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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Author: 라라

제1화

Author: 라라
“한정훈 씨, 용성으로 가서 여동생분의 심리 치료사가 될게요.”

강시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전화 너머에서 남자가 다소 의외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시연 씨, 들으니 이미 가정을 꾸리셨다고 하던데 가족을 떠나기 어렵다면 남편과 아이까지 챙겨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이?

시선을 내린 강시연의 멀지 않은 곳에는 그녀가 실수로 쏟은 우유가 여전히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아침에 우유를 쏟았을 때 아들의 혐오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엄마는 왜 이런 작은 일도 못 해요? 이모라면 절대 망치지 않을 텐데. 엄마는 이모보다 한참 못해요.”

아들이 말하는 이모는 남편 진수혁의 첫사랑 심하은으로, 유명한 발레 무용가였다.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하게 춤을 추는 모습에 아들까지 매료되었다.

진수혁은 아들의 말을 듣고도 꾸짖는 대신 차갑고 조롱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엄마를 어떻게 이모랑 비교해? 만약 네 엄마가 그렇게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진수혁과의 결혼 7년 차, 짝사랑 또한 7년이었다.

나중에 두 사람은 우연한 사고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아이를 낳은 후 결혼식을 올렸다.

진씨 가문은 보수적인 재벌가로 진수혁과 결혼한 후 진씨 가문은 그녀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진씨 가문의 사모님으로서 남편을 돌보고 아들을 키우는 데 전념하라고 요구했다.

강시연은 아들을 위해 결국 동의했고 집안일을 도맡는 가정주부가 되어 남편과 아들을 성실히 돌보았다.

그러나 7년이 지나자 그녀의 아들과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이러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엄마, 왜 계속 아빠랑 싸워요? 엄마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아빠가 싫어하는 게 당연하죠. 차라리 이모가 내 엄마면 좋겠어요.”

강시연은 시선을 거두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정훈 씨, 그럴 필요 없어요.”

심하은이 엄마와 아내가 되길 원한다면 바람을 들어줄 수밖에.

남편과 아들 다 버리면 그만이다.

강시연은 한정훈과 보름 뒤에 떠날 것을 약속했다.

용성 최고 재벌인 한정훈의 여동생은 심리적 문제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자, 진 교수는 강시연을 추천했다. 그녀가 한때 진 교수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서 최면과 심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진수혁과 결혼해 가정주부로 전락하자 진 교수는 그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시연아, 네가 여자라고 해서 진씨 가문에 얽매여 집안과 부엌에 갇혀서는 안 돼. 네게는 강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있으니 네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진 교수가 그렇게 말했지만 당시 그녀는 진씨 가문을 위해 타협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삼자가 하는 말이 맞았다.

그녀가 진수혁 부자에게 바친 모든 것은 자기만족에 불과했고 그들의 눈에는 과거 심리학 천재가 우아하게 춤추는 작은 백조보다 못한 존재였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마침 진수혁의 음성 메시지가 떴다.

“나랑 도현이 밖에서 먹을 거니까 저녁 준비하지 않아도 돼.”

서늘한 말투가 꼭 아내가 아닌 가정부 도우미에게 지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몇 년간 바삐 돌며 공짜로 도우미 노릇을 한 거나 다름없었다.

강시연이 답장을 하려던 순간 무심코 심하은과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 엄마는 늙은 마녀처럼 아무것도 못 하면서 남의 일에 참견만 하고 이런 것도 먹지 못하게 해요. 이모가 제일 좋아요.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하잖아요. 난 이모를 제일 사랑해요.”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에 평소라면 강시연은 아마도 실망하고 슬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의외로 평온했다.

조산으로 인해 아들의 몸이 약해서 그녀는 수년간 정성스럽게 돌보았고 특히 식사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아이의 건강을 걱정해 밖에서 밥 먹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데 그게 아들의 눈에는 늙은 마녀처럼 보였나 보다.

강시연은 더 말을 섞지 않고 짧게 대꾸했다.

“그래요.”

아무리 핏줄이라도, 아이의 몸이 약해도 이젠 그녀와 무관했다.

강시연은 어지러운 거실을 바라보며 쏟아진 우유를 직접 치우지 않고 가사도우미를 불러왔다.

진수혁은 외부인이 집에 오는 것을 싫어했기에 집은 항상 강시연이 정리하고 청소했다. 그녀는 항상 멍청하게 진수혁의 취향에만 맞춰 행동했다.

하지만 이제 강시연은 정신을 차렸고 어차피 떠날 테니 진수혁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가사도우미가 방을 정리하는 동안 강시연은 방으로 돌아가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고 이후 정시 우편으로 발송했다.

보름 후 이혼 합의서는 정확히 남편의 손에 전달될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진수혁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저녁에 진수혁은 마침내 아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두 사람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이모가 춤추면 꼭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반짝반짝해요. 내일 학교 공연에 이모를 초대해도 될까요?”

아들은 명문 유치원에 다녔다.

이틀 후 공연이 있는데 부모 중 한 명이 동반해야 했지만 아이는 항상 엄마를 부끄럽게 생각했기에 단 한 번도 시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심하은이 함께 가주길 원했던 걸까?

아들의 들뜬 모습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라졌고 그녀를 볼 때면 입술을 꾹 다문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진수혁이 아들의 손을 잡은 채 집 안을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집에 누가 왔었어?”

“네.”

강시연이 무심하게 말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있어서 사람 시켜 정리하고 기부했어요.”

예를 들어 그녀가 남편을 위해 샀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넥타이랑 커프스, 아들을 위해 준비했지만 옆으로 던져버리던 장난감들 말이다.

떠나기 전에 이 오래된 물건들을 빨리 정리해서 남편이 새로운 안주인 심하은을 맞이하는 걸 도와줄 셈이었다.

진수혁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옷장을 도통 신경 쓰지 않았기에 무엇이 빠졌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도현이는 몸이 안 좋아서 알레르기도 많으니까 앞으로 사람들 적당히 데려와. 잡동사니는 버리면 되니까. 진씨 가문엔 딱히 그런 게 필요도 없어.”

맞다. 그녀가 남편과 아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은 항상 필요 없는 것이었다.

강시연은 과거처럼 화를 내지 않았고 누구보다 도현의 알레르기를 잘 안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차갑고도 잘생긴 남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강시연은 아들이 들어올 때 한 말을 떠올리며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일이 있어서 도현이 학교 공연은 심하은 씨랑 같이 가도 돼요?”

옆에 있던 진도현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더니 기대하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엄마, 정말 이모와 함께 가도 돼요?”

강시연은 아들의 들뜬 모습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런데 진수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해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더니 짜증스럽게 말했다.

“강시연, 또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거야? 도현이는 아직 어려서 하은이를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 애가 그냥 한 말로 화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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