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먹고 소희는 출근하는 길에 청아를 먼저 장씨 그룹으로 데려다 주었다.가는 길에 청아가 소희를 한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어 물었다.“어젯밤에 언제 돌아왔어?”“11시 다 되어서.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좀 늦게 끝났거든.”어제 저녁 그 모습으로 청아 앞에 나타났다간 청아가 걱정할 게 분명했기에, 소희는 청아 집으로 들르지 않고 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었다.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왔는데 밥도 못 먹고 잠들었을 소희가 마음에 걸렸는지 청아는 자책하는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나 어제 분명 야식까지 만들어 놨는데, 너무 졸려서 먼저 잠들어 버렸어.”“앞으로 내가 늦게 돌아오게 되면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응, 알았어.”소희의 당부에 청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폰의 뉴스를 뒤져보기 시작했다.오늘의 실검 뉴스는 ‘케이슬 흉기 난동 사건’으로 어제 밤 케이슬 대문 앞에서 마음씨 착한 한 여인이 여러 명에게 납치당한 무고한 사람을 구했다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사진도 한 장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은 길가던 모 행인이 급히 휴대폰으로 찍은 것인지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고, 또 일이 터진 게 마침 어두워진 후의 저녁때라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의 태도는 여느 때보다 더 들끓어 있었다. 그리고 어제 그 현장에 있었다는 한 네티즌의 진술에 의하면 착한 여 시민은 싸움 실력은 한발로 사람을 걷어차 날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심지어 7~8명에 달하는 강도들이 분명 다 손에 칼을 들고 있었지만 결국 착한 여 시민한테 죽도록 얻어맞아 콧물을 질질 짜며 도망쳤다고.그래서 지금 댓글은 전부 사진 속 착한 여 시민에 대한 칭찬으로 자자했고, 착한 여 시민의 사진을 찾는 네티즌들도 엄청 많았다.뉴스 속 사진을 한창 들여다보던 청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희에게 물었다.“너 어제 어디에 있었어?”“케이슬.”“그럼 이거 봤어?”청아가 뉴스
청아는 침을 한번 삼키고 고개를 숙여 장시원이 풍기고 있는 압박감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들었어요. 저 오늘 저녁에 일이 있어 안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그럼 내일은요? 내일은 쉬는 날이죠?]“내일에도 일이 있어요.”청아가 자신을 거절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하온은 멋쩍게 한번 웃고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그럼 청아 씨 이제 시간이 될 때 만나요.]“하 선생님, 저 하 선생님에게 적합한 짝이 아니에요, 연애할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 저한테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하온의 포기할 줄 모르는 태도에 청아가 눈썹을 한번 찌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했다.이에 하온이 잠시 멍해져 있다가 한참 후에야 다시 웃으며 말했다.[너무 일찍 그렇게 단정 짓지 마요. 만약 어느 날 청아 씨가 갑자기 연애하고 싶어지고, 마침 내가 또 청아 씨를 쫓고 있으면, 그건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아닌가요?]정수리를 찌르고 있는 장시원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챈 청아는 난감한 표정을 드러내며 다시 하온을 거절하려는데 휴대폰 맞은편의 하온이 청아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어서 출근해요, 다른 건 이제 만나서 다시 얘기하고. 끊을 게요.]그렇게 청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하온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고, 꺼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청아는 순간 마음속이 착잡해졌다.그런데 이때, 장시원이 갑자기 손을 내밀어 청아의 턱을 잡았다.조금전까지만 해도 농락의 뜻이 섞여 있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얼음판 마냥 차가워져 있었다.“전에 그렇게 그 사람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더니, 지금 뭐하는 거지?”허홍연이 퇴원하던 날 장시원은 이미 둘 사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눈치챘었다.‘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그쪽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상관이 없다?”청아의 고집스러운 눈빛에 장시원은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 마냥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차갑게 청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여
이 감독의 표정에 소희는 죄책감이 들어 바삐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감독님. 이현 씨의 일도 그렇고, 마민영 씨의 일도 그렇고, 전부 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네요.”“아니야, 소희 씨. 그런 말 하지 마. 나 오히려 소희 씨한테 감사해야 해.”소희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던 이 감독은 오히려 웃으며 소희를 위로했다.“소희 씨 어제 제때에 나타나 민영 씨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민영 씨는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운이 좋으면 그동안 우리의 노력은 헛수고로 되고, 나는 다시 여주인공을 뽑아야 할 거고, 재수 없으면 이번 작품 그대로 중단해야 했을 거야.”“마민영 씨 아무 일도 없어요, 요 이틀 사이에 다시 돌아와 촬영을 계속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감독님께서는 될수록 일이 더 커지지 않게 바깥의 기자들과 잘 말해서 돌려보내세요.”“그래, 더 이상 말썽을 일으켜서는 안 돼.”젊은 나이에 맞지 않게 남들이 쉽게 생각지 못하는 점들까지 단번에 콕 집어 내는 소희의 능력에 이 감독이 탄복하는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마민영 씨가 성질도 더럽고 눈에 뵈는 것도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소희 씨 그동안 많이 수고했어.”“아닙니다. 소동 씨가 온 후로 저 마민영 씨랑 별로 만나지도 못했는 걸요.”“소동 씨는…….”소동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 감독이 갑자기 착잡한 표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업무에 대해 소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소희를 돌려보냈다.그렇게 이 감독의 사무실에서 나와 소희가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고 있는데 조수 미나가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와서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소희 씨! 마, 마민영이 왔어요!”“마민영 씨가 왔다고?”소희가 듣더니 살짝 놀라서 물었다.매일 밥 먹듯이 지각하던 마민영이 그렇게 큰 일을 겪은 후 오히려 아침 일찍 출근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소희는 바로 또 놀란 표정을 거두고 담담하게 물었다.“마민영 씨가 출근한 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
솔직히 소희는 이렇게 갑자기 돌변하여 애교까지 부리는 마민영보다는 예전의 그 가탈스럽고 성질이 더러운 마민영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섬뜩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으니까.‘정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여인이야.’“소희야, 내가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할까?”마민영은 전혀 소희를 놓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애교를 부리며 물었다.이에 소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기, 마민영 씨, 이 손부터 먼저 놔줄래요?"마민영은 그제야 쑥스럽게 웃으며 소희를 놔주었다. 그러고는 진심이 담긴 두 눈으로 초롱초롱하게 소희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말해봐, 소희야. 돈? 아니면 집? 네가 말하기만 하면 내가 다 들어줄게.”“아니요,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어제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어도 난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구했을 거니까 이러지 않아도 돼요.”소희의 덤덤한 대답에는 사양의 뜻이 묻어 있었지만 마민영의 눈빛이 거절당한 사람 치고는 엄청 밝았다.“너에게 있어서는 다 똑같겠지만, 나한테 있어서는 나를 구한 사람이 바로 너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정말 큰일이 났을 거야.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던 스태프들은 마민영과 소희의 대화에 낮은 소리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논 소리를 들은 소희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마민영을 향해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그래!”마민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소희만 보면 물고 늘어지려 했던 그녀의 눈에는 지금 온통 소희뿐이었다. 심지어 소희의 한마디에 바로 고분고분 뒤를 따라 소희의 사무실로 들어가기까지 하고.그렇게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간 후,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스태프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마민영이 또 소희를 괴롭히려고 아침 일찍 달려와 이정남과 싸운 줄 알았는데, 소희가 오자마자 소희를 껴안고 감사의 인사를 표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소동도 포함되어
소희가 갑자기 농담이 섞인 말투로 덤덤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사람 찾아 날 혼낼 거예요?”소희의 실력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을 보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니 마민영은 당연히 그렇게 할 리가 없었다.그래서 고개를 한번 젓고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찾은 사람들은 너와 비하면 잽도 안 돼.”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민영의 조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민영 씨, 이 감독님께서 민영 씨가 출근한 걸 알고 오늘부터 촬영 시작할 수 있는지 묻는데요?”“내가 지금 소희와 이야기 나누고 있는 거 안 보여? 가서 이 감독한테 말해, 내가 지금 몸에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까 이틀 동안은 푹 쉬어야 한다고.”마민영의 화가 잔뜩 묻은 어투에 겁을 먹은 조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소희가 덤덤하게 마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많이 불편한 거 아니시면 이 감독님의 요구에 협조해 줘요, 그래야만 우리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거든요.”“그래, 네 말 대로 할 게!”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짢아하고 있던 마민영이 소희의 말에 바로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러는 마민영의 모습을 처음 보는 조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이에 마민영이 또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조수를 무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소희가 한 말 못 들었어? 이 감독에게 어서 알리러 가지 않고 거기에 서서 뭐하는 거야?”“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조수가 놀라 바삐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그러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뒤에 있던 마민영이 다시 조수를 불렀다.“잠깐! 나 할 말이 있으니까 가서 다른 조수들을 전부 불러와.”“네!”조수가 바삐 밖으로 나가 마민영의 기타 조수와 소동을 전부 방으로 불러들였다.그리고 마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네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다
“무슨 요구? 얼마든지 말해!”“이번 작품의 진도가 이미 충분히 지체되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이 감독님과 다른 스태프들이 매일 하염없이 민영 씨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앞으로 조금만 더 일찍 출근해주시면 안 될까요?”그녀 자신만을 위한 요구가 아니라 전체 제작진을 위한 요구이다.그리고 분명 매일 출근하는 걸 제일 거부했던 마민영이었는데, 소희의 말에 의외로 통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것도 요구라고 제기한 거야? 그래, 내일부터는 매일 일찍 올게.”그러면서 마민영이 또 고개를 돌려 조수에게 분부했다.“내일부터 아침 6시로 알람을 맞춰 둬, 7시에 바로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게.”“그렇게 일찍 도착할 필요는 없고요, 8시에 도착해도 충분해요.”“그래! 네 말대로 할 게!”소희가 뭘 말하든 마민영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이상하게 돌변한 마민영을 감당할 수가 없는 소희는 바로 손을 흔들었다.“어서 가봐요, 이 감독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오키!”여전히 고분고분한 태도.마민영은 바로 조수들을 데리고 소희의 사무실을 떠났다.하지만 맨 뒤에 있던 소동은 일부러 마민영이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려 소희를 아래위로 훑으며 냉소했다.“언니는 참 재주도 좋아.”“더 이상 날 언니라고 부르지 마, 우리 사이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너 자신도 잘 알고 있잖아. 어서 일하러나 가봐, 또 마민영 씨한테 욕 먹지 말고,”“너!”소희의 차갑고 인정사정없는 대답에 소동의 얼굴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소동은 바로 또 웃음을 드러냈다.“비웃고 싶으면 실컷 비웃어 봐. 어차피 난 이 직무를 잃고 작업실의 문을 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돌아가 아빠와 엄마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엄마가 지금 너를 엄청 증오하고 있어 한 푼도 너에게 남겨주지 않을 거야.”먹은 나이에 맞지 않게 철이 들기는커녕 여전히 유치하기만 한 소동에 대해 소희는 더 이상 줄 인내심도 없었다.그래서 한숨을 깊게
점심 시간이 되어 마민영의 조수가 점심을 주문하려고 앱을 뒤지는데 마민영이 갑자기 조수를 향해 말했다.“소희에게도 연락해 물어봐, 점심 먹을 건지.”그러다 곧 또 무엇이 생각났는지 마민영이 바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아니다. 내가 물어볼게.”그리고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마민영이 애교를 부리며 입을 열었다.“우리 소희.”휴대폰 맞은편의 소희는 순간 소름이 돋아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러지 마세요, 마민영 씨.]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또 심한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차갑게 경고하고 있는 소희의 표정이 상상되었는지 마민영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다정하게 물었다.“소희야, 나 지금 라이트 푸드 주문할 건데, 너도 먹을래?”[라이트 푸드가 뭐죠?]“그냥 뭐 과일이나 채소 샐러드, 통밀, 그리고 고기 같은 것들을 조합하여 파는 도시락인데 기름과 소금이 거의 안 되어 있어. 맛은 별로 없지만 다이어트도 되고 건강에도 좋아!”자신이 매일 먹고 있는 음식들을 소희에게도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민영은 흥분에 겨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하지만 마민영의 그런 마음을 알 리가 없었던 소희는 바로 눈썹을 찌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그거, 정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 맞아요?]“…….”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라이트 푸드만 견지해왔던 마민영은 순간 삶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전 그런 걸 안 먹습니다.]정말 그런 음식이 싫었는지 소희는 마민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바로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마민영도 순간 울컥하여 조수를 향해 말했다.“나도 안 먹어!”같은 시각, 소희는 이정남과 함께 도시락 받으러 갔고, 도시락을 나눠주는 직원이 여전히 소희에게 따로 준비한 도시락을 건네주었다.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희는 바로 도시락 뚜겅을 열었고, 기대찬 눈빛으로 입맛을 미리 다시고 있던 이정남이 오늘의 반찬을 본 순간 경악한 표정
소동은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고는 무엇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지 다시 마민영을 향해 물었다.“민영 씨, 민영 씨와 소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네가 알 바가 아니잖아. 아무튼 기억해 둬, 앞으로 네가 또 소희를 괴롭혔다간, 그건 나를 괴롭히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마민영의 경고를 소동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엄청 힘들게 찾은 아군이었으니. 그래서 소동이 또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소동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들어와!”마민영의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온 소희는 매서운 눈빛으로 소동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보아하니 내가 한 말은 전혀 믿지 않은 것 같네?”소동은 순간 아침에 소희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눈빛에 섞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소동은 바로 시선을 아래로 드리운 채 마민영을 향해 말했다.“그럼 저 먼저 일하러 가볼게요. 일이 있으면 저를 호출하세요.”하지만 마민영은 소동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소희를 향해 웃음을 드러내며 물었다."소희야, 날 찾았어?”이에 소동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돌려 휴게실을 나갔고, 소희는 그제야 손에 든 메이크업 함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이거 돌려주려고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저 진짜 이런 거 필요 없어요.”상 위에 놓인 메이크업 함을 보며 마민영이 눈알을 한번 굴렸다. 그러고는 떠보듯이 조심스레 소희를 향해 물었다.“아까 나와 소동이 한 말들, 다 들었어? 예전에는 소동이 계속 옆에서 나를 부추겨서, 그래서 너를 그렇게 괴롭혔던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야. 그러니 이 립스틱들은 그냥 받아줘. 이 몇 개의 립스틱으로 네 은혜에 보답하려는 거 아니야, 단지 너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은 거니까.”“민영 씨가 정말로 나랑 친구하고 싶은 거라면 앞으로의 시간이 더 긴데, 지금 이렇게 급하게 선물을 줄 필요가 없잖아요.”마민영의 진심을 모를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