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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에 도착한 겨울

Penulis: 유월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8-13 15:23:22

“아무도 나가서는 안 됩니다.”

시종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황궁 동쪽 별궁에 울렸다.

복도를 오가던 시종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창문을 닦던 하녀도.

꽃병을 옮기던 시녀도.

간식 쟁반을 들고 있던 어린 시종도.

모두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엘라도 교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한 손에는 역사 교재를.

다른 손에는 아직 먹지 못한 작은 사과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엘라가 물었다.

옆에서 나오던 테오도르가 먼저 대답했다.

“또 누가 사고 쳤나 봐.”

엘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저를 보십니까?”

“안 봤어.”

“방금 보셨습니다.”

“그냥 옆을 본 거야.”

“제가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옆을 본 거지.”

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사고를 친 적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완전히 억울한 의심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두 분께서는 교실로 돌아가 주십시오.”

시종장이 빠르게 다가왔다.

평소에도 엄격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테오도르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확인 중입니다.”

“그러니까 뭘 확인해?”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테오도르의 눈썹이 올라갔다.

시종장이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대개 자신과 아주 밀접한 일이었다.

“내 별궁에서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해놓고?”

“곧 해결하겠습니다.”

“뭐가 없어졌어?”

시종장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망설임만으로도 테오도르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말해.”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지만 황태자의 명령이었다.

시종장은 결국 허리를 숙였다.

“전령조 한 마리가 사라졌습니다.”

“전령조요?”

엘라가 물었다.

“편지를 나르는 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창문으로 날아간 것 아닙니까?”

“날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시종장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오늘 새벽 북부에서 도착한 전령조입니다.”

북부.

엘라는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다.

제왕학 수업에서 지도 위로 보았고.

기사들의 대화에서도 몇 번 들었다.

제국 가장 위쪽.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며.

국경을 지키는 기사들이 사는 곳.

하지만 그곳은 아직 엘라에게 책 속에만 있는 땅이었다.

“다쳤습니까?”

“날개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라졌지?”

테오도르가 물었다.

시종장이 대답했다.

“치료를 위해 새장에 옮겼으나, 잠시 관리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편지도 같이 없어졌습니까?”

이번에도 엘라의 질문이었다.

시종장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전령통이 다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럼 편지도 같이 사라졌겠네요.”

“그렇습니다.”

테오도르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북부에서 황궁까지 직접 날아온 편지였다.

보통 소식이라면 정식 우편 마차나 마법 통신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친 전령조를 보낼 만큼 급한 소식이라는 뜻이었다.

“누가 훔친 거야?”

테오도르가 물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새장 문이 저절로 열린 건 아니잖아.”

“관리인의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엘라가 말했다.

테오도르가 그녀를 보았다.

“전령통까지 가져갔는데?”

“새 다리에 그대로 있다면서요.”

“그래도 누가 문을 열었겠지.”

“그건 확인해야 합니다.”

엘라는 며칠 전 자신의 책이 망가졌던 일을 떠올렸다.

눈앞의 사실을 이어 붙여 테오도르를 범인으로 정했던 날.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시종장은 두 아이를 교실 안으로 이끌었다.

“우선 안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도 찾을게.”

테오도르가 말했다.

“안 됩니다.”

“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새 한 마리 찾는 게?”

“단순한 실종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종장은 복도 끝에 배치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지키는 기사들의 표정도 평소보다 무거웠다.

“전령통을 노린 사람이 있다면 아직 별궁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 위험해지는 문제라면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엘라도 함께 있었다.

별궁에는 어린 시종과 시녀도 많았다.

그는 마지못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 찾으면 바로 알려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종장이 문을 닫았다.

철컥.

평소에는 잠그지 않던 문에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테오도르는 문을 바라보다 입을 벌렸다.

“우리를 가둔 거야?”

엘라는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보호하시는 겁니다.”

“문을 잠갔잖아.”

“전하께서 나가실 것 같으니까요.”

“나가려고 했지.”

“그러니 정확히 보셨네요.”

테오도르는 억울하다는 듯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엘라는 창가로 다가갔다.

아침 햇살이 정원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기사들과 시종들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나무 아래.

분수 주변.

화단 사이.

몇몇은 고개를 들어 지붕과 나뭇가지를 살폈다.

“전령조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엘라가 물었다.

“은회색일 거야.”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북부에서 쓰는 새는 대부분 설응이니까.”

“독수리입니까?”

“매에 가까워.”

“크기는요?”

“이 정도?”

테오도르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엘라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하보다 큽니까?”

“그렇게 크진 않아.”

“방금 전하만큼 넓게 벌리셨습니다.”

“날개를 펼치면 그렇다는 거야.”

“그럼 다친 새가 별궁 안을 돌아다니면 눈에 띌 텐데요.”

“그러니까 누가 숨겼을 수도 있지.”

엘라는 창밖을 계속 바라보았다.

모두가 바깥만 찾고 있었다.

새는 날아다니는 동물이니까 당연했다.

하지만 날개를 다쳤다면 높은 곳까지 날지 못했을 것이다.

어딘가 숨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전하.”

“왜?”

“새는 다치면 어디로 갑니까?”

“내가 새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황태자께서는 많은 것을 배우시잖아요.”

“새가 어디 숨는지는 안 배워.”

“쓸모없는 수업만 들으셨네요.”

“제왕학 교수님한테 말한다?”

엘라는 잠시 고민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테오도르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노아를 떠올렸다.

“마구간?”

“왜요?”

“노아는 무서우면 마구간으로 갔잖아.”

“전령조도 말을 좋아합니까?”

“그건 모르지만.”

테오도르는 창밖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아는 곳으로 가지 않을까?”

엘라도 생각에 잠겼다.

북부에서 날아온 새가 황궁에서 아는 곳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냄새나 온도가 익숙한 장소는 있을 수 있었다.

북부는 춥다.

황궁은 봄이라 따뜻했다.

다친 새에게는 오히려 너무 덥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차가운 곳.”

엘라가 중얼거렸다.

“뭐?”

“북부의 새라면 추운 곳을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두 아이는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곳.

창고.

지하실.

물이 흐르는 분수 근처.

하지만 자신들은 교실에 갇혀 있었다.

테오도르가 다시 문손잡이를 잡았다.

“나가자.”

“문이 잠겼습니다.”

“창문으로.”

엘라는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교실은 이 층이었다.

아래에는 잘 다듬어진 화단과 낮은 관목들이 있었다.

뛰어내리면 아주 크게 다치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엘라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도 엘라를 바라보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엘라가 먼저 아래를 살폈다.

“관목 위로 떨어지면 덜 아플 것 같습니다.”

“네가 먼저 내려가.”

“전하께서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나는 황태자야.”

“그게 지금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다치면 큰일 나잖아.”

“저도 다치면 아버지가 큰일을 만드실 겁니다.”

“뭘?”

“황궁을 부수실 수도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펠리시아 공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누가 먼저 내려갈지 진지하게 다투고 있을 때였다.

똑.

창틀 위로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엘라의 손등에 닿았다.

“비가 옵니까?”

두 아이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밝았다.

구름도 없었다.

똑.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소매에 떨어졌다.

테오도르가 위를 바라보았다.

교실 창문 위쪽에는 궁전 지붕에서 이어진 얇은 배수관이 있었다.

물방울은 그 관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밤에 비가 왔나?”

“아닙니다.”

엘라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주 차가웠다.

거의 얼음이 녹은 물처럼.

시선이 배수관을 따라 움직였다.

관은 동쪽 별궁 뒤편의 유리 온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온실은 봄에도 서늘한 북방 식물들을 기르기 위해 일부 구역을 마법으로 차갑게 유지한다고 들었다.

“차가운 곳.”

엘라가 말했다.

테오도르도 같은 생각을 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온실.”

두 아이는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여기로 내려가야 해.”

테오도르가 말했다.

엘라는 관목의 높이와 거리를 살폈다.

“밧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실에 밧줄이 왜 있어?”

엘라의 시선이 창가의 긴 커튼으로 향했다.

테오도르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금실 자수가 놓인 비싼 커튼이었다.

잠시 뒤.

찌이익―!

교실 안에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폐하께 뭐라고 말하지?”

테오도르는 창문 아래로 늘어진 천 조각을 붙잡고 있었다.

엘라는 커튼 여러 장을 길게 묶은 임시 밧줄을 단단히 당겼다.

“전령조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씀드리면 됩니다.”

“아버지가 화낼 것 같은데.”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니 이해해 주실 겁니다.”

“지난번 화병을 깨뜨렸을 때도 그렇게 말했는데 혼났어.”

“그때는 좋은 일을 하려던 게 아니셨잖아요.”

“꽃을 옮기려고 했어.”

“검으로요?”

“손이 안 닿았어.”

엘라는 더 묻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내가 먼저 내려갈게.”

“아까는 싫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황태자니까.”

이번에는 같은 말의 뜻이 달랐다.

위험한 일을 먼저 하겠다는 뜻이었다.

엘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같이 내려가면 됩니다.”

“어떻게?”

엘라는 밧줄을 하나 더 창틀에 묶었다.

“각자 하나씩 잡으면 됩니다.”

“하나가 풀리면?”

“먼저 내려간 사람이 아래에서 잡아주면 됩니다.”

“그럼 누가 먼저 가?”

두 사람은 다시 마주 보았다.

결국 가위바위보를 했다.

테오도르가 졌다.

“황태자한테 가위바위보로 위험한 일을 시켜도 돼?”

“전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나는 그냥 결정하자는 뜻이었어.”

“결정됐습니다.”

테오도르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밧줄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떨어지면 꼭 잡아.”

“제가 위에 있는데 어떻게 잡습니까?”

“그럼 왜 네가 뒤에 와?”

“전하께서 지셨으니까요.”

“엘라!”

“조용히 내려가십시오.”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벽을 타고 내려갔다.

중간쯤 내려갔을 때 커튼이 찌익 소리를 냈다.

“엘라.”

“네.”

“방금 이상한 소리 났어.”

“괜찮습니다.”

“뭘 보고 괜찮다는 거야?”

“아직 안 떨어지셨잖아요.”

“떨어진 다음엔 늦어!”

다행히 테오도르는 관목 위에 무사히 내려섰다.

곧 엘라도 다른 커튼을 타고 내려왔다.

마지막에 발이 미끄러져 관목 속으로 조금 깊게 빠졌지만, 테오도르가 팔을 붙잡아 주었다.

“괜찮아?”

“나뭇가지가 치마에 걸렸습니다.”

“그것만?”

엘라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팔꿈치가 조금 따갑습니다.”

“오늘은 바로 말하네.”

“연습 중입니다.”

두 아이는 몸에 붙은 잎을 떼어내고 온실 쪽으로 달렸다.

별궁 뒤편은 수색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모두 정원과 지붕 위를 찾느라 온실 안쪽까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듯했다.

유리문은 닫혀 있었다.

테오도르가 손잡이를 당겼다.

잠겨 있었다.

“이쪽도 잠겼어.”

엘라는 유리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안쪽에는 북부의 침엽수와 차가운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가득했다.

유리 표면에는 희미하게 성에가 맺혀 있었다.

“다른 입구가 있을 겁니다.”

두 아이는 온실 벽을 따라 걸었다.

뒤쪽으로 돌아가자 관리인이 사용하는 작은 문이 나타났다.

문 아래쪽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은회색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엘라가 허리를 숙여 깃털을 집었다.

“여기입니다.”

테오도르가 문을 밀었다.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온실 안은 황궁의 봄과 전혀 다른 계절이었다.

하얀 성에가 낀 나뭇잎.

차가운 안개.

작은 연못 위에 떠 있는 얇은 얼음.

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문질렀다.

“북부는 항상 이런 느낌일까요?”

“이것보다 더 춥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삽니까?”

“두꺼운 옷 입고 살겠지.”

“전하는 가보셨습니까?”

“아니.”

“황태자인데도요?”

“황태자라고 다 가보는 건 아니라니까.”

두 아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온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전령조.”

테오도르가 작게 불렀다.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이름을 모르잖아.”

“새야.”

“그렇게 부르면 모든 새가 오겠네.”

“여기에는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순간.

사락.

왼쪽 수풀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엘라는 곧장 걸음을 멈췄다.

테오도르도 입을 다물었다.

수풀 아래.

은회색 깃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쪽에 웅크린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생각보다 컸다.

몸은 눈처럼 희고, 날개 끝은 잿빛이었다.

한쪽 날개가 이상하게 아래로 처져 있었다.

노란 눈동자가 두 아이를 경계하며 빛났다.

“찾았다.”

테오도르가 한 걸음 다가가려 했다.

엘라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잠깐만요.”

“왜?”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설응의 몸이 바짝 굳어 있었다.

부리도 조금 벌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했지만, 날개가 다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엘라는 노아와 브린을 떠올렸다.

두려워하는 존재에게 다가가는 방법.

먼저 손을 대지 않는 것.

스스로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여기 앉으십시오.”

엘라는 수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 앉았다.

테오도르도 그녀를 따라 앉았다.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나와?”

“모릅니다.”

“그럼 왜 앉아?”

“기다려 보려고요.”

“얼마나?”

“나올 때까지요.”

테오도르는 차가운 바닥을 손으로 만졌다.

“엉덩이 얼 것 같은데.”

“참으십시오.”

“너는 안 추워?”

“춥습니다.”

“그럼 나가서 사람을 부르자.”

“갑자기 여러 사람이 오면 더 놀랄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설응을 바라보았다.

새의 다리에는 검은 가죽으로 만든 작은 전령통이 묶여 있었다.

다행히 사라지지 않았다.

두 아이는 말없이 기다렸다.

처음 몇 분 동안 설응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란 눈만 깜빡이며 두 사람을 경계했다.

테오도르는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엘라.”

“네.”

“얼마나 지났어?”

“조금요.”

“한 시간은 된 것 같아.”

“오 분도 안 됐습니다.”

“어떻게 알아?”

“전하께서 다섯 번 움직이셨습니다.”

“그걸 왜 세?”

“심심해서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엘라는 사과를 꺼냈다.

교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한입도 먹지 않은 붉은 사과.

그녀는 사과를 반으로 나눠 한 조각을 바닥에 놓았다.

테오도르가 물었다.

“새가 사과 먹어?”

“모릅니다.”

“고기를 먹을 것 같은데.”

“그럼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간식은요?”

테오도르는 품속에서 작은 육포를 꺼냈다.

“이건 내 건데.”

“전령조가 굶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줄게.”

그는 아주 작은 조각을 떼어 사과 옆에 놓았다.

설응의 눈이 육포로 향했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두 아이는 또 기다렸다.

한참 뒤.

설응이 아주 조금 몸을 움직였다.

한 발.

그리고 다시 멈췄다.

엘라는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테오도르 역시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다.

설응은 천천히 육포 쪽으로 다가왔다.

상처 입은 날개가 바닥에 끌렸다.

두 아이와 세 걸음쯤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새가 다시 경계하듯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테오도르가 아주 작게 말했다.

평소의 명령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설응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육포를 부리로 집었다.

엘라가 손을 내밀지 않은 채 기다렸다.

설응이 육포를 삼키고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때였다.

새의 다리에 묶인 전령통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가죽 표면에 희미한 얼룩이 있었다.

먹물처럼 검고.

얇은 핏줄처럼 퍼진 자국.

엘라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전하.”

“응.”

“저것을 보십시오.”

테오도르도 얼룩을 발견했다.

“원래 무늬 아니야?”

“움직입니다.”

정말이었다.

검은 자국은 가죽 위를 아주 느리게 번지고 있었다.

살아 있는 그림자처럼.

엘라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아주 희미한 금빛이 피어났다.

설응이 크게 몸을 떨었다.

“엘라!”

테오도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저것이 이상합니다.”

“그래도 갑자기 손대면 안 된다고 네가 그랬잖아.”

엘라는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검은 얼룩을 보는 순간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설응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도 알 수 없었다.

“제가 또 먼저 결정했습니다.”

엘라가 손을 거두었다.

“사람을 불러야 합니다.”

이번에는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갈게.”

“혼자요?”

“누군가는 여기 있어야 하잖아.”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설응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나 올 때까지 만지지 마.”

“알겠습니다.”

“정말로.”

“네.”

“네 신성력도 쓰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빨리 다녀오십시오.”

테오도르는 온실 밖으로 달려갔다.

엘라는 설응과 단둘이 남았다.

새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엘라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설응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저 검은 게 무엇인지.”

새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 아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엘라는 자신의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저도 기다리는 건 아직 잘 못합니다.”

조금 뒤.

온실 밖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시종장과 기사들.

궁정 마법사.

그리고 황제까지 직접 들어왔다.

“엘라!”

펠리시아 공작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엘라는 움찔했다.

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느냐?”

“팔꿈치가 조금 따갑습니다.”

“왜?”

“창문으로 내려오다가요.”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시선이 찢어진 치맛자락과 옷에 묻은 잎으로 향했다.

“창문?”

테오도르가 뒤에서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다.

엘라는 그를 보았다.

“전하께서 먼저 내려가셨습니다.”

“엘라!”

“사실이잖아요.”

공작의 시선이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황제가 얼른 두 아이 사이를 막았다.

“친구, 우선 새부터 보지.”

“폐하께서도 나중에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내가 왜?”

“황태자 전하의 별궁 창문에 저런 커튼을 달아 두셨으니까요.”

황제가 교실 창문 밖으로 늘어진 찢어진 커튼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내 잘못인가?”

“튼튼한 밧줄이었다면 덜 위험했을 겁니다.”

“왜 창문에 밧줄을 달아 둬야 하나?”

“오늘 같은 일을 대비해서요.”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

그사이 궁정 마법사가 설응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작은 마법진을 펼쳤다.

부드러운 푸른빛이 설응의 몸을 감쌌다.

새가 잠시 저항했지만 곧 움직임이 느려졌다.

“진정 마법입니다.”

마법사가 설명했다.

“다친 날개부터 치료해야 합니다.”

기사들이 두꺼운 천으로 설응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엘라는 전령통을 가리켰다.

“검은 얼룩이 움직였습니다.”

마법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전령통 가까이에 작은 빛을 띄웠다.

검은 자국이 빛을 피하듯 꿈틀거렸다.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기인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법사가 낮게 대답했다.

“다만 일반적인 마력 오염은 아닙니다.”

공작이 엘라를 돌아보았다.

“그것에 손대지 않았느냐?”

“손을 대려고 했습니다.”

공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라가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말리셨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테오도르는 어깨를 조금 폈다.

“엘라가 먼저 결정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황제는 아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테오도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황제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아주 잘했다.”

“……예.”

테오도르의 귀가 조금 붉어졌다.

엘라도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말려주셔서요.”

“네가 나였어도 그랬을 거잖아.”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됐어.”

엘라는 조용히 웃었다.

마법사는 전령통을 설응의 다리에서 풀어냈다.

검은 자국이 묻은 부분에는 직접 손대지 않고, 마법으로 공중에 띄웠다.

통 입구에는 붉은 밀랍이 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낯선 문장이 찍혀 있었다.

눈 덮인 산맥.

그 앞에 세워진 검 한 자루.

“어느 가문의 문장입니까?”

엘라가 물었다.

대답한 것은 황제였다.

“발테르 대공가.”

그 이름이 온실 안에 낮게 울렸다.

북부를 지키는 가문.

제국의 최북단을 수백 년 동안 지켜 온 사람들.

황제는 밀랍 봉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집무실로 가져가게.”

“예, 폐하.”

마법사가 전령통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설응은 치료를 위해 황궁 마법사들의 치료실로 보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온실을 빠져나갔다.

엘라 역시 아버지를 따라 나가려 했다.

그때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엘라.”

“네, 폐하.”

“어떻게 이곳을 찾았느냐?”

엘라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함께 찾았습니다.”

“누가 먼저 온실을 생각했지?”

“제가 차가운 곳을 찾았고.”

엘라는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친 존재가 자신이 익숙한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테오도르가 덧붙였다.

“엘라가 새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급하게 손대지 말라고 하셨고요.”

황제는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혼자 찾아낸 답이 아니었다.

한 아이가 놓친 것을 다른 아이가 보았다.

한 아이가 서두르면 다른 아이가 붙잡았다.

그렇게 둘은 설응을 찾았고.

전령통도 지켰다.

황제가 작게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잘했다.”

칭찬을 들은 두 아이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웃은 것은 테오도르였다.

“내가 조금 더 잘했지?”

엘라의 미소가 곧바로 사라졌다.

“왜요?”

“내가 네가 마법 쓰는 걸 막았잖아.”

“제가 온실을 찾았습니다.”

“내가 익숙한 곳으로 갈 거라고 했어.”

“차가운 곳을 생각한 것은 저입니다.”

“교실에서 나가자고 한 건 나야.”

“커튼을 묶은 것은 저입니다.”

“먼저 내려간 건 나고.”

“가위바위보에서 지셨잖아요.”

“그래도 내려갔어.”

“어쩔 수 없이요.”

두 아이의 말다툼이 다시 시작되었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마법사가 들고 간 전령통으로 향했다.

검은 얼룩.

북부.

발테르 대공가.

봄날의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날 오후.

황제의 집무실에는 단 네 사람만 남았다.

황제.

펠리시아 공작.

궁정 마법사장.

그리고 군무대신.

책상 위에는 북부에서 도착한 전령통이 놓여 있었다.

검은 얼룩은 마법으로 봉인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법사장이 여러 겹의 보호막을 친 뒤 조심스럽게 봉인을 풀었다.

딱.

붉은 밀랍이 부서졌다.

전령통 안에서 돌돌 말린 종이가 나왔다.

종이 가장자리에도 검은 흔적이 번져 있었다.

황제는 장갑을 낀 손으로 보고서를 펼쳤다.

첫 줄을 읽은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공작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빠르게 문장 위를 훑었다.

군무대신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

보고서는 길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짧았다.

북부 제7방어선에서 마물의 비정상적 움직임 확인.

세 개의 감시 초소와 연락 두절.

마력석 일부가 검게 변색됨.

그리고 마지막.

발테르 대공의 마력에서 동일한 오염 징후가 발견됨.

집무실 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펠리시아 공작이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대공 본인에게서 말입니까?”

마법사장이 검은 얼룩을 살폈다.

“전령통에 남은 것과 같은 기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기인가?”

황제가 물었다.

“정밀하게 조사해야 합니다.”

마법사장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마기라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발테르 대공은 제국에서 가장 강한 마력 보유자 중 하나였다.

그의 마력이 오염되었다는 것은.

개인 한 사람의 병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북부 방어선 전체가 그의 마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군무대신이 낮게 말했다.

“수도에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당연하지.”

황제는 보고서를 접었다.

“대공가에는 뭐라고 답하실 겁니까?”

공작의 질문에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창밖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엘라와 테오도르가 찢어진 커튼 때문에 시종장에게 혼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봄 햇살이 밝았다.

분홍 꽃잎이 바람을 타고 황궁 정원을 지나갔다.

하지만 황제의 손에 들린 종이에서는.

마치 한겨울의 냉기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우선 치료 가능한 마법사와 신관을 비밀리에 보내게.”

황제가 명령했다.

“그리고 발테르 대공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도록.”

군무대신이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마법사장이 물었다.

“전령통에 남은 오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제의 시선이 검은 얼룩으로 향했다.

“완전히 봉인하게.”

“신전으로 옮길까요?”

“아니.”

황제는 잠시 생각했다.

“황궁 안에 두게.”

공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왜입니까?”

“이것이 북부에서 수도까지 따라왔다면.”

황제는 낮게 말했다.

“이미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 왔을 수도 있으니까.”

창밖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열린 창문으로 꽃잎 하나가 들어왔다.

연분홍 꽃잎은 책상 위를 날아가다 전령통 옆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봉인된 검은 얼룩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꽃잎을 향해.

스르륵.

마법사장이 급히 보호막을 강화했다.

공작의 손이 검 손잡이로 향했다.

황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얼룩을 바라보는 눈빛만 깊어졌다.

황궁에는 봄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웃었고.

꽃은 피었으며.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가장 북쪽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이.

천천히 황궁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훈련장으로 돌아가던 엘라는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테오도르가 물었다.

엘라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설응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피어났던 신성력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따뜻해야 할 금빛 안쪽에.

아주 작은 검은 점 하나가 섞여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흔적은 사라졌다.

“엘라?”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라는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잘못 본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먼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차가운 온실에서 보았던 검은 얼룩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엘라는 북부라는 곳이.

책 속의 아주 먼 땅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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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기에 잠식된 대공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길을 택했습니다

    실제 오염 마기를 사용하는 첫 현장 시험은 설화초가 완전히 핀 날 오전 열 시에 시작됐다.대공성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단테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리아에게 상태를 확인했고, 전날보다 잠을 조금 덜 잤다는 사실까지 먼저 알렸다. 두통과 감각 이상은 없었고 마기 유입량 역시 최근 평균 범위 안이었다. 엘라는 그 옆에서 듣기만 했다. 이제 단테가 자기 상태를 말할 때마다 의미를 붙이거나 변화라고 짚어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면 멈추는 것도 어느새 현장 준비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사용하는 오염 마기는 제9방어선에서 회수된 마력석에서 추출한 극소량이었다. 이전에 오염도 78퍼센트였던 돌을 제3감시탑의 기존 순환에 잠깐 연결해 31퍼센트까지 낮췄던 것과는 방식부터 달랐다. 그때는 이미 살아 있는 고대 흐름에 작은 돌 하나를 맡겨보는 시험이었다면, 오늘은 자신들이 새로 만든 네 개의 전달석과 두 개의 교대선을 거쳐 실제 오염 마기가 움직일 수 있는지를 처음 확인하는 자리였다.그래서 사람들은 어제보다 훨씬 말이 적었다.회백 능선 초입에는 길이 120미터의 시험 구간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눈을 걷어낸 암반 사이로 네 개의 전달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설되어 있었고, 각 전달석 사이에는 두 줄의 얇은 마력선이 번갈아 주선 역할을 맡도록 연결돼 있었다. 그 끝에는 방출 장치 대신 밀폐형 회수석이 놓였다. 오늘은 환경으로 마기를 내보내지 않는다. 전달만 확인한 뒤 마지막에 다시 회수한다. 실제 분산 방출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아르센이 마지막 봉인을 확인하며 말했다.“오늘 목표는 세 개뿐입니다. 실제 오염 마기가 전달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지, 이동 과정에서 전달석에 얼마나 남는지, 한쪽 선을 중간에 끊었을 때 보조선으로 전환되는지. 그 이상은 보지 않습니다.”단테가 물었다.“끝까지 안정적이어도?”“끝냅니다.”이번에는 아르센이 먼저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단테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에른이

  • 마기에 잠식된 대공   꽃이 피는 데에는 이유가 많습니다

    현장 실증을 마치고 대공성으로 돌아온 단테는 곧장 서쪽 정원으로 가지 못했다.엘라가 말한 대로 먼저 세리아에게 상태를 확인받았고, 외부 지맥 노출 이후 유입량 변화와 감각 이상 여부까지 전부 검사했다. 다행히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전날보다 피로도가 조금 높았지만 두통도, 손끝 저림도 없었고, 마기 유입량 역시 위험 기준에 한참 못 미쳤다.세리아는 기록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 저녁 업무는 줄이십시오.”단테가 바로 물었다.“얼마나.”“문서 결재는 세 건까지.”“다섯 건.”“세 건.”“네 건.”세리아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봤다.단테가 잠시 버티다가 시선을 돌렸다.“……세 건.”엘라는 옆에서 웃음을 참다가 결국 말했다.“많이 발전하셨습니다.”단테가 그녀를 봤다.“어디가.”“협상하셔도 결국 지키시잖아요.”“아직 안 지켰는데.”“지킬 거잖아요.”단테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세리아가 태연하게 정리했다.“이제 정원은 가셔도 됩니다. 다만 오래 서 있지는 마십시오.”그 말이 끝나자 단테가 거의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엘라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꽃이 그렇게 궁금하셨습니까?”“너도 궁금하잖아.”“저는 인정했습니다.”“언제.”“계속요.”“못 들었는데.”“지금 들으셨네요.”단테가 피식 웃었다.둘은 함께 치료실을 나왔다.⸻서쪽 정원으로 가는 길은 이제 둘에게 제법 익숙했다.처음 북부에 왔을 때 엘라는 대공성의 회랑이 지나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검은 돌벽, 높은 창문, 눈이 쌓인 안뜰.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같은 회랑도 조금씩 달랐다.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오후 빛이 길게 들어왔고, 겨울에는 다른 곳보다 바닥이 조금 따뜻했다. 정원으로 나가는 마지막 유리문은 손잡이 아래쪽에 오래된 흠집이 하나 있었다.단테는 문을 열기 전에 바깥부터 확인했다.“바람 거의 없네.”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오래 보셔도 되겠네요.”“세리아가 오래 서 있지 말랬잖아.”엘라는 잠시 그를 봤다.“정말 잘 들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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