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행인은 겸을 한번 훑어보더니, 곧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감님 댁이라면 이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백성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신하라니, 역시 스승다웠다. 그 덕분에 수월하게 홍양의 대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홍양대감의 저택 앞.
담장 너머로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치솟은 용마루들이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끼이익- 거대한 대문이 열리더니 한 하인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 장승처럼 선 두 청년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춰 섰다. 하인은 잠시 멍하니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다,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뉘.. 뉘신지요..?" 영도가 겸의 앞으로 나서며 하인에게 말했다. "세자저하시네." “예? 세… 세자저하요?” 겸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세자저하가 왜…’ 그러다 문득, 홍양이 세자의 스승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눈치 백 단 하인은 바로 허리를 굽실했다. “대감께서 안에 계시느냐?” “아, 예! 지금 안에 계십니다! ” '저분이 세자저하시구나… 와, 세상 참 불공평하네.' 타고나길 고귀한 신분에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용모에, 하인은 저도 모르게 신세한탄을 했다. 스윽- 보니, 세자의 옆에 선 무사 또한 세자 못지않게 훌륭하지 않은가. 신세 한탄이야 했지만 눈이 즐거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경외감마저 들었다. ‘잘생긴 사람 옆엔… 잘생긴 사람…’ “이보게!” “아이고, 안으로 어서, 어서 드시지요! ” 하인은 허둥지둥 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가옥들이 널찍이,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 최고 명문가답게, 정원수 하나, 기왓장 하나까지도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웠다. 그 각각의 가옥들 사이사이를 하인들과 일꾼들이 분주히 오갔다. 서로 눈빛만 주고받아도 동선이 맞는 듯, 움직임엔 일사불란함이 배어 있었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공기를 가르는 금속성의 날카로운 마찰음이 귓가를 스치며 그의 발을 붙잡았다. 챙! 챙! 그 소리에 눈빛이 번뜩였다. "이 소리는…?” 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하인이 얼떨결에 설명을 덧붙였다. “예, 저 뒤뜰에 연무장이 있습니다. 아마 도련님들께서 검술 훈련 중이실 겁니다.” 하인의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슬쩍 들어 세자의 눈치를 보았지만 어딘지 정신이 팔린 모습에 다시 쭈뼛거리며 한걸음 다가가 말했다. “저하… 대감께서는 저쪽 사랑채에 계십니다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겸의 발걸음은 이미 연무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하… 먼저 인사를…” 그의 뒤를 따르며 영도가 조심스레 말렸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무장으로 구경을 좀 가야겠구나. 스승님께 내가 왔다고 먼저 전하거라.” 겸의 오감은 이미 훈련장의 소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게 있어 검의 울림은, 그 어떤 말보다도 진실한 언어였으며, 벗이었다. 영도는 하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겸의 뒤를 따랐다. 하인은 그들을 멀어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 사랑채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에서는 두 사내가 대련 중이었다.
연무장 가장자리에는 양반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와 여종 하나가 물수건을 들고, 멀찍이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건장한 자와 왜소한 자.
한쪽은 강하고 묵직하게 밀어붙였고, 한쪽은 날렵하게 틈을 파고들었다. 이겸은 멀찍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속도, 호흡, 중심축의 흔들림이 없다. 둘 다 보통이 아니군.’ 칼끝이 맞닿을 때마다 맑은 쇳소리가 울렸고, 날카로운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찢었다.
건장한 사내는 안정적인 자세, 묵직한 검으로 상대를 압박했고,
상대는 마치 바람처럼 그의 빈틈으로 흘러들었다. “움직임이 아주 인상 깊구나…” 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영도도 동조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을 잘 되었다를 넘어선 타고난 감각이 있다.”
겸은 단순히 관전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무예를 사랑하는 자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했고, 온몸으로 칼의 감각을 익혔다. 그런 그의 눈에, 지금 벌어지는 이 대련은 단순한 연습이 아니었다. “둘 다 실력자다. 하지만…” 겸의 눈동자가 점점 더 좁아지며 한 사람에게 시선이 붙잡혔다. “저 작은 자가… 결코 밀리지 않는군. 아니, 곧 승패를 내겠어.”
대련이 절정에 다다르자, 건장한 사내가 검을 높이 들어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나 그 순간, 왜소한 상대가 몸을 낮추며 사선으로 파고들며 상대의 칼을 순식간에 쳐냈다. 검이 공중을 가르며 날아갔다. 쨍—! 청명한 쇳소리와 함께 무거운 검이 바닥에 꽂혔다. 정적이 흘렀다. 대련은 끝났고, 모두의 시선이 그 작은 승자에게 쏠렸다. 그 정적을 깨고, 겸은 그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훌륭하군.” 그 짧은 한마디에 연무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세자저하! 어찌 기별도 없이…” 이겸의 스승, 홍양이었다. 그는 반가움에 상기된 얼굴로 이겸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반갑기야 겸만 할까? 스승을 발견한 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스승님?” “저하 덕분에 소신은 잘 지냈습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홍문이 사내들에게 오라 손짓을 했다. “이 아이들은 소신의 자식들입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건장한 사내를 보며, 겸은 놀라움에 스승과 사내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 자는… 무술대회 장원을 한...” “예, 큰아들 홍문이옵니다.” 건장한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홍문이라 하옵니다.” “이런, 어찌 자네! 스승님의 자제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송구합니다. 저하. 혹 저하께 누가 될까 그랬습니다.” “하하, 스승님의 자제가 맞습니다. 그대, 대회 때도 물론 훌륭했지만, 그때보다 더 좋아졌군.”
홍양은 둘째'임'과 셋째'헌"도 곁으로 데려와 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 고개를 숙인 채 외로이 서 있는 왜소한 사내에게 겸의 시선이 닿았다. 그러나 스승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할 뿐 아니라 딴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묘한 분위기에 겸과 영도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그 왜소한 사내가 결심한 듯, 그들에게 성큼 다가왔다.
“저하, 연화라 하옵니다.”당장이라도 무언가 부술 것 같은 분노가 서린 얼굴이었다.전에는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그의 기세에 연화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네가 감히 나를 떠나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고저 없는 그의 목소리는 먹잇감을 앞에 둔 산군의 모습과도 같았다.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를 망칠 수도 있기에.“제가 사라져야 전하께서 살시고, 전하께서 사셔야 제가 살 수 있습니다.”“안 된다.”“……”“불허한다.”“이번만은 소인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연화야!"“전하께서는 이 관계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그래. 제가 많이 힘들었겠지.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방법을 찾지 못해서… ”치솟았던 분노가 어느새 죄책감으로 변해, 그는 애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소인을 놓아주십시오. 떠나고 싶습니다. 전하.”그녀의 단호한 태도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나는 절대 너를 떠나보낼 수는 없어. 네가 원해서 동궁전으로 너를 보내주었다.그것만으로도 내겐 힘든 결정이었어. 더는 안 된다.더 멀리는 안돼. 나는 너를 보낼 수는 없어.”“전하. 사사로운 감정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감정일 뿐입니다.”“아니다! 네가 없으면 나는 당장… 나는… 살 수 없단 말이다. 연화야.”작아진 그의 어깨를 보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럴수록 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이제 지쳤습니다. 누군가의 그늘인 채로,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지쳐버렸습니다. 전하를 연모하는 그 마음하나로 버틴 세월입니다. 더 이상… 더 이상은 힘이 들어 버틸 수가 없습니다.”“그래. 힘들었겠지.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으냐? 당장이라도 너를 내 후궁으로 들이면 되는 것이냐”“전하! 어찌 그런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 말 한마디에 닥칠 파장들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그렇겠지. 폭풍이 몰아칠 테지, 하지만 네가 나를 떠나는 고통만 하겠느냐
"소인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홍연의 굴복에 정귀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쩔 도리가 없을 테지.화산처럼 폭발하던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잘 생각했다. 전하께 내 얘기는 하지 말고, 알아서 떠나거라. 입을 잘못 놀려 전하께서 오늘 너와 나의 일을 알게 되는 날에는, 나 혼자 죽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잘 판단하여 처신하거라.”연화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리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상상을 해왔던 일이다.그러나 막상 이 순간이 닥치자,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다.물러나야 했다. 그를 위해서.“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귀인 마마께서도 꼭 약조를 지켜주십시오. 전하께서 고초를 겪지 않게 하시겠다고요.”“당연하지. 주상 전하께서는 내 지아비신데, 어찌 그리되길 바라겠느냐.그리고 이제 그것은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니, 어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거라.”자신의 처소를 나서는 그녀를 보자 입술이 휘어지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당당하던 품이 한낱 볼품없는 여인이 되었다.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신이 난 적은.‘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구나. 이제 저것이 사라졌으니 전하께서는 분명, 나를 찾게 되실 거야. 이번에 정말 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놓치서는 안돼.’정귀인은 왕의 옆에서 서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꽉 찬 달은 밝고 아름다웠다.그런 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화의 마음은 어두웠다.‘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이내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언젠가는 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비밀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애써 외면해 왔던 그 일이 닥치고야 말았다.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다.자신이 떠나야만 겸이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떠나는 자신을 겸이 쉽게 보내줄 리도 만무했다.슬픔도 잠시, 연화는 그에게 어떻게 떠나야 할지 막막한
시는 겁니까?”연화는 오히려 강하게 그녀에게 반박을 하기로 했다. 감히 입에 담지 못한 말을 한 그녀에게 겁을 줄 생각이었다.“예? 어찌 그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말을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혹여, 누가 들을까 저어 되옵니다. 마마께서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그의 당당한 태도에 정귀인은 살짝, 겁이 났다.설마 아니라면, 그의 말대로 어마어마한 뒷감당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하지만 그녀는 이미 잃을것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생각이 꼭 맞을 것 같은 어떤 확신이 있었다.정귀인은 그의 겁박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더 궁지에 몰 생각이었다.“그렇다면... 그대가 여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까?”바닥에 내다 꽂혔던 심장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바스러지기 시작했다.연화는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다.‘말리면 안 돼. 정신 차려, 홍연화!’“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아까는 전하의 정인이 아니냐 물으시더니, 여인이라니요!”홍연의 목소리는 변함없는 듯했지만, 정귀인은 더욱 확신했다.표정을 읽히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꽉 쥔 모습은 평소에 보던 당당한 홍연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홍 판서 대감댁에는 서자가 없다 하더이다.”“!”“그리도 그대가 당당하다면, 내 앞에서 옷을 벗어보세요. 그렇게 결백을 증명해 보세요!”“……”“못하겠으면, 아랫것들을 시켜 벗겨드릴까?”비웃는 입매와 서슬 퍼런 눈빛에 연화는 더 이상 제정신을 바로 붙잡을 수 없었다.“마마… 어찌… 외간 사내의 옷을 벗으라 하십니까?”정귀인은 그녀의 연극에 진저리를 쳤다. 이미 너는 표정에서 다 들켰어!“그 뒷감당은 내가 하겠습니다. 간통으로 나를 쳐 죽인데도 감당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어쩌시렵니까?”연화는 들지 못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여기서 모든 걸 인정하고 그대가 물러난다면, 그대를 욕
명화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정귀인은 뒤죽박죽 얽혀 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명화의 이야기로 자신이 품었던 의구심이 하나씩 아귀가 맞아가는 것 같았다.생각이 정리되자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휘어졌다.정귀인의 표정을 읽고 명화가 물었다.“마마, 뭐 짚이시는 거라도…?”“그래, 이제야 알겠다. 홍양 대감의 서자라는 호위무사… 하지만 홍양 대감댁에는 세 아들 외에 다른 사내는 없는데.. 의문의 여인이 있었다라...그렇다면 전하의 호위무사가 홍양 대감의 서자가 아닌 서녀라면?""예?""그렇다면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느냐? 전하께서 홍양 대감의 서녀를 호위무사로 들이셨고, 그 전이든 그 후든 간에 전하께서 그 여인을 연모하게 되셨다면… 중전이나 내가 없어도 되셨겠지. 밤마다 침소로 그 년을 데려오면 되니 말이다.”"홍연대장이 여인이라는 말씀이세요? 말도 안 됩니다!""이제 보니 몸도 무인치고는 여리하고 얼굴도 곱상하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그것이 아니라 여인이 어찌 호위무사를..""그거야 더 알아보면 되겠지. 앙큼한 년이 아니냐?"정귀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로 늘어놓자 사실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점점 화가 오르기 시작했다.'비천한 서녀주제에 성별까지 바꿔가며 전하옆을 꿰차고 앉아있던 거야?'화가 내기기 위해 정귀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벌컥벌컥 올라오는 분노에 찬물을 들이켰다.이야기를 듣던 명화도 말이 안 된다 싶으면서도, 논리적으로는 너무 들어맞는 이야기여서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마, 증좌가 없지 않습니까? 옷을 벗겨볼 수도 없고, 전하께 직접 여쭐 수도 없고요…”“맞아. 증좌가 없지. 그러니 도박을 하는 수밖에… 명화야, 네가 홍연을 만나고 오너라.” “예? 소인이요? 가서 뭐라 해야 할까요?”“네가 뭐라 할 수 있겠느냐? 그저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하거라. 지금 당장!”“예, 마마.”명화는 상전의 불호령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잽싸게 동궁전으로 발걸음을 재촉
처소로 돌아온 정귀인이 자리에 앉아 좀 전에 후원에서의 장면을 떠올렸다.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며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그런 정귀인에게 명화가 슬며시 말을 걸었다.“마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명화야, 홍연이 말이다.”“예, 마마.”“그 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예? 홍연 대장이라면… 전하께서 세자 시절부터 함께하시던 호위무사가 아닙니까?”“그것은 나도 안다. 그 외에는?”“그야… 인기가 많으시죠. 특히나 나인들한테 인기가 많으십니다.전하와 홍연 대장이 대련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궁 안의 모든 나인이 구경하러 갈 정도니까요.그 고우신 얼굴로 칼을 휘두르실 때 또 얼마나 멋지신지…”“그런 얘기 말고! 다른 건 없느냐?”“예… 워낙 다른 궁인들과 교류가 없으셔서… 호조판서인 홍양 대감 댁 서자라는 건 아시지요?”“뭐? 홍양 대감의 서자?”“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관시험을 따로 보지 않고, 전하께서 세자 시절에 특별히 데려오셨답니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별다른 직책도 없으셨고…”“근데 아까 보니 세자와 함께 있던데?”“예, 최근에 동궁전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합니다.”“갑자기 왜?”“글쎄요. 거기까지는 잘…”잠시 생각에 잠긴 정귀인이 눈을 번뜩이며 명화에게 이야기했다.“명화야, 은밀히 홍연 그 자에 대해 알아오너라.”“예? 갑자기 홍연 대장님은 왜…”“그 자… 뭔가 있다.”“무엇이 말입니까?”정귀인은 그들 사이에 오가던 미묘한 감정들을 떠올렸다.“홍연을 바라보던 전하의 눈빛 말이다.”“눈빛이요?”“그래. 전하의 그런 눈빛, 미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건 중전과 있을 때도 마찬가지셨고…”명화는 눈을 끔뻑 거리며 정귀인의 말을 해석하려 했지만, 도무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예? 마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내가 잘 알지. 연모하는 이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빛과 행동 말이다. 사가에 있을 때, 뭇 남성들이 나에게 보내던 그 수많은 눈빛과 행동들… 모
“허나… 전하께서는 중전마마의 침소에도 합궁일 이외에는 찾지 않으신다 들었습니다.”“알고 있다. 중전마마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더욱 궁금하지 않으냐?”“마마, 어쩌시려고요?”제 상전의 성품을 아는지라 명화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일단, 대전 나인들에게 아는 것이 없는지 물어보거라.”“안 그래도 소인이 여러 번 채근하여 전하의 근황을 물었습니다.허나… 대전 나인들이 입이 어찌나 무겁던지… 대전 안에서의 일은 입도 뻥긋 안 하지 뭡니까.”“뭐라도 좀 찔러 주면서 하란 말이야! 이 맹충아!”정귀인은 장을 열어 옥반지 몇 개를 그녀 앞에 툭 던졌다.“예… 마마…”“그리고 전하께서 후원으로 산책을 자주 나가신다지?”“예, 그렇다 들었습니다.”“전하께서 언제 산책을 나가시는지 그것도 알아보거라.”“그것은 왜…”“뭐라도 해야 하니 그렇지! 모르겠으면 그냥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묻기는 뭘 그리 묻는 게야?”“예… 마마…”“왜 그리 앉아 있어? 굼떠가지고는…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 해?”상전의 불호령에 명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예, 마마. 바로 나가보겠습니다.”정귀인에게 혼쭐이 난 명화가 빠르게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누군가를 마음에 품지 않고서야… 내가 아니더라도 여인에게 일절 관심이 없으시니… 분명 뭔가 있어…’점심 수라를 마친 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김 내관! 이 시간에 세자도 후원에서 산책을 한다지?”“예, 전하. 지금쯤 동궁전 후원에 나와 계실 겁니다.”“그래. 그럼 과인도 세자도 볼 겸 산책을 좀 해야겠어.”그는 설레는 마음은 안고 대전을 나서 후원으로 향했다.세자도 보고 싶고, 연화도 보고 싶었다.그 마음이 발걸음에서 드러났다. 겸의 걸음은 평소보다 빠르고 가벼웠다.머지않아 멀리 세자와 연화가 그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세자를 불렀다.“세자!”한참 꽃구경을 하던 세자가 겸의 부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아바마마.”달려오는 세자를 겸이
“예?”“전 영의정 영감과 폐비를 따르겠다고 줄을 섰지만 결국 다들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까? 사직서라… 여기서 모두가 한 입으로 내자고 한들, 과연 몇 분이나 진짜 내실 것 같습니까?”“맞습니다. 이미 우리 사이에도 믿음에 금이간지 오래입니다.”한참을 설전하던 서인들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설전은 오갔지만, 별다른 대안도 없으니 결국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모두가 떠난 그 자리에 우의정과 좌찬성만이 남았다.“우의정 대감, 어차피 대감께서는 정귀인 마마 때문에라도 전하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우시니, 이참에 전하께 협조하
회의는 길어지고 있었다.답이 나오지 않는 회의에 지친 겸이 언성을 높였다.“대책을 강구하지도 않고 안 된다고만 외치면 다인가?일단 여러 방면으로 대책을 세운 후에 반대를 해도 늦지 않을 터인데, 어찌 그리 그 입만 놀릴 것이오!”영의정의 역모 사건 이후로 조정은 아직 재정비되지 못하고 있었다.마지막에 영의정에게 등을 돌려 살아남은 몇몇 관료들은 새 왕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들은 철저히 실리에 따라 움직였다.처음에는 영의정을 따랐으나, 막판에 돌아가는 판세를 보자 까딱하면 자신들까지 역모로 몰릴 듯한 상황에
“살려 준다 했지. 왕자의 목숨만은 살려 준다, 약조했다.”“그래서... 그래서 전하께서 이리 시름이 깊으셨군요.”“그래. 그 어린아이를 죽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하지만 상황이 이리되고 보니,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듯 하구나..대신들도 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방도가 없구나.”“이번 일은 소인이 하겠습니다.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연이 네가? 어쩌려고 하느냐?”영도가 연화를 보며 말했다.“전하께서 약조를 지키실 수 있게. 하지만 누구도 왕자를 찾을 수 없게 해야지요.”“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예. 전하. 나인들에게 내일까지 준비를 마쳐놓으라 일러두겠사옵니다.부원군 대감, 모레 중전마마와 함께 중궁전으로 입궁하시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알겠네.”“아, 그리고 부원군과 중전께 어려운 부탁을 하나 드려야겠습니다.”“하명하십시오, 전하.”“이리 급작스럽게 왕위에 오르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즉위식과 가례 같은 큰 행사를 두 번이나 여는 것이 참으로 부담이 아닙니까? 전쟁으로 국고도 부족할 터인데... 그 또한 백성의 고혈이니 말입니다.그러니 즉위식과 가례를 함께 치르고자 합니다. 부원군께서 이해해 주셨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