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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어의가 오는 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2:01

연화는 내려놓은 숯연필을 다시 집었다. 쪽지 아래 빈 곳에 저녁 상태를 마저 적고, 젖은 천이 닿지 않는 선반 위로 옮겼다.

“왕야께도 말씀드렸어요?”

“노상 집사님이 가셨어요. 황후께서 몸이 걱정돼 보내신다고 했대요.”

앵두는 문틀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연화의 얼굴을 살피느라 약곳간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쓰던 천부터 정리해 주세요. 내일 필요한 건 그대로 준비하고요.”

“침도요?”

“네.”

연화는 침통의 끈을 묶었다. 가죽 뚜껑이 들뜬 곳을 눌러 넣자 앵두가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로 나왔을 때 서쪽 방문이 열려 있었다. 노상이 물러나고, 왕야가 문 안쪽에 앉은 채 연화를 보았다.

“들었나.”

“네. 어의가 오신다고요.”

“하던 대로 해.”

연화는 침통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어의가 오면 치료를 못 하게 할 수도 있어요.”

“내 몸이다.”

왕야는 문 옆에 놓인 마른 천을 집어 연화 쪽으로 내밀었다. 아직 덜 마른 침통 바닥을 받칠 만큼 넓은 천이었다.

“네가 살피면 된다.”

연화는 천을 받아 침통 밑에 둘렀다. 왕야의 손은 곧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오늘처럼 쉬세요. 어의가 온다고 몸을 더 쓰지는 마시고요.”

“알겠다.”

방문을 닫기 전, 왕야가 약곳간 쪽을 한 번 보았다.

“남은 일은 앵두에게 맡겨라.”

연화는 침통을 품에 붙여 들었다. 마루를 건너는 동안 가죽 바닥에서 물이 더 떨어지지는 않았다.

◑

봄 둘째 달 20일 아침, 노상은 안채 마루의 의자를 다시 닦았다.

이미 먼지 하나 없는 등받이에 천이 한 번 더 지나갔다. 허리의 열쇠 꾸러미는 천으로 감싸 두어 움직여도 소리가 작았다.

“여기서 보신답니까?”

연화가 묻자 노상이 의자를 내려놓았다.

“왕야께서 방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루면 충분하다고요.”

“바람이 들면 문을 닫아 주세요. 손을 오래 내놓으셔야 하니까요.”

노상은 마루 끝 창을 살피러 갔다. 연화는 낮은 상 위에 깨끗한 천을 펼쳤다. 한쪽에는 물그릇을 두고, 침통은 손이 닿는 곳에 놓았다.

앵두가 차 쟁반을 들고 와 상 옆에 서 보았다.

“이쪽으로 놓으면 될까요?”

“진료가 끝난 뒤에 드려요. 손목을 짚을 때는 상이 비어 있는 게 좋아요.”

“그럼 제가 문 옆에서 기다릴게요.”

앵두는 쟁반을 들고 몸을 돌렸다가 다시 연화를 보았다.

“어의는 많이 엄한가요?”

연화는 펴 둔 천의 구김을 눌렀다.

전생의 공석주는 의녀들이 적어 온 기록을 끝까지 읽었다. 잘못 적은 곳에는 짧게 줄을 그었다. 연화가 월강왕의 몸에 독이 들었다고 말했을 때도, 기록을 덮던 손은 느리지 않았다.

“진료할 때 말을 많이 하는 분은 아니에요.”

“왕비님도 그렇잖아요.”

“그러면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겠네요.”

앵두는 입술을 조금 내밀다가 쟁반 위 찻잔을 바로 놓았다.

서쪽 방문이 열렸다. 왕야는 혼례 때보다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긴 소매 끝이 손등을 덮고 있었다.

연화가 의자 쪽으로 손을 내밀자 왕야는 그 앞에 앉았다.

“먼저 볼게요.”

연화는 얼굴빛과 입술을 살폈다. 마루로 걸어 나올 때 발을 멈추지는 않았고, 앉은 뒤의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손을 무릎에 얹는 움직임은 아직 조심스러웠다.

“밤에는 어떠셨어요?”

“깨지는 않았다.”

“저리지는 않았고요?”

“저렸다. 잠들기 전에.”

나아진 곳과 그대로인 곳을 나누어야 했다. 연화는 손끝이 여전히 불편한지 짐작하며 소매를 올려 달라고 했다.

왕야가 손목을 내밀었다. 연화는 맥을 확인한 뒤 손등과 손끝의 온기를 살폈다. 손가락을 펴는 움직임은 첫 치료 날보다 편해 보였지만, 손톱 밑의 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은 무리하지 않을게요. 어의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이 차지 않게 덮어 두세요.”

연화는 준비한 치료를 마친 뒤 마른 천으로 손을 감싸 주었다. 왕야는 천 아래에서 손가락을 한 번 움직였다.

“기다리느라 치료를 바꾼 건가.”

“오늘 몸을 보고 정한 거예요. 손을 여러 번 살필 테니 피곤하지 않게요.”

왕야는 더 묻지 않았다.

연화는 쪽지를 상 모서리에 놓고 적었다.

『밤중 깸 없음. 손끝 저림 남음. 맥 가늘고 빠름. 손톱 색 그대로.』

숯연필을 내려놓자 왕야가 쪽지를 보았다.

“그것도 보여 주나.”

“필요하면요.”

“네가 정해라.”

연화는 쪽지를 접지 않고 천 옆에 두었다. 바깥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노상이 먼저 마루에 올라와 몸을 낮췄다.

“어의께서 오셨습니다.”

◑

공석주는 마루 아래에서 신발을 벗었다.

희끗한 머리가 단정히 묶여 있었다. 연화가 기억하는 것보다 얼굴의 주름은 옅었지만, 의원 가방을 여는 손에는 작은 떨림이 있었다. 가방의 고리를 한 번 놓쳤다가 다시 잡았다.

“왕야, 황후께서 몸을 살피라고 보내셨습니다.”

“들었다.”

왕야는 의자에 앉은 채 답했다. 공석주가 고개를 숙이고 올라왔다.

연화는 상 옆에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온연화입니다.”

“왕비께서 직접 치료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공석주는 연화의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인사를 받은 뒤 곧 왕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은 어떠십니까?”

“전보다 낫다.”

“손발은 여전히 차십니까?”

“손끝이 저리다.”

“걷는 데 불편은요?”

왕야가 연화를 보았다.

“그건 온 의원이 보았다.”

공석주의 눈길이 돌아왔다. 연화는 상 위의 쪽지를 앞으로 밀었다.

“아침에 일어나실 때 발을 짚는 건 괜찮으셨어요. 오래 서 계시면 아직 불편하시고요. 치료 뒤에는 손끝이 덜 차다고 하셨어요.”

공석주는 쪽지를 펼쳐 읽었다. 종이 아래를 받친 손이 조금 흔들렸다. 연화는 상 위로 시선을 내렸다가 공석주의 얼굴을 보았다.

어의는 쪽지를 내려놓고 왕야의 손목을 받았다.

마루가 조용해졌다. 부엌 쪽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고, 앵두가 문 곁으로 옮겨 앉는 소리가 뒤따랐다.

공석주는 오래 맥을 짚었다. 왕야의 숨을 살핀 뒤 반대쪽 손도 받아 들었다. 처음보다 입술이 단단히 다물렸다.

연화는 묻지 않고 기다렸다.

공석주가 손을 놓았을 때 왕야의 소매가 손등 가까이 흘러내렸다.

“오래된 병입니다. 몸이 차고 기운이 약해져 말단까지 온기가 가지 않는 겁니다.”

“손톱을 보세요.”

연화는 소매 아래 가려진 손을 가리켰다.

공석주의 손이 멈췄다.

“손끝이 찬 것은 방금 살폈습니다.”

“온기만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손톱 밑의 색이요.”

왕야가 스스로 소매를 올렸다. 푸르스름한 손톱이 상 위에 드러났다.

공석주는 그 손을 보았다. 고개를 숙였지만 손가락을 다시 받지는 않았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물으셨어요?”

연화가 묻자 왕야가 먼저 답했다.

“전에도 보았다.”

공석주의 시선이 왕야에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연화는 어의가 펼쳐 놓은 쪽지 끝을 눌렀다.

“치료 뒤에 손이 덜 차진 건 맞아요. 그래도 색은 그대로예요. 편해졌다고 끝낼 수는 없어요.”

공석주가 연화를 보았다.

이번에는 눈길이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왼쪽 눈 아래의 작은 점에 잠깐 머물더니 머리 쪽으로 올라갔다. 검게 탄 은잠 끝을 본 뒤에는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연화는 쪽지를 누른 손을 그대로 두었다.

“왜 그러세요?”

“그 비녀는…….”

공석주는 말끝을 멈췄다. 가방 옆으로 손을 거두고 손가락을 접었다.

“왕비께서는 침을 멈추세요.”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몸이 약한데 피를 빼면 위험합니다. 좋아졌다는 말만 듣고 계속하면 더 지칠 수도 있습니다.”

연화는 침통으로 향하던 손을 멈췄다.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왕야가 치료 뒤 피곤해하는 것도, 아직 몸이 약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매번 얼굴과 숨을 살피고 맥을 확인했다.

“무리하게 치료하지는 않아요. 시작할 때와 끝난 뒤의 상태를 따로 적고 있어요.”

“왕비께서 궁에서 진료를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약방에서 배웠어요.”

공석주는 연화의 손을 보았다. 길게 뻗은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있었다. 연화가 손을 뒤집어 숨기지 않자 공석주는 눈을 내렸다.

“이 몸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보고 있어요.”

왕야가 상 위의 손을 거두었다.

“내 아내 말대로 한다.”

짧은 말 뒤에 소매가 내려왔다. 연화가 덮어 주었던 천은 여전히 무릎 위에 있었다.

공석주가 왕야를 보았다. 더 말하려던 입술이 다물렸다.

“진료는 끝났나.”

“예, 왕야.”

“그러면 그만해라.”

왕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연화는 바로 곁으로 가 발을 딛는 모습을 살폈다. 한쪽으로 기울거나 멈추는 곳은 없었다.

“방에서 조금 쉬세요. 제가 다시 볼게요.”

왕야는 천을 연화에게 건네려다 상 위에 놓았다. 의원의 가방과 떨어진 자리였다.

“온 의원도 앉아라.”

방문이 닫힐 때까지 공석주는 일어난 채 서 있었다.

◑

앵두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차 드세요.”

공석주가 돌아앉자 앵두는 상의 빈 곳을 찾았다. 펼쳐진 쪽지와 의원 가방을 피하려다 쟁반을 몸 쪽으로 기울였다.

찻잔이 미끄러졌다.

앵두가 잔을 잡으려 했지만 차가 먼저 쟁반 밖으로 쏟아졌다. 마루에 물이 튀고 공석주의 옷자락이 젖었다.

“죄송해요. 제가 바로 닦을게요.”

앵두는 쟁반을 내려놓으려다 다시 들었다. 어디에 둘지 몰라 발부터 뒤로 뺐다.

공석주가 손을 내밀었다.

“쟁반 내려놓아라.”

“옷이 젖으셔서…….”

“안 데었니.”

앵두가 입을 다물었다. 공석주는 쟁반을 받아 상 아래에 놓고 앵두의 손을 살폈다.

연화도 다가가 손등을 보았다. 차가 스친 곳이 조금 붉었다. 찻잔을 급히 잡다가 놀란 듯 손가락이 오그라들어 있었다.

“손에도 닿았어요?”

“조금요. 옷만 젖은 줄 알았어요.”

연화는 앵두가 손을 감추지 않도록 손목을 가볍게 받쳤다. 뜨거운 차가 닿은 자리가 불편한 듯했다. 붉어진 곳과 앵두가 아프다고 하는 곳을 확인한 뒤 시원한 물로 식히게 했다.

공석주는 젖은 옷을 닦지 않고 앵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에는 잔을 잡으려 하지 말고 쟁반부터 놓아라.”

앵두는 손등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 안 내세요?”

“손부터 봐야지.”

공석주는 그제야 천으로 옷자락을 눌렀다. 연화가 마른 천을 더 건네자 두 손으로 받았다.

떨림은 여전했다. 천의 모서리가 무릎 위에서 작게 움직였다.

연화는 젖지 않은 쪽지를 골라 숯연필을 집었다.

『앵두. 손등 붉어짐. 물로 식힌 뒤 불편 줄음.

공 어의, 젖은 옷보다 시녀 손 먼저 살핌. 나쁜 사람만은 아님.』

끝줄을 적는 동안 공석주는 마루 바닥을 닦는 앵두를 말렸다.

“그 손으로 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된다.”

연화는 숯연필을 멈췄다.

사람의 손을 먼저 볼 줄 알면서, 왕야의 손톱에서는 왜 눈을 거두었을까.

연화가 고개를 들자 공석주는 의원 가방을 닫고 있었다. 고리가 잘 맞지 않아 한 번 더 눌렀다.

“왕비께서도 몸을 아끼세요.”

“어의께서는 왕야의 손이 처음부터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공석주의 손이 가방 위에 놓였다.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 본 것은 황후께 전하겠습니다.”

“제가 적은 것도 필요하세요?”

“아닙니다.”

공석주는 쪽지를 가져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바로 폈다.

연화는 그 눈길을 기억해 두었다. 왕야의 손을 볼 때보다, 연화의 얼굴과 은잠을 볼 때 더 오래 멈춘 눈이었다.

◑

노상이 바깥채에서 기다리던 마차를 문 가까이 오게 했다.

연화는 공석주를 배웅하며 마당을 건넜다. 어의는 의원 가방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옷은 돌아가시면 갈아입으세요. 아직 덜 말랐어요.”

연화가 말하자 공석주는 젖은 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시녀에게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직접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안심했을 거예요.”

공석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마차 앞에 이르러 연화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공석주가 발판을 오르는 동안만 맡아 둘 생각이었다. 가방은 묵직했고, 손잡이는 여러 번 고친 자국이 있었다.

공석주가 먼저 마차 안에 앉았다. 연화는 양손으로 가방을 들어 건넸다.

가방을 받은 어의는 곧 놓지 않았다. 연화의 손끝에 눈길이 머물렀다.

연화는 빈손을 거두며 소매를 정리했다. 아까 왕야의 손목을 받쳤던 손바닥에 천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노상이 문을 닫으려 다가왔다. 연화는 길을 비켜 주려다 공석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 안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 의녀 손이군.”

(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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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6화. 이름을 부르는 날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5화. 유 소의를 지키는 날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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