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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게시일: 2026-06-03 11:02:57

나는 손을 뻗어, 내가 한 달 동안 밤새워 만든 모형의 지붕을 잡았다.

우지끈-!

“야! 강진호! 너 뭐 해?!”

옆에 서 있던 동기가 비명을 질렀다. 스튜디오 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최무진의 시선도, 김 교수의 당황한 눈빛도 느껴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형을 짓이겨버렸다.

바사삭, 툭.

정성스럽게 붙인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기둥이 꺾였다.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달려온 조교가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가볍게 뿌리쳤다.

“쓰레기를 치우는 중입니다.”

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스튜디오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박살 난 모형 잔해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텅 빈 모형 받침대 위에 검은색 폼보드 한 장을 깔았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대지(大地).

그것이면 충분했다.

---

“다음, 강진호 학생.”

내 차례가 왔다.

내 앞에는 텅 빈 검은색 받침대만이 놓여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히 깐깐하기로 소문난 외부 심사위원, 이형석 소장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자네, 지금 장난하나? 졸업 작품이 장난이야?”

“장난 아닙니다.”

“모형도 없고, 패널도 찢어버렸던데. 뭘 보여주겠다는 건가?”

“건물이 아니라, '공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굵은 유성 매직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준비된 화이트보드가 아닌, 모형 받침대 뒤의 하얀 벽으로 걸어갔다.

“건축은 무엇입니까?”

나는 벽에 굵은 선 하나를 그었다.

찌익-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누군가는 예술이라 하고, 누군가는 공학이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축은 ‘해결’입니다.”

나는 빠르게 스케치를 시작했다.

20년의 경력. 수천 장의 도면을 그리고, 수백 개의 현장을 지휘했던 손이다.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손끝을 타고 벽면 위로 쏟아져 나왔다.

내 손이 움직일 때마다 시스템 창이 번쩍였다.

[스킬: ‘속도 스케치(Lv.Max)’가 발동됩니다.]

[구조적 오차를 자동 보정합니다.]

단순한 투시도가 아니었다.

건물의 뼈대, 하중의 흐름, 빛이 들어오는 각도까지 계산된 정밀한 단면도였다.

나는 기존의 ‘어반 포레스트’가 있던 대지를 그렸다. 서울의 구도심. 빽빽한 빌라촌 사이에 끼어 있는 좁고 긴 땅.

“이 대지는 죽어 있습니다. 북쪽은 4층 빌라에 막혀 일조권을 침해받고, 남쪽은 도로 소음이 심각하죠. 기존의 제 설계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예쁜 포장지로 덮으려 했습니다.”

나는 내가 그렸던, 그리고 방금 부숴버린 건물의 형태를 점선으로 그리고 X를 쳤다.

“그래서 껍데기를 버렸습니다.”

나는 새로운 선을 그었다.

땅을 파고드는 선큰(Sunken) 가든. 건물을 위로 올리는 대신 지하로 공간을 확장하고, 지상은 필로티 구조로 띄워 골목길을 연결했다.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막혀 있던 골목의 숨통을 틔우는 도시 재생(Urban Regeneration)의 관점.

이건 2013년의 학부생 수준에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이 아니었다. 2025년 이후에나 유행할, 그리고 내가 실무에서 피를 토하며 익혔던 ‘공공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잡는 설계였다.

“지하 1층은 경사지를 이용해 자연 채광이 가능하게 하고, 그곳에 커뮤니티 시설을 넣습니다. 지상 1층은 보행로로 개방하여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습니다. 그렇게 확보한 층수로...”

내 펜 끝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투박한 매직 펜 선이었지만, 그 안에는 완벽한 비례와 구조 미학이 담겨 있었다.

입체감이 살아나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벽 속에 실제 건물이 들어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압도적인 드로잉 실력.

어느새 웅성거림은 사라졌다.

김 교수님은 안경을 벗고 벽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독설가 이형석 소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는 남자, 최무진.

그의 눈빛이 변했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

'그래, 봐라. 이게 네가 알던 강진호다. 하지만 이번엔 네가 알던 호구가 아냐.'

나는 마지막으로 건물 꼭대기에 펜을 찍으며 뒤를 돌았다.

“건축주는 수익을, 주민은 쾌적함을, 도시는 새로운 길을 얻습니다. 이것이 제가 제안하는 프로젝트, <넥서스(Nexus): 연결>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1초, 2초, 3초.

“...허.”

이형석 소장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자네, 학생 맞나? 이 구조... 캔틸레버(외팔보)를 이렇게 뽑아내면 하중은 어떻게 견딜 건가? 단순히 그림만 그럴싸한 게 아니야?”

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코어(Core) 벽체에 포스트 텐션(Post-Tension) 공법을 적용하면 됩니다. 슬래브 두께를 250mm로 잡고, 강선으로 미리 압축력을 주면 기둥 없이 12m 캔틸레버도 충분히 버팁니다. 시공비는 일반 RC조보다 15% 상승하겠지만, 용적률 인센티브로 얻는 임대 면적이 30% 늘어나니 사업성은 오히려 개선됩니다.”

이형석 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학부생 입에서 나올 디테일이 아니었다. 포스트 텐션 공법은 당시 실무에서도 흔히 쓰이지 않던 기술이었다.

“...시공비 상승 대비 수익률까지 계산했다고?”

“건축가는 물주(건축주)의 지갑도 지켜줘야 하니까요.”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강의실 뒤편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나, 둘. 곧이어 스튜디오 전체가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찼다.

“미친, 강진호 저 새끼 천재 아냐?”

“와, 그림 그리는 거 봤냐? 소름 돋는다.”

교수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느라 바빴다. 내 졸업 작품 점수는 안 봐도 뻔했다.

그때, 최무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특유의 거만한 걸음걸이. 잘 빠진 수트 핏.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재밌네. 강진호 학생이라고 했나?”

“네.”

“태영건설 기획팀장 최무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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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5.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백 회장의 눈이 커졌다. 주변에 있던 덩치들도 입을 딱 벌렸다.단순히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업 파트너로서의 지분을 요구한 것이다.'건방진 놈. 새파랗게 어린놈이.'“이 건물, 이대로 두면 똥값 됩니다. 하지만 제가 손대면 강남 랜드마크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선택하시죠. 평생 귀신 나오는 건물 주인으로 남으실지, 아니면 저랑 손잡고 돈방석에 앉으실지.”잠시 침묵이 흘렀다. 백 회장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녀도 급했다. 이미 들어간 돈이 수십억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좋다. 30분이다. 만약 해결 못 하면, 넌 진짜로 내 밑에서 1년 동안 개처럼 일해야 할 거다. 각서 써.”“구두 계약도 계약입니다. 녹음하시죠.”나는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나는 안전모를 쓰고 덩치들이 가져다준 망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인부용 리프트를 타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옥상에 올라서자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윙윙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시스템: 공명 발생 지점을 포착합니다.』『좌표 확인. 옥상 파라펫(Parapet) 상단 알루미늄 루버 14번, 15번, 16번 구간.』건물 디자인을 위해 설치된 수직 알루미늄 장식들.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미세한 간격 오차로 인해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피리처럼 소리를 내고 있었다.해결책은 간단했다. 바람의 길을 흐트러뜨리면 된다.“저기, 저거 뜯어내세요.”내가 지목한 곳은 루버의 중간 부분이었다. 인부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이거 비싼 자재인데... 막 뜯어도 됩니까?”“책임은 제가 집니다. 빨리요!”내 호통에 인부들이 마지못해 빠루(노루발 못뽑이)를 들이밀었다.끼이익- 쾅!알루미늄 바가 뜯겨 나갔다.하나, 둘, 셋.연달아 세 개의 루버를 제거하고, 남은 루버 사이에 미리 준비한 고무 패킹을 끼워 넣었다. 진동을 흡수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자, 이제 들어보세요.”거짓말처럼, 귀를 찢을 듯하던 굉음이 사라졌다.바람은 여전히 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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