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머니를 아세요?”
연화는 멈춘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문밖에 선 석영도 왕야를 돌아보았다.
“궁에 계실 때 뵈신 건가요?”
“그렇다.”
왕야의 시선이 연화의 얼굴로 내려왔다.
“닮았군.”
아버지가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문짝이 조금 삐걱거렸다. 연화는 더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선 자리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날을 꺼낼 수는 없었다.
“어떤 일로 뵈셨는지도 여쭤봐도 돼요?”
왕야는 잠시 연화를 보았다.
“그 이야기는 지금 하지 않겠다.”
연화는 책상 끝을 짚었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알아낼 수 있는 일과 오늘 묻지 못하는 일을 나누어 두어야 했다.
“알겠어요. 대신 몸이 불편해진 일은 숨기시면 안 돼요.”
“그렇게 하지.”
왕야는 문턱을 넘었다. 석영이 뒤따르고, 아버지가 문을 닫았다. 빗장을 거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연화는 책상으로 돌아와 진료 쪽지를 펼쳤다. 아직 온기가 남은 물그릇 옆에 종이를 놓았다.
아버지가 뒤에서 물었다.
“내일도 오신다니?”
“아직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런 분이 우리 약방에 매일 오셔도 되는 건가.”
연화는 왕야가 앉았던 의자를 보았다. 접은 천에 손목이 눌렀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치료하려면 매일 봐야 해요.”
아버지는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더 묻지는 않았다.
◑
봄 첫째 달 4일, 왕야는 해가 기울기 전에 왔다.
아버지는 손님이 나간 진료 자리를 닦고 있었다. 문밖에서 석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천을 접었다. 보름은 서랍 앞에 앉아 종이에 번호를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오늘도 왔네.”
왕야가 문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다.”
보름은 자리를 내주려고 바닥에 펼쳐 둔 종이를 모았다. 석영이 문을 닫고, 연화는 부엌에서 가져온 물그릇을 내려놓았다.
왕야의 겉옷은 어제와 비슷하게 짙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이 굳어 있었다. 의자를 당기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
연화가 먼저 의자를 빼 주었다.
“어젯밤에는 어떠셨어요?”
“손이 저려서 깼다.”
“글은 오래 쓰셨어요?”
“오래 쓰지 않았다.”
연화는 얼굴과 손을 차례로 살폈다. 입술의 색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을 쥐었다 펴는 움직임은 더 느렸다.
밖에서 찬바람을 맞아 불편이 심해졌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보아서는 안 됐다.
“손목 주세요.”
왕야는 소매를 걷어 접은 천 위에 손을 올렸다. 연화가 맥을 짚는 동안 약방 안에는 아버지가 그릇을 정리하는 소리만 났다.
맥의 흐름은 어제와 비슷했다. 손바닥의 온기는 덜했다. 연화는 손가락을 움직일 때 통증이 있는지 묻고, 손끝의 감각도 확인했다.
“오늘은 밖에 오래 계셨나요?”
“조금 걸었다.”
“약방에 오시기 전부터 더 저렸어요?”
“나온 뒤에.”
연화는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왕야의 손을 마른 천으로 덮고, 발 앞에는 방석을 놓았다. 아버지가 가져온 담요도 받아 무릎 위에 덮었다.
“우선 쉬세요. 지금은 몸을 더 차게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왕야는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연화가 물그릇을 가까이 옮기자 천 밖으로 손을 조금 내밀었다.
연화는 종이에 짧게 적었다.
『찬바람 뒤 손끝 저림 심해짐. 맥은 어제와 비슷함. 몸 덥히고 안정.』
숯연필을 내려놓을 때 왕야가 말했다.
“매일 진료할 방법을 정했다.”
연화는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석영이 보름 곁으로 가서 흩어진 종이를 주워 주었다. 아버지는 정리하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약방으로 오실 수 있으세요?”
“매일 나오기는 어렵다.”
“그럼 제가 왕부로 가면 돼요. 치료할 자리를 정해 주시고요.”
“왕부 안채는 드나드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왕야는 천 위에 놓인 손을 보았다.
“너를 들여도 궁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다. 의원 셋이 사라진 뒤로는 들이는 사람마다 더 살핀다.”
연화는 접은 담요 끝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살피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생에도 왕야의 곁에 가는 길은 내약원의 허락을 거쳐야 했다.
“그러면 바깥채에서 진료하면요?”
“몸이 나빠져 누워 있어야 하는 날에도 거기로 나오라는 뜻인가.”
연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치료할 때만 잠깐 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밤에 악화될 때 곁에 갈 수 없다면, 왕부 안에 들어가도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었다.
왕야가 말을 이었다.
“아내라면 매일 내 맥을 짚고 안채를 드나들 수 있다.”
아버지의 손에서 그릇이 달그락거렸다.
연화는 왕야를 보았다. 짧은 말이 끝났는데도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됐다.
“제게 혼인을 청하시는 거예요?”
“그렇다.”
보름이 종이를 쥔 채 입을 벌렸다. 석영은 보름이 떨어뜨린 숯연필을 주워 옆에 놓았다.
왕야는 연화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1년 안에 나를 살려 내면 이혼장과 의원패를 주겠다.”
연화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혼인보다 뒤의 말이 먼저 귀에 남았다.
“의원패요?”
“종실이 보증하면 여자도 받을 수 있다는 옛 법이 있다. 내가 찾아 두었다.”
“지금도 쓸 수 있는 법인가요?”
“없어진 조문이 아니다.”
“보증만 받으면 되는 거예요?”
“보증금도 필요하다. 은 20냥은 내가 낸다.”
연화는 손에 묻은 숯가루를 엄지로 문질렀다. 궁에서는 의원패에 대해 여러 번 물었다. 돌아온 답은 늘 여자는 의녀로 뽑힌다는 말이었다.
왕야가 덧붙였다.
“법을 적은 글은 가져오겠다. 네가 직접 읽어라.”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의 말만 믿고 도장을 찍을 수는 없었다. 받을 수 있는 패인지, 받은 뒤에도 제 이름으로 진료할 수 있는지 읽어 봐야 했다.
아버지가 진료 자리로 다가왔다.
“왕야, 우리 딸은 아직 열여섯입니다.”
“알고 있다.”
“혼인을 할 나이가 되어도 이런 식으로는 못 보냅니다. 치료를 맡는 것과 아내가 되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끝에서 갈라졌다.
왕야는 아버지를 보았다.
“따로 방을 쓸 것이다. 치료 외의 일은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중에 이혼까지 하면…….”
아버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연화가 의자에서 일어나 아버지 곁에 섰다.
“아버지, 저도 아직 답하지 않았어요.”
“답할 일이 아니야. 의원패 때문에 네 혼인을 이렇게 정할 수는 없어.”
아버지는 연화의 손을 잡았다. 약재 물이 든 손바닥이 거칠었다.
연화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올여름에 의녀를 뽑아요.”
아버지의 입이 다물렸다.
“약방집 딸 중에서 뽑잖아요. 저는 그 전에 열일곱이 되고요.”
아버지는 연화의 손을 잡은 채 바닥을 보았다. 내약원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서랍을 다시 닦고 딸의 이름을 묻는 말에 늦게 답하던 손이었다.
“혼인한 여자는 뽑지 않아요.”
연화가 천천히 말했다.
“궁에 들어가면 제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없어요. 집에도 마음대로 못 오고요.”
아버지의 엄지가 연화의 손등을 한 번 쓸었다.
연화는 전생에 궁문 안에서 보낸 날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은 이유도, 황후가 옥 앞에서 웃던 얼굴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지금 셈할 수 있는 일을 놓았다.
“혼인하면 선발을 피할 수 있어요. 치료를 해내면 의원패도 받고요.”
왕야의 아내라면 황후의 가까이 갈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의녀의 옷을 입고 불려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셈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참 뒤에야 손을 놓았다.
“오늘 정하지는 마라.”
“네.”
왕야도 짧게 답했다.
“기다리겠다.”
◑
그날 밤, 감초 써는 소리가 다락까지 올라왔다.
연화는 이불을 걷고 내려갔다. 부엌에서는 물이 낮게 끓고 있었다. 아버지 앞의 바구니에는 잘린 감초가 가득했다.
“내일 팔 것도 다 써신 것 같은데요.”
아버지는 손을 멈췄다. 눈가가 붉었다.
“손이 놀면 자꾸 다른 생각이 나서.”
연화는 맞은편에 앉았다. 아버지 옆에 쌓인 감초를 바구니로 옮겼다. 달고 마른 냄새가 손가락에 묻었다.
“궁에만 안 들어가면 되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데 네가 왕부로 간다니, 거기도 편할 것 같지는 않구나.”
“편하다고 생각해서 가는 건 아니에요.”
연화는 바구니 가장자리에 걸린 감초를 안으로 밀었다.
“제가 진료할 수 있는 자리를 얻고 싶어요. 아버지가 여기서 손님 받으시는 것처럼요.”
아버지는 칼을 내려놓았다.
“그 왕야는 네 말을 듣더냐?”
“담요 덮으시라고 하니까 덮으셨어요.”
“그거야 추우면 누구나 덮지.”
“침을 놓으려면 더 잘 들으셔야 해요. 그 조건도 말할 거예요.”
아버지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네 어미도 치료할 때는 한 번 한 말을 안 물렸는데.”
연화는 빈 그릇을 당겨 아버지 앞에 놓았다. 물을 따르자 부엌 안으로 김이 올랐다.
“아버지도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오늘은 그만 써세요.”
아버지는 그릇을 받았다. 남은 감초를 썰려던 손이 그릇 주위를 감쌌다.
◑
다음 날 왕야는 법 조문을 베낀 종이를 가져왔다.
연화는 글을 처음부터 읽었다. 종실의 보증을 받은 여자는 의원패를 받을 수 있었다. 개업한 뒤에도 보증한 종실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아버지도 연화 곁에 앉아 그 줄을 따라 읽었다.
“이혼한 뒤에도 패는 제 것이에요?”
연화가 물었다.
“그렇다. 혼인이 아니라 보증으로 받는 패다.”
“왕야께서 보증을 거두실 수도 있나요?”
“약속을 지킨 뒤에는 거두지 않겠다.”
연화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저도 조건이 있어요.”
왕야는 대답 대신 몸을 조금 바로 했다.
“진료는 제 말대로. 제가 묻는 건 답하기. 거짓말 안 하기.”
아버지가 연화를 돌아보았다. 연화는 왕야의 손목을 받쳤던 천을 반듯하게 접었다.
“독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찾아야 해요. 불편한 이야기도 물을 수 있어요. 제가 시키는 걸 안 하시면 치료가 더뎌지고요.”
“숨기는 건 있어도 거짓말은 안 한다.”
“숨기시는 일이 진료에 필요하면 다시 여쭤볼 거예요.”
“그때도 말하지 못하면 말하지 않겠다고 하겠다.”
연화는 어젯밤 문턱에서 들은 대답을 떠올렸다.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럼 저는 답을 못 들었다고 적어 둘게요.”
“그렇게 해.”
연화는 깨끗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못 지켰을 때도 정해 둬야 해요. 제가 치료를 그만두면 의원패를 못 받는 건 알겠어요. 왕야께서 그만두시면요?”
왕야가 바로 답했다.
“패는 준다.”
“제가 진료를 잘못해서 그만두셔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때는 네 잘못인지 먼저 확인하겠다. 내가 그만두면 패는 준다.”
아버지가 무릎에 올린 손을 펴고 다시 쥐었다.
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왕야가 어제 내놓은 조건을 적다가 손톱을 보았다. 독을 끊어도 이미 나빠진 몸이 하루아침에 돌아오지는 않았다.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 다 나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무엇을 더 적으면 되나.”
“손톱 색이 돌아오는 것까지요.”
왕야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적어라.”
연화가 문장을 고치는 동안 아버지는 글씨를 따라 읽었다. 한 줄을 다 적을 때마다 연화는 왕야에게 읽어 주었다.
고칠 곳이 없어졌을 때 보름이 의자 옆에 와 섰다.
“언니가 아저씨랑 결혼하면 나도 왕부 가?”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왕야가 보름을 보았다.
“원하면.”
“서랍도 있어?”
“약재 두는 곳이 있다.”
“그럼 내가 번호 붙여도 돼?”
왕야는 바로 답하지 않고 연화를 보았다.
연화가 종이를 누른 채 말했다.
“이름도 같이 붙여야 해.”
보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버지는 옆에 두었던 천을 집어 눈가에 댔다.
“하나는 가겠다고 하고, 하나는 벌써 서랍을 고르고 있네.”
“아버지도 오시면 되잖아.”
보름이 아버지 무릎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는 천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석영이 물그릇을 가져와 아버지 앞에 놓았다.
왕야가 말했다.
“오는 건 막지 않는다.”
연화는 종이 끝을 매만졌다. 궁에 들어가면 허락받아야 했던 일들이었다. 아버지가 찾아오는 것과 보름이 옆에서 떠드는 것까지.
연화는 초안의 마지막 줄에 손도장을 적었다.
◑
봄 첫째 달 6일, 연화는 약방의 가장 넓은 책상을 비웠다.
손님이 두고 간 돈을 서랍에 넣고, 약재 가루를 닦아 냈다. 왕야가 가져온 종이를 펼치자 아버지가 물그릇을 멀리 옮겼다.
연화는 숯연필로 제목부터 적었다.
진료 약속.
그 아래에 어제 함께 고친 말을 옮겼다.
『하나. 온연화는 월강왕의 맥을 날마다 짚고, 치료는 온연화의 말대로 한다.
둘. 월강왕은 온연화가 묻는 것에 답한다. 숨길 수는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셋. 다음 해 봄 둘째 달 15일까지 월강왕이 살아 손톱 색이 돌아오면, 월강왕은 그날 이혼장과 의원패를 내준다.
넷. 그 전에 온연화가 그만두면 의원패는 없다. 월강왕이 그만두면 의원패는 그대로 준다.
다섯. 두 사람 손도장.』
연화는 다 쓴 종이를 왕야 쪽으로 돌렸다.
왕야는 서두르지 않고 읽었다. 아버지는 연화가 글을 쓰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름도 오늘은 번호 놀이를 하지 않았다.
“달라진 데는 없어요.”
연화가 말했다.
왕야는 마지막 줄까지 읽고 손을 내밀었다.
석영이 붉은 인주를 책상에 놓았다. 왕야는 긴 소매를 걷었다. 연화는 종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눌러 주었다.
손도장이 다섯째 줄 아래에 남았다.
왕야가 손을 떼자 연화도 인주에 손을 댔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빈자리를 살피고 손바닥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누르는 동안 아버지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연화는 손을 떼었다. 두 손도장 사이에 붉은 자국이 묻지 않은 좁은 틈이 남았다.
아버지가 젖은 천을 내밀었다.
“닦아라.”
연화는 천을 받았다. 아버지가 놓지 못한 끝을 잠깐 함께 잡았다가, 천천히 당겼다.
왕야는 석영이 건넨 천으로 손을 닦았다. 손끝을 구부릴 때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연화는 그 손을 보았다.
“오늘도 손을 덥히고 가세요. 아직 저리시잖아요.”
왕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지.”
연화는 새 천을 가져와 손을 덮었다. 방금 도장을 찍은 종이는 물그릇에서 먼 곳으로 옮겼다. 보름이 바람에 종이 끝이 들릴까 봐 숯연필을 옆에 놓아 주었다.
인주가 마를 동안 누구도 종이를 접자고 하지 않았다.
연화는 왕야의 손이 덜 차가워진 뒤에야 천을 걷었다. 아버지는 의자 옆에서 담요를 받아 들었다.
손도장이 마른 종이를 연화가 접었다.
왕야가 말했다.
“봄 둘째 달 15일에 데리러 오겠다.”
연화는 접은 종이를 다시 펴고, 그날에서 꼭 1년 뒤인 다음 해 봄 둘째 달 15일이 약속의 끝이라고 적었다.
(5화 끝)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