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화는 마차 문을 닫으려던 노상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
공석주는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손잡이를 놓지 않은 손이 조금 떨렸다. 연화가 마차 안을 보자 어의는 시선을 내려 가방의 고리를 만졌다.
“어머니를 아세요?”
공석주의 손가락이 멎었다.
“궁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제 손이 어머니와 닮았나요?”
어의는 대답하기 전에 연화의 손을 다시 보았다. 연화는 소매를 당기지 않고 기다렸다.
“환자 손을 받치는 모양이 닮았습니다.”
공석주는 가방을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왕야께서 쉬셔야 합니다. 들어가 보세요.”
연화는 더 묻지 않았다. 노상이 문을 닫자 마차 안의 얼굴이 가려졌다. 바퀴가 움직이고도 연화는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손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왕야의 몸에 대해서는 병이라는 말만 남겼다.
연화는 돌아서서 안채로 향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쪽 방에 있었다.
◑
봄 둘째 달 25일, 약곳간 선반의 돌배잎 주머니가 가벼워져 있었다.
연화는 주머니 입구를 벌려 남은 잎을 살폈다. 바닥에 부서진 잎이 조금 모여 있었다. 옆에 둔 노을뿌리는 아직 남았지만, 다음 치료를 준비하려면 약재를 더 들여야 했다.
앵두가 비어 있는 바구니를 가져왔다.
“노상 집사님께 말씀드릴까요? 필요한 건 사다 주실 거예요.”
“제가 보고 고를게요. 잎이 오래 묵으면 냄새부터 달라져요.”
연화는 바구니 안에 천을 깔았다. 약재가 섞이지 않도록 작은 주머니도 넣었다.
“다녀오는 동안 쓰던 천만 말려 주세요. 손은 이제 괜찮아요?”
앵두가 손등을 펴 보였다.
“물 닿아도 안 따가워요. 어의 옷이 더 걱정이었는데요.”
붉은 기가 거의 가신 손등을 보고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앵두는 바구니 손잡이를 바로 세워 놓고 창가의 천을 걷으러 갔다.
연화는 침통을 챙겨 마루로 나왔다. 왕야는 서쪽 방문 앞에 앉아 신발을 신고 있었다. 소매가 내려온 손으로 신발 뒤축을 눌렀다가 손을 거두었다.
“어디 가나.”
“약재를 사려고요. 아침 진료를 마치고 나갈 거예요.”
“석영을 데려가.”
왕야는 신발을 다 신은 뒤 상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화가 천을 펼치자 말없이 손목을 내놓았다.
연화는 먼저 얼굴과 입술을 보았다. 방에서 나올 때 숨이 가쁘지는 않았다. 발을 마루에 올려놓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글을 쓰셨어요?”
“썼다.”
“늦게까지요?”
“평소보다 일찍 끝냈다.”
“손이 저려서 그만두신 건가요?”
“네가 쉬라고 해서.”
연화는 펼치던 천의 끝을 눌렀다. 왕야는 손목을 내놓은 채 기다렸다.
“발은 일어나실 때 어땠어요?”
“차다. 아프지는 않았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발끝이 더 불편할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아직 가늘고 빨랐지만, 짚는 동안 끊기듯 약해지는 때는 줄었다.
손끝을 살핀 뒤 발목도 확인했다. 왕야는 연화가 손을 옮길 때마다 옷자락을 조금씩 걷어 주었다. 손톱 밑의 푸른 기는 그대로였고, 발은 손보다 차가웠다.
“오늘은 치료가 끝난 뒤 조금 걸으셔야 해요.”
“얼마나.”
“몸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만요. 숨이 차거나 발이 아프면 바로 쉬고요.”
연화는 왕야의 몸 상태에 맞춰 침 치료를 했다. 침통 뚜껑이 상에 닿는 작은 소리가 났다. 왕야는 움직이지 않았고, 연화가 손을 거둔 뒤에야 소매를 내렸다.
치료를 마치고 땀을 닦는 동안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앵두가 마른 천을 더 가져와 상 끝에 놓았다.
연화는 손끝의 온기를 다시 확인한 뒤 쪽지를 적었다.
『손끝 저림 줄음. 발끝 차가움 남음. 치료 뒤 맥 고름. 걸은 뒤 다시 살필 것.』
왕야가 바구니 쪽을 보았다.
“약재를 사는 데 오래 걸리나.”
“남쪽 약재 가게에 들렀다가 약방에도 가 보려고요.”
“마차를 쓰면 된다.”
연화는 쪽지를 접으며 왕야를 보았다.
“왕야도 걸으셔야 해요.”
왕야의 눈길이 바구니에서 연화에게 돌아왔다.
“함께 가면 되는 건가.”
“걸으실 수 있으면요. 불편하시면 중간에 돌아오셔도 돼요.”
왕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화는 발을 딛는 모습을 살폈다. 이번에도 어느 한쪽으로 몸이 기울지는 않았다.
“갈아입겠다.”
◑
석영은 왕부 문 앞에서 빈손으로 나온 왕야를 보고 웃음을 삼켰다.
왕야는 무늬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 장식도 뺐지만, 소매는 여전히 손등을 덮었다. 석영도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으로 칼을 옷자락 안쪽에 두었다.
“걸어서 가십니까?”
“그렇다.”
“우리 의원님 말씀이면 따라야죠. 제가 바구니를 들겠습니다.”
석영이 손을 내밀자 연화가 바구니를 건넸다. 왕야는 문밖으로 먼저 나가지 않고 연화가 신발을 고쳐 신는 동안 기다렸다.
노상이 문까지 따라왔다.
“마차를 뒤에 보내 둘까요?”
연화는 왕야를 보았다. 오래 걷는 것이 괜찮을지는 길에서 살펴야 했다.
“남문 안쪽에 세워 주세요. 필요하면 탈게요.”
“예, 왕비님.”
왕야는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석영이 노상에게 마차를 기다릴 자리를 알려 주었다.
길에는 햇볕이 고르게 들었다. 연화는 그늘과 볕이 번갈아 드는 쪽을 골라 걸었다. 왕야의 걸음은 크지 않았다. 연화가 가게 앞에서 비켜 설 때도 먼저 지나가지 않았다.
“약재 가게는 남문 안에 있나요?”
석영이 물었다.
“오늘은 남문 밖 가게에 가려고요. 잎을 잘 말리는 곳이 있어요.”
“그럼 제가 길을 압니다. 가죽골을 지나면 되죠.”
연화가 왕야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괜찮다.”
짧은 대답 뒤에도 걸음은 고르게 이어졌다. 연화는 석영이 앞서지 않도록 바구니 쪽으로 손을 내렸다. 석영이 걸음을 늦추고 길의 사람들을 살폈다.
◑
남문을 나서자 냄새가 먼저 달라졌다.
젖은 가죽 냄새가 낮은 담 너머에서 올라왔다. 공방 문 앞에는 손질한 가죽이 걸려 있었고, 처마 아래 놓인 나무틀 사이로 물이 떨어졌다.
좁은 길 양쪽에 집이 붙어 있었다. 연화는 문을 연 공방을 하나씩 지나쳤다. 여섯 곳이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길에 둔 바구니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물은 골목 한가운데 하나였다.
여자가 물통을 내려놓고 줄을 당겼다. 곁에서는 아이들이 돌멩이를 늘어놓고 놀고 있었다. 한 아이가 물통을 피하느라 뒤로 뛰자 다른 아이가 웃으며 팔을 잡았다.
연화는 우물 앞에서 멈췄다.
전생의 열일곱 여름에도 이 물통들이 오갔다. 열꽃병의 첫 환자는 여기서 일하던 가죽 공방 일꾼이었다. 열이 오른 몸으로 우물가에 앉아 있었고, 사흘 뒤에는 피부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처음 궁에 올라온 기록에는 일꾼의 열과 기침만 적혀 있었다. 뒤에 온 기록에는 같은 골목의 환자들이 이어졌다. 연화는 내약원에서 그 종이들을 넘겼다.
수도에서 수천이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때도, 처음 적힌 곳은 가죽골이었다.
“온 의원.”
왕야가 곁에서 불렀다.
연화는 우물에서 눈을 떼었다. 지금 물을 긷는 여자는 팔에 힘을 주고 있었고,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공방 안에서는 일을 마친 사람이 손을 털며 나왔다.
아직 열꽃병이 시작된 때는 아니었다.
“발이 불편하세요?”
연화가 묻자 왕야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멈췄다.”
석영도 바구니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연화는 옷 안에 넣어 둔 쪽지 묶음을 꺼냈다. 담 곁으로 조금 비켜 서서 숯연필을 들었다.
『가죽골. 우물 하나. 여름 셋째 달.』
연화는 아래에 더 적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첫 환자가 나온 공방의 문을 다시 보았다. 젖은 천이 문 안쪽에 걸려 있었다.
왕야가 쪽지 쪽으로 눈길을 내렸다.
“무엇을 적나.”
연화는 종이를 접었다.
“나중에 말할게요.”
왕야는 잠깐 연화를 보았다. 쪽지를 달라고 하지도, 언제 말할 것인지 묻지도 않았다.
물통을 든 여자가 골목으로 나오자 왕야가 연화 쪽으로 한 걸음 옮겨 길을 비웠다. 석영도 바구니를 몸 가까이 당겼다.
“가자.”
연화는 쪽지를 넣고 다시 걸었다. 골목 끝까지 가는 동안 우물 쪽에서 물통 놓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렸다.
◑
약재 가게에서는 돌배잎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연화는 잎의 빛과 냄새를 살피고 부서진 것이 얼마나 섞였는지 확인했다. 왕야는 가게 밖 낮은 의자에 앉았고, 석영이 물건을 받아 바구니에 넣었다.
일을 마치고 나오자 왕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는 동안 발은 어떠셨어요?”
“여전하다.”
“걸을 때는요?”
“아프지 않았다.”
연화는 한 번 더 얼굴을 살폈다. 입술은 마르지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약방까지는 가 보셔도 되겠어요. 거기서 쉬었다 돌아가요.”
왕야는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필요한 건 다 샀나.”
“네.”
“그럼 가자.”
살구골에 닿았을 때 온가 약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온주학은 안쪽에서 약재 서랍을 닫다가 연화를 보고 손에 든 천을 떨어뜨렸다.
“우리 딸 왔구나.”
아버지는 서랍을 끝까지 밀어 넣지도 않고 나왔다. 연화가 웃으며 천을 주워 주자 손등으로 눈가부터 문질렀다.
“또 우세요?”
“먼지가 들어갔다.”
보름이 낮은 의자에서 내려와 연화의 허리를 안았다. 양쪽으로 묶은 머리가 옷에 스쳤다.
“언니, 오늘 자고 가?”
“오늘은 돌아가야 해.”
“아저씨도 왔네.”
보름이 왕야를 올려다보았다. 온주학은 왕야를 보고 허리를 숙이려다가 연화가 건넨 천을 두 손으로 쥐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앉을 곳은 있습니다.”
“잠깐 쉬겠습니다.”
왕야가 아버지에게 답하고 문턱을 넘었다. 연화는 안쪽 진료 자리의 의자를 당겨 주었다. 익숙한 약재 냄새가 났다. 감초를 썰던 칼은 도마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보름은 왕야가 앉자 발치까지 따라갔다.
“오늘도 서랍 놀이 할래요?”
“쉬고 나서.”
“그럼 쉬면서 생각해요. 어려운 걸 낼 거니까.”
석영이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나는 안 끼워 주나?”
“침 놓는 데 쓰는 건 알아요?”
“모르면 배우면 되지.”
보름은 석영의 손을 잡아 서랍 앞으로 데려갔다. 온주학이 물을 가져오는 동안 연화는 왕야의 곁에 앉았다.
“손을 잠깐 주세요.”
왕야가 소매를 걷었다. 걸어온 뒤의 맥을 확인하고 손의 온기를 살폈다. 아침보다 손끝이 따뜻했다. 연화는 확인을 마치고 물잔을 앞으로 밀었다.
“여기서는 충분히 쉬어요. 갈 때 불편하시면 마차를 타고요.”
왕야는 물잔을 들었다.
“너도 앉아 있어라.”
연화가 약재 바구니를 정리하려던 손을 멈췄다. 왕야는 물을 마신 뒤 옆의 빈 의자를 보았다.
“아버지와 이야기하러 온 것 아닌가.”
온주학이 맞은편에 앉으며 천을 무릎에 놓았다.
“그럼요. 얼굴도 보고 가야죠.”
연화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버지는 왕부에서 먹는 것부터 밤에 춥지는 않은지까지 차례로 물었다. 연화가 대답하는 동안 왕야는 잔을 내려놓고 기다렸다.
약방 문에 함씨의 목소리가 걸린 것은 그때였다.
“연화 왔다면서?”
함씨는 떡 접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연화를 보자 접시부터 내밀었다.
“얼굴 보러 나오지도 않고. 가깝게 살면서 이래도 돼?”
“지금 떡집에도 가려고 했어요.”
“그 말은 떡 받아 놓고 하는 거지.”
연화가 접시를 받자 함씨는 의자에 앉은 왕야를 보았다. 혼례 때 멀리서 보았던 얼굴을 확인하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신랑도 같이 왔네.”
왕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앉아. 여긴 일어날 때마다 뒤에 뭐가 걸려.”
함씨는 왕야의 키를 올려다보고 연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연화 신랑이 키만 크네. 손도 좀 쓰지. 저 접시 혼자 들게 해?”
연화가 입을 열려는데 왕야가 접시를 받았다. 두 손으로 받쳐 들자 함씨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같이 먹어. 연화는 일할 때는 배고픈 것도 잊어.”
온주학은 물잔을 입에 댄 채 내려놓지 못했다. 석영이 고개를 돌리자 보름이 옆구리를 찔렀다.
“왜 웃어요?”
“떡이 맛있어 보여서.”
왕야는 접시를 상에 놓고 연화 쪽으로 밀었다. 함씨가 들으라는 듯 덧붙였다.
“많이 걸어왔어요. 앉아서 먹어야 합니다.”
“걸어? 신랑은 안 힘들고?”
“괜찮습니다.”
함씨는 왕야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피더니 물을 더 마시라며 아버지에게 잔을 내밀었다.
연화는 떡을 집었다. 왕야도 연화가 먹는 것을 보고 접시로 손을 옮겼다. 보름은 석영에게 서랍 이름을 물었고, 아버지는 왕야의 빈 잔을 다시 채웠다.
접시가 비어 갈 때까지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돌아갈 무렵 온주학은 문밖까지 나왔다.
보름은 약재 바구니를 들겠다고 했다가 석영이 높이 들어 올리자 손만 흔들었다. 함씨는 떡집으로 돌아가며 다음에는 문 앞에서 부르라고 말했다.
왕야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고 연화 곁에 섰다. 쉬고 난 뒤 첫걸음을 내딛는 데에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남문 안쪽에서 기다리던 마차는 빈 채로 왕부로 돌아갔다. 연화가 더 걸을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왕야가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석영은 약재 바구니를 들고 조금 뒤에서 걸었다. 천에 싸 둔 주머니들이 움직일 때마다 마른 잎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연화는 왕야의 걸음을 살폈다. 약방에 들어가기 전보다 발을 내딛는 움직임이 편했다. 긴 소매 아래의 손도 힘을 주어 움켜쥐고 있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도 발이 어떠신지 말씀해 주세요.”
“알겠다.”
“오늘 편해졌다고 오래 서 계시면 안 돼요.”
왕야는 앞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도 시선을 길로 돌렸다. 왕부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지나가는 수레를 피하려고 둘이 나란히 비켜 섰다.
수레가 지나간 뒤 왕야가 다시 걸었다.
“연화.”
연화는 옮기려던 발을 잠깐 늦췄다. 온 의원도, 아내도 아닌 이름이었다. 왕야의 옆얼굴은 그대로 앞을 향해 있었다.
“걸으라는 말, 맞았다. 발이 덜 차다.”
연화는 대답을 못 하고 걸음만 맞췄다.
(9화 끝)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