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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왕부 문을 넘는 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1:47

연화는 덧쓴 날짜가 번지지 않도록 종이를 펼쳐 두었다. 아버지가 책상 한쪽에 놓인 물그릇을 치웠다. 보름은 종이 끝을 누르던 숯연필을 집어 서랍 위에 올렸다.

“그건 어디에 둘 거야?”

“침통이랑 같이.”

연화는 손도장이 마른 것을 확인하고 종이를 접었다. 가죽 침통을 넣어 둔 함 안에 함께 내려놓자 아버지가 뚜껑을 닫아 주었다.

◑

봄 둘째 달 15일 아침, 그 함은 다락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연화는 새로 지은 옷의 소매를 펴고 함을 들었다. 평소보다 천이 두꺼워 팔을 굽힐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사다리 아래에서는 보름이 아버지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버지, 여기 또 접혔어.”

“펴 놓으면 다시 접히는구나.”

연화가 내려가 옷깃을 바로잡았다. 아버지는 딸의 옷을 한참 보다가 머리로 눈을 옮겼다. 검은 머리는 늘 하던 대로 하나로 묶었고, 어머니의 은잠으로 고정했다.

“새 옷은 잘 맞네.”

아버지는 그 말만 하고 함을 받아 들었다.

문밖에서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보름이 먼저 나가려다 문턱 앞에서 발을 모았다. 오늘은 뛰지 말라는 말을 아침부터 들은 탓이었다.

연화가 문을 열자 왕야가 마차 곁에 서 있었다. 짙은 혼례 옷을 입었는데도 소매는 여전히 손을 덮었다. 석영은 마차 문을 열어 둔 채 보름을 보고 웃었다.

“오늘은 서랍 말고 챙길 게 많겠네.”

“언니 함은 아버지가 챙겼어요. 저는 이거.”

보름이 작은 보자기를 들어 보였다. 안에서 진료 쪽지를 묶어 둔 끈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왕야는 연화를 보았다.

“준비됐나.”

“네. 아버지랑 보름도 같이 타도 되죠?”

“그러려고 큰 걸 가져왔다.”

연화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앉을 자리가 넉넉했다. 아버지가 함을 안에 넣는 동안 왕야는 마차 앞에 선 채 기다렸다. 손을 재촉해서 뻗거나 먼저 올라타지 않았다.

연화는 혼례 옷의 자락을 모아 올라갔다. 보름이 곁에 앉고, 아버지가 함을 무릎 위에 놓았다. 왕야는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가 움직이자 아버지의 손이 함 모서리를 눌렀다.

연화는 창을 조금 열었다. 약방 간판이 뒤로 물러났다. 감초를 썰고 남은 달고 마른 냄새가 아직 소매에 배어 있었다.

◑

왕부 문 앞에는 노인이 나와 있었다.

허리에 찬 열쇠 꾸러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딪쳤다. 마른 손으로 옷자락을 정리한 노인은 왕야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연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왕부 살림을 맡고 있는 노상입니다. 왕비님.”

처음 듣는 호칭에 연화는 내리던 발을 잠깐 멈췄다. 노상은 마차 발판이 흔들리지 않도록 한쪽을 눌러 주었다.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잘 부탁드려요.”

연화가 땅을 밟자 안쪽에서 함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옷 밟지 마라. 오늘은 내가 잡아 줄게.”

함씨는 벌써 왕부 안에 와 있었다. 연화의 뒤로 돌아가 끌리는 옷자락을 걷어 주며 아버지에게 눈짓했다.

“아버지가 울면 신부도 울어. 오늘만 참아 봐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함을 고쳐 안았다.

왕부 마당은 약방 앞보다 넓었다. 바깥채 처마 아래에 호위들이 서 있었고, 안채로 이어지는 길은 깨끗하게 쓸려 있었다. 석영이 보름의 보자기를 받아 들며 길을 가리켰다.

“돌이 들뜬 데가 있으니 천천히 와.”

보름은 발밑을 보느라 왕부 구경을 잠시 미뤘다.

혼례 자리는 안채 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앉은 사람은 약방 식구와 함씨, 왕부 사람들이 다였다. 연화는 왕야와 마주 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새 옷의 소매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손을 모으자 맞은편의 왕야도 천천히 몸을 낮췄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아버지는 무릎 위에 놓은 함을 보고 있었다. 보름이 그 옆에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인사를 마친 뒤 왕야가 노상에게 말했다.

“약재와 진료에 관한 일은 왕비에게 물어라.”

“예, 왕야.”

“왕비가 필요한 것을 말하면 먼저 갖춰 주고.”

연화는 왕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상은 이미 허리의 열쇠 꾸러미에서 작은 열쇠를 골라 쥐고 있었다.

“약곳간은 비워 두었습니다. 직접 보시고 고칠 곳을 알려 주세요.”

연화가 답하기 전에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자가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곧게 편 허리, 흐트러지지 않는 옷자락, 돌을 밟아도 거의 나지 않는 소리.

연화는 손에 쥔 소매를 놓았다.

채란이었다.

전생에 내약원 앞 복도를 지나던 걸음과 같았다. 의녀들이 벽 쪽으로 물러나면 채란은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다. 그 뒤에서야 사람들은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 채란의 손에는 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황후께서 혼례를 축하하셨습니다.”

채란은 왕야에게 인사하고 연화를 보았다. 입가에는 작게 웃음이 걸려 있었다.

“왕비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노상이 상자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고운 천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연화는 손을 앞으로 모았다.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 주세요.”

“황후께서도 왕비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날을 정해 보내면 내가 답하겠다.”

왕야의 말에 채란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채란은 물러나면서 안채 쪽을 보았다. 열린 문 안과 마루 끝, 노상이 손에 쥔 열쇠까지 차례로 시선이 닿았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연화는 그 눈길을 따라 문 쪽을 보았다가 다시 채란에게 눈을 돌렸다.

왕야가 한 걸음 옮겨 연화 곁에 섰다. 채란은 두 사람에게 다시 인사한 뒤 바깥채로 나갔다. 노상이 선물 상자를 든 채 뒤따랐다.

마당에 남은 보름이 연화의 소매를 당겼다.

“언니, 나 저 천 만져 봐도 돼?”

“나중에 같이 보자.”

연화는 보름의 손을 소매에서 풀어 쥐었다. 왕야는 채란이 나간 문을 한 번 보고 자리에 앉았다.

◑

상을 물릴 무렵, 함씨가 떡 접시를 들고 연화를 찾아왔다.

“이것부터 먹어.”

“아까 먹었어요.”

“인사하다 말하다 한 입 먹은 게 다지. 내가 봤어.”

함씨는 접시를 연화 손에 얹었다. 혼례 옷의 넓은 소매가 접시 아래로 늘어지자 보름이 얼른 받쳐 주었다.

“함 아주머니, 저도 먹어도 돼요?”

“네 언니 먹고 남으면.”

보름은 입을 다물고 접시를 보았다. 연화가 떡을 집어 보름에게 주자 함씨가 바로 다른 떡을 빈자리에 올렸다.

“그럴 줄 알고 넉넉하게 가져왔지.”

연화는 결국 마루 끝에 앉았다. 함씨는 연화가 떡을 먹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는 약곳간으로 옮길 함을 노상에게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무겁지는 않습니다. 제가 들고 가면 돼요.”

“안에 깨질 것도 있을 테니 제가 조심히 옮기겠습니다.”

“깨질 건 없는데, 침통이 오래된 거라.”

연화는 떡을 삼키고 다가갔다.

“아버지, 어디에 두는지 같이 보실래요?”

아버지는 그제야 함을 노상에게 건넸다.

안채 마루를 지나 동쪽 문 앞에 이르자 작은 시녀가 급히 몸을 세웠다. 볼이 붉었고, 두 손에 든 수건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왕비님, 저는 앵두예요. 방을 먼저 보여 드리라고 하셔서요.”

앵두는 문을 열다가 연화의 머리를 보고 손을 멈췄다.

“왕비님, 그게요— 새 비녀 꺼내 드릴까요?”

시선이 은잠 끝에 닿아 있었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 쓸 거예요.”

“네. 그게, 예쁘다는 뜻이었어요. 새 옷에도 잘 어울리고요.”

앵두는 말을 끝내자마자 문을 활짝 열었다.

연화는 웃음을 누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접어 둔 이불과 낮은 책상, 옷을 넣을 장이 보였다. 창을 열면 가운데 마루가 내다보였다.

“이쪽이 왕비님 방이고요. 마루 건너 서쪽은 왕야 방이에요.”

아버지가 마루 건너편을 보았다. 닫힌 문을 확인한 뒤에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연화는 보름에게서 보자기를 받아 책상 위에 놓았다. 보름은 방 한가운데 서서 양팔을 벌렸다.

“언니 다락보다 넓다.”

“여기서는 천장에 머리 부딪칠 일은 없겠네.”

“아버지만 부딪쳤잖아.”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앵두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노상은 안채 옆의 약곳간을 열어 주었다. 빈 선반과 낮은 작업대가 있었고, 안쪽 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함을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렸다.

연화는 함에서 침통과 진료 약속을 꺼냈다. 종이는 작업대의 서랍 안쪽에 넣고, 침통은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었다.

아버지는 열린 함 안을 한 번 더 살폈다.

“빠뜨린 건 없니?”

“없어요. 쓰다가 필요한 게 생기면 제가 가지러 갈게요.”

아버지의 손이 함 뚜껑에서 떨어졌다.

“그래. 집은 그대로 있으니까.”

보름은 빈 선반을 보며 번호를 붙일 자리를 골랐다. 연화는 먼저 약재를 들인 뒤에 하자고 말하고 손을 잡아 데리고 나왔다.

약방 식구가 돌아갈 때 왕야도 바깥문까지 나왔다. 함씨는 빈 떡 접시를 챙겼고, 아버지는 아침보다 가벼워진 손으로 보름을 붙들었다.

연화는 마차 문이 닫힐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보름이 창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보름의 팔이 밖으로 너무 나가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자 연화는 왕부 안으로 돌아섰다.

왕야는 먼저 들어가지 않고 곁에 서 있었다.

“약곳간은 괜찮나.”

“네. 창이 있어서 좋아요.”

“모자라는 것은 노상에게 말해라.”

연화는 왕야의 소매 끝을 보았다. 아침보다 손을 꺼내는 일이 적었다.

“오늘 많이 서 계셨죠. 저녁에는 진료부터 할게요.”

“알겠다.”

◑

해가 기울자 노상이 등잔을 챙겨 들었다.

연화는 약곳간에서 손을 닦고 나오다가 열쇠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가세요?”

“밤글방에 불을 켜러 갑니다.”

왕야가 밤마다 글을 쓴다는 곳이었다. 연화는 아직 보지 못한 별당 쪽을 보았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안채 뒤라 길은 가깝습니다.”

마루 끝에서 내려가자 별당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노상이 문을 열었고 연화는 문턱을 넘기 전에 안을 살폈다.

벽에는 책이 가득했다. 큰 책상 위에는 붓과 종이가 놓여 있었고, 등잔은 모두 여섯이었다. 앉을 자리 가까이에 불빛이 고르게 닿도록 놓여 있었다.

노상이 등잔을 손질하는 동안 연화는 책상 옆에 섰다. 펼쳐진 글은 없었다. 접어 둔 종이 위에 손이 가지 않도록 소매를 모았다.

등잔에 불이 붙자 기름 냄새가 났다.

익숙한 냄새 끝에 아주 옅은 단내가 섞였다. 연화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등잔을 보았다.

“여기는 늘 이 기름을 쓰세요?”

“예. 20년 거래한 범씨 기름입니다.”

노상은 등잔 밑을 천으로 닦았다.

“왕야가 어릴 때부터 저희 집에 기름을 댔지요. 늦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다른 방도 이 기름을 쓰나요?”

“왕부에서 쓰는 건 같습니다. 밤글방은 늦게까지 불을 켜니 자주 채우고요.”

연화는 손끝에 묻은 숯가루를 털었다. 낮에 보자기에서 꺼낸 쪽지 한 장을 펼쳐 짧게 적었다.

『밤글방 등잔 기름에서 옅은 단내. 다른 방도 같은 기름 사용.』

냄새만으로 나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 닫혀 있던 방의 냄새인지, 기름 자체에서 나는 것인지 더 살펴야 했다.

노상이 남은 등잔에도 불을 붙였다.

“불빛이 약합니까?”

“아니요. 왕야는 여기 오래 앉아 계세요?”

“몸이 편한 날은 오래 계십니다. 제가 쉬시라고 말씀드려도 글 한 줄만 더 쓰겠다고 하시지요.”

연화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팔을 놓는 부분이 반들반들했다.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좋겠어요.”

“왕비님이 말씀해 주시면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노상은 빈 기름통을 들고 문으로 향했다. 연화도 쪽지를 접어 따라 나왔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 단내가 한결 옅어졌다.

◑

첫 밤의 안채 마루에는 작은 등잔이 켜져 있었다.

연화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왕야가 서쪽 방 앞에 앉아 있었다. 혼례 옷은 벗었지만 손을 덮은 긴 소매는 그대로였다.

앵두가 물그릇과 마른 천을 놓았다. 연화는 왕야 맞은편에 앉아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은 낮보다 색이 옅었고, 발을 내려놓은 자세가 굳어 있었다.

“손은 언제부터 더 저리셨어요?”

“상을 물린 뒤부터.”

“발도요?”

“발은 아침부터 차다.”

오래 서 있던 데다 쉬는 시간이 적었다. 그것이 오늘의 불편을 더했을 수 있었다. 연화는 손을 움직여 보도록 부탁한 뒤 손목을 받쳤다.

왕야가 소매를 올렸다. 손톱 밑의 푸른빛이 드러났다. 연화는 맥을 확인하고 손바닥의 온기를 살폈다. 흐름은 가늘었지만 약방에서 짚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숨이 답답하시지는 않아요?”

“아니다.”

“그럼 오늘은 더 움직이지 마세요.”

연화는 앵두가 가져온 담요를 받아 왕야의 무릎에 덮었다. 손은 마른 천으로 감쌌다. 왕야는 담요 끝이 발을 가리도록 조금 당긴 뒤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연화가 부탁한 물건들이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 앵두는 유심히 보았다.

“밤에도 제가 가져다 드리면 돼요?”

“네. 손이 더 저리거나 숨쉬기 불편하다고 하시면 바로 불러 주세요.”

왕야가 말했다.

“왕비 방은 네가 드나들기 쉽게 해 두어라.”

앵두는 고개를 끄덕이고 빈 그릇을 챙겼다.

연화는 왕야의 손이 조금 덜 차가워진 뒤 천을 풀었다. 종이를 무릎 위에 놓고 상태를 적었다.

『오래 서 있은 뒤 손끝 저림. 맥의 큰 변화 없음. 몸 덥히고 휴식.』

왕야는 연화가 쪽지를 접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늘 적은 것은 어디에 두나.”

“약곳간에요. 전날 것과 같이 봐야 해요.”

“그럼 밤에 불편해진 것도 거기 적나.”

“네. 말씀 안 하시면 빠질 수도 있고요.”

“빼놓지 않겠다.”

연화는 접은 쪽지를 침통 옆에 두었다. 왕야가 손을 덮었던 천을 반듯하게 접어 돌려주었다. 손가락을 구부릴 때 아직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았다.

연화는 침통을 가까이 당겼다. 오래 쓴 가죽 가장자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왕야는 소매를 다시 걷고 손목을 내밀었다.

“침은 어디에 놓나.”

연화가 침통을 열었다.

“오늘은 보기만 할게요. 내일부터 아파요.”

(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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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7화. 황제 앞에 서는 날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6화. 이름을 부르는 날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5화. 유 소의를 지키는 날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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