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동선 조정이고 뭐고, 시간표가 같으면 답이 없다.
그녀는 강의실에 들어서다 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어제 복도의 3초가 그대로 재생됐다. 창백해지는 얼굴, 하얗게 쥐어지는 가방끈. 최대한 먼 대각선 자리에 앉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쪽을 안 봤다.
수업이 끝나기 오 분 전에 교수가 자료를 넘겼다.
"조별 과제를 진행한다. 조 편성은 출석번호 순으로."
교수 말에 명단이 화면에 떴고, 4조에서 아주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4조: 한도윤, 윤이서, 외 2명.
강의실 어딘가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는데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근데 윤이서 등이 돌처럼 굳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이거 좀 곤란한데.'
내가 손을 들기도 전에 다른 손이 먼저 올라갔다.
"교수님. 조 변경을 요청합니다."
강현우였다.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더니 이유는 안 붙였다.
"제가 4조로 가겠습니다. 한도윤과 제 자리를 바꿔 주십시오."
강의실이 웅성거렸다. 교수가 미간을 좁히고 명단을 다시 들여다봤다. 신입생 수석 요청이니 물리기도 애매했다.
"사유가 뭔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럼 들어줄 근거도 없는데." "근거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들을 거면 지금 안 바꿔도 되겠군."그때, 또 하나의 손이 올라갔다.
윤이서였다.
"괜찮습니다."
딱 한마디였다. 부연도 설명도 없이, 바꿔 달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냥 내 일이니 내가 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한마디.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강현우조차 반박할 말을 못 찾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손 든 채로 굳어 버린 건 오히려 그쪽이었다. 교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명단을 원래대로 뒀다.
"조는 편성대로 간다."
4조는 그대로였다. 한도윤, 윤이서, 외 둘.
'계산에 없던 전개인데.'
내가 그린 그림은 손 안 대고 동선이 정리되는 거였다. 강현우가 조를 바꾸면 물러나면 그만이었는데, 그녀가 그 카드를 제 손으로 덮어 버렸다. 무슨 표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망은 아니었고.
그리고 그때, 눈앞에서 뭐가 움직였다.
여태 한 번도 안 움직이던 거였다.
━━━━━━━━━━━━━━
[ 한도윤 — 퇴장 예정 ]남은 시간 : D-1000 → D-1006
━━━━━━━━━━━━━━숫자를 두 번 읽었다.
엿새?
3년이다. 저 창은 하루도 안 틀리고 하루씩 줄어들기만 했다. 회사를 사들일 때도, 연구소를 주울 때도, 사람을 살릴 때도 저 숫자는 아무 반응 없이 그냥 매일 아침 1씩 깎였다.
그게 방금 뒤로 갔다.
'내가 뭘 했다고?'
머릿속으로 오늘을 되감았다. 아침에 일어났고, 강의실에 왔고, 명단을 봤고, 그리고.
아무것도 안 했다. 진짜로. 손을 들려다 말았고, 강현우가 나서는 걸 봤고, 그 애가 거절하는 걸 들었을 뿐이라 내 몫은 그냥 앉아 있는 거였다.
그런데 엿새가 늘었다.
강의실 공기도 이상하게 술렁였다.
"또야? 입학식부터 대련에, 이번엔 조까지 나서고."
"근데 윤이서 쟤는 왜 거절해? 바꿔 준다는데." "몰라. 근데 방금 좀 무섭지 않았냐." "누가. 수석이?" "둘 다."소문이라는 게 재밌는 생물이다. 먹이를 주면 자라는데, 어느 방향으로 클지까진 내가 못 정한다. 입학식 겁박, 지명 대련, 그리고 방금. 강현우가 쌓은 장면들이 슬슬 다른 이야기를 짜기 시작했다. 망나니가 문제라는 이야기에서, 수석이 좀 과하다는 이야기로.
'저건 저것대로 손해고.'
강현우 평판은 내 자산이다. 어디서 균형을 잡아 줘야 하나. 그 계산마저 방금 윤이서의 한마디 앞에서는 잠깐 뒤로 밀렸다.
수업이 끝나자 4조 나머지 둘이 눈치를 보다가 내 책상 앞으로 왔다. 하나는 명단을 든 채였고, 하나는 아예 가방을 멘 채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기. 역할 분담을……."
"자료 조사는 내가 할게." "어? 아니, 그건 보통 나눠서." "나눠도 결국 한 명이 몰아서 해. 그럴 바엔 처음부터 몰아 주는 게 낫고." "그래도 되나." "대신 발표는 너희가 해." "발표요?" "둘이 사이좋게."둘이 아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표가 자료 조사보다 무서운 나이니까. 그 뒤로 아무도 4조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조원 셋 중 하나랑은 말도 안 섞고 과제를 끝낼 수 있게 됐다.
복도로 나오는데 강현우가 나를 벽 쪽으로 불러 세웠다.
"윤이서."
강현우가 벽에서 등을 뗐다.
"봤을 텐데. 저 앤 누구한테 기대는 걸 제일 싫어해."
대답은 안 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네가 가까이 가면 안 된다. 같은 조가 되는 것도, 같은 공간에 서는 것도, 전부 우연이어야 해. 우연이 아니게 되는 순간—"
"그럴 생각 없어."짧게 잘랐다. 사실이었으니까.
강현우 눈이 가늘어졌다. 아, 너무 순순히 답했나. 저 의심 앞에선 순순한 게 오히려 독인데.
"그 말을 믿을 것 같나."
"믿든 말든." "쉽게 말하는군." "어렵게 말하면 믿어 줄 거야?" "어렵게 말해 봐." "그럼 더 안 믿을 거잖아."옆을 지나가는데 강현우가 안 비켰다. 어깨가 부딪혔고, 둘 다 안 돌아봤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밤새 가설을 하나 세웠고, 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시험했다. 가설이랄 것도 없었다. 그 애한테 뭘 해 주면 숫자가 밀린다, 그 한 줄이 전부였으니까.그래서 해 봤다. 4조 실습 자료 정리를 새벽 세 시까지 대신 끝내 놓고 아무도 없는 자료실 책상 위에 슬쩍 올려 뒀다.이름은 당연히 안 적었고, 조원 중 아무나 한 걸로 보이게 글씨도 반쯤 흘려 썼고, 딱 떨어지는 항목 두어 개는 아예 비워 뒀다. 너무 완벽하면 사람 손 냄새가 안 난다.아침 자습 시간,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자료실 앞 복도 벽에 기대섰다. 자판기는 잔돈을 뱉을 때마다 늙은 기침 같은 소리를 냈고, 커피는 뽑자마자 미지근했다. 3년 묵은 감지기 갈아 끼울 돈은 없다면서 자판기만 층마다 두 대씩 세워 둔 학교다.문이 열리고 4조가 우르르 들어가더니, 삼십 초도 안 돼서 안쪽이 시끄러워졌다."어? 야, 이거 누가 했어?""난 아닌데.""너지?""내가 이걸 왜 해. 새벽에 잠도 안 자고?""그럼 뭐야, 자료실에 귀신 붙었냐.""귀신이 표 정리를 이렇게 잘하면 그건 귀신이 아니라 조교지.""조교 귀신은 좀 슬프다.""슬프든 말든 난 이거 그대로 낼 거야.""야, 그럼 어젯밤에 나 혼자 끄적인 건 어쩌라고.""그걸 왜 했어.""과제니까 했지, 왜 하긴."문틈으로 웃음이 몇 번 새어 나왔고, 그 웃음 속에 그 애 목소리는 없었다.윤이서는 맨 뒤에서 그걸 받아 들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몇 번 나다가 한 번 멈췄고, 잠깐 그대로 있다가, 그냥 가방에 챙겨서 나갔다. 표정은 안 보였다. 볼 자리도 아니었고.그리고 숫자는.━━━━━━━━━━━━━━남은 시간 : D-1001━━━━━━━━━━━━━━나흘 깎였다. 하루에 하나씩, 아주 정상적으로.'안 되네.'밤새 만든 가설이 아침 한 번에 죽었다. 잘해 주면 밀린다는 게 틀렸다는 소린데, 그럼 지난주 그 엿새는 대체 뭐였나. 캔커피를 다 비울 때까지 곱씹어도 답이 안 나왔고, 답이 안
웃긴 일이다. 윤이서를 지키겠다는 놈이랑 윤이서한테서 물러나겠다는 놈, 목표가 완벽하게 똑같은 두 사람이 서로를 최악의 적으로 의심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이런 건 대본에도 안 나온다.* * *금요일 오후의 자료관은 비어 있었다.균열학 조별 과제 자료를 뽑으러 온 참이었다. 조는 그대로 4조라 얼굴을 완전히 피할 순 없어도, 자료 조사만 혼자 미리 해치우면 마주칠 일은 줄어든다. 다들 빠져나간 시간을 고른 것도 그래서고.서가 사이엔 종이 냄새랑 먼지가 가라앉아 조용했고,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났다. 창으로 든 늦은 볕이 서가 끝에서 길게 잘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료 뽑아 돌아서는데, 통로 끝에 윤이서가 서 있었다.손에 책을 든 채로. 우연이었을 거다. 같은 4조 과제였고 균열학 서가는 여기 하나뿐이니까, 피하려고 고른 시간에 같은 이유로 그녀도 와 있었던 거다.시선 내리고 옆 통로로 빠지려 했다."서."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낮고, 팽팽하고,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멈췄다. 이 거리에서 등을 돌리면 그건 모욕이다."돌아봐."돌아봤다. 윤이서는 서가에 등을 붙이듯 서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손끝은 떨리는데 시선은 안 떨렸다."입학 명단에서 네 이름을 봤을 때."들고 있던 책 모서리를 엄지로 한 번 눌렀다."잘못 봤다고 생각했어. 세상이 아무리 엿같아도, 그렇게까지 엿같지는 않을 거라고."아무 말도 안 했다."소문은 들었어. 재벌가에서 버림받았다며. 여자들한테 빌붙어 산다며. 그래, 그러라고 해.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살든 관심 없어. 근데."숨을 한 번 삼키고, 마지막 문장을 밀어냈다."여긴 왜 왔어. 하필 여기. 너 같은 게, 왜 여기 있어."변명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준비할 생각도 없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사실은 네가 아는 그놈이 아니라고. 전부 사실인데 전부 그녀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무슨 말이라도 해 봐."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져서, 그녀는 말을 끊고 한 번 숨을 골랐
동선 조정이고 뭐고, 시간표가 같으면 답이 없다.그녀는 강의실에 들어서다 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어제 복도의 3초가 그대로 재생됐다. 창백해지는 얼굴, 하얗게 쥐어지는 가방끈. 최대한 먼 대각선 자리에 앉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쪽을 안 봤다.수업이 끝나기 오 분 전에 교수가 자료를 넘겼다."조별 과제를 진행한다. 조 편성은 출석번호 순으로."교수 말에 명단이 화면에 떴고, 4조에서 아주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4조: 한도윤, 윤이서, 외 2명.강의실 어딘가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는데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근데 윤이서 등이 돌처럼 굳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이거 좀 곤란한데.'내가 손을 들기도 전에 다른 손이 먼저 올라갔다."교수님. 조 변경을 요청합니다."강현우였다.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더니 이유는 안 붙였다."제가 4조로 가겠습니다. 한도윤과 제 자리를 바꿔 주십시오."강의실이 웅성거렸다. 교수가 미간을 좁히고 명단을 다시 들여다봤다. 신입생 수석 요청이니 물리기도 애매했다."사유가 뭔가.""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그럼 들어줄 근거도 없는데.""근거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나중에 들을 거면 지금 안 바꿔도 되겠군."그때, 또 하나의 손이 올라갔다.윤이서였다."괜찮습니다."딱 한마디였다. 부연도 설명도 없이, 바꿔 달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냥 내 일이니 내가 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한마디.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강현우조차 반박할 말을 못 찾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손 든 채로 굳어 버린 건 오히려 그쪽이었다. 교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명단을 원래대로 뒀다."조는 편성대로 간다."4조는 그대로였다. 한도윤, 윤이서, 외 둘.'계산에 없던 전개인데.'내가 그린 그림은 손 안 대고 동선이 정리되는 거였다. 강현우가 조를 바꾸면 물러나면 그만이었는데, 그녀가 그 카드를 제 손으로 덮어 버렸다. 무슨 표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망은 아니었고.그리고 그때,
윤이서는 소리치지 않았다.가방끈을 쥔 손만 하얬다. 어깨가 안 닿게 벽에 붙어 걷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뛰는 거였다.몸의 기억이라는 게 참 얄궂다. 계좌 비밀번호는 사흘을 뒤져야 겨우 나오는데 이런 건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올라온다.중학교 3년 치. 이 몸의 원래 주인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나 실험한 기록이 통째로. 교과서가 창밖으로 날아갔고, 신발이 없어졌고, 옆에 있던 애들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붙어 있으면 다음 차례가 되니까.돈만 딸려 온 몸인 줄 알았는데, 죄까지 끼워 팔더라.그날 밤, 그 죄를 잠깐 밀어 두고 밀린 일부터 처리했다.밤 열한 시. 기숙사 방 불을 끄고 폰을 세 대 세웠다. 통화용, 한 번 쓰고 버릴 회선용, 그리고 아무 데도 안 연결된 수신 전용. 창밖에선 기숙사 앞 가로등이 벌레 때문에 지직거렸고, 그 소리 말고는 방이 조용했다. 하도 하다 보니 손에 익은 순서였다.첫 번째. 서부 연구소에 새로 들어갈 사람 명단.이름 두 개를 빼고 하나를 올렸다. 뺀 둘은 옛날에 이 몸 원주인이랑 술자리를 같이한 기록이 있는 놈들이고, 올린 하나는 어느 종이에도 나랑 엮인 적 없는 사람이다.강현우가 언제 서류를 파기 시작해도 안 이상한 상황이니 걸릴 이름은 명단에 오르기 전에 치우는 게 싸게 먹힌다.두 번째. 가온다인이랑 나 사이에 회사를 한 겹 더 끼웠다.이름만 있는 회사, 남의 손에 맡겨 둔 몫, 국경 하나, 그리고 오늘 얹은 걸로 넷째 겹. 저놈이 밤새 종이를 판다면 파면 팔수록 매끈한 막다른 길로 걸어 들어갈 거다.종이로 나를 잡는 건 진작에 안 되는 걸로 판정이 났고, 그 벽은 저놈이 자는 사이에도 알아서 두꺼워진다. 편한 벽이다.세 번째. 원주인이 옛날에 부순 문구점.주인한테 이번 달 치가 들어갔는지 확인하려고 비서실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예, 대표님.""주무시다 받으셨죠.""아닙니다.""목소리가 아닌데요.""조금 누웠습니다.""누
점심시간 식당은 소문의 2차 시장이었다."봤어? 아침 대련.""수석이 왜 굳이 걔를 지명해? 어제도 입학식에서 대놓고 시비 걸었잖아."맞은편 테이블에서 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숟가락을 들었다."망나니라며. 맞을 만하니까 그러겠지.""근데 걔 입학하고 나서 뭐 한 것도 없지 않냐? 어제부터 계속 당하기만 하던데.""그러네. 뭘 해야 욕을 하지."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그 대화를 배경음악처럼 흘렸다. 오늘 국은 미역국이었는데 미역이 세 가닥밖에 없었다. 이 학교, 등록금은 그렇게 받으면서.식판 하나가 툭 놓이더니 앞자리 애가 맞은편에 앉았다."여기 자리 있어?""앉고 나서 묻는 건 반칙이지.""어깨 괜찮아? 아까 소리 크던데.""멀쩡해.""근데 너 왜 안 때려? 서른 합이나 버텼으면 한 대쯤은 칠 수 있었잖아.""때려서 이길 상대가 아니니까.""그럼 왜 버텨?""버티는 건 이기는 거랑 상관없이 되니까."애가 숟가락을 문 채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됐다가, 곧 관두고 미역국 얘기로 넘어갔다."야, 근데 네 국에도 미역 세 가닥이지?""세 가닥.""내 것도 세 가닥. 이거 정량이야.""학교가 성실하네."여론이 갈라지고 있었다. 당해도 싸다는 쪽과, 이유 없이 저러는 건 이상하다는 쪽.욕하는 쪽은 그냥 두면 내 연막이 되고, 갸웃거리는 쪽은 나중에 쓸 데가 있다.문제는 강현우 쪽이었다.계획은 원래 단순했다. 3년간 아무 짓도 안 한다, 그럼 경계는 알아서 무뎌진다. 원한이야 기억이 만드는 거라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의심은 다르다. 그건 증거를 먹고 크는 거라 안 주면 알아서 굶어 죽는다.그런데 오늘 대련에서 확인했다. 저놈의 의심은 굶어 죽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보고 아는 한도윤이 아니라는 데까지 갔으니, 위험한 망나니였던 게 이제 정체 모를 뭔가가 돼 버린 거다.'전략 수정.'숨는 건 실패. 그럼 눈에 띄는 채로 굴린다. 어차피 소문은 최고의 연막이라, 스폰받는 망나니 구경하느라
평가장은 본관 뒤편 제1훈련장이었다.천장이 까마득히 높고 바닥엔 충격 흡수 술식이 깔린 거대한 홀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땀 냄새랑 나무 냄새가 먼저 훅 끼쳤고, 신입생들이 줄을 서는 동안 훈련장 벽면을 훑었다.벽을 두른 보호 장벽 발생 장치. 모서리 각인이 눈에 익었다.'가온다인 3세대 모델이네.'작년에 아카데미가 무더기로 주문한 물건이다. 값 흥정할 때 서류를 직접 봤으니 모를 수가 없지. 부도 직전에 주워 온 그 작은 기술회사가 이제 이 나라 훈련 시설 절반에 제 이름을 박고 있었다.줄에 서 있는데 어제 그 앞자리 애가 슬쩍 뒤로 끼어들었다."새치기 아니야. 원래 여기였어.""그렇다고 해 두자.""야, 근데 너 어디까지 나올 것 같아? 나는 딱 중간만 나오면 소원이 없겠는데.""중간이 제일 어려운 거야.""뭔 소리야, 중간이 제일 쉽지.""위든 아래든 한 번 찍히면 3년 가고, 중간은 아무도 안 외워 주거든.""그러니까 쉽다는 거 아니야.""외워 주는 사람이 없는 걸 정확히 맞히는 게 어렵다고.""너 진짜 이상한 애다."칭찬으로 들어 두기로 했다.기초 측정이 시작됐다. 근력, 반응속도, 마력 출력, 지구력. 측정 기기 앞에서 신입생들이 하나씩 제 숫자를 만들어 갔고, 환호가 터지기도 하고 어깨가 처지기도 했다.눈에 익은 얼굴 몇이 그 줄에 섞여 있었다.도진혁. 목검 쥔 자세부터 다른, 검 계열 최상위권. 수치가 뜰 때마다 주변이 짧게 술렁였다.그 옆줄 백진은 정반대였다. 숫자가 화려하진 않은데 측정 내내 자세 한 번 안 흐트러지는 게 오히려 눈에 걸렸다. 규율이 뼈에 박힌 놈.그리고 마법학부 쪽 줄 끝엔 측정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딴 데만 보는 여학생 하나, 정하람. 이론 수석이라더니 실기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전부 원작에서 아는 얼굴이다. 앞으로 이 아카데미를 굴려 갈 이름들. 지금은 그냥 얼굴만 익혀 둔다.내 앞줄에선 여학생 하나가 유독 시끄러웠다."괜찮아, 떨어지는 시험도 아닌데!" 긴장한 옆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