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라?”
겸과 영도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저하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소인이 오라버니의 검을 날려버리는 모습을요.” 연화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영도가 칼집을 움켜쥐었다. 연화는 멋쩍은 듯 손을 내저었다. “검술이며 무술이며, 실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기대 이상일 겁니다.” 겸은 당황스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실력은 분명 인상 깊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성별과 출신. 그게 걸림돌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영도가 먼저 나섰다. “이보시오 낭자. 궁에는 엄연한 체계가 있소. 세자저하시라 해도 궁에 함부로 누군가를 들일 수는 없단 말이오. 하물며 여인을...” “소인도 그게 억울합니다. 시험을 보고 싶어도 여인은 응시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지난 무술대회에 몰래 참가하려다 아버님께 들켜 열흘동안 방에 갇혔었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둘 사이에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겸이 둘 사이를 막아 나섰다. “잠깐.” 서로를 겨누던 시선이 모두 겸에게 향했다. “좋다. 그대 말대로 한 번쯤 세자 권한을 발휘해 보는 것도 괜찮겠군.” “정말이십니까?” “저하!” 영도가 다급히 말렸지만, 겸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지 않으냐.” “감사합니다! 저하!” “하지만 조건이 있다. 내 옆에 있는 영도와 대련하여 그대가 이겨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의가 없도록 말이다.” 연화는 잠시 고민했지만,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하. 자신 있습니다. 지금 하면 될까요?” 칼을 뽑으려는 연화를 겸이 제지했다. “지금은 곤란하네. 적당한 장소와 때를 내가 정하지. 그때 다시 기별하겠다.” “네! 반드시 기별해 주십시오. 그날까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저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잔뜩 흥분하여 얼굴이 상기된 연화를 보자 새어 나오는 웃음을 누르며, 점잖게 답했다. “그래. 이제 그만 가보거라. 우리도 바빠서 말이다.” “예! 저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했다. 떠나가는 뒷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신기한 듯 잠시 그 모습을 보던 겸은 얼굴을 때리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슬쩍 돌려 영도를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폭풍 같은 잔소리가 쏟아졌다. “저하! 어찌 그런 약조를 하십니까? 호위무사가 무슨 동네 머시기 이름도 아니고!” “왜? 혹시 자신 없는 것이냐?” “저하! 소인을 뭘로 보시고… 아닙니다! 저런 망둥이 같은 계집이랑 대련을 하라시니 무사로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됐다. 내 입으로 한 약속이니 내칠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영도는 멍하니 잠시 겸의 의도를 짐작했다. 그럼 그렇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실 분이 아니지. 영도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 저하. 소인이 경솔했습니다. 저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스승님께서 아끼시는 여식인데 함부로 내치기도 어렵지 않느냐. 게다가 그 고집... 아휴... 어설프게 막아선 안 될 것 같아서 꾀를 낸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날을 위해 수련에 매진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괜히 창피당하지 않게 말이다.” “저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두 사람은 연화와 있었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었다. 그녀와의 시간이, 왜 이리도 자꾸만 떠오르는지... 그녀를 만난 이후, 우울하고 비관적이던 그의 삶에 활력이 생긴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오랜만에 기분 좋은 바람이 그의 이마를 간지럽게 불었다.
겸을 만나고 돌아온 연화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발끝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세자 저하는 훌륭하신 분이야! 이렇게 기회를 주시다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연화야.” “예, 아버님. 들어오시지요.” 문을 열고 들어온 홍양은 연화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다녀온 게냐?” “아… 저, 그게….” 연화는 순간 망설였다. 겸과의 일을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
숨을 가다듬고, 숨김없이 말하기로 했다.
“세자 저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뵙고 왔습니다.” “뭐라고? 세자 저하를 미행했다고 하는 것이냐?” “아뇨, 아버님! 미행은 아닙니다. 그저 드릴 청이 있어 뒤를 따랐을 뿐이에요.” “네가 저하께 무슨 청을 드리겠다고 감히 그 뒤를 따랐단 말이냐! 이 철없는것아!” 딸의 경악스러운 행동에 아연실색했지만 연화는 별 신경이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것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불안한 예감은 왜 언제나 들어맞는 것일까? “저하의 호위무사로 써달라고 청을 드렸습니다.” “뭐?” 홍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겠지… 아무리 철이 없다지만 설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다시 말해 보거라. 무슨 청을 드렸다고 했느냐?” “세자 저하의 호위무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노년의 귀가 아직 멀쩡하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그저 말문이 막히고, 탄식만 나올 뿐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지.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키운 탓이야….’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달래듯, 차분하게 물었다. “연화야. 그것은 너무나도 무례하고 황당한 청이 아니냐? 저하께서 네 말에 얼마나 곤란하셨겠느냐. 또한, 이 아비는 뭐라 생각하시겠느냐?” 연화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들어주신다 하셨습니다.” “… 뭐라고?”그녀를 슬쩍 본 홍양은 손에 든 술을 마저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녀가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낚아챘다.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뭐 하는 짓이요? 부인!” “언제까지 이러실 작정입니까?” “……” 홍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밀이 버거워, 말없이 다시 술잔을 채웠다. “다녀오세요.” “?” 그녀가 그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속량*을 해 달라, 관아에 요청을 했습니다” “!” “전하께서도 아시게 되었나 봅니다. 면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부인!” 그녀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어조와 태도였다. "제가 모르실 줄 알았습니까? " 평소와 달라진 지아비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것이 여자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를 되돌려 놓아야 했다. 그것이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는 그녀의 역할이었으니. “데려 오세요. 양반이 첩을 거느리는 게 무에 그리 큰 흠이 라고, 몇 날 며칠을 이렇게 끙끙대신단 말입니까!” “……” “언제까지 폐인처럼 사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녀의 질책에도 그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과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체면 때문이셨겠지요.”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고개 숙인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도 잠시, 하령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령아, 조금만 기다려 다오. 금방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 다음 날 이른 새벽, 홍양은 급히 함평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부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안채로 향했다. 안방에서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부인이었다. 강한 척, 담대한 척했지만, 그녀도 여인일 뿐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그녀의 말대로 그녀와 했던 시간들은 일장춘몽으로 끝났단 말인가.이제는 그 이름을 부른다 한들, 대답해 줄 이도 웃어줄 이도 없다.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상실감에 정신이 메말라갔다.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데려 오고 싶은 상상을 수없이 반복했다.다른 놈의 품에 안겨 달뜬 숨을 내쉬는 모습과 그놈을 향해 웃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지독하게 괴로운 것이었다.그녀를 데려 올 용기는 없으면서도, 그녀를 잊지도 못했다. 천지같이.그녀가 없는 나주목은 적막했다. 외로운 타지생활은 더없이 지루하고 서글펐다.밤이면,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던 기억과, 자신을 바라보던 말간얼굴이 떠올라 잠에들지 못했다.너는, 잘 살고 있을까.머릿속을 지배해 버린 너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나는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라,네 안위와 네 행복보다는 투기심에 들끓고 감당할 수 없는 내 감정에 화가 났다.그러니 부디, 잘 살라고. 나 같은 놈은 잊고 잘 살라고.너를 평생 잊지 않고 아파하는 것으로, 너를 보낸 형벌을 평생 받겠노라.그는 매일 밤, 그녀가 잠들었던 그 방에 누웠다. 그녀의 체취가 아직 남아 있었다.그녀가 없이 지난한 시간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양은 다시 한양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원자를 가르치라는 왕명이 내려왔기 때문이다.떠나는 그의 얼굴에 미련이 가득했다.이제 정말, 그녀와 영영 이별인가. 그녀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이곳과도 이별이리라.그녀와 나누지 못한 작별인사를 마음에 고이 접어 두었다.그저, 잘 살기를. 잘 살아내기
그녀의 축축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자, 빠듯한 만족감이 덮쳐왔다. 신음이 적나라하게 울리고, 방안은 열기로 가득 찼다. 가녀린 몸을 비틀며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워, 그의 입술로 그 소리를 삼켰다. 자신의 아래에서 바들거리는 선연한 얼굴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 마침내, 그녀에 대한 욕망이 그녀 안을 꽉 채우고, 끈적한 흔적을 남겼다. “하-하-”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교차했다. 그의 턱밑에서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순간, 감당하지 못할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이 한 짓이, 그녀에게 어떤 불행과 고난을 안기게 될지 무서웠다.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 방도가 있을 거야. 찾아보자. 하령이를 내 것으로 만들 방법을.’ 서로 마주 보는 얼굴에 간지러움이 묻어난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다. 긴긴밤과 혹한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랑은 점점 깊어졌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견고해졌다. 하령이 나갈 채비를 하자, 홍양이 다가와 물었다. “어딜 가려고?” “연꽃잎을 따 오려고요. 연잎밥을 해드릴게요. 향긋하고 맛있을 거예요.” 수줍게 웃는 미소가 마치 연꽃처럼 발그레했다. “같아가자.” 두 사람은 연못으로 향했다. 봄이 시작되자, 연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연꽃잎을 따, 차곡차곡 쌓고, 연잎을 부채질을 하고, 향기를 맡고, 세상이 둘 뿐인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보냈다. 피어오르는 연꽃을 사이에 두고 입술을 맞췄다. 두 사람은 연못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하령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한 봄 햇살이 따가웠다. “나리, 집안이 몰락했을 때도, 관비가 되었을 때도, 더는 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요즘은 그마저도 다행히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마저 듭니다.” “정말 이상한 생각이로구나. 훗-” “나리를 만나서 그런 것이
허공에 흩날리듯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리!” 그리운 소리에 번뜩 떠진 눈이 소리를 좇자, 하령이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너!” “일찍 오셨네요. 빨래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그녀는 빨갛게 언 손을 호호-불며 그에게 다가왔다. 홍양은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가 빨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나리!” 생경한 그의 행동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동공이 흔들렸다. “왜, 왜 이러세요. 놔, 놔주세요." 당황스럽고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그녀를, 홍양은 더욱 강하게 붙들어 잡았다. “추운데 무슨 빨래를 한다고.” “괘, 괜찮습니다. 익숙해져서…” “들어가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불을 피웠는지, 방안은 이미 뜨끈뜨끈했다. 홍양은 아랫목에 덮인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앉혔다. “몸 좀 녹이거라.”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하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이러세요. 냉정하게 밀어내실 때는 언제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녀의 말투에 서운함과 투정이 섞여 있었다. “네 신랑 될 사람을 만나고 왔다지?” “……” “어떴더냐? 맘에 들더냐? 기왕지사 혼인하는 거,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 삐뚤어진 말에, 반항하듯 대답했다. “예. 맘에 들었습니다. 듬직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잘생겼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시집가고 싶어 졌어?” “……” “빨리 떠나고 싶어 졌느냐? 나만 여기 두고, 빨리 그놈에게 가고 싶어?” 그는 화가 난 듯 그녀에게 쏘아붙이고,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왜, 화를 내시나요?” 정곡을 찔린 듯, 애써 아닌 척 입꼬리를
다음날, 관아로 들어가는 홍양의 귀에 관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하령이가 시집을 간다고?”“그래. 옆 함평군에서 일하는 관노라던데?”“하긴, 좀 늦긴 했어. 빨리 치워야지. 안 그래도 눈독 들이는 놈들 많은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이야.”“에효- 팔자도 참. 양반집 규수가, 노비랑 혼인을 하다니. 쯧.”순간, 홍양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하령이 시집을 간다니. 부질없이 일렁이는 마음이 성가셨다.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그는 이미 한양에 처자식이 있으며, 그녀는 국가의 자산이다.그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나? 그 뒷감당은 할 수 있나?그저 정도만 걸으며, 평탄하게 살고자 한 인생이었다.틀 안에 살고자 했던 그에게,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변수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는 지금 조차도. 정말 성가셨다.그 말을 들은 이후, 그는 애써 그녀를 멀리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이긴 했지만, 기분 탓일 테지.“나리. 오늘도 소인이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없다. 이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서류는 거의 다 정리를 끝냈으니, 이제 밤새 일을 할 필요는 없다.”“네.”“할 말 없으면 나가보거라.”그녀는 대답 없이 그의 방 앞을 떠났다.시선은 서책에 향했고, 들리는 것은 여상한 그녀의 목소리일 뿐이니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후-”정신이 사나워, 글자가 눈에 들지 않았다.홍양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잡념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밤이 깊었지만,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아 홍양은 방을 나섰다.멀리, 하령의 방에서 등불이 새어 나왔다.‘아직, 안자나?’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거처로 다가갔다.다가갈수록 문틈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다.소리 내 울지 않던,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그녀가 울고
홍양은 저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가 궁금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한양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절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고고한 선비이기를 바랐다. “나리.” 그가 뒤를 돌아보자, 게슴츠레 눈을 뜬 하령이 곁으로 다가왔다. “송구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이만, 소인은 가보겠습니다.” 홍양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날, 온 마을을 뒤덮은 거센 눈발에 홍양은 관아에서 나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늘 자신을 맞아주던 하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오는 게 어딜 간 게야?” 그는 구들장으로 가, 그녀와 자신의 방에 장작을 밀어 넣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향리가 나무를 지고 들어오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령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까 마주쳤을 때, 빨래터에 간다고 했습니다.” 홍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켜고, 서책을 폈다. 어쩐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세지는 바람과 눈발이 신경이 쓰여 자꾸만 밖을 내다봐야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넘었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깊이까지 쌓이고 있었다. “왜 이리 안 오는 게야?” 초조한 발걸음이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겼다. 그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설피를 짚신 위에 단단히 묶고, 도롱이를 걸친 뒤 삿갓을 눌러썼다. 한발 한발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겨우 빨래터에 도착했지만, 하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함을 감지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빨래터 인근을 다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 산으로 오르며 하령의 이름을 불렀다. “하령아! 하령아!” 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령아!”
쿵쿵쿵- “또 밥을 다- 남기셨네! 이러다 정말 죽는다니까요!” 문 앞의 밥상 앞에 앉아 막둥어멈이 큰 소리를 쳤다. 누군가가 꼭 들으라는 듯이. “안 먹을 테니 헛수고 말고 가져가!” 방 안쪽에서도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그들의 바람이 통하기라고 한 듯, 홍양이 연화의 방 앞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막둥어멈이 자리를 비켜서자, 홍양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풀었다. 덜컹-문을 잡아당겼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당황한 홍
"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실언을 했다 하지 않았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연화는 순식간에 영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화야!" 놀란 홍문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칼은 영도에게 겨눠지고 있었다. 영도는 재빠르게 다시 칼을 뽑아 그녀의 칼을 막아냈다. 챙! "받아주는 건 여기까지요. 이제 그만하시오. 더는 나도 참지 않겠소!" 영도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다. 무슨 여자가 이리도 드센지… 그렇다고 해도 여인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그렇소." 겸 또한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여기 보다 높으신 분?” 턱으로 관리를 가리키며 묻는 연화를 향해 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요. 여기! 여기 좀 보십시오." 연화는 꼬깃해진 벽보를 겸 앞에 들이밀었다. "여기 누. 구. 나. 무술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소만?" "헌데 왜 저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합니까?" 겸은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관찰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
이곳은 고립된 전장이며, 그의 곁에 선 유일한 여인이기에 그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다짐했으며, 신실한 약조를 했으니까. 그를 위해 무엇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기에 망설이지 않았다.겸은 자신의 팔에 연화를 뉘었다. 그리고 팔을 감아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득 안았다. 숨을 고르는 그들의 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겸은 담요를 끌어와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체온이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