과 현수의 운영 확인 의견이 달려 있었다. 채이는 새 버전으로 덮어쓰지 않고 검토본을 따로 저장했다. 누가 무엇을 고쳤는지 다음 회의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게.

그 옆에 도진에게서 온 문자가 떴다. 회장님께 실제 신원 전달했습니다. 첫 인사 가능 시간 확인 부탁합니다.

채이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방금 혼인신고한 남편에게 보내는 첫 업무 외 연락이었다.

내일 저녁 가능합니다. 그리고 출근은 따로 할게요. 도진의 답은 금방 왔다.

아직 같이 산다는 일정도 정하지 않았는데 벌써 차부터 나눕니까? 채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미리 말씀드려야 일정 조정하시죠.

다음 날 아침, 첫 인사 때 가져갈 선물을 확인하느라 잠깐 만나고 나서 두 사람은 주차장 갈림길에 섰다. 도진이 회사 쪽으로 향하는 차 문을 열어주자 채이는 정류장 방향을 가리켰다.

“정말 버스로 갑니까?”

“네. 여기서 한 번에 가요.”

“출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데.”

“설명할 시간을 절약하려고요.”

그 말에 도진이 문을 다시 닫았다. 억지로 설득하지 않는 모습이 고마웠다. 채이는 가방 끈을 올리고 두 걸음 걷다가 돌아섰다.

“회사에서 뵐게요, 대표님.”

“네. 윤 대리.”

익숙한 호칭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입가에 남은 웃음 때문에, 버스가 올 때까지 채이는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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