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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독 이름을 적는 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2:20

“내일도 함께 걸으실래요?”

연화는 왕부로 갈라지는 길을 보며 물었다. 왕야가 걸음을 늦췄다.

“네가 나가면.”

“약재를 사러 가는 건 아니에요. 마당부터 걸으시면 돼요.”

“그럼 마당을 걷겠다.”

석영이 뒤에서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마른 잎이 천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연화는 다시 왕야와 걸음을 맞췄다.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왕부 문에 닿을 때까지 둘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

봄 둘째 달 28일 아침, 연화는 왕야가 내민 손을 바로 받지 않았다.

손등은 전보다 덜 말라 있었다. 소매를 걷는 움직임도 편해졌다. 그러나 손톱 밑의 푸른빛은 햇볕 아래에서 더 선명했다.

“어젯밤에는 저림이 어땠어요?”

“줄었다.”

“잠에서 깨지는 않으셨고요?”

“깨지는 않았다.”

연화는 손목 아래에 접은 천을 놓았다. 치료를 받으면 손끝이 따뜻해졌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식어 있었다. 몸에 남은 독이 많은 것인지, 아직 들어오는 길이 있는 것인지 가려야 했다.

맥을 짚는 동안 왕야는 다른 손도 상 위에 놓았다. 연화는 맥의 힘을 확인한 뒤 손끝을 가볍게 눌러 보았다. 전처럼 손가락을 급히 거두지는 않았다.

“오늘은 발도 볼게요.”

왕야가 옷자락을 걷었다. 발목에서 맥을 확인하고 차가운 발끝을 살핀 뒤, 연화는 침통을 열었다.

침이 든 천을 펴는 소리가 났다. 왕야는 등을 기대고 앉아 연화가 치료를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맺히자 연화가 마른 천을 건넸다.

“제가 다래골에 다녀와야겠어요.”

왕야는 천을 받은 손을 멈췄다.

“무엇 때문에.”

“외할머니께 여쭤볼 게 있어요. 독의 이름을 알아야 해요.”

“지금 치료로는 안 되나.”

“도움은 되고 있어요. 하지만 왜 아침마다 다시 손이 차가워지는지 확인해야 해요.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도요.”

왕야가 천으로 이마를 닦았다.

“얼마나 걸리나.”

“마차로 하루예요. 내일 아침에 떠나면 봄 셋째 달 1일에는 돌아올 수 있어요.”

왕야는 창밖을 보았다. 마당을 쓸던 노상의 빗자루 소리가 들렸다.

“석영과 가.”

“왕야는 여기 계셔야 해요. 오래 마차를 타면 발이 더 불편해질 수 있어요.”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연화는 침통 뚜껑을 덮다 말고 왕야를 보았다. 왕야가 천을 접어 상에 놓았다.

“네가 없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연화는 약곳간에 준비해 둘 것과 쉬어야 할 때를 차례로 말했다. 왕야는 중간에 끊지 않았다. 밤글방에서도 늦게까지 앉아 있지 말라는 말에만 잠깐 눈길을 들었다.

“쓰던 건 돌아온 뒤에 마저 쓰세요.”

“알겠다.”

치료를 마친 손끝은 따뜻해져 있었다. 연화는 그 온기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손을 내려놓았다.

◑

다음 날 아침, 석영은 마차 옆에 서서 짐을 세고 있었다.

연화의 침통과 쪽지 묶음, 갈아입을 옷이 든 보퉁이는 작았다. 그 옆에는 두툼한 천과 물통이 놓여 있었다.

“누가 이만큼 챙겼어요?”

“왕야께서요. 산골은 아직 춥다고 하셨습니다.”

석영이 천을 마차 안으로 옮겼다. 연화는 약곳간에서 가져온 작은 주머니를 노상에게 건넸다.

“왕야께서 불편해하시면 혼자 참으시게 두지 마세요. 손이 다시 저린다고 하셔도요.”

“예, 왕비님. 마당을 걸으실 때도 곁에 있겠습니다.”

왕야는 안채에서 나와 마차 앞에 섰다. 긴 소매 밖으로 손끝만 조금 보였다.

“짐은 다 실었나.”

석영이 연화를 보며 웃었다.

“우리 의원님이 직접 확인하시는 중입니다.”

왕야는 연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빠진 것 없나.”

“네. 치료도 마쳤고, 부탁할 것도 다 말씀드렸어요.”

왕야가 마차 문을 열었다. 연화가 올라타려 하자 문틀 위에 손을 대었다. 연화는 머리를 낮춰 안으로 들어간 뒤 돌아보았다.

“다녀올게요, 왕야.”

“길에서 무리하지 마.”

문이 닫히기 전에 왕야가 안쪽 천을 한 번 보았다. 연화는 무릎 위로 천을 끌어 올렸다. 그제야 문이 닫혔다.

마차가 왕부를 벗어나자 석영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저것까지 고르셨습니다. 얇은 건 다시 넣으라고 하시더군요.”

연화는 천의 가장자리를 펴 보았다. 접힌 안쪽에 햇볕을 쬔 냄새가 남아 있었다.

“석영도 덮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산골은 아직 춥다면서요.”

석영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천 끝을 받아 무릎에 놓았다.

◑

수도를 벗어나자 길이 좁아졌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연화는 쪽지 묶음을 눌렀다. 왕야를 처음 진료한 날의 기록부터 다시 읽었다. 가는 맥과 차가운 손발, 오래 남은 푸른 손톱. 먹는 것만 살펴서는 찾을 수 없었던 독이었다.

석영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바람이 들어오자 연화는 종이를 접어 옷 안에 넣었다.

“다래골에는 자주 오셨습니까?”

“어릴 때 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외할머니께서 약방으로 오셨고요.”

“그럼 오랜만에 뵙겠네요.”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는 궁에 들어간 뒤 다래골에 올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보낸 노을뿌리도 내약원 창고에서 받았다. 자루 끝에 묶인 매듭을 보고서야 누구 손에서 온 것인지 알았다.

연화는 무릎 위의 천을 다시 접었다. 이번에는 받은 것만 기다리지 않고 직접 물을 수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마차가 산길을 돌았다. 낮은 담 너머에서 염소 울음이 들렸다. 집 앞에 선 노인이 긴 막대기로 염소를 몰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거기는 네 밥 없다.”

흰 염소가 고개를 들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염소는 담에 턱을 비비다가 마차 소리에 귀를 세웠다.

연화는 문이 열리자 침통을 품고 내려섰다.

“할머니.”

서 할매가 막대기를 멈췄다. 연화를 위아래로 살피던 눈길이 침통을 받친 손에 머물렀다.

“네 어미 손.”

연화는 침통을 고쳐 안았다.

“저 왔어요.”

할매가 가까이 와서 연화의 손을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를 천천히 쓸어 본 뒤 손바닥을 뒤집었다.

“침을 많이 잡았네.”

연화는 손을 빼지 않았다. 할매는 더 묻지 않고 석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짐부터 들여. 염소가 천을 씹는다.”

석영이 보퉁이를 들어 올렸다.

“먼저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왕부에서—”

“인사하다 물린다.”

흰 염소가 보퉁이 끝을 향해 입을 벌렸다. 석영이 얼른 짐을 등 뒤로 옮겼다.

◑

부엌에서는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서 할매가 밥상을 내놓는 동안 연화는 왕야의 상태를 말했다. 맥이 얼마나 약했는지, 치료 뒤에는 손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빠뜨리지 않으려고 말을 골랐다.

“손톱 밑이 푸르다고?”

“네. 손끝부터 발끝까지 차고요. 밤에 저려서 글을 쓰다가 손을 쉬기도 해요.”

“숨은.”

“평소에는 고른데 몸이 나빠지면 짧아져요. 가까이에서 살펴도 먹은 약 냄새는 뚜렷하지 않았어요.”

할매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음식은 뒤졌고?”

“왕부에서 드시는 걸 확인했어요. 치료를 시작한 뒤에도 같은 증상이 남아요.”

“얼마나 오래된 독으로 봤는데.”

“5년쯤이요.”

할매는 연화가 내민 기록을 받아 들었다. 글자를 읽는 동안 손가락으로 종이 모서리를 문질렀다.

“내일 해 뜨면 뒤에 올라갔다 온다.”

“저도 갈게요.”

“넌 이놈들 못 들어오게 문이나 잘 닫아.”

할매가 열린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염소 한 마리가 부엌 문턱에 앞발을 올리고 있었다.

석영이 밖으로 나가 염소를 밀어냈다. 짐을 내려놓느라 풀어진 띠 끝이 허리 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염소가 그 끝을 물었다.

“그건 먹는 게 아닙니다.”

석영이 띠를 잡았다. 염소는 물고 있던 것을 더 당겼다.

연화가 문 앞에 섰을 때는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먼저 났다. 석영이 끊어진 띠를 들고 염소를 보았다. 염소는 남은 조각을 질겅거리며 턱을 움직였다.

“놓으세요. 삼키면 안 됩니다.”

석영이 손을 내밀자 염소가 담 쪽으로 달아났다. 따라가려던 석영은 급히 허리를 붙잡았다.

할매가 부엌에서 나와 염소 입에서 천 조각을 빼냈다.

“쫓으면 더 달아나.”

연화는 고개를 돌렸다. 석영이 한 손으로 바지 허리를 잡은 채 다른 손에 끊어진 띠를 들고 있었다.

“웃으셔도 됩니다, 왕비님.”

연화는 입술을 누르다가 결국 웃었다.

“왕야께는 말씀 안 드릴게요.”

“왕야께서는 들으셔도 안 웃으실 겁니다. 석영, 염소가 왜 띠를 먹었나. 그렇게 물으시겠죠.”

할매가 천 조각을 석영에게 건넸다.

“밥 먹고 꿰매.”

“오늘 밤은 손으로 버티겠습니다.”

석영은 앉을 때도 허리를 붙잡았다. 밥그릇을 받으려다가 손을 바꾸자 연화가 그릇을 앞에 놓아 주었다.

염소는 닫힌 문 바깥을 코로 밀었다. 석영이 문 쪽을 향해 말했다.

“제 것은 이제 없습니다.”

◑

봄 둘째 달 30일 아침, 서 할매는 바위산에 다녀왔다.

연화가 부엌에서 그릇을 닦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할매는 접은 천을 상에 놓았다. 천 안에는 흰빛이 도는 이끼가 붙은 작은 바위 조각이 있었다.

연화는 손을 닦고 가까이 앉았다.

“흰이끼.”

할매가 천을 펼쳤다.

“네가 본 손톱이 이것 때문이다.”

연화는 바위를 건드리지 않고 살폈다. 마른 표면에 가느다란 흰 조각들이 붙어 있었다. 음식에 섞인 독이라면 나타나야 할 흔적은 왕야에게서 찾기 어려웠다.

“먹는 독이 아니에요?”

“숨으로 든다. 태울 때 들어가는 거야. 음식만 뒤져서는 안 나온다.”

할매는 바위 조각에서 흰 부스러기 하나를 손톱으로 떼어 냈다. 아궁이 앞으로 가서 불 속에 떨어뜨렸다.

불꽃이 잠깐 푸르게 섰다.

연화는 아궁이 가까이 몸을 숙였다. 붉은 불 가운데서 푸른빛이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타는 동안 아주 옅은 단내가 났다.

“타면 저 색이 난다. 눈에 담아 둬. 코로 못 가리면 눈으로 가리는 거다.”

“어디에 숨겨 태우는데요?”

“그건 네가 찾을 일이다. 나는 산에서 자라는 것만 안다.”

연화의 손이 쪽지 묶음 위에서 멈췄다.

“그러면 자는 방도 봐야겠네요.”

“자는 데만 보지 마. 오래 앉는 자리도 봐.”

밤마다 글을 쓴다는 왕야의 말이 떠올랐다. 연화는 숯연필을 꺼냈다.

“손톱이 저렇게 되려면 오래 들이쉰 건가요?”

“5년은 봐야지. 잠깐 맡았다고 그렇게 안 된다.”

할매는 천을 다시 접었다. 연화가 손을 가까이 가져가기 전에 바위 조각을 상 끝으로 옮겼다.

“치료는?”

“독을 땀으로 몰아내고 있어요. 치료 뒤에는 맥이 조금 고르고 손도 따뜻해져요.”

“계속 들어오면 빼도 다시 쌓인다.”

연화는 숯연필 끝을 종이에 댔다.

『흰이끼. 손톱 밑 푸름은 오래 들이쉰 흔적. 들어오는 길부터 끊을 것. 탈 때 불꽃 푸름.』

그 아래에 숨으로 드는 독이라는 말을 따로 적었다. 종이를 넘기는 대신 글씨가 묻어나지 않도록 잠시 기다렸다.

할매가 일어나 선반을 열었다. 붉은 노을뿌리가 든 자루를 꺼내다가 연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눈길이 연화의 머리에서 멎었다.

연화는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할매가 자루를 든 채 다가와 비녀 끝을 보았다. 검게 탄 부분이 창가의 빛을 받고 있었다.

“할머니?”

할매의 입술이 다물렸다. 비녀 쪽으로 들었던 손이 중간에서 내려갔다.

“…그걸 썼구나.”

연화는 머리에 손을 대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할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을뿌리 자루를 상 옆에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할머니, 끝이 이렇게 된 건—”

“밥 식는다.”

할매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을 담은 그릇이 상에 놓이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연화는 손을 머리에서 내렸다. 묻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지만, 문 안쪽에서 보이는 할매의 등은 돌아오지 않았다.

석영이 마당에서 끊어진 띠를 꿰매고 있었다. 염소가 다가오자 바늘 든 손을 높이 올렸다.

연화는 쪽지 위에 손을 올려 바람을 막았다. 지금 왕부에 가져갈 수 있는 답은 독의 이름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서 할매는 노을뿌리 자루를 마차에 실었다.

석영이 받아 들자 할매가 매듭을 다시 당겼다. 전생에 내약원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매듭이었다.

“젖지 않게 둬.”

“네, 할머니.”

연화는 침통을 품고 서 있었다. 할매가 머리 쪽을 볼까 기다렸지만, 이번에는 소매 끝을 만져 보고 손을 놓았다.

“환자만 보지 말고 밥도 먹어.”

“먹고 있어요.”

“그 말은 네 어미도 잘했다.”

연화가 입을 다물자 할매는 마차 쪽으로 등을 밀었다. 석영은 꿰맨 띠를 단단히 여민 채 문을 잡고 있었다.

“염소한테는 인사 안 하십니까?”

연화가 묻자 석영이 담 뒤를 살폈다.

“눈으로 했습니다.”

할매는 마차 문이 닫힐 때까지 곁에 서 있었다. 바퀴가 움직이자 연화는 창가로 몸을 기울였다. 할매는 손을 흔들지 않고 노을뿌리 자루가 놓인 쪽을 가리켰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집으로 돌아갔다.

마차가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석영은 자루가 움직이지 않도록 발치에 받쳐 두었다. 바람에 실려 온 노을뿌리 냄새가 마차 안에 희미하게 남았다.

연화는 옷 안에서 쪽지를 꺼냈다.

왕부에서는 마시는 물과 먹는 것을 먼저 살폈다. 약재를 확인했고, 치료 뒤의 손끝을 기록했다. 그동안 왕야가 숨을 쉬는 자리는 그대로 두었다.

연화는 종이 아래에 따로 적어 둔 말을 보았다.

『숨으로 드는 독.』

‘그럼 왕부 안에서 타는 것이 있다.’

밤글방의 등잔 여섯이 떠올랐다.

(1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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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6화. 이름을 부르는 날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5화. 유 소의를 지키는 날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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