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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3 11:04:10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전생에서는 내가 굽신거리며 받았던 그 명함. 이번에는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림만 잘 그리는 환쟁이는 우리 회사에 필요 없지만, 돈을 벌 줄 아는 건축가는 환영이지. 우리 회사 공채, 지원했나?”

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지원? 이미 서류는 냈다.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태영건설에 입사해서 노예처럼 구르는 건 사양이다.

나는 그의 명함을 받아 들고는,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대상: 최무진 (태영건설 기획팀장)]

[성향: 야망, 기회주의, 소시오패스 성향 다분]

[현재 상태: 당신의 재능을 탐내고 있음.]

나는 명함을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말했다.

“지원했습니다만.”

“그럼 면접 때 보지. 내가 특별히 1차는...”

“생각이 바뀌어서요.”

나는 말을 끊었다. 최무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태영건설은 제 그릇을 담기에 좀 작아서요. 지원, 철회할 생각입니다.”

주변이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국내 도급순위 5위 안에 드는 태영건설 입사를, 그것도 임원 앞에서 걷어차?

최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패기 좋네. 학생. 현실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자네 실력, 인정해. 하지만 자본 없는 아이디어는 그냥 낙서야. 태영 없이 자네가 저런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나?”

그는 정확한 지적을 했다. 건축은 돈이다. 막대한 자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20년 동안 폭등할 땅과, 대박 날 개발 정보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팀장님.”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속삭였다.

“성수동 2가, 구두 공장 부지. 태영에서 매입하려고 작업 중이시죠?”

최무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것은 태영건설 내부에서도 극비리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였다.

“거기, 사지 마세요. 토양 오염 심각해서 정화 비용만 수백억 깨질 겁니다. 게다가 알박기하고 있는 지주들, 절대 안 팝니다.”

“...너, 너 누구야? 그걸 어떻게...”

“조언은 공짜입니다. 저를 놓친 아쉬움에 대한 서비스라고 생각하시죠.”

나는 벙찐 최무진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시스템: 대상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명성도가 상승합니다.]

이제 시작이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직접 땅을 사고, 직접 설계하고, 직접 짓는다.

대한민국을 내 도면 위에 새로 그릴 것이다.

먼저, 종잣돈부터 만들어야겠지.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내일모레 발표될 '강남구 특별계획구역' 해제 소식.

그전에 움직여야 할 곳이 있다.

나는 강의실을 나서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안에 쥔 최무진의 명함이 구겨졌다.

“기다려라. 내 방식대로, 가장 높은 곳에서 다시 만나게 해 줄 테니까.”

건축가 강진호의 두 번째 삶은, 이제 막 착공(着工)에 들어갔다.

* 기초 공사비는 어디서 나오는가

웅성거리는 강의실을 뒤로하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시선들이 차단되자,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야, 강진호! 거기 안 서?”

복도 끝에서부터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박민수가 달려왔다. 녀석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내 앞을 막아섰다. 촌스러운 체크무늬 셔츠에 땀이 흥건했다.

“너 진짜 미쳤냐? 아니, 돌았어? 태영건설 팀장 면전에서 명함을 구겨? 거기다 대고 훈수까지 둬? 너 취업 안 할 거야? 우리 학자금 대출은? 인생 포기했어?”

민수는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았다. 20년 만에 듣는 친구의 잔소리가 묘하게 반가웠다. 전생에서 그는 과로로 쓰러지기 전날까지 내게 술을 사주며 위로해 주던 녀석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민수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라. 다 생각이 있으니까.”

“생각은 무슨 얼어 죽을 생각! 교수님들 표정 봤냐? 김 교수님은 뒷목 잡고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더라. 너 F 학점 나오면 졸업 유예야. 알기는 해?”

'졸업은 시켜 줄 거야. 그 사람들, 내 설계 보고 눈 돌아간 거 못 봤냐?'

“하아. 그래, 솔직히 지리긴 하더라. 너 언제부터 그런 그림 실력을 숨기고 있었냐? 벽에다가 매직으로 투시도를 그리는데, 와 소름이 쫙 돋는 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나는 민수의 말을 자르고 걸음을 옮겼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회귀 전, 무너진 현장에서 며칠 밤을 새우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인지 허기가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학교 앞 허름한 순대 국밥집. 2013년 당시 5천 원이면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던 학생들의 성지였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숟가락을 들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한 계산으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태영건설 최무진에게 한 방 먹인 건 통쾌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해소였다.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지금 당장 땡전 한 푼 없는 대학생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뱅킹 앱을 실행했다.

[잔액: 324,500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돈으로는 서울 바닥에서 월세 보증금은커녕, 고시원 한 달 치도 간당간당했다.

건축? 시행? 부동산 개발? 전부 돈 놀음이다. 아무리 뛰어난 설계 능력이 있고 미래를 아는 정보가 있어도, 그것을 실현할 종잣돈(Seed Money)이 없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강진호, 너 진짜 태영 안 갈 거야? 거기 초봉이 얼만데.”

국밥을 후루룩거리던 민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안 가. 아니, 못 가. 가면 죽어.”

“죽긴 왜 죽어? 야, 빡세게 굴리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대기업이잖아.”

민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이 얼마나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곳인지. 그리고 최무진이라는 인간이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어떻게 버리는지.

“돈은 벌어야지. 그것도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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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54

    "뭐라고? 저 여자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대성그룹? 저 한국 기업이 우리 도로를 자기들 마음대로 썼다는 거야?"시민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몰려왔던 인부들은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명분이 사실은 탐욕스러운 재벌의 농간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이건... 이건 조작이야! 당장 꺼!"어디선가 달려 나온 김영민 상무가 소리를 질렀지만, 시민들의 야유 소리에 묻혀버렸다. 뉴욕 시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당장 여기서 나가! 우리 도시에서 꺼지라고!""도로를 돌려줘! 공원을 만들어라!"시민들이 시위대를 향해 커피 컵과 쓰레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대성건설의 인부들은 분노한 시민들의 기세에 밀려 펜스 뒤로 도망치듯 물러났다.***그날 밤, 나는 강진호 센터 옥상에서 철거되는 대성의 펜스를 지켜보았다. 텅 빈 도로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진호야, 이제 저 도로는 어떻게 할 거야? 시의회에서는 우리한테 관리권을 줬잖아."이지현 실장이 물었다."공원을 만들어야지. 하지만 평범한 공원이 아니야. '더 리본(The Ribbon)'이라는 이름의 공중 정원을 만들 거야. 하이라인 파크에서 시작해 우리 건물을 감싸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대성건설의 건물 앞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녹색 띠."나는 펜을 들어 허공에 선을 그었다."그 리본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53

    나는 시스템 창을 띄웠다.『시스템: 「공간 물류 최적화(Lv.2)」 기능과 「하이퍼 싱크(Hyper-Sync)」 모드를 결합합니다.』『대상: 서울 시청 시장실 - 뉴욕 강진호 센터 50층.』『상태: 물리적 거리 11,000km, 지연 속도 0.01ms 이하로 고정.』'대성그룹이 내 국내 기반을 흔들려 한다면, 아예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너뜨려 주지.'***오후 7시, 강진호 센터 50층 메인 홀.뉴욕 시의회 의장과 주요 언론사 기자들, 그리고 이서현 상무를 포함한 대성그룹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서현은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샴페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강 대표님, 오늘 시연회가 고별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로 점용권 문제는 내일 시의회에서 최종 결판이 날 텐데, 우리 대성이 이미 승기를 잡았거든요.""이 상무님, 성격이 급하시네요. 결과는 늘 도면을 다 펼쳐봐야 아는 법인데."나는 여유롭게 단상 위로 올라갔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중앙 무대로 집중되었다."여러분, 오늘 저는 새로운 건축의 시대를 선포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건축은 고정된 장소에 건물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안하는 건축은 '장소를 공유하는' 건축입니다."손가락을 퉁기자 무대 중앙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치지직-!강렬한 빛이 잦아들자, 그곳에는 놀랍게도 서울 시장실의 풍경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52

    일주일 뒤, 대성건설 뉴욕 지사 상무실.이서현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현장 중계 화면을 보고 있었다."아직도 멈춰 있네. 강진호, 이제 슬슬 한계겠지? 자재는커녕 인부들 밥차도 못 들어가게 막아놨으니 말이야."그녀의 옆에 선 비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했다."그런데 상무님, 좀 이상합니다. 지상에서는 공사가 멈춘 것 같은데, 하이라인 부지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음 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밤마다 진동도 감지되고요.""진동? 지하 터 파기라도 하는 거 아냐? 어차피 자재가 없으면 건물은 못 올려. 무시해."그때, 거대한 진동과 함께 창밖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강진호 센터의 부지 위로, 거대한 유리 구조물들이 순식간에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크레인도, 트럭도 보이지 않았는데 마치 땅속에서 건물이 자라나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었다."뭐, 뭐야? 저게 어떻게 올라가는 거야!"이서현이 창문에 달라붙어 소리쳤다.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내 건물 외벽에 부착된 수천 개의 미러 패널들이었다. 그 패널들은 일제히 각도를 틀어 대성건설이 새로 짓고 있던 건물의 그림자를 반사해버렸다.빛의 역습이었다.대성 건물이 가리려 했던 햇빛은 미러 패널에 부딪혀 오히려 내 건물의 조도를 높였고, 반사된 강렬한 빛은 대성건설 현장의 크레인 기사들의 시야를 가려버렸다."눈부셔! 앞이 안 보여!"대성 현장의 인부들이 비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51

    그는 나의 설계를 방해하기 위해 뉴욕의 또 다른 거대한 필지를 점령했다. 우리가 지으려는 하이 가든의 볕을 가리고, 공사 물길을 막아버리겠다는 계산이었다."동수, 지현 누나. 당장 긴급 회의 준비해."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허드슨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고요했지만 그 밑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이병철 회장이 조망권을 가리겠다면, 우리는 조망권 자체를 창조해야지. 건물 내부에서 한강과 허드슨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미러 시티(Mirror City) 공법을 도입한다.""미러 시티요? 그건 아직 실험 단계잖아요!"이지현 실장이 놀라서 물었다."실험은 끝났어. 내 머릿속에서 이미 완공됐거든."나는 펜을 들어 하이라인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시계추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용산과 뉴욕, 그리고 사막의 신도시를 잇는 거대한 건축 제국의 정점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이병철 회장이 쌓아 올린 대성그룹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세계의 설계자로 거듭나기 위한 마지막 승부처가 다가오고 있었다."준비해. 내일은 대성건설 뉴욕 지사로 직접 쳐들어간다. 전쟁을 선포하러 말이야."내 목소리가 차가운 사무실 공기를 갈랐다. 동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그의 허리춤에 찬 무전기에서는 긴박한 상황실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인의 침공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50.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자네 같은 디벨로퍼들이 하는 소리는 질리도록 들었어. 공학, 효율, 경제성... 그런 단어들이 뉴욕의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지. 이 낡은 철길이 왜 아름다운지 아나? 이건 더 이상 쓸모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걸세.""쓸모없음의 미학이라... 하지만 그 미학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의 이웃들이 좁고 어두운 골목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미학이 아니라 이기심 아닐까요?"내 도발적인 질문에 다이애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자네, 말조심하게. 나는 이 땅의 영혼을 지키고 있는 거야.""영혼을 지키는 방법은 박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수직의 하이라인을 지을 생각입니다.공중권을 이용해 건물을 올리되, 지상의 공원을 건물 내부로 끌어올려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숲을 만들 겁니다. 시민들이 지상에서 느꼈던 기억을 100층 높이에서도 느낄 수 있게 말이죠."나는 태블릿을 꺼내 미리 준비한 조감도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유리를 바른 건물이 아니었다. 건물의 외벽을 따라 철길의 질감을 살린 테라스가 나선형으로 올라가고, 그 위로 하이라인의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이었다.다이애나는 조감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흔들림이 포착되었다."이건... 불가능해. 구조적으로 이 하중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어.""저희 실장이 계산을 마쳤습니다. 아부다비에서 썼던 나선형 구조와 용산의 탄소 섬유 보강 기술을 결합하면 가능합니다. 회장님, 저는 이곳에 건물을 짓고 싶은 게 아닙니다. 뉴욕의 기억을 확장하고 싶은 겁니다."다이애나는 한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49

    "조작인지 아닌지는 FBI 전문가들이 판단하겠죠. 그리고 요원 여러분, NYSE 전산망을 공격한 진짜 IP는 지금 실버먼 회장의 자택 서재로 찍히고 있을 겁니다. 제가 아까 역추적해서 경로를 고정해뒀거든요."현장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실버먼을 향했다. FBI 요원들은 당황한 실버먼의 팔에 수갑을 채웠다."데이비드 실버먼 회장, 당신을 사이버 테러 및 테러 사주 혐의로 체포합니다.""이건 모함이야! 강진호! 네가 감히 나를!"실버먼은 비참하게 끌려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사건이 일단락된 밤, 나는 다시 4층 현장으로 내려갔다. 지현 누나와 인부들이 밤을 새우며 기둥 보강 공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진호, 이제 안전해. 탄소 섬유 보강으로 이전보다 강도가 두 배는 높아졌어."지현 누나가 땀을 닦으며 웃었다."고생했어, 누나. 역시 누나가 없었으면 이 건물은 진짜 무너졌을 거야."나는 보강된 기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거칠고 단단한 촉감. 이것이 바로 건축의 본질이다. 아무리 화려한 시스템과 금융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해도, 결국 우리를 지켜주는 건 정직하게 세워진 이 콘크리트와 철근이다.동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대표님, 레이첼은 당국에 신병을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말이 걸립니다.""뭐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5.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백 회장의 눈이 커졌다. 주변에 있던 덩치들도 입을 딱 벌렸다.단순히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업 파트너로서의 지분을 요구한 것이다.'건방진 놈. 새파랗게 어린놈이.'“이 건물, 이대로 두면 똥값 됩니다. 하지만 제가 손대면 강남 랜드마크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선택하시죠. 평생 귀신 나오는 건물 주인으로 남으실지, 아니면 저랑 손잡고 돈방석에 앉으실지.”잠시 침묵이 흘렀다. 백 회장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녀도 급했다. 이미 들어간 돈이 수십억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좋다. 30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4

    나는 국물을 들이키며 눈을 번뜩였다.당장 큰돈을 만질 방법이 필요했다.주식? 비트코인?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아직 대중화되기도 전이고, 주식으로 큰돈을 불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나는 지금 당장 현금이, 그것도 억 단위의 현금이 필요했다. 그래야 곧 발표될 강남 개발 계획에 숟가락이라도 얹을 수 있었다.내 전공을 살리면서 단기간에 목돈을 챙길 방법.기억을 더듬었다. 2013년 겨울. 대한민국 건축 업계와 부동산 시장에 돌았던 흉흉한 소문들. 그리고 내가 실무에서 들었던 수많은 비사(秘史)들.뇌리에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2

    나는 손을 뻗어, 내가 한 달 동안 밤새워 만든 모형의 지붕을 잡았다.우지끈-!“야! 강진호! 너 뭐 해?!”옆에 서 있던 동기가 비명을 질렀다. 스튜디오 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최무진의 시선도, 김 교수의 당황한 눈빛도 느껴졌다.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형을 짓이겨버렸다.바사삭, 툭.정성스럽게 붙인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기둥이 꺾였다.“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달려온 조교가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가볍게 뿌리쳤다.“쓰레기를 치우는 중입니다.”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스튜디오가 찬물을 끼얹은 듯

  • 도면 위의 마에스트로   1

    * 무너진 탑, 그리고 다시 쌓아 올리는 기초쿠르르릉-!세상이 뒤집히는 소리였다.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내 인생의 역작이라 불렸던 ‘센트럴 팰리스’의 B동이 먼지 구름 속으로 주저앉았다. 콘크리트가 비명을 지르고, 철근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강진호 소장님!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현장 관리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팔을 붙잡았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내 눈앞에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3년. 내 영혼을 갈아 넣어 설계한 건물이, 완공을 코앞에 두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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