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배정우의 진심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살벌하더니 지금은 또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척 신사처럼 굴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임슬기는 더 이상 의미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가끔은 배정우가 이중인격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너무나도 다른 두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혹시 과거에 무슨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게 아닐까? 그래서 성격이 이렇게 된 건 아닐까?하지만 그녀는 배정
임종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실 소파로 내려와 앉았다.“좋아요. 딱 10분 줄게요.”10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임슬기의 얼굴엔 기쁨이 번졌다. 그녀는 웃으며 조심스레 임종현 옆에 앉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를 잡자마자 임종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요.”임슬기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 동생은 어쩜 이렇게 자랐을까. 말투며 행동까지 하나같이 배정우를 닮아 있어서 괜히 움츠러들 정도였다.“종현아, 누나는 정우 형한테 정말 잘못한 게 없어. 임씨 가문이 무너진
감정이 너무 격해졌던 탓일까. 임슬기의 폐가 갑자기 조이듯 당기더니 목구멍으로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놀란 그녀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간신히 기침을 참았다. 터져 나오려던 피는 꾹 삼켜냈다.그 모습을 본 임종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왜 그래요?”임종현은 어제 묘지에서도 그녀가 피를 토하는 걸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임슬기는 대충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입을 가린 채 말했다.“괜찮아. 그냥 기침이 좀 나서.”“어제 피 토하는 거 다 봤어요.”그 말에 그녀의 어깨
“그래.”배정우는 자연스럽게 임슬기 맞은편에 앉으며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나도 한 그릇 끓여줘.”임슬기는 순간 멍해졌다. 예상 밖의 부드러운 반응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몰랐다. 다만...그녀는 라면을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레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괜찮다면 이거 먹어. 나 아직 안 건드렸어.”“응, 괜찮아.”배정우는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천천히 씹어 삼킨 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여전한 맛이네. 진짜 맛있어.”그 말
“그럼 아니야?”임슬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내가 혼수상태일 때 연다인을 몰래 도시 밖으로 빼돌려서 숨겼잖아. 내가 복수할까 봐, 그 여자 죽일까 봐 무서웠던 거 아냐?”배정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난 그런 짓 안 했어.”“안 했다고? 하, 누가 그 말을 믿겠어.”임슬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직접 말했잖아. 연다인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배정우가 한 짓이었다. 연다인을 저
두 사람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정신을 먼저 차린 건 임슬기였다. 그녀는 김현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현정아, 너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이런 힘쓰는 짓 하면 어떡해?”“슬기 언니, 나 진짜 괜찮아요.”김현정의 말투는 금세 부드러워졌다.“근데 언니는 괜찮아요? 그 자식이 또 무슨 짓 한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자세한 건 안에서 이야기하자. 우선 네 손 좀 보자.”“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좀 탈골됐던 거 의사 선생님이 맞춰줬어요. 봐봐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약 한 시간쯤 지나자 한 배달 기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별장 대문 앞에 멈춰 섰다.배정우는 차 안에서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린 기사가 배달 상자에서 장바구니 두 개를 꺼내 철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바라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배달 기사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배정우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임슬기가 제대로 한 상 차릴 생각인 것 같았다.그때 휴대폰 너머에서 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자료 보내드렸습니다. 내일 지방에 회의 있는 거 잊지 마세요.”“응.”
“왜 네가 여기 있어?”임슬기는 잠시 멍해졌고 당황한 나머지 그를 밀치며 소리쳤다.“이거 놔.”배정우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놓아주고 조리대 앞으로 걸어갔다.“뭐 도와줄 거 있어?”그 말이 끝나자 그는 상의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으로 장바구니를 열어 채소를 고르기 시작했다.“새우 내가 씻을게. 다른 것도 씻을 거 있어?”그 모습에 임슬기는 말문이 막혔다.이런 배정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딱 2년 전 두 사람이 함께했던 평온했던 어느 날의 장면이 떠올랐다.그때 그들은 종종 함께 요리를 했고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