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연화는 은잠을 등잔에서 조금 멀리 떼었다.
빛이 닿지 않아도 검게 탄 끝은 그대로였다. 손톱으로 살짝 문질러 보았지만 벗겨지는 것은 없었다.
아래층에서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났다. 이어 보름이 물을 달라고 웅얼거렸다. 연화는 은잠을 내려놓고 사다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버지, 손은 괜찮으세요?”
“괜찮다. 너도 얼른 자.”
대답 뒤에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다친 손으로도 보름의 물을 챙기고 있었다.
연화는 다시 제 손목을 보았다. 더 짚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대신 침통 아래 두었던 종이를 펴고 빈 뒷면에 날짜를 적었다.
겨울 셋째 달 20일.
숯연필 끝이 종이에 작은 가루를 남겼다. 연화는 그 아래에 의녀 선발 날짜를 쓰려다 멈췄다. 손바닥으로 종이를 가리고 잠시 앉아 있었다.
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달라질 일이 있었다.
그러나 궁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 어머니의 죽음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다.
연화는 종이를 접었다. 은잠을 다시 머리에 꽂고, 침통을 이불 가까이 당겨 두었다.
◑
다음 날 아침, 보름은 약재 서랍 앞에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언니, 봐 봐.”
연화가 다가가자 보름은 혀로 앞니를 밀었다. 이가 조금 움직였다.
“어제보다 더 흔들려.”
“손으로 자꾸 만지지는 마.”
“손으로 안 했어. 혀로 했지.”
보름은 대답하고도 다시 혀를 가져갔다. 연화가 가만히 보고 있자 입을 다물었다.
도마 앞에 앉은 아버지가 웃었다. 다친 손가락에는 어제 감아 준 천이 남아 있었다. 칼은 옆에 내려놓았고, 오늘은 약재를 골라내는 중이었다.
연화는 아버지 손부터 확인했다. 천이 젖지 않았고, 손가락을 굽힐 때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늘도 칼은 제가 쓸게요.”
“네가 어제부터 내 일을 다 가져가는구나.”
“손이 나을 때까지만요.”
연화는 도마를 제 쪽으로 옮겼다. 감초를 썰자 마른 조각이 칼 옆으로 모였다. 보름은 흔들리는 이를 잊었는지 옆에 앉아 조각을 바구니에 담았다.
문밖에서 수레가 지나갔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멀어지자 아버지가 장부를 펼쳤다.
“돌배잎이 얼마 안 남았네. 큰길에 나갈 때 가져와야겠다.”
“제가 다녀올게요.”
“바람이 찬데.”
“겨울옷 입으면 돼요.”
아버지는 장부 한쪽에 살 것을 적었다. 연화는 그 손을 보다가 물었다.
“아버지, 의원패는 어디서 받아요?”
숯연필이 멈췄다.
“의원패?”
“약방 말고, 제 이름을 걸고 진료하는 곳을 내려면요.”
아버지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보름도 감초를 담던 손을 멈췄다.
“넌 약방집 딸이라 받을 수가 없다.”
“시험을 잘 봐도요?”
“여자에게는 시험 자리부터 안 내준다. 궁에서 의녀를 뽑을 때 실력을 보는 거지.”
연화는 도마에 남은 가루를 모았다.
내약원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 처음 보는 증세를 만났고, 어머니가 가르쳐 준 침술을 수없이 익혔다. 그곳에서 일한 시간이 전부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올 수가 없었다.
“의녀가 되면 언제 집에 돌아와요?”
보름이 물었다.
아버지는 장부 모서리를 눌렀다.
“궁에서 보내 줘야 돌아오지.”
“그럼 언니는 안 가면 되잖아.”
“뽑으면 가야 한다.”
아버지의 대답이 짧아졌다. 연화는 칼을 도마 옆에 내려놓았다.
“올여름에도 사람을 뽑겠죠.”
“해마다 그러니까.”
“혼인한 여자는 안 뽑고요?”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그렇다만.”
“그냥 물어봤어요.”
아버지는 그냥 들은 얼굴이 아니었다. 연화도 더 묻지 않았다. 보름이 바구니를 안고 서랍으로 가자 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췄다.
“궁에 가기 싫으냐?”
연화는 도마에서 손을 뗐다.
“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짧은 수염을 문질렀다. 한참 뒤,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아직 봄도 안 왔다. 천천히 생각하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다친 손가락을 감싸 쥐는 것을 보고 칼을 더 멀리 치웠다.
문에 달린 작은 방울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짐꾼 하나가 문턱을 넘다가 허리를 굽혔다. 등에 멘 지게가 문설주에 부딪혔다. 아버지가 얼른 일어나 지게를 받았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짐꾼은 대답 대신 배를 안았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고, 입술 가장자리가 창백했다. 연화는 진료 자리의 의자를 당겼다.
“여기 앉으세요.”
짐꾼은 몸을 바로 펴지 못한 채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연화는 얼굴과 숨 쉬는 모습을 먼저 살폈다. 숨은 고르게 이어졌지만, 배가 불편할 때마다 입을 다물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옷깃은 땀에 조금 젖어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아침에 짐을 나르는데 속이 답답하더니, 갈수록 아파서.”
“아침은 드셨어요?”
“급하게 먹었지. 늦으면 일감을 놓치니까.”
먹은 뒤 곧바로 무거운 짐을 나른 모양이었다. 체한 것일 수 있었다. 다만 식은땀이 나는 것을 보고 바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배가 계속 아픈가요, 아팠다가 조금 나아지나요?”
“조금씩 나아졌다가 다시 그래.”
연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씻었다. 아버지가 옆에 깨끗한 천을 놓아 주었다.
“손목 좀 볼게요.”
짐꾼이 팔을 내밀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맥에는 힘이 있었다. 끊기거나 급히 흐트러지는 느낌은 없었다.
연화는 손을 놓고 불편한 곳을 물었다. 짐꾼이 가리킨 곳과 그 주변을 가볍게 눌러 확인하자, 짐꾼은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어느 곳이 더 불편한지 묻는 말에도 또렷하게 답했다.
살핀 것이 처음 짐작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다.
“속이 막혀 불편하신 것 같아요. 침으로 먼저 풀어 볼게요. 다른 데가 아프거나 어지러우면 바로 말씀하세요.”
연화가 침통을 열었다.
가죽 뚜껑이 접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가는 침을 고르자 짐꾼이 의자 팔걸이를 붙들었다.
“많이 아픈가?”
“불편하시면 멈출 수 있어요.”
연화는 처치를 시작했다. 침 두 자리를 살피는 동안에도 짐꾼의 얼굴에서 눈을 오래 떼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게를 문 옆에 세운 뒤 보름을 부엌으로 데려갔다.
끓는 물 소리가 들렸다.
짐꾼의 어깨가 조금씩 내려갔다. 꽉 다물고 있던 입술도 풀렸다. 연화는 다시 어디가 불편한지 물었고, 처음보다 숨을 편하게 쉬는 것을 확인했다.
“좀 낫네.”
짐꾼이 배에서 손을 뗐다.
“등까지 굳는 것 같더니.”
“바로 지게를 지지는 마세요. 여기서 조금 쉬셨다가 가요.”
처치를 마친 연화는 의자를 뒤로 물려 편히 앉게 했다. 보름이 아버지와 함께 물그릇을 가져왔다. 짐꾼은 양손으로 그릇을 받았다.
“이 집 딸이 이렇게 컸구나. 전에는 저 서랍에도 손이 안 닿았는데.”
“지금은 제가 안 닿아요.”
보름이 말했다.
짐꾼은 웃으려다 배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웃어도 불편하지 않은지,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웃었다.
연화는 종이를 당겨 기록했다.
『배 답답함, 식은땀. 맥에 힘 있음. 침 뒤 불편함 줄어듦. 다시 살필 것.』
잠시 쉬고 일어난 짐꾼은 허리를 조심스럽게 폈다. 의자 주위를 걸어 보고는 품에서 돈을 꺼냈다.
“침값이 얼마지?”
“50문이에요.”
짐꾼은 진료 자리에 돈을 세어 놓았다. 연화가 확인하는 동안 아버지는 지게를 문밖까지 옮겨 주었다.
“또 불편하시면 오세요. 심하게 아프면 참지 마시고요.”
짐꾼이 문턱 밖에서 돌아보았다.
“알겠네. 오늘은 짐을 나눠 져야겠어.”
연화는 방울 소리가 멎은 뒤에야 돈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빈 의자를 보며 말했다.
“언제 이렇게 차분해졌냐.”
“급하게 하면 놓치는 게 있으니까요.”
연화는 침통 뚜껑을 닫았다. 아버지는 그 손을 잠깐 바라보다 서랍 앞으로 갔다.
“네 어머니도 그랬다. 환자 앞에서는 내가 불러도 못 듣곤 했지.”
연화의 손가락이 가죽 뚜껑 위에 남았다.
어머니가 누워 있던 방에도 이 침통이 있었다. 어린 연화는 그것만 가져다주면 어머니가 일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침통을 열지 않았다. 대신 연화의 손을 잡았다.
힘이 없는 손이었다. 연화가 손바닥을 받치자 어머니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백둘째 서랍.”
연화는 그때도 서랍을 잘 알았다. 보름처럼 번호를 외웠고, 어머니가 말하면 아버지에게 약재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런 서랍은 없는데, 어느 것을 열어야 하느냐고.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
연화가 불렀다.
“우리 약방 서랍은 전부 100개죠?”
“그렇지.”
“전에 더 있었어요?”
“저 서랍은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대로다.”
연화는 앞줄부터 차례로 보았다. 지워진 숫자를 덧쓴 곳은 있어도, 맨 끝 번호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물었다.
“없는 약재가 있니?”
“아니에요. 한번 세어 보려고요.”
연화는 진료 쪽지를 침통 아래에 넣었다. 어머니가 남긴 말은 그 종이에 적지 않았다.
◑
겨울 셋째 달 22일, 보름의 앞니가 빠졌다.
보름은 아침밥을 먹다 말고 손바닥을 펼쳤다. 작고 하얀 이를 한참 바라보더니 연화를 불렀다.
“언니, 진짜 빠졌어.”
연화는 보름이 내민 이를 받아 보았다. 보름은 앞니가 비어 있는 입으로 자꾸 바람을 내보냈다. 평소처럼 말하려는데 소리가 조금 달랐다.
“이제 큰 이가 나겠네.”
아버지가 손을 씻고 다가왔다.
“아버지가 잘 던져 줄까?”
“높이 던져야 해.”
“지붕까지 던져 주지.”
아버지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이를 받았다. 보름이 마당으로 먼저 달려 나갔다. 연화도 두 사람을 따라 문밖으로 나섰다.
아버지는 지붕 끝을 올려다보고 팔을 뒤로 뺐다. 보름이 옆에서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나, 둘!”
작은 이가 손을 떠났다.
지붕에 닿기 전에 살구나무의 가느다란 가지가 흔들렸다. 하얀 것이 갈라진 가지 사이에 걸렸다.
셋은 말없이 위를 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가지는 움직였지만 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보름이 아버지 옷자락을 잡았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봐.”
“지붕까지 던진다며.”
아버지는 목을 길게 빼고 나무를 보았다. 연화가 옆에서 입술을 누르자 보름이 돌아보았다.
“언니도 봤지?”
“봤어.”
“저기서 이가 나면 어떡해?”
연화는 끝내 웃었다.
“네 이가 나무에서 왜 나.”
“모르잖아.”
보름이 제 입을 가렸다. 아버지는 긴 막대라도 가져오려다가, 높은 곳에 오르지 말라는 연화의 말을 듣고 멈췄다.
“바람이 더 불면 떨어질 거다.”
“그럼 오늘 나무 밑에 아무도 못 가.”
보름은 떨어질 이가 사람 머리에 닿을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마당에 있던 바구니를 가져다가 나무 밑에 놓았다.
“여기 받으면 돼.”
아버지는 바구니 위치를 조금 옮겨 주었다. 셋이 다시 위를 보았지만, 이는 아직 가지 사이에 있었다.
연화는 보름의 머리끈을 묶어 주고 약방으로 들여보냈다. 찬바람 속에 오래 서 있던 아버지에게도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날 보름은 문이 열릴 때마다 나무를 확인했다. 이가 떨어졌느냐고 묻는 말에 아버지는 번번이 밖을 내다보았다.
연화는 둘이 문 앞에 나란히 서 있을 때 서랍을 다시 셌다.
아랫줄부터 윗줄까지 손잡이를 하나씩 짚었다. 오래되어 안쪽으로 밀리는 서랍은 당겨 보고, 번호가 흐린 곳은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100개였다.
옆면에도 뒤편에도 작은 칸은 없었다. 연화가 마지막 서랍을 닫자 보름이 돌아왔다.
“언니, 왜 세어?”
“빠뜨린 게 있나 보려고.”
“내가 세어 줄까?”
“오늘은 다 셌어.”
보름은 빈 앞니를 혀로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서랍에서 손을 떼었다.
어머니는 번호를 잘못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목소리도, 제 손을 놓지 않던 손가락도 기억났다. 연화는 손잡이를 한 번 더 보다가 진료 자리로 돌아왔다.
◑
겨울 셋째 달 23일, 연화는 약재를 살 바구니를 챙겼다.
아버지가 장부에 적어 준 종이와 돈주머니를 함께 넣었다. 보름은 약방 문턱에 앉아 신을 신는 연화를 지켜보았다.
“큰길 가?”
“응. 돌배잎 사러.”
“내 이 떨어졌나 보고 가.”
연화는 문밖에서 살구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있어.”
보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못 들은 척 약재 서랍을 열었다.
연화는 웃음을 남기고 길을 나섰다.
살구골 골목에는 마른 짚 냄새가 났다. 문 앞을 쓸던 사람이 빗자루를 옆으로 비켜 주었다. 세 집 건너 떡집에서는 함씨가 빈 접시를 겹치고 있었다.
“연화야, 어디 가니?”
“약재 사러요.”
“돌아오는 길에 들러. 보름이 먹을 것 좀 싸 줄게.”
“아버지도 같이 드실 수 있게 조금만 주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함씨의 목소리를 뒤로 두고 연화는 큰길로 걸었다.
옷깃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구니를 반대 손으로 옮기자 손끝에 묻은 숯연필 자국이 보였다. 아침에 진료 쪽지를 묶으며 묻은 자국이었다.
궁 바깥에 남을 방법은 찾아야 했다.
혼인하면 선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의원패를 얻거나 황후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말을 알아내더라도, 기록 하나 들고 궁문 앞에 서면 안으로 들여보내 줄 사람조차 없었다.
연화는 돈주머니가 바구니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50문을 받고 환자를 돌보는 일부터 계속할 수는 있었다. 그 사이에 길을 찾아야 했다.
큰길에 가까워졌을 때 사람들의 걸음이 한쪽으로 몰렸다.
수레를 끌던 사람이 바퀴를 길 가장자리로 붙였다. 물건을 고르던 손님들도 가게 앞에서 물러났다. 연화는 바구니를 몸 가까이 당겼다.
호위들이 먼저 지나갔다.
뒤이어 가마가 보였다. 흔들림이 크지 않았고, 창을 가린 천은 조금 걷혀 있었다.
“월강왕 행렬이네.”
옆에 선 사람이 낮게 말했다.
연화의 발이 멈췄다.
월강왕 담해원.
전생에 왕부로 불려 갔던 날도 추웠다. 연화는 의녀의 옷 위에 겉옷을 걸치고, 침통을 품에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곁에는 어의 공석주가 서 있었다.
연화에게 내준 시간은 짧았다. 손목을 받아 들었을 때 맥이 너무 가늘었다. 병세를 묻자 왕부 사람들은 오래 앓았다고 했다.
“독인 것 같아요.”
연화가 말하자 공석주는 손목을 놓게 했다.
“이미 살폈다. 더 말하지 마.”
침통을 열기도 전에 밖으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강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궁에 전해졌다. 병이 깊었다고 했다. 연화가 적은 쪽지에도 결국 병이라는 말이 남았다.
지금 가마 안의 사람은 등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긴 소매가 손을 덮었다. 창이 좁아 얼굴 전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턱을 조금 돌리는 움직임은 또렷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연화는 바구니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4년 뒤에 죽는 사람.’
가마는 연화 앞을 지나갔다. 창을 가린 천이 흔들리며 내려왔다. 연화는 마지막 호위가 지나갈 때까지 길가에 서 있었다.
약재를 사러 가던 사람들이 다시 움직였다. 수레바퀴가 길 한가운데로 돌아왔고, 가게 주인이 손님을 불렀다.
연화는 한 걸음 늦게 큰길로 들어섰다. 서랍을 세던 손가락으로 바구니 손잡이를 짚었다.
그 겨울까지 4년. 이번에는 침통을 열 시간이 있었다.
(2화 끝)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