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전생에서는 내가 굽신거리며 받았던 그 명함. 이번에는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림만 잘 그리는 환쟁이는 우리 회사에 필요 없지만, 돈을 벌 줄 아는 건축가는 환영이지. 우리 회사 공채, 지원했나?”
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지원? 이미 서류는 냈다.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태영건설에 입사해서 노예처럼 구르는 건 사양이다.
나는 그의 명함을 받아 들고는,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대상: 최무진 (태영건설 기획팀장)]
[성향: 야망, 기회주의, 소시오패스 성향 다분]
[현재 상태: 당신의 재능을 탐내고 있음.]
나는 명함을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말했다.
“지원했습니다만.”
“그럼 면접 때 보지. 내가 특별히 1차는...”
“생각이 바뀌어서요.”
나는 말을 끊었다. 최무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태영건설은 제 그릇을 담기에 좀 작아서요. 지원, 철회할 생각입니다.”
주변이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국내 도급순위 5위 안에 드는 태영건설 입사를, 그것도 임원 앞에서 걷어차?
최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패기 좋네. 학생. 현실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자네 실력, 인정해. 하지만 자본 없는 아이디어는 그냥 낙서야. 태영 없이 자네가 저런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나?”
그는 정확한 지적을 했다. 건축은 돈이다. 막대한 자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20년 동안 폭등할 땅과, 대박 날 개발 정보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팀장님.”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속삭였다.
“성수동 2가, 구두 공장 부지. 태영에서 매입하려고 작업 중이시죠?”
최무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것은 태영건설 내부에서도 극비리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였다.
“거기, 사지 마세요. 토양 오염 심각해서 정화 비용만 수백억 깨질 겁니다. 게다가 알박기하고 있는 지주들, 절대 안 팝니다.”
“...너, 너 누구야? 그걸 어떻게...”
“조언은 공짜입니다. 저를 놓친 아쉬움에 대한 서비스라고 생각하시죠.”
나는 벙찐 최무진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시스템: 대상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명성도가 상승합니다.]
이제 시작이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직접 땅을 사고, 직접 설계하고, 직접 짓는다.
대한민국을 내 도면 위에 새로 그릴 것이다.
먼저, 종잣돈부터 만들어야겠지.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내일모레 발표될 '강남구 특별계획구역' 해제 소식.
그전에 움직여야 할 곳이 있다.
나는 강의실을 나서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안에 쥔 최무진의 명함이 구겨졌다.
“기다려라. 내 방식대로, 가장 높은 곳에서 다시 만나게 해 줄 테니까.”
건축가 강진호의 두 번째 삶은, 이제 막 착공(着工)에 들어갔다.
* 기초 공사비는 어디서 나오는가
웅성거리는 강의실을 뒤로하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시선들이 차단되자,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야, 강진호! 거기 안 서?”
복도 끝에서부터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박민수가 달려왔다. 녀석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내 앞을 막아섰다. 촌스러운 체크무늬 셔츠에 땀이 흥건했다.
“너 진짜 미쳤냐? 아니, 돌았어? 태영건설 팀장 면전에서 명함을 구겨? 거기다 대고 훈수까지 둬? 너 취업 안 할 거야? 우리 학자금 대출은? 인생 포기했어?”
민수는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았다. 20년 만에 듣는 친구의 잔소리가 묘하게 반가웠다. 전생에서 그는 과로로 쓰러지기 전날까지 내게 술을 사주며 위로해 주던 녀석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민수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라. 다 생각이 있으니까.”
“생각은 무슨 얼어 죽을 생각! 교수님들 표정 봤냐? 김 교수님은 뒷목 잡고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더라. 너 F 학점 나오면 졸업 유예야. 알기는 해?”
'졸업은 시켜 줄 거야. 그 사람들, 내 설계 보고 눈 돌아간 거 못 봤냐?'
“하아. 그래, 솔직히 지리긴 하더라. 너 언제부터 그런 그림 실력을 숨기고 있었냐? 벽에다가 매직으로 투시도를 그리는데, 와 소름이 쫙 돋는 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나는 민수의 말을 자르고 걸음을 옮겼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회귀 전, 무너진 현장에서 며칠 밤을 새우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인지 허기가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학교 앞 허름한 순대 국밥집. 2013년 당시 5천 원이면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던 학생들의 성지였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숟가락을 들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한 계산으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태영건설 최무진에게 한 방 먹인 건 통쾌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해소였다.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지금 당장 땡전 한 푼 없는 대학생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뱅킹 앱을 실행했다.
[잔액: 324,500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돈으로는 서울 바닥에서 월세 보증금은커녕, 고시원 한 달 치도 간당간당했다.
건축? 시행? 부동산 개발? 전부 돈 놀음이다. 아무리 뛰어난 설계 능력이 있고 미래를 아는 정보가 있어도, 그것을 실현할 종잣돈(Seed Money)이 없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강진호, 너 진짜 태영 안 갈 거야? 거기 초봉이 얼만데.”
국밥을 후루룩거리던 민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안 가. 아니, 못 가. 가면 죽어.”
“죽긴 왜 죽어? 야, 빡세게 굴리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대기업이잖아.”
민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이 얼마나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곳인지. 그리고 최무진이라는 인간이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어떻게 버리는지.
“돈은 벌어야지. 그것도 아주 많이.”
백 회장의 눈이 커졌다. 주변에 있던 덩치들도 입을 딱 벌렸다.단순히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업 파트너로서의 지분을 요구한 것이다.'건방진 놈. 새파랗게 어린놈이.'“이 건물, 이대로 두면 똥값 됩니다. 하지만 제가 손대면 강남 랜드마크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선택하시죠. 평생 귀신 나오는 건물 주인으로 남으실지, 아니면 저랑 손잡고 돈방석에 앉으실지.”잠시 침묵이 흘렀다. 백 회장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녀도 급했다. 이미 들어간 돈이 수십억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좋다. 30분이다. 만약 해결 못 하면, 넌 진짜로 내 밑에서 1년 동안 개처럼 일해야 할 거다. 각서 써.”“구두 계약도 계약입니다. 녹음하시죠.”나는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나는 안전모를 쓰고 덩치들이 가져다준 망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인부용 리프트를 타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옥상에 올라서자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윙윙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시스템: 공명 발생 지점을 포착합니다.』『좌표 확인. 옥상 파라펫(Parapet) 상단 알루미늄 루버 14번, 15번, 16번 구간.』건물 디자인을 위해 설치된 수직 알루미늄 장식들.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미세한 간격 오차로 인해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피리처럼 소리를 내고 있었다.해결책은 간단했다. 바람의 길을 흐트러뜨리면 된다.“저기, 저거 뜯어내세요.”내가 지목한 곳은 루버의 중간 부분이었다. 인부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이거 비싼 자재인데... 막 뜯어도 됩니까?”“책임은 제가 집니다. 빨리요!”내 호통에 인부들이 마지못해 빠루(노루발 못뽑이)를 들이밀었다.끼이익- 쾅!알루미늄 바가 뜯겨 나갔다.하나, 둘, 셋.연달아 세 개의 루버를 제거하고, 남은 루버 사이에 미리 준비한 고무 패킹을 끼워 넣었다. 진동을 흡수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자, 이제 들어보세요.”거짓말처럼, 귀를 찢을 듯하던 굉음이 사라졌다.바람은 여전히 불고
나는 국물을 들이키며 눈을 번뜩였다.당장 큰돈을 만질 방법이 필요했다.주식? 비트코인?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아직 대중화되기도 전이고, 주식으로 큰돈을 불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나는 지금 당장 현금이, 그것도 억 단위의 현금이 필요했다. 그래야 곧 발표될 강남 개발 계획에 숟가락이라도 얹을 수 있었다.내 전공을 살리면서 단기간에 목돈을 챙길 방법.기억을 더듬었다. 2013년 겨울. 대한민국 건축 업계와 부동산 시장에 돌았던 흉흉한 소문들. 그리고 내가 실무에서 들었던 수많은 비사(秘史)들.뇌리에 스치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논현동 유령 빌딩 사건]강남구 논현동 한복판.5층짜리 상가 건물이 완공을 코앞에 두고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이유는 기괴했다. 밤마다 건물에서 '웅-' 하는 귀신 울음소리가 들리고, 멀쩡하던 유리에 금이 간다는 것이었다.건물주는 강남 사채 시장의 큰손이라 불리는 '백 회장'이라는 노파였는데, 그녀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고 건물을 헐값에 매각하려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당시에는 그저 호사가들의 안주거리로 넘겼지만, 훗날 밝혀진 진실은 허무할 정도로 과학적이었다.그리고 나는 그 해결책을 알고 있다.“민수야.”“어? 깍두기 더 달라고?”“아니. 오후 수업, 대출 좀 부탁한다.”“뭐? 야! 너 오늘 사고 친 거 수습도 안 됐는데 어디 가려고!”“돈 벌러.”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 건물이 헐값에 넘어가기 전에, 아니 누군가 원인을 알아채기 전에 내가 먼저 선점해야 했다.강남구 논현동.화려한 고층 빌딩 숲 사이, 흉물처럼 방치된 건물이 하나 보였다.외벽엔 붉은색 스프레이로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글자가 살벌하게 적혀 있었고, 공사 가림막은 찢겨 나부끼고 있었다.'스산하네.'나는 건물 앞에 서서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11월의 찬 바람이 찢어진 가림막 사이로 들어와 기괴한 피리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불길하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전생에서는 내가 굽신거리며 받았던 그 명함. 이번에는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그림만 잘 그리는 환쟁이는 우리 회사에 필요 없지만, 돈을 벌 줄 아는 건축가는 환영이지. 우리 회사 공채, 지원했나?”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지원? 이미 서류는 냈다. 하지만 면접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태영건설에 입사해서 노예처럼 구르는 건 사양이다.나는 그의 명함을 받아 들고는,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대상: 최무진 (태영건설 기획팀장)][성향: 야망, 기회주의, 소시오패스 성향 다분][현재 상태: 당신의 재능을 탐내고 있음.]나는 명함을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말했다.“지원했습니다만.”“그럼 면접 때 보지. 내가 특별히 1차는...”“생각이 바뀌어서요.”나는 말을 끊었다. 최무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예?”“태영건설은 제 그릇을 담기에 좀 작아서요. 지원, 철회할 생각입니다.”주변이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국내 도급순위 5위 안에 드는 태영건설 입사를, 그것도 임원 앞에서 걷어차?최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하! 패기 좋네. 학생. 현실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자네 실력, 인정해. 하지만 자본 없는 아이디어는 그냥 낙서야. 태영 없이 자네가 저런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나?”그는 정확한 지적을 했다. 건축은 돈이다. 막대한 자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하지만 그는 모른다.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20년 동안 폭등할 땅과, 대박 날 개발 정보들이 가득하다는 것을.“팀장님.”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속삭였다.“성수동 2가, 구두 공장 부지. 태영에서 매입하려고 작업 중이시죠?”최무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것은 태영건설 내부에서도 극비리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였다.“거기, 사지 마세요. 토양 오염 심각해서 정화 비용만 수백억 깨질 겁니다. 게다가 알박기하고 있는 지주들, 절대 안
나는 손을 뻗어, 내가 한 달 동안 밤새워 만든 모형의 지붕을 잡았다.우지끈-!“야! 강진호! 너 뭐 해?!”옆에 서 있던 동기가 비명을 질렀다. 스튜디오 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최무진의 시선도, 김 교수의 당황한 눈빛도 느껴졌다.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형을 짓이겨버렸다.바사삭, 툭.정성스럽게 붙인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기둥이 꺾였다.“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달려온 조교가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가볍게 뿌리쳤다.“쓰레기를 치우는 중입니다.”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스튜디오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나는 박살 난 모형 잔해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텅 빈 모형 받침대 위에 검은색 폼보드 한 장을 깔았다.아무것도 없는, 검은 대지(大地).그것이면 충분했다.---“다음, 강진호 학생.”내 차례가 왔다.내 앞에는 텅 빈 검은색 받침대만이 놓여 있었다.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히 깐깐하기로 소문난 외부 심사위원, 이형석 소장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자네, 지금 장난하나? 졸업 작품이 장난이야?”“장난 아닙니다.”“모형도 없고, 패널도 찢어버렸던데. 뭘 보여주겠다는 건가?”“건물이 아니라, '공간'을 보여드리겠습니다.”나는 주머니에서 굵은 유성 매직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준비된 화이트보드가 아닌, 모형 받침대 뒤의 하얀 벽으로 걸어갔다.“건축은 무엇입니까?”나는 벽에 굵은 선 하나를 그었다.찌익-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누군가는 예술이라 하고, 누군가는 공학이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축은 ‘해결’입니다.”나는 빠르게 스케치를 시작했다.20년의 경력. 수천 장의 도면을 그리고, 수백 개의 현장을 지휘했던 손이다.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손끝을 타고 벽면 위로 쏟아져 나왔다.내 손이 움직일 때마다 시스템 창이 번쩍였다.[스킬: ‘속도 스케치(Lv.Max)’가 발동됩니다.][구조적 오차를 자동 보정합니다.]단순한 투시도가 아니었다.건물의 뼈대, 하중의 흐
* 무너진 탑, 그리고 다시 쌓아 올리는 기초쿠르르릉-!세상이 뒤집히는 소리였다.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내 인생의 역작이라 불렸던 ‘센트럴 팰리스’의 B동이 먼지 구름 속으로 주저앉았다. 콘크리트가 비명을 지르고, 철근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강진호 소장님!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현장 관리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팔을 붙잡았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내 눈앞에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3년. 내 영혼을 갈아 넣어 설계한 건물이, 완공을 코앞에 두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피 섞인 침이 뱉어졌다.“...자재.”“예?”“자재를 바꿨어. 태영건설 본사 놈들이.”설계도면 상의 고강도 철근이 아니었다. 하중을 견뎌야 할 기둥에는 규격 미달의 재생 철근이 박혀 있었고, 콘크리트 배합 비율은 물을 탄 듯 묽었다.원가 절감. 그 빌어먹을 단어 하나가 내 꿈을,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속보] 태영건설 센트럴 팰리스 붕괴... 설계 책임자 강진호 소장, 잠적설 돌아현장의 대형 전광판에 뉴스가 뜨고 있었다. 아직 현장에 서 있는 나를 두고 ‘잠적’이라니.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다.지잉- 지잉-.주머니 속 핸드폰이 발작하듯 울렸다. 발신자는 ‘최전무’. 이번 부실 공사를 주도하고 뒷돈을 챙긴, 나를 친형제처럼 아껴준다던 그 인간이었다.“...여보세요.”* 진호야, 뉴스 봤지? 일단 넌 해외로 좀 나가 있어라.“형... 아니, 전무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방서랑 다르게 시공한 건 시공사 쪽이잖아요! 감리단도 매수하고!”* 아이고, 이 친구야. 지금 그게 중요해? 언론이랑 국민들은 씹을 거리가 필요해. 네가 설계도면에서 하중 계산을 실수했다고 입 맞췄으니까, 조용히 있어. 옥바라지는 내가 책임질 테니...뚝.통화를 끊었다. 더 들을 가치도 없었다.나는 폐허가 된 현장을 등지고 걸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비가 콘크리트 가루와 섞여 진흙처럼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