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아… 아니… 조금 낯설어서... 그럼 다음에 뵙지요.”
영도는 상기된 표정이 들킬까 두려워, 서둘러 대문을 열고 성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제가 배웅을…” 연화가 서둘러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따라나섰지만, 영도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화는 자꾸만 치솟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웃고 있는 연화를 향해 막둥어멈이 다가와 물었다. “뭐가 그리 즐거워요? 입이 귀에 걸려 있네요?” “어멈, 어멈. 나... 곧 아버님 품을 떠나게 될지도 몰라.” “아까 그 잘생긴 나리랑 드디어 혼례라도 하시려는 거예요?” “아니, 아니. 혼례는 아니고… 더 고귀하신 분과…” “다른 분이요?” “아… 아니… 아무튼, 잘되면 그때 말해줄게. 히!” 언제 봐도 기분 좋아지는 연화의 미소를 보고 막둥어멈은 더 묻지 않았다. 연화가 저리도 즐거워하는데, 그것이면 족하지!
닷새 후, 약속의 날이 다가왔다.
푹 자야 최상의 몸상태로 대련을 치를 텐데...
도저히 설레는 마음에 잠이 쉬이 들지 않았다. 겨우 느지막이 잠이 들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눈이 떠졌다. 밖을 보니 아직 닭도 울지 않은 짙은 새벽이었다. 연화는 잠을 청하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입궁 준비를 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단정하게 소세를 한 후 환복까지 마쳤지만 아직도 아침은 오지 않았다. 홍양도 이른 아침 눈이 떠니긴 마찬가지였다. 멀찍이 그녀를 지켜보다, 이내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벌써 채비를 마친 것이냐?" 홍양을 발견한 연화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한숨은 깊어졌다. “연화야… 아비와 한 약속, 잊지는 않았겠지?” “그럼요. 걱정 마셔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소녀가 이기지 못한다면, 아버님 뜻을 따에 것입니다." “그래. 부디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하거라.” 마침, 동궁전의 내관이 도착했고, 연화는 큰 절을 올린 후 경쾌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처음 밟는 궁궐의 길.
궐 안은 연화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크고 화려했다. "구중궁궐이라..." 떡 벌어지는 입을 다물길이 없었다. 궁녀들과 내관들이 분주히 오가는 길목마다 정갈한 장식과 정원이 이어졌고, 연못엔 물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연화는 그 모든 풍경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집안에서만 살아온 연화에게 이곳은 낯선 장소였지만, 동시에 감출 수 없는 설렘과 긴장으로 가슴이 뛰었다. 오늘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건 대련이 있다. 연화의 입과 눈은 이내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울수록,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또렷해졌다.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야.'
내관을 따라 궁의 동쪽으로 들어가니, 이미 그곳에는 대련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주위를 세자익위사 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과, 경계의 눈빛들이 그녀를 향하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머지 않아 영도가 연화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나리.” 영도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데 어쩐지 영도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으며, 경직된 것 같아 보였다. 하물며 그녀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긴장하셨나?'
영도는 상기된 얼굴이 들킬까 그저 짧게 목례만 할 뿐이었다.
영도가 연화의 앞에 마주 서 자세를 꼿꼿이 하자, 곧 겸이 나타났다. 그이 등장에 모두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연화도 눈치껏 그들을 따라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겸은 대련장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입을 열었다
“무술대회를 열었으나, 나는 아직도 내 곁을 지킬 호위무사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히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기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 결과가 어떻든, 절대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 “예!” 우렁찬 함성소리와 함께 곧 두 사람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영도는 칼을 높이 쳐들었지만, 그녀를 보자 눈과 마음이 흔들렸다. 대련을 앞둔 검객이 아니라,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었다.첫 검은 그의 머뭇거림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역시나, 연화는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칼을 쥔 손끝이 유연하고 단단했으며, 몸놀림은 춤을 추듯 매끄러웠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더 강하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확실히 힘에 있어서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것을 상쇄할 빠르고 정확한 몸놀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경험에 당황스러웠다. '이런 식의 대련은 처음이다.'
누구 하나 물러섬 없이 둘은 팽팽히 맞섰다.
흙먼지가 일고,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쉽게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이어지는 대련은 누구도 쉽게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연화는 빠르고 정확한 수비로 영도의 강공을 받아내었고, 그럴수록 영도는 점점 흔들려 갔다. ‘왜 쓰러뜨릴 수 없지?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냐?’ 자신을 향한 비난은 날 선 검이 되어 그녀를 향했다. 칼끝이 그녀에게 향할 때마다, 그녀의 단단한 눈동자가 시야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집중력, 끈기, 단호한 의지는 영도를 흔들고 어지럽혔다.
연화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이 대련에서 이기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영도의 칼은 생각보다 더 매서웠다. 지난번 영도와 대련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영도가 휘두르는 공격을 매번 간신히 빠져나갔지만, 검이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연화는 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길어지는 싸움에 잠시 숨을 고르며, 서로 멀찌감치 떨어졌을 때였다.
그 순간, 벚꽃을 실은 봄바람이 불어와 연화의 잔머리가 흩날렸고, 그 자리에 햇살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 모습이, 영도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발그레 웃던 고운 얼굴, 단아하고 고고한 자태. 심장이 뛰었고, 시선이 흔들렸다. 그러자 칼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가 다시 집중하려는 찰나, 연화가 먼저 그를 향해 칼을 뻗었다. “하압!”
‘아... 안 돼…’
그녀를 슬쩍 본 홍양은 손에 든 술을 마저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녀가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낚아챘다.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뭐 하는 짓이요? 부인!” “언제까지 이러실 작정입니까?” “……” 홍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밀이 버거워, 말없이 다시 술잔을 채웠다. “다녀오세요.” “?” 그녀가 그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속량*을 해 달라, 관아에 요청을 했습니다” “!” “전하께서도 아시게 되었나 봅니다. 면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부인!” 그녀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어조와 태도였다. "제가 모르실 줄 알았습니까? " 평소와 달라진 지아비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것이 여자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를 되돌려 놓아야 했다. 그것이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는 그녀의 역할이었으니. “데려 오세요. 양반이 첩을 거느리는 게 무에 그리 큰 흠이 라고, 몇 날 며칠을 이렇게 끙끙대신단 말입니까!” “……” “언제까지 폐인처럼 사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녀의 질책에도 그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과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체면 때문이셨겠지요.”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고개 숙인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도 잠시, 하령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령아, 조금만 기다려 다오. 금방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 다음 날 이른 새벽, 홍양은 급히 함평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부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안채로 향했다. 안방에서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부인이었다. 강한 척, 담대한 척했지만, 그녀도 여인일 뿐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그녀의 말대로 그녀와 했던 시간들은 일장춘몽으로 끝났단 말인가.이제는 그 이름을 부른다 한들, 대답해 줄 이도 웃어줄 이도 없다.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상실감에 정신이 메말라갔다.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데려 오고 싶은 상상을 수없이 반복했다.다른 놈의 품에 안겨 달뜬 숨을 내쉬는 모습과 그놈을 향해 웃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지독하게 괴로운 것이었다.그녀를 데려 올 용기는 없으면서도, 그녀를 잊지도 못했다. 천지같이.그녀가 없는 나주목은 적막했다. 외로운 타지생활은 더없이 지루하고 서글펐다.밤이면,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던 기억과, 자신을 바라보던 말간얼굴이 떠올라 잠에들지 못했다.너는, 잘 살고 있을까.머릿속을 지배해 버린 너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나는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라,네 안위와 네 행복보다는 투기심에 들끓고 감당할 수 없는 내 감정에 화가 났다.그러니 부디, 잘 살라고. 나 같은 놈은 잊고 잘 살라고.너를 평생 잊지 않고 아파하는 것으로, 너를 보낸 형벌을 평생 받겠노라.그는 매일 밤, 그녀가 잠들었던 그 방에 누웠다. 그녀의 체취가 아직 남아 있었다.그녀가 없이 지난한 시간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양은 다시 한양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원자를 가르치라는 왕명이 내려왔기 때문이다.떠나는 그의 얼굴에 미련이 가득했다.이제 정말, 그녀와 영영 이별인가. 그녀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이곳과도 이별이리라.그녀와 나누지 못한 작별인사를 마음에 고이 접어 두었다.그저, 잘 살기를. 잘 살아내기
그녀의 축축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자, 빠듯한 만족감이 덮쳐왔다. 신음이 적나라하게 울리고, 방안은 열기로 가득 찼다. 가녀린 몸을 비틀며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워, 그의 입술로 그 소리를 삼켰다. 자신의 아래에서 바들거리는 선연한 얼굴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 마침내, 그녀에 대한 욕망이 그녀 안을 꽉 채우고, 끈적한 흔적을 남겼다. “하-하-”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교차했다. 그의 턱밑에서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순간, 감당하지 못할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이 한 짓이, 그녀에게 어떤 불행과 고난을 안기게 될지 무서웠다.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 방도가 있을 거야. 찾아보자. 하령이를 내 것으로 만들 방법을.’ 서로 마주 보는 얼굴에 간지러움이 묻어난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다. 긴긴밤과 혹한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랑은 점점 깊어졌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견고해졌다. 하령이 나갈 채비를 하자, 홍양이 다가와 물었다. “어딜 가려고?” “연꽃잎을 따 오려고요. 연잎밥을 해드릴게요. 향긋하고 맛있을 거예요.” 수줍게 웃는 미소가 마치 연꽃처럼 발그레했다. “같아가자.” 두 사람은 연못으로 향했다. 봄이 시작되자, 연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연꽃잎을 따, 차곡차곡 쌓고, 연잎을 부채질을 하고, 향기를 맡고, 세상이 둘 뿐인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보냈다. 피어오르는 연꽃을 사이에 두고 입술을 맞췄다. 두 사람은 연못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하령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한 봄 햇살이 따가웠다. “나리, 집안이 몰락했을 때도, 관비가 되었을 때도, 더는 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요즘은 그마저도 다행히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마저 듭니다.” “정말 이상한 생각이로구나. 훗-” “나리를 만나서 그런 것이
허공에 흩날리듯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리!” 그리운 소리에 번뜩 떠진 눈이 소리를 좇자, 하령이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너!” “일찍 오셨네요. 빨래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그녀는 빨갛게 언 손을 호호-불며 그에게 다가왔다. 홍양은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가 빨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나리!” 생경한 그의 행동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동공이 흔들렸다. “왜, 왜 이러세요. 놔, 놔주세요." 당황스럽고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그녀를, 홍양은 더욱 강하게 붙들어 잡았다. “추운데 무슨 빨래를 한다고.” “괘, 괜찮습니다. 익숙해져서…” “들어가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불을 피웠는지, 방안은 이미 뜨끈뜨끈했다. 홍양은 아랫목에 덮인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앉혔다. “몸 좀 녹이거라.”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하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이러세요. 냉정하게 밀어내실 때는 언제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녀의 말투에 서운함과 투정이 섞여 있었다. “네 신랑 될 사람을 만나고 왔다지?” “……” “어떴더냐? 맘에 들더냐? 기왕지사 혼인하는 거,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 삐뚤어진 말에, 반항하듯 대답했다. “예. 맘에 들었습니다. 듬직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잘생겼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시집가고 싶어 졌어?” “……” “빨리 떠나고 싶어 졌느냐? 나만 여기 두고, 빨리 그놈에게 가고 싶어?” 그는 화가 난 듯 그녀에게 쏘아붙이고,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왜, 화를 내시나요?” 정곡을 찔린 듯, 애써 아닌 척 입꼬리를
다음날, 관아로 들어가는 홍양의 귀에 관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하령이가 시집을 간다고?”“그래. 옆 함평군에서 일하는 관노라던데?”“하긴, 좀 늦긴 했어. 빨리 치워야지. 안 그래도 눈독 들이는 놈들 많은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이야.”“에효- 팔자도 참. 양반집 규수가, 노비랑 혼인을 하다니. 쯧.”순간, 홍양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하령이 시집을 간다니. 부질없이 일렁이는 마음이 성가셨다.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그는 이미 한양에 처자식이 있으며, 그녀는 국가의 자산이다.그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나? 그 뒷감당은 할 수 있나?그저 정도만 걸으며, 평탄하게 살고자 한 인생이었다.틀 안에 살고자 했던 그에게,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변수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는 지금 조차도. 정말 성가셨다.그 말을 들은 이후, 그는 애써 그녀를 멀리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이긴 했지만, 기분 탓일 테지.“나리. 오늘도 소인이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없다. 이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서류는 거의 다 정리를 끝냈으니, 이제 밤새 일을 할 필요는 없다.”“네.”“할 말 없으면 나가보거라.”그녀는 대답 없이 그의 방 앞을 떠났다.시선은 서책에 향했고, 들리는 것은 여상한 그녀의 목소리일 뿐이니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후-”정신이 사나워, 글자가 눈에 들지 않았다.홍양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잡념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밤이 깊었지만,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아 홍양은 방을 나섰다.멀리, 하령의 방에서 등불이 새어 나왔다.‘아직, 안자나?’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거처로 다가갔다.다가갈수록 문틈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다.소리 내 울지 않던,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그녀가 울고
홍양은 저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가 궁금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한양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절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고고한 선비이기를 바랐다. “나리.” 그가 뒤를 돌아보자, 게슴츠레 눈을 뜬 하령이 곁으로 다가왔다. “송구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이만, 소인은 가보겠습니다.” 홍양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날, 온 마을을 뒤덮은 거센 눈발에 홍양은 관아에서 나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늘 자신을 맞아주던 하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오는 게 어딜 간 게야?” 그는 구들장으로 가, 그녀와 자신의 방에 장작을 밀어 넣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향리가 나무를 지고 들어오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령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까 마주쳤을 때, 빨래터에 간다고 했습니다.” 홍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켜고, 서책을 폈다. 어쩐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세지는 바람과 눈발이 신경이 쓰여 자꾸만 밖을 내다봐야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넘었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깊이까지 쌓이고 있었다. “왜 이리 안 오는 게야?” 초조한 발걸음이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겼다. 그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설피를 짚신 위에 단단히 묶고, 도롱이를 걸친 뒤 삿갓을 눌러썼다. 한발 한발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겨우 빨래터에 도착했지만, 하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함을 감지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빨래터 인근을 다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 산으로 오르며 하령의 이름을 불렀다. “하령아! 하령아!” 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령아!”
영도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예? 정말이십니까? 벌써 한 달이나 지나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잊고 있었지. 하지만 문득 그 아이를 시험해보고 싶어졌어. 내 곁에 둘 수 있을 만한 아이인지…”겸은 아련히 창밖을 바라보았다.어딘가로 달아나는 구름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더 이상 달아나기만 할 수는 없다.“그 아이는 내게 모든 걸 바치겠다고 했다. 그 말이 자꾸 맴돌아.”“하지만… 여인입니다. 저하께서 여인이 호위무사라니요. 분명 내외의 반발이 클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그러니 네가 필요하다.
“정식으로 영도 나리와의 겨루기에서 이긴다면 받아주시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영도와 대련을…?”홍양은 그제야 사태의 전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영도라면 백전불패 무사가 아닌가. 아무리 우리 연화가 특출 나다 하더라도 영도를 이기는 것은 무리지… 흠… 저하의 의중을 알겠구나.’그 의도를 인지하고 안도한 홍양은 억지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저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이 아비도 더는 말릴 수 없겠구나.”“정말요? 정말 허락하시는 거죠?”“그럼. 단, 조건이 있다. 대련에서 네가 지면, 그땐 이 아비
“뭐라?” 겸과 영도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저하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소인이 오라버니의 검을 날려버리는 모습을요.” 연화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영도가 칼집을 움켜쥐었다. 연화는 멋쩍은 듯 손을 내저었다. “검술이며 무술이며, 실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기대 이상일 겁니다.” 겸은 당황스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실력은 분명 인상 깊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성별과 출신. 그게 걸림돌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영도가 먼저 나섰다. “이보
“괜찮으십니까?” “연화 낭자? 그대가 어찌 여기에…” “말씀은 나중에요. 저하. 일단 저 시정잡배들부터 혼쭐을 내줘야겠습니다" 연화는 곧장 목검을 들고 먼저 다가온 사내의 다리를 정확히 찍어 눌렀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곧이어 두 번째 사내가 뒤에서 덤벼들었다. 연화는 허리를 돌려 그의 팔목을 쳤고, 손에서 빠진 막대기는 땅에 울리며 떨어졌다. 그러자, 동시에 양옆에서 사내 둘이 함께 덤벼들었다. “조심!” 겸의 그녀를 향해 외치며 옆에 나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