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15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들어갈 때, 마트에 좀 들리자."하윤이 다 비워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의 얼음을 빨대로 달그락거리며 건우의 손을 쓰다듬었다.
"뭐 살 거 있어?“
“생수랑 음료 같은 건 쿠팡으로 다 시켜놨는데,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식재료 같은 거, 직접 보고 사놓게. 마트 갔다가 집에 가서 정리 하고 헤어지면 딱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래, 그럼."
건우가 하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기분 좋게 대답했다.
오늘 하루, 건우의 모습 어디에서도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그 피도 눈물도 없는 '개차반 차건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이하윤의 얼굴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무장 해제되는 놈인데, 오늘따라 하윤이 작정하고 말아주는 '질투에 눈먼 여친', '나긋나긋하게 챙겨주는 애교 여친', '살뜰하게 내조하는 현모양처 여친' 등의 종합 선물 세트 컨셉은, 짐승 같은 그의 심장을 한없이 요동치게 만들었다.
긴 시간, 매번 볼 때마다 질리기는커녕 이렇게 자신의 심장을 꽉 쥐고 흔드는 여자는 평생 이 여자 하나밖에 없을 거라는 차건우만의 지독한 확신.
대형 마트에 도착한 두 사람은 널찍한 카트를 끌며 평화로운 주말 마트 쇼핑 삼매경에 빠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윤이 진열대를 샅샅이 뒤지며 쇼핑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건우는 그저 그녀의 뒤에서 묵묵히 카트를 끌어주며 커다란 대형견처럼 졸졸 따라다닐 뿐이었다.
"뭐야? 가격이 올랐네. 음... 근데 또 이 향은 좀 싸네? 하... 아니다. 그냥 쓰던 거 쓰자."
미리 핸드폰 메모장에 빼곡하게 기록해 둔 쇼핑 리스트를 하나하나 체크하며, 성분표와 가격을 깐깐하게 비교하고 고르는 하윤. 건우는 제 집 살림을 본인보다 더 야무지게 챙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하고 묘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진짜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아찔한 착각.
"건우야. 너 그때 이거 먹어보고 별로라고 했지?"
하윤이 냉동식품 코너에서 너겟 봉지 하나를 집어 들고 그를 향해 홱 뒤돌아보며 물었다. 치킨 너겟은 건우가 입이 심심할 때 즐겨 찾는 간식 중 하나였다.
"어... 그랬나?"
건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긁적였다. 솔직히 그에겐 너겟이 다 똑같은 고기 튀김일 뿐, 맛의 차이 따윈 중요치 않았다. 그저 하윤이 입에 넣어주니 맛있게 먹는 것일 뿐.
"맞아. 튀김옷이 좀 두꺼워서 앞에 거 보다 별로라고 했어. 역시, 늘 먹던 걸로 사야 돼."
가끔 주말을 건우의 집에서 함께 보낼 때면, 하윤이 솜씨를 발휘해 이것저것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곤 했다. 손맛 좋은 제 엄마를 쏙 빼닮아 요리 솜씨가 제법 훌륭했던 하윤은, 건우의 까다로운 미각과 만족도를 극강으로 끌어올리는 완벽한 사육 스킬마저 장착한 여자였다.
어쩌다 보니 카트 한가득 채워진 짐들이 건우의 널찍한 SUV 트렁크에 한가득 실렸다.
"휴우~ 오늘 장 알차게 잘 봤다. 큭."
조수석에 앉아 기지개를 켜며, 오늘 하루의 데이트 일정이 꽤 만족스럽다는 듯 하윤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건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건우는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운전에 신경 쓰고 있었다. 운전대를 쥔 손의 굵은 핏대만 도드라져 보일 뿐이었다.
"왜?"
"어?"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묘하게 잠잠한 그였다.
"피곤해?"
"아니."
"거짓말. 엄청 피곤한 것 같은데? 너무 오랜만에 돌아다녀서 그런가?"
하윤은 괜히 혼자 신나서, 안 그래도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을 제 남자친구를 너무 무리하게 끌고 다닌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 종일 나한테 질질 끌려 다니느라 기 빨렸나 보네, 우리 건우.”
괜히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는 하윤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신호 대기에 걸린 차 안, 괜스레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있잖아..."
건우가 핸들에 얹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천천히, 그리고 아주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응."
"내년 1월에 변호사 시험치고... 시험 붙으면..."
"응."
"우리... 결혼할까?"
"..........어?!"
"음... 이제... 너랑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굴 보면서 같이 살고 싶어졌어.“
쿵-
하윤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순간, 숨도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실, 주변에서는 이미, 어차피 10년을 알고 6년을 연인으로 만났으면 사실혼 관계 아니냐, 그냥 피곤하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동거를 하든 살림을 합치라며 누누이 잔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윤과 마찬가지로 건우 역시 아무리 사랑해도 각자의 독립된 공간은 분명히 필요하다며 딱 잘라 말하던 남자였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나른하고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옭아매며 '같이 살자'고 말하다니.
"너무... 그건... 너무, 빠르지..."
당황한 하윤이 시선을 창밖으로 휙 피하며 더듬거렸다.
"뭐가 빨라. 어차피 나랑 결혼할 거 아냐? 아니, 씨발, 너 지금 나 따먹고 버릴 생각이야?“
“아, 아니! 아니... 너랑 하겠지, 결혼. 근데... 나는... 음... 서른 넘어서 할 거야.”
“하아, 씨발, 여기서 2년이나 더 기다리라고?”
당연히 두 손을 들고 환영할 줄 알았던 하윤의 거절에, 오늘 하루 종일 끈적하고 부드럽게 스윗했던 건우의 눈썹이 거칠게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서른 넘어서라고 했지, 딱 서른이라고는 안 했다?"
하윤이 약 올리듯 덧붙이자 그의 미간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하,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나 말려 죽일 작정이야? 말장난해 지금?"
하루 종일 솜사탕처럼 보송보송하고 달콤했던 건우의 기분이, 단박에 지하 암반수로 처박히듯 날카롭고 까칠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너도 나도... 자리는 잡아야지.”
“나 해오름 로펌에 이미 스카웃 다 끝난 상태잖아. 뭐가 문제야?”
맞는 말이었다. 작년의 실습을 통해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차건우는 이미 해오름 로펌에 입도선매가 된 상태였다.
"거기 들어갔다고 해서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는 없지. 그리고 나도! 나도 우리 회사에서 핵심 프로젝트도 맡고, 좀 멋지게 자리 잡아야지!"
하윤은 건우의 집요한 시선을 회피하며 애써 입술을 비죽였다. 하지만...
'결혼? 내가 미쳤냐?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우리 에테르 오빠들부터 은퇴시켜, 미친놈아.'
결혼? 당연히 좋다. 10년을 만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저 잘나고 섹시한 차건우랑 한 침대에서 살 맞대고 뒹굴며 사는 거? 상상만 해도 코피 터지게 좋다, 이거야.
근데. 그러면 소중한 덕질은? 눈물겨운 덕질 인생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는 건데?
밥 먹으면서 시우 직캠 보고, X에서 화력 지원하면서 다른 루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는 그 권력 같은 시간들. 퍼스널 굿즈를 제작하고, 매 콘서트 때마다 우치와랑 네임 보드를 제작하는 그 극락 같은 그 기쁨을, 도대체 어떻게 하루아침에 포기를 한단 말인가!
차건우 저 지독한 집착광공 새끼랑 한집에 살게 되면, 숨겨둔 포카 한 장, 앨범 한 장 구경도 못 하고 평생 오빠들과는 강제 이별일 텐데... 절대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하... 씨발... 애를 만들든가 해야지, 원.“
하윤의 단호한 철벽에, 건우가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 생기면... 너를 향한 내 사랑은 딱 절반이 되겠네?”
하윤이 여우처럼 건우를 스윽 흘겨보며 정곡을 찔렀다.
"아이, 씨발! 하, 짜증 나. 하, 나 미치겠네, 진짜!"
예전부터 건우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리 둘 사이의 아이는 최대한 늦게, 천천히 갖고 싶다고.
차건우가 평소 아이를 싫어하는 성격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 '애가 태어나면, 니가 나한테만 쏟던 사랑과 관심이 옮겨 갈 거 아냐? 난 나보다 그 애새끼를 더 챙기는 꼴은 절대 못 봐.' ]
미래의 제 핏줄한테마저 지독한 질투를 느끼는, 구제 불능의 소유욕 덩어리.
이렇게 하윤은 차건우라는 남자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그를 너무나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고, 이 흉포한 맹수를 제 입맛대로 휘두르는 조련법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상태였다.
건우의 주상복합 아파트. 마트에서 사 온 짐들을 냉장고와 팬트리에 완벽하게 정리한 후, 하윤은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슬슬 막차가 끊기기 전에 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자고 가는 거 아냐?"
건우가 현관으로 향하는 하윤의 손목을 낚아채며 나직하게 말했다. 주말이었고 당연한 수순이었다. 매정하게 자신의 집을 나서려는 하윤의 모습에 살짝 날이 선 목소리였다.
"괜찮겠어?"
하윤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한 척 되물었다.
"뭐가?“
건우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어차피 내가 자고 가도, 우리 아무것도 못할 텐데... 니 그 아랫도리가 괜찮겠냐구? 밤새워 고문 당할텐데?“
하윤이 농염한 눈웃음을 흘리며 턱짓으로 건우의 묵직한 하체를 툭 가리켰다. 순간, 건우의 이마가 험악하게 확 찌푸려졌다.
"하아, 씨발, 진짜!“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가 그날이라는 것을.
하윤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애가 타서 안달복달할 때, 진짜 귀여워 뒤질 것 같았다.
"지금, 씨... 하, 존나 박아대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하겠는데... 씨발... 하... 진짜 좆같네..."
건우가 끓어오르는 욕정에 눈자위가 붉어진 채 혼자 억눌린 짐승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터질 듯한 성욕에 숨을 헐떡이는 그 야성적인 꼴에, 하윤의 아랫배마저 찌릿하게 달아올랐다.
하윤은 건우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두 손으로 그의 뜨거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제 붉은 입술을 꾹 다문 그의 입술 위로 진득하게 포갰다.
쪽-
짧았지만 농염하고 야릇한 버드 키스.
순간, 꾹꾹 억눌려 있던 건우의 눈이 맹수처럼 부릅떠졌다. 그는 살짝 고개를 틀더니, 멀어지려는 하윤의 뒷목을 커다란 손으로 부서져라 옭아매고 그녀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거칠게 다시 덮쳐 누르며 집어삼켰다.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열린 입술 틈으로 건우의 뜨겁고 축축한 혀가 난폭하게 밀고 들어왔다. 짐승처럼 진하고 질척한 딥키스가 시작되었다.
“읍... 거... 건우... 야...”
오늘은 그녀를 발가벗기고 다리를 벌려 피 터지게 섹스를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 여자의 숨결과 입술이라도 뼈째로 씹어 삼켜버리겠다는 듯, 그는 집요하고 맹렬하게 그녀의 점막과 혀를 옭아매고 탐했다.
조용한 거실 안에 질척하고 야릇한 마찰음이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의 끈적한 타액이 뜨겁게 엉겨 붙었다. 하윤의 달뜬 신음 소리와 함께 건우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시스루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와 그녀의 가슴과 허리를 미친 듯이 더듬어댔다.
“하아... 하아...”
츕, 쪽- 하는 끈적한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타액이 은빛 실처럼 길게 늘어지다 끊어졌다.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게 가빠져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하아… 하, 씨발, 진짜 더는 못 참겠어. 이대로 있다간 생리고 뭐고 쑤셔 박을 것 같아. 좆이 터져서 뒤질 것 같다고.“
건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하윤을 내려다보았다. 한계치에 다다른 수컷의 얼굴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섹시했다. 오늘 밤 더 같이 있다가는 그의 고통이 더 심화될 것을 알기에, 하윤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살짝 요망하게 웃어 보였다.
"응. 나 진짜 갈게. 혼자 잘 식혀봐.“
“아이씨, 진짜...”
자신의 말에 투덜거리는 건우를 보며 하윤은 만족스러운 듯 달콤하게 웃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그를 향해 고백했다.
"사랑해, 건우야."
#43 백스테이지의 환희“와, 시야 대박!”에테르의 리더, 강태윤이 시은에게 선물로 준 ‘에테르 VIP 콘서트 티켓’의 좌석은 1층 8구역의 12열이었다. 실질 1열. 심지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콘서트를 즐길 수 있도록 연석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태윤의 배려에 두 사람의 마음이 따뜻하다 못 해, 뜨거워졌다.체조경기장, KSPO DOME의 8구역은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무대 전체를 보기에 상당히 좋은 자리였다. 본 무대와는 꽤 거리가 있긴 하지만 멤버들이 움직이는 모든 동선을 따라가기 좋고, 전광판까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에 돌출 무대가 있어, 그 무대 앞에 에테르 멤버들이 온다면 플로어 좌석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좋은 자리였다. 거기다 실질 1열의 좌석이니 멤버들의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자리.“저기... 시우 부모님.”“와, 진짜 어머니 너무 미인이시다.”“그치? 누나도 엄청 예쁘더라. 근데 오늘은 안 왔나 봐."덕질 5년 차의 짬바는 내 최애의 가족도 괜히 친근해지는 법."어? 저기 저 사람, 태윤이 여동생 아냐?”“어? 어디?"시은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윤이 가리킨 곳에 태윤의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어어, 맞아. 존나 예쁘지?”“응. 진짜 연예인들은 가족들이 다 장난 없네.”“그러니까. 부럽게.”VIP 초대권의 또 다른 혜택. 멤버들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보통 콘서트의 두 번째 날인 토요일, 중콘에 가족들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 하윤과 시은이 앉아 있는 8구역에서 에테르 멤버들의 가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이 즐거워지는 순간들이었다.***"꺄아아아아악!!!"암전과 함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음악의 비트 소리와 함께 VCR의 화면이 재생되었다.또 다시, 에테르 단독 콘서트 [Luminate]의 두 번째 날 공연이 시작되었다.“시우야~~~!”"강태윤!!!"콘서트가 진행될수록 콘서트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
#42 거짓말의 서막“내일 몇 시에 마치는데?”바쁘게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하윤을 보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은 건우가 툭- 물었다. 순간, 하윤의 손짓이 멈칫했다. 가만... 막콘이 몇 시에 끝나더라?막콘의 경우에는 앵콜에서 앵앵콜, 앵앵앵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좀 더 넉넉하게 알리바이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 어느때보다 하윤의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음... 8시... 쯤?”“하, 더럽게 늦네. 데리러 가?”“아냐... 후배가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어.”응, 시은이가 태워 주기로 했어.“어디로 가는데?”아차차!이건 생각을 못 했는데...“어... 그... 우리 회사... 연수원 있잖아.”“아~ 용인에 있는 거?”“아, 응!”다행이었다.아주 스무스하게 잘 넘어갔다.“그럼, 집까지 1시간 정도 걸리겠네? 우리 집으로 바로 올 거지?”“음... 피곤할 것 같은데?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고...”하윤은 건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첫콘 때 구매한 콘서트 MD 굿즈는 시은이에게 다 맡겨 놓고 온 상태였다. 마지막 날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바리바리 안고 귀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능한 한 자신의 오피스텔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다. 실제로 피곤하기도 할테고 말이다.“내일은 꼭 껴안고 자야지. 아이씨, 연수 개새끼. 월요일에 학교 가서 그 새끼 보이기만 해봐라. 확 대가리 날려 버릴 거야, 씨발.”하윤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는 차건우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그였지만, 두 사람의 2,500일인 일요일, 그녀와 하루 종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차건우의 역린을 살살 건들고 있었다.빠...빨리 가야할 것 같다.“바빠도 중간 중간 연락 자주 해.”“응."시우의 우치와와 네임보드, 스케치북, 또 다른 루미들에게 나눔할 커스텀 미니 굿즈들을 잔뜩 넣은 작은 캐리어를 손에 끌고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혹시나 건우
#41 사랑의 깊이하윤은 건우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사실, 앵콜곡까지 맛있게 말아줄 에테르의 마지막 모습까지 끝까지 보고 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에테르 멤버들이 콘서트장의 1층과 2층 사이의 통로에서 토롯코를 타고 등장하기 직전 빠르게 짐을 꾸려 콘서트 장을 빠져나왔다. 콘서트가 진행된 지 약 3분의 2 지점이 지난 상태였다. 아쉬움이 가득 남아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는 이성을 부여잡았다.“포장 주문했는데요.”건우의 집 근처의 건우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덮밥 집에 들려, 미리 앱으로 주문한 포장 주문 음식을 받았다. 어쩌면 피곤함에 쩔어 저녁도 굶고 소파나 침대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 6월과 8월의 시험 마지막 날에도 그랬으니까.기왕이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콘서트를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음에도 벌써 시간은 오후 10시를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띠띠띠띠띠띠띡- 띠리리-건우 집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건우가 깨어 있었다면 하윤이 문 따는 소리에 벌써 중문 앞까지 달려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과 함께 불조차 켜져 있지 않은 어두움만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거실에는 그가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 놓은 흔적과 탄산수 한 병을 따서 반쯤 마시다만 흔적이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하윤은 그의 흔적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는 이내 정리를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옷들은 바르게 펴 스타일러에 넣어 기계를 작동 시켰고, 반쯤 남은 탄산수는 싱크대에 버리고 병은 재활용 통에 넣었다.굳게 닫힌 그의 마스터 룸을 힐끔 보고는 좀 더 자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들어가 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건우가 너무 피곤한 탓에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게스트 룸에 가서 잠을 자면 될 것이고, 건우의 그 잘난 얼굴을 못 보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몸은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하윤은 빠르게 욕실
#40 에테르 단독 콘서트 [ Luminate ]“콘서트 퇴근 길도 못 보고 간다고?”채아의 눈이 커졌다.에테르가 데뷔한 이래로 다섯 번째 단독 콘서트였다. 그때마다, 콘서트 기간 3일 내내, 공연을 마치고 퇴근하는 에테르 멤버들과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덕질의 룰이었다.이미 채아를 제외한 직장인 셋은, 반차를 내고 에테르의 단독 콘서트 [Luminate]가 열리는 [ KSPO DOME ]에 일찍 도착했다. 줄을 서서 콘서트 MD 제품을 구매하고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은 후, 진작에 공원 입구 쪽의 할리스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며 콘서트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응. 마치자마자 바로 튀어가야 돼.”하윤이 아쉬워하는 채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미안한 듯, 예쁜 미소를 흘렸다.가끔, 이 언니들은 참 이상했다. 에테르의 덕질에 정말 진심인 것 같으면서도 가끔 현생의 일로 에테르의 우선 순위를 바꿔버리는 기행을 하곤 했다. 빠순이질에 진심인 이들에게 현생의 일 따위는 감히 에테르보다 앞설 수 없는데 말이다.“시은아, 너는 애들이랑 같이 보고 와.”하윤은 시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사실 오늘, 하윤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오늘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차건우의 10월 ‘변시 모고’의 마지막 날이지 않은가. 아무리 늦어도 오후 8시쯤에는 그가 집에 도착할 것이었다. 하지만 금요일의 콘서트는 직장인의 퇴근 시간을 고려하여 주말 콘서트보다 늦게 시작하는 이유로 밤 10시가 넘어야 끝날 판이었다.더군다나 토, 일 이틀 간 선행 연구팀의 연수가 있다고 알고 있는 건우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도 억지로 삼키며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하윤이 보여준 중콘 티켓 취소 내역을 보며, 콘서트 3일 중 하루라도 재밌게 보고 오라며 저 답지 않게, 에테르의 첫콘을 쿨하게 보내준 그였다.그러니... 이하윤의 마음이 편할 턱이 있겠냐고.“나, 중간에 나가야 될 수도 있어.”하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39 콘서트의 빠순이를 위한 정신 나간 아이돌의 빌드업쿵- 쿵- 쿵- 쿵-서초동의 에테르 단독 연습실. 반복 적인 음악의 비트 소리가 끊어지지 않은 지 벌써 7시간째였다. 단독 콘서트를 2주 앞두고 연습실과 숙소만을 오가며 본업에 충실하고 있는 5년 차 아이돌, [에테르].“잠깐, 잠깐, 잠깐!”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거대한 대형 거울 속에서 도현이 춤을 추다 말고 다급하게 손을 휘젓고 있었다.도현의 손짓에 매니저가 오디오의 스탑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뚝- 음악이 끊기고 잠깐 동안 그곳은 멤버들의 거친 호흡 소리로만 가득 찼다.“하아... 하아...”음악이 끊어진 틈을 타 바닥에 하나 둘 주저앉는 에테르 멤버들. 10월 초. 밖의 날씨는 서서히 가을의 서늘한 날씨로 변하고 있었지만 연습실 안은 여전히 한여름 같았다.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어도 멤버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이거 진짜 아니야.”도현이 거친 호흡이 조금 정리 되자마자 자신이 음악을 멈춘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콘서트 셋리가 결정되고,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을 때부터 계속 말이 나왔던 부분.“루미들이 좋아할 만한 셋리는 맞는데... 이거 잘못하다간 사고 나. 무대 위에서 누구 하나 죽을 일 있어? 두 곡 다 빼든지, 아니면 곡 하나를 바꾸던지 해야 된다고.”다소 격양된 목소리의 도현. 여전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나머지 멤버들은 에테르의 리더인 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동갑내기이자 팀의 맏형들인 태윤과 도현은, 계속 해서 다른 의견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5년간 활동을 하면서 앨범의 곡들 중에는 같은 세계관으로 연결되는 노래들이 있었다. 지금 셋리에 있는 이 두 곡은 특히나 루미들이 함께 연결해서 보고, 듣는 것을 상당히 좋아 했다.문제는 두 곡 모두 매우 빠른 비트에 안무 동작이 많이 어렵고, 움직임이 많아 한 곡을 소화하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는 것에 있었다. 이런 곡을 연속으로 춤추고 노래를 하려고
#38 콘서트를 위한 빠순이의 빌드업[ 에테르 일본 투어 콘서트 ]에 눈이 멀어, 자신들에게 미쳐있는 남친들의 깊은 사랑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 어줍잖은 계획으로 남친들의 고삐를 쥐려 했던 어리석은 빠순이들, 이하윤과 최시은은...주말 내내 남친들의 분노를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온 삭신이 쑤시는 쾌락을 주말 내내 즐겼던(?) 그녀들의 현생은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아, 미안해.”수요일의 늦은 저녁. 오랜만에 둘이서 저녁을 먹기로 한 하윤이와 시은이였지만, 하윤의 갑작스런 야근으로 저녁 식사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대신, 두 사람은 진한 수다나 떨기 위해, 시내의 24시간 프렌차이즈 커피숍에서 만났다.“그래도 용케 빨리 빠져 나왔네?”먼저 도착한 시은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숨을 고르고 있는 하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지난 주 금요일, 이태현과 저녁을 먹기로 했을 때만 해도 반짝반짝 빛나며 예쁘고 섹시했던 친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가슴팍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대충 묶어 올리고, 급하게 뛰어 오느라 정리하지 못한 잔머리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원래도 진한 화장을 하지 않는 하윤이었지만 하루 종일 거울 한 번 못 들여다 본 듯 번들 거리는 유분기와 눈 밑의 다크 서클이, 오늘 하루 그녀의 현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었다.“하... 엉망진창이네.”가쁜 숨을 고르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그제서야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상태 체크를 하던 하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새로운 발견과 연구를 위한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대기업의 연구원 일이었지만 소망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연구실에 머무르기 보다는 온갖 수치를 문서화하고, 엑셀 창을 열어 서류 작성을 하는 일이 더 많은 주임 연구원의 삶. 오늘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온 터라 허리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저녁은? 누구랑 먹었어?”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건만, 오늘 안에 전송해줘야 할 급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