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3화. 손톱을 보는 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1:26

연화는 바구니를 내려놓지 않은 채 약재 가게 앞에 섰다.

행렬이 지나간 길에는 수레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게 주인이 돌배잎을 꺼내 놓고도 연화가 돌아보지 않자 한 번 더 불렀다.

“온가 약방에서 왔지? 이만큼 가져가면 되나?”

“네. 아버지가 적어 주셨어요.”

연화는 바구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힌 곳을 펴는 동안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가마 창 안으로 보였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아직 침상에 누워 있지 않았다. 누가 손목을 내주지 못하게 막고 있지도 않았다.

연화는 약재를 받아 바구니에 담았다.

“장날에도 나오니?”

“필요한 게 있으면요.”

“봄 첫 장이라 사람 많을 거다. 동생 데리고 오면 손 잘 잡고.”

연화는 돈을 세어 건넸다. 가게를 나온 뒤에는 행렬이 간 쪽을 더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살구골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집에 닿자 보름이 문턱에서 일어났다.

“언니, 내 이 떨어졌어.”

보름의 손바닥에 작은 이가 놓여 있었다. 나무 아래 두었던 바구니에서 찾았다며, 먼지가 묻은 손을 연화에게 내밀었다.

연화는 바구니를 아버지에게 건네고 보름의 손부터 씻겼다.

◑

봄 첫째 달 2일, 장터로 가는 길에는 빈 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이어졌다.

보름은 앞니가 빠진 자리를 혀로 만지다가 연화의 손을 잡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자락이 다리에 감겼다.

“언니, 오늘도 돌배잎 사?”

“오늘은 아버지 침통 고칠 가죽을 볼 거야.”

“언니 것도 고쳐?”

“내 건 아직 괜찮아.”

연화는 허리에 매단 침통을 손으로 눌렀다. 어머니가 쓰던 가죽은 접히는 자리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뚜껑을 묶는 끈만 새것으로 바꾸어 둔 참이었다.

장터 입구에는 떡집 함씨가 먼저 와 있었다. 넓은 판 위에 접시를 놓고, 그 옆에 물건을 싸 줄 천을 쌓아 두었다.

“둘이 왔니? 아버지는?”

“약방 보세요.”

“잘했다. 보름아, 이 빠진 데 좀 보자.”

보름이 입을 다물었다.

“아주머니도 웃을 거잖아요.”

“안 웃는다.”

함씨는 그렇게 말하고도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보름은 연화 뒤로 반쯤 숨었다.

연화가 빈 접시를 판 안쪽으로 옮겨 주자 함씨는 바람에 들리는 천 끝을 그 아래 눌렀다.

“저 끝에서 가죽 팔아. 사람 몰리기 전에 보고 와.”

“다녀올게요.”

“오는 길에 떡 가져가고.”

보름의 손이 연화 손 안에서 조금 움직였다.

“들었어?”

“들었어. 먼저 살 것부터 보고.”

장터 안쪽에서는 짐 내려놓는 소리와 물건값을 묻는 목소리가 섞였다. 연화는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보름을 제 쪽으로 당겼다. 겨울옷을 벗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벌써 얇은 겉옷을 걸친 사람도 있었다.

가죽을 고르는 동안 보름은 옆 가게에 걸린 끈을 구경했다. 연화는 침통에 쓸 것을 골라 돈주머니에 든 돈을 셌다. 아버지가 맡긴 돈과 제 침값으로 받은 돈은 따로 묶어 두었다.

돌아서는 순간, 큰길 쪽에서 길을 비켜 달라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물건을 들고 가게 앞으로 붙었다. 연화도 보름을 데리고 길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호위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뒤에서 함씨가 손을 흔들었다.

“연화야, 여기로 와. 애 데리고 서 있기엔 좁다.”

연화는 보름과 함께 떡판 곁으로 갔다. 함씨는 미리 싸 둔 떡을 내밀려다가 길 쪽을 돌아보았다.

“어르신, 그쪽 말고 이리 오세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길 가운데에 서 있었다. 함씨가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노인은 함씨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곧바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연화는 떡을 받으려던 손을 내렸다.

노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입을 벌리고 있는데도 숨을 편히 쉬지 못했다. 지팡이를 쥔 손이 흔들렸다.

“어르신?”

함씨가 판 밖으로 나오기 전에 노인의 무릎이 꺾였다.

지팡이가 바닥을 치고 굴렀다. 누군가 노인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몸이 기우는 것을 붙잡지는 못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급히 물러났다.

연화는 보름의 손을 함씨에게 넘겼다.

“보름이 좀 봐 주세요.”

“연화야!”

연화는 이미 길로 나가고 있었다.

큰 덩치의 호위가 팔을 뻗어 사람들을 막았다. 칼을 뽑지는 않았지만, 길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마다 손짓으로 물렸다.

“물러나세요. 뒤에서 밀지 마세요.”

연화도 그 팔 앞에서 멈췄다.

“환자를 볼게요.”

호위가 연화의 얼굴과 허리의 침통을 차례로 보았다.

“의원이냐?”

“온가 약방에서 진료해요. 저분 숨부터 봐야 해요.”

뒤에서 함씨가 말했다.

“우리 약방 딸이에요. 제가 아는 애예요.”

호위는 쓰러진 노인을 돌아보았다. 노인의 입술에 푸른 기가 돌고 있었다. 호위가 팔을 거두고 옆으로 비켰다.

“사람은 내가 막을 테니 들어가.”

연화는 노인 곁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의 찬 기운이 치마를 통해 올라왔다.

노인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연화를 곧바로 보지는 못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에 힘이 들어갔다. 옷깃 아래가 땀으로 젖어 있었고, 입술 색은 가까이서 보니 더 좋지 않았다.

“제 말 들리세요?”

노인의 눈이 연화 쪽으로 움직였다. 대답하려다가 거친 숨만 내놓았다.

함씨가 무릎을 굽히고 다가왔다.

“아침에는 멀쩡하셨어. 떡 사러 오신다고 했는데.”

연화는 노인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살폈다. 숨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지나치게 힘을 쓰고 있었다.

‘어딘가 막혔다.’

지금은 그 막힌 숨을 풀어 주는 것이 먼저였다.

연화가 손을 들어 함씨를 잠시 멈추게 했다.

“잠깐만요. 얼굴 볼 수 있게 조금만 비켜 주세요.”

함씨는 바로 뒤로 물러났다. 연화는 노인의 목을 짚어 반응을 확인하고 손목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손바닥이 연화 손등에 닿았다.

맥이 손끝에 잡혔다. 흐름이 고르지 못했다. 숨이 더 거칠어질 때마다 손목에도 힘이 몰렸다.

연화는 노인의 눈을 다시 보았다.

“침으로 막힌 데를 풀어 볼게요. 제 말 들리시면 눈을 한번 감았다 떠 주세요.”

노인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침통 끈을 풀자 가죽 뚜껑이 작게 울렸다. 연화는 가는 침을 꺼내면서도 노인의 얼굴을 살폈다. 손목에서 확인한 흐름과 숨 쉬는 모습이 어긋나지 않는지 다시 보았다.

누군가 뒤에서 물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입에 넣지 마세요.”

연화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했다. 호위가 그 말을 받아 주변 사람들에게 전했다.

어깨샘과 열손끝을 살피고 처치를 시작했다. 소매가 방해되지 않도록 정리한 뒤, 침을 놓는 동안에는 말을 줄였다. 침통 안에서 가는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노인의 손이 한 번 움찔했다.

연화는 손을 멈추고 얼굴을 보았다. 노인의 눈이 연화를 향해 있었다. 아직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지만, 처음처럼 시선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여기 있어요.”

연화는 짧게 말하고 처치를 이어 갔다.

주변의 말소리가 낮아졌다. 가마가 멈춘 것은 알았지만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노인의 옷깃에 맺힌 땀이 턱 아래로 흘렀다.

깨끗한 천이 연화의 무릎 옆에 놓였다.

연화는 천을 집어 노인의 땀을 닦았다. 조금 전까지 꽉 올라가 있던 어깨가 내려왔다. 입을 벌린 채 힘겹게 들이쉬던 숨이 잠시 끊기는 듯하더니, 노인이 크게 숨을 쉬었다.

함씨가 손으로 제 가슴을 눌렀다.

“아이고.”

연화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손목을 다시 받아 들고, 숨이 이어지는 동안 맥을 확인했다.

노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입술에는 조금씩 색이 돌아왔다.

“이제 제 얼굴 보이세요?”

노인이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가슴은 어떠세요?”

“아까보다…… 낫네.”

목소리가 작았다. 그래도 말끝까지 숨이 이어졌다.

연화는 처치를 마친 뒤 침을 정리했다. 함씨가 옆에서 노인을 부축하려고 하자 먼저 눈을 맞췄다.

“서두르지 말고 여기서 쉬게 해 주세요.”

“그래. 여기 앉을 것 가져올게.”

“저분이 쓸 의자를 가져와.”

뒤쪽에서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가마 문이 열려 있었고, 길 한쪽에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고 긴 소매가 손을 덮었다.

가마 창 안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월강왕이었다.

연화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천을 접었다. 호위가 근처 가게에서 의자를 받아 왔다. 왕야는 말없이 자리를 비켜 노인이 앉을 곳을 내주었다.

노인이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연화는 손목을 놓지 않았다. 의자에 앉고 나서 숨이 다시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손을 뗐다.

“바로 걷지는 마세요. 조금 쉬고 약방에 들러 주세요. 다시 살필게요.”

“폐를 끼쳤구나.”

“먼저 숨이 편해져야죠.”

노인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아까처럼 지팡이를 놓칠 만큼은 아니었다.

◑

보름이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

끝에 묻은 먼지를 함씨가 준 천으로 닦고 있었다. 지팡이가 제 키보다 높아 자꾸 옆으로 기울었다.

“언니, 이거 여기 떨어졌어.”

“잘 가져왔네.”

보름은 노인 앞에 지팡이를 세웠다.

“지금은 제가 들고 있을게요.”

노인이 빈 앞니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럼 부탁 좀 하마.”

“집까지 가져다드릴까요?”

“집은 멀어서 네 팔이 아플 텐데.”

보름이 지팡이를 다른 손으로 옮겼다. 벌써 팔이 조금 아픈 모양이었다.

함씨가 보름 뒤에 작은 의자를 놓아 주었다.

“여기 앉아서 지켜. 놓치지 말고.”

보름은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지팡이를 붙들었다. 노인이 자세를 바꾸면 지팡이도 그쪽으로 기울였다.

연화는 길 가장자리에서 손을 씻었다. 물을 따라 주던 가게 사람이 빈 그릇을 받아 들었다.

“아까 그 천은 이 집에서 주셨나요?”

“천은 저쪽에서 가져왔어.”

가게 사람이 왕야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연화는 접어 둔 천을 보았다. 약방에서 쓰는 것보다 촘촘하고 부드러웠다.

말을 건네기 전에 함씨가 연화를 끌어안았다.

“우리 연화가 사람을 살렸네.”

함씨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연화는 젖은 손을 바깥으로 뻗은 채 붙잡혀 있었다.

“아주머니, 아직 다시 봐야 해요.”

“알아. 그래도 아까 저분 얼굴이 어땠는데.”

함씨는 연화를 놓고 장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연화가 사람을 살렸다! 살구골 온가 약방 딸이야!”

연화는 함씨의 소매를 가볍게 당겼다.

“어르신 쉬셔야 해요.”

함씨가 곧바로 입을 가렸다. 주변 사람들은 웃었지만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길을 막던 호위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노인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연화는 다시 다가가 얼굴색과 숨을 살폈다. 노인이 눈을 뜨자 어지럽지 않은지 묻고 손목을 짚었다.

급히 걸음을 옮길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까보다 맥이 고르게 이어졌다.

연화는 침통 아래 넣어 둔 종이를 꺼냈다. 허리를 굽힌 채 숯연필로 짧게 적었다.

『숨 거침. 입술 푸름. 침 뒤 숨 편해짐. 쉰 뒤 다시 살필 것.』

보름이 종이를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저것도 아버지한테 보여 줘?”

“응. 어르신이 약방에 오시면 아버지도 알아야 하니까.”

“내가 지팡이 찾은 건?”

연화는 숯연필을 멈추고 보름을 보았다.

“그건 집에 가서 네가 말씀드려.”

보름은 만족한 얼굴로 지팡이를 당겨 안았다.

연화가 종이를 접을 때 노인이 품을 더듬었다. 돈주머니를 꺼내려는 손이 아직 조금 떨렸다.

“얼마를 주면 되니?”

“약방에 오셔서 주셔도 돼요.”

“그래도 침을 맞았으니.”

연화가 대답하기 전에 긴 소매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왕야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없었다. 연화가 일어나자 왕야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은이 놓여 있었다.

“삯이다.”

은 1냥이었다.

연화는 은보다 먼저 손톱을 보았다.

손가락은 길고 손등은 희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톱 밑에 푸르스름한 빛이 남아 있었다. 노인의 입술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손끝마다 비슷하게 번져 있었고, 햇빛 아래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연화는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침값은 50문이에요.”

“받아.”

“받을 만큼만 받을게요.”

왕야의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큰 덩치의 호위가 왕야 옆으로 다가왔다. 연화가 은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제 돈주머니를 꺼냈다.

“잔돈이 필요하신 거죠? 제가 바꿔 드리겠습니다.”

왕야가 짧게 말했다.

“석영.”

호위가 돈주머니를 든 채 멈췄다.

“50문.”

“예.”

석영이 돈을 세어 내밀었다. 연화는 손을 펴서 그중 50문만 집어 들었다. 돈이 손바닥에 닿는 동안에도 시선은 왕야의 손끝으로 돌아갔다.

왕야가 은을 거두려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굽혀졌다 펴지는 것이 조금 느렸다.

연화는 돈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짚어 볼 수 있다.’

바로 뒤에 의자가 있었다. 침통도 손 닿는 곳에 있었다. 다만 이 사람을 멈춰 세울 말이 필요했다.

연화는 왕야를 올려다보았다.

“왕야, 밤에 손끝이 저리시죠. 아침엔 발이 차고요.”

석영의 손이 칼자루를 잡았다.

돈주머니 입구가 열린 채 허리 옆에 매달렸다. 연화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왕야의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손톱을 보았다.

왕야가 석영 쪽으로 손을 조금 들었다. 석영은 칼자루를 놓았지만 연화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장터에서는 다시 물건값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보름은 지팡이를 안은 채 연화와 왕야를 번갈아 보았다.

왕야가 소매를 내려 손을 덮었다. 표정은 그대로였다.

“…누구냐.”

“살구골 온가 약방 딸입니다.”

왕야는 한 박자 뒤에 말했다.

“내일 가지.”

(3화 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40화. 약속을 다시 쓰는 날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9화. 의원패를 받는 날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8화. 자란궁 문이 닫히는 날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7화. 황제 앞에 서는 날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6화. 이름을 부르는 날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5화. 유 소의를 지키는 날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