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실언을 했다 하지 않았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연화는 순식간에 영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화야!" 놀란 홍문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칼은 영도에게 겨눠지고 있었다. 영도는 재빠르게 다시 칼을 뽑아 그녀의 칼을 막아냈다. 챙! "받아주는 건 여기까지요. 이제 그만하시오. 더는 나도 참지 않겠소!" 영도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다. 무슨 여자가 이리도 드센지… 그렇다고 해도 여인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모양이 빠지지 않는가?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그녀를 대하는 그의 모습에 난처함이 묻어났다.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연화는 더욱 영도를 도발했다. "제발 그만하면 안돼겠소?" 그런 영도를 비웃듯 연화가 그를 향해 다시 칼을 휘둘렸다. 그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끝을 보지 않는 이상 이 여인은 결코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 한수 가르쳐주고 빨리 끝내 버리자.’ 하지만 그건 영도의 착각이었다. 영도가 칼을 휘두르는 대로 막아내자,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까지 공격을 하고 어디까지 방어를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끝나지 않는 지리한 대련이 계속되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겸이 그들 사이에 나섰다. "이제 그만! 그만하시오!" 단호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에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칼을 멈칫했다. "그대의 실력이 대단한 걸 인정하오. 그러니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겠소." 소리를 지르지도, 무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장악하는 힘이 있었다. 연화는 저도 모르게 검을 슬며시 내려놓고 말았다.
어쩌면 적절할 때 그가 멈추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연화는 영도와의 대결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도는 그간 그녀가 겨루어 본 누구보다 강했다. 최근의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이 사내가 강도를 조절하며 자신을 받아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내 그대의 실력도 알겠고, 억울함도 알겠소." "그럼 대회에 참가해도 되는 것입니까?" “나는 실력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오. 하지만, 이 문제는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미안하지만 이번 대회는 어렵소. 하지만 다음은 약조하지.” “다음이요?” 연화의 물음에 겸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그럼, 나리를 믿어도 됩니까?” “글쎄… 그것은 그대의 몫이오.” 그 흔들림 없는 단단한 그의 말에 연화는 칼을 거두고 허리를 숙였다. “소란스럽게 해서, 송구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슬쩍 영도를 보니, 여전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살짝 미안한 감이 들긴 했지만 왠지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연화는 영도를 향해 어색하게 짧은 목례를 하고 홍문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영도는 여전히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었지만, 겸은 웃고 있었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것이냐? 크크” “어찌 웃으십니까? 사실, 저 낭자가 하는 짓은 곤장을 쳐도 모자랄 일이 아닙니까?” “뭐… 그렇지.” “근데 어찌 그냥 가게 놔두시는 겁니까?” “그럼 너는? 너는 왜 다 받아주고 있던 것이냐?” “그건…” 그 질문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할 질문이었다. 영도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꽤 흥미로운 처자가 아니냐. 즐거웠으니 됐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겸의 머리에 낮에 있었던 일들이 떠나질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여인의 몸으로 무술대회를 참가한다고 하지를 않나, 사내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나서는 모습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아마 사내로 태어났다면 한 자리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조선에서 여인은 지아비를 보필하는 것이 최선의 역할이 아니던가. “저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아까 그 낭자가 자꾸 생각이 나는구나.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 당차기도 하고.” “당차긴요. 무례하고 천방지축에… 아,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봉변도 이런 봉변이 없습니다.” “하하. 그렇지. 네가 오늘 큰 봉변을 당했지. 어디가서 네가 이런 대접을 받겠느냐? 하하.” “다시 마주치며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다시? 다시 마주할 날이 과연 있을까?’ 겸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근데 저하께서 다음을 약조하셨으니, 내년에 또 마주칠까 무섭습니다.” “그래. 내년… 내년이라…” 내년에는 참가할 수 있도록 하겠다 약조를 했지만, 어쩌면 확신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약조였을 것이다. 올해도 간신히 개최한 무술대회를 내년에도 할 수 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인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하는구나.’
열흘 후, 동궁전의 주최로 열린 무술대회의 장원이 세자 이겸 앞에 섰다.
익숙한 얼굴. 바로 홍문이었다. 기골이 장대하며, 칼에는 무와 예가 잘 갖춰져 있는 훌륭한 무사였다. 그에게 장원 교지를 내리는 겸의 얼굴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싶었다. 그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무사의 누이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에게도 이와 같은 재능이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를 지배하는 한 가지 생각.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그녀를 슬쩍 본 홍양은 손에 든 술을 마저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녀가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낚아챘다.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뭐 하는 짓이요? 부인!” “언제까지 이러실 작정입니까?” “……” 홍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밀이 버거워, 말없이 다시 술잔을 채웠다. “다녀오세요.” “?” 그녀가 그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속량*을 해 달라, 관아에 요청을 했습니다” “!” “전하께서도 아시게 되었나 봅니다. 면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부인!” 그녀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어조와 태도였다. "제가 모르실 줄 알았습니까? " 평소와 달라진 지아비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것이 여자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를 되돌려 놓아야 했다. 그것이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는 그녀의 역할이었으니. “데려 오세요. 양반이 첩을 거느리는 게 무에 그리 큰 흠이 라고, 몇 날 며칠을 이렇게 끙끙대신단 말입니까!” “……” “언제까지 폐인처럼 사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녀의 질책에도 그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과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체면 때문이셨겠지요.”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고개 숙인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도 잠시, 하령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령아, 조금만 기다려 다오. 금방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 다음 날 이른 새벽, 홍양은 급히 함평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부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안채로 향했다. 안방에서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부인이었다. 강한 척, 담대한 척했지만, 그녀도 여인일 뿐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그녀의 말대로 그녀와 했던 시간들은 일장춘몽으로 끝났단 말인가.이제는 그 이름을 부른다 한들, 대답해 줄 이도 웃어줄 이도 없다.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상실감에 정신이 메말라갔다.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데려 오고 싶은 상상을 수없이 반복했다.다른 놈의 품에 안겨 달뜬 숨을 내쉬는 모습과 그놈을 향해 웃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지독하게 괴로운 것이었다.그녀를 데려 올 용기는 없으면서도, 그녀를 잊지도 못했다. 천지같이.그녀가 없는 나주목은 적막했다. 외로운 타지생활은 더없이 지루하고 서글펐다.밤이면,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던 기억과, 자신을 바라보던 말간얼굴이 떠올라 잠에들지 못했다.너는, 잘 살고 있을까.머릿속을 지배해 버린 너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나는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라,네 안위와 네 행복보다는 투기심에 들끓고 감당할 수 없는 내 감정에 화가 났다.그러니 부디, 잘 살라고. 나 같은 놈은 잊고 잘 살라고.너를 평생 잊지 않고 아파하는 것으로, 너를 보낸 형벌을 평생 받겠노라.그는 매일 밤, 그녀가 잠들었던 그 방에 누웠다. 그녀의 체취가 아직 남아 있었다.그녀가 없이 지난한 시간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양은 다시 한양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원자를 가르치라는 왕명이 내려왔기 때문이다.떠나는 그의 얼굴에 미련이 가득했다.이제 정말, 그녀와 영영 이별인가. 그녀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이곳과도 이별이리라.그녀와 나누지 못한 작별인사를 마음에 고이 접어 두었다.그저, 잘 살기를. 잘 살아내기
그녀의 축축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자, 빠듯한 만족감이 덮쳐왔다. 신음이 적나라하게 울리고, 방안은 열기로 가득 찼다. 가녀린 몸을 비틀며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워, 그의 입술로 그 소리를 삼켰다. 자신의 아래에서 바들거리는 선연한 얼굴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 마침내, 그녀에 대한 욕망이 그녀 안을 꽉 채우고, 끈적한 흔적을 남겼다. “하-하-”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교차했다. 그의 턱밑에서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순간, 감당하지 못할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이 한 짓이, 그녀에게 어떤 불행과 고난을 안기게 될지 무서웠다.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 방도가 있을 거야. 찾아보자. 하령이를 내 것으로 만들 방법을.’ 서로 마주 보는 얼굴에 간지러움이 묻어난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다. 긴긴밤과 혹한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랑은 점점 깊어졌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견고해졌다. 하령이 나갈 채비를 하자, 홍양이 다가와 물었다. “어딜 가려고?” “연꽃잎을 따 오려고요. 연잎밥을 해드릴게요. 향긋하고 맛있을 거예요.” 수줍게 웃는 미소가 마치 연꽃처럼 발그레했다. “같아가자.” 두 사람은 연못으로 향했다. 봄이 시작되자, 연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연꽃잎을 따, 차곡차곡 쌓고, 연잎을 부채질을 하고, 향기를 맡고, 세상이 둘 뿐인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보냈다. 피어오르는 연꽃을 사이에 두고 입술을 맞췄다. 두 사람은 연못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하령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한 봄 햇살이 따가웠다. “나리, 집안이 몰락했을 때도, 관비가 되었을 때도, 더는 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요즘은 그마저도 다행히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마저 듭니다.” “정말 이상한 생각이로구나. 훗-” “나리를 만나서 그런 것이
허공에 흩날리듯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리!” 그리운 소리에 번뜩 떠진 눈이 소리를 좇자, 하령이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너!” “일찍 오셨네요. 빨래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그녀는 빨갛게 언 손을 호호-불며 그에게 다가왔다. 홍양은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가 빨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나리!” 생경한 그의 행동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동공이 흔들렸다. “왜, 왜 이러세요. 놔, 놔주세요." 당황스럽고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그녀를, 홍양은 더욱 강하게 붙들어 잡았다. “추운데 무슨 빨래를 한다고.” “괘, 괜찮습니다. 익숙해져서…” “들어가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 불을 피웠는지, 방안은 이미 뜨끈뜨끈했다. 홍양은 아랫목에 덮인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앉혔다. “몸 좀 녹이거라.”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하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이러세요. 냉정하게 밀어내실 때는 언제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녀의 말투에 서운함과 투정이 섞여 있었다. “네 신랑 될 사람을 만나고 왔다지?” “……” “어떴더냐? 맘에 들더냐? 기왕지사 혼인하는 거,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 삐뚤어진 말에, 반항하듯 대답했다. “예. 맘에 들었습니다. 듬직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잘생겼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시집가고 싶어 졌어?” “……” “빨리 떠나고 싶어 졌느냐? 나만 여기 두고, 빨리 그놈에게 가고 싶어?” 그는 화가 난 듯 그녀에게 쏘아붙이고,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왜, 화를 내시나요?” 정곡을 찔린 듯, 애써 아닌 척 입꼬리를
다음날, 관아로 들어가는 홍양의 귀에 관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하령이가 시집을 간다고?”“그래. 옆 함평군에서 일하는 관노라던데?”“하긴, 좀 늦긴 했어. 빨리 치워야지. 안 그래도 눈독 들이는 놈들 많은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이야.”“에효- 팔자도 참. 양반집 규수가, 노비랑 혼인을 하다니. 쯧.”순간, 홍양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하령이 시집을 간다니. 부질없이 일렁이는 마음이 성가셨다.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그는 이미 한양에 처자식이 있으며, 그녀는 국가의 자산이다.그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나? 그 뒷감당은 할 수 있나?그저 정도만 걸으며, 평탄하게 살고자 한 인생이었다.틀 안에 살고자 했던 그에게,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변수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는 지금 조차도. 정말 성가셨다.그 말을 들은 이후, 그는 애써 그녀를 멀리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이긴 했지만, 기분 탓일 테지.“나리. 오늘도 소인이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없다. 이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서류는 거의 다 정리를 끝냈으니, 이제 밤새 일을 할 필요는 없다.”“네.”“할 말 없으면 나가보거라.”그녀는 대답 없이 그의 방 앞을 떠났다.시선은 서책에 향했고, 들리는 것은 여상한 그녀의 목소리일 뿐이니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후-”정신이 사나워, 글자가 눈에 들지 않았다.홍양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잡념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밤이 깊었지만,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아 홍양은 방을 나섰다.멀리, 하령의 방에서 등불이 새어 나왔다.‘아직, 안자나?’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거처로 다가갔다.다가갈수록 문틈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다.소리 내 울지 않던,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그녀가 울고
홍양은 저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가 궁금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한양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절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고고한 선비이기를 바랐다. “나리.” 그가 뒤를 돌아보자, 게슴츠레 눈을 뜬 하령이 곁으로 다가왔다. “송구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이만, 소인은 가보겠습니다.” 홍양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날, 온 마을을 뒤덮은 거센 눈발에 홍양은 관아에서 나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늘 자신을 맞아주던 하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오는 게 어딜 간 게야?” 그는 구들장으로 가, 그녀와 자신의 방에 장작을 밀어 넣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향리가 나무를 지고 들어오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령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까 마주쳤을 때, 빨래터에 간다고 했습니다.” 홍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켜고, 서책을 폈다. 어쩐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세지는 바람과 눈발이 신경이 쓰여 자꾸만 밖을 내다봐야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넘었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깊이까지 쌓이고 있었다. “왜 이리 안 오는 게야?” 초조한 발걸음이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겼다. 그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설피를 짚신 위에 단단히 묶고, 도롱이를 걸친 뒤 삿갓을 눌러썼다. 한발 한발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겨우 빨래터에 도착했지만, 하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함을 감지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빨래터 인근을 다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 산으로 오르며 하령의 이름을 불렀다. “하령아! 하령아!” 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령아!”
“아… 아니… 조금 낯설어서... 그럼 다음에 뵙지요.” 영도는 상기된 표정이 들킬까 두려워, 서둘러 대문을 열고 성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제가 배웅을…” 연화가 서둘러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따라나섰지만, 영도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화는 자꾸만 치솟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웃고 있는 연화를 향해 막둥어멈이 다가와 물었다. “뭐가 그리 즐거워요? 입이 귀에 걸려 있네요?” “어멈, 어멈. 나... 곧 아버님 품을 떠나게 될지도 몰라.” “아까 그 잘생긴 나리랑 드디어
영도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예? 정말이십니까? 벌써 한 달이나 지나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잊고 있었지. 하지만 문득 그 아이를 시험해보고 싶어졌어. 내 곁에 둘 수 있을 만한 아이인지…”겸은 아련히 창밖을 바라보았다.어딘가로 달아나는 구름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더 이상 달아나기만 할 수는 없다.“그 아이는 내게 모든 걸 바치겠다고 했다. 그 말이 자꾸 맴돌아.”“하지만… 여인입니다. 저하께서 여인이 호위무사라니요. 분명 내외의 반발이 클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그러니 네가 필요하다.
“정식으로 영도 나리와의 겨루기에서 이긴다면 받아주시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영도와 대련을…?”홍양은 그제야 사태의 전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영도라면 백전불패 무사가 아닌가. 아무리 우리 연화가 특출 나다 하더라도 영도를 이기는 것은 무리지… 흠… 저하의 의중을 알겠구나.’그 의도를 인지하고 안도한 홍양은 억지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저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이 아비도 더는 말릴 수 없겠구나.”“정말요? 정말 허락하시는 거죠?”“그럼. 단, 조건이 있다. 대련에서 네가 지면, 그땐 이 아비
“뭐라?” 겸과 영도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저하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소인이 오라버니의 검을 날려버리는 모습을요.” 연화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영도가 칼집을 움켜쥐었다. 연화는 멋쩍은 듯 손을 내저었다. “검술이며 무술이며, 실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기대 이상일 겁니다.” 겸은 당황스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실력은 분명 인상 깊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성별과 출신. 그게 걸림돌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영도가 먼저 나섰다. “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