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웃긴 일이다. 윤이서를 지키겠다는 놈이랑 윤이서한테서 물러나겠다는 놈, 목표가 완벽하게 똑같은 두 사람이 서로를 최악의 적으로 의심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이런 건 대본에도 안 나온다.
* * *
금요일 오후의 자료관은 비어 있었다.
균열학 조별 과제 자료를 뽑으러 온 참이었다. 조는 그대로 4조라 얼굴을 완전히 피할 순 없어도, 자료 조사만 혼자 미리 해치우면 마주칠 일은 줄어든다. 다들 빠져나간 시간을 고른 것도 그래서고.
서가 사이엔 종이 냄새랑 먼지가 가라앉아 조용했고,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났다. 창으로 든 늦은 볕이 서가 끝에서 길게 잘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료 뽑아 돌아서는데, 통로 끝에 윤이서가 서 있었다.
손에 책을 든 채로. 우연이었을 거다. 같은 4조 과제였고 균열학 서가는 여기 하나뿐이니까, 피하려고 고른 시간에 같은 이유로 그녀도 와 있었던 거다.
시선 내리고 옆 통로로 빠지려 했다.
"서."
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낮고, 팽팽하고,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멈췄다. 이 거리에서 등을 돌리면 그건 모욕이다.
"돌아봐."
돌아봤다. 윤이서는 서가에 등을 붙이듯 서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손끝은 떨리는데 시선은 안 떨렸다.
"입학 명단에서 네 이름을 봤을 때."
들고 있던 책 모서리를 엄지로 한 번 눌렀다.
"잘못 봤다고 생각했어. 세상이 아무리 엿같아도, 그렇게까지 엿같지는 않을 거라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소문은 들었어. 재벌가에서 버림받았다며. 여자들한테 빌붙어 산다며. 그래, 그러라고 해.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살든 관심 없어. 근데."
숨을 한 번 삼키고, 마지막 문장을 밀어냈다.
"여긴 왜 왔어. 하필 여기. 너 같은 게, 왜 여기 있어."
변명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준비할 생각도 없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사실은 네가 아는 그놈이 아니라고. 전부 사실인데 전부 그녀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져서, 그녀는 말을 끊고 한 번 숨을 골랐다.
"미안하다든가. 그런 적 없다든가. 기억이 안 난다든가. 뭐라도. 그래야 내가, 널 마음껏 미워하기라도 하지."
그녀 눈을 피하진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정직한 일이 그거 하나뿐이었으니까.
"할 말, 없어."
윤이서는 잠깐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우는 거랑 구분이 안 가는 웃음이었다.
"그래. 너는 늘 그랬지."
책을 가슴에 안고 내 옆을 지나쳤는데, 이번엔 벽에 안 붙었다. 일부러 정면으로, 곧게 걸어서. 발소리가 자료관 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떤 말을 골라도 결국 나 살자고 하는 소리라 안 꺼냈다.
그녀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그녀가 안 보는 데서 하면 된다. 이건 나 좋자고 하는 짓이기도 하고. 저 시야 밖 빈칸 셋을 그냥 두면 두고두고 내 판에 걸리적거릴 테니까.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른다. 그녀가 3년째 안 놓고 있는, 아직 안 끝난 세 가지.
알아낸다. 그리고 하나씩 이름도 없이 지운다. 그녀가 눈치 못 채게. 얼굴 내밀고 미안하다 하는 게 폭력이 되는 상대라면 남은 방법은 몰래 갚는 것뿐이고.
폰 꺼내서 비서실장한테 문자 한 줄 보냈다.
—옛날에 내가 부순 것들 중, 윤이서 쪽에 아직 남아 있는 게 뭔지. 목록으로 뽑아 주세요. 조용히.
답장은 곧바로 왔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 밑에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주무시는 시간은 언제십니까. 안 잔다고 답하려다 관뒀다.
너 같은 게 왜 여기 있어.
텅 빈 자료관에서 서가에 어깨를 기댄 채, 대답은 속으로만 했다.
맞아. 원래라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놈이지.
그래도 온 이상, 이 이름으로 진 빚은 이 이름으로 갚는다.
* * *
그리고 자리에 눕기 전에 숫자를 다시 열어 봤다.
━━━━━━━━━━━━━━
[ 한도윤 — 퇴장 예정 ]남은 시간 : D-1005
━━━━━━━━━━━━━━하루가 지났으니 하루가 깎였다. 거기까진 정상이다. 문제는 어제까지 1000이었던 게 오늘 1005라는 거고.
엿새가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는 아직 모른다.
여태 이 창은 딱 한 가지만 했다. 줄이는 것. 늘어난 적이 없고, 늘어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늘었다.
늘 수 있으면, 늘리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며 오늘 하루를 처음부터 다시 돌렸다. 명단, 4조, 강현우의 손, 그리고 그 애의 다섯 글자.
괜찮습니다.
거기서 뭐가 움직였다면.
'설마.'
몸을 일으켰다.
3년 동안 이 창을 시한폭탄으로만 봤다. 남은 날을 세는 시계라고. 근데 시계가 아니라 계기판이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계기판은 읽으라고 달아 놓는 게 아니다. 바늘을 올리라고 달아 놓는 거지.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밤새 가설을 하나 세웠고, 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시험했다. 가설이랄 것도 없었다. 그 애한테 뭘 해 주면 숫자가 밀린다, 그 한 줄이 전부였으니까.그래서 해 봤다. 4조 실습 자료 정리를 새벽 세 시까지 대신 끝내 놓고 아무도 없는 자료실 책상 위에 슬쩍 올려 뒀다.이름은 당연히 안 적었고, 조원 중 아무나 한 걸로 보이게 글씨도 반쯤 흘려 썼고, 딱 떨어지는 항목 두어 개는 아예 비워 뒀다. 너무 완벽하면 사람 손 냄새가 안 난다.아침 자습 시간,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자료실 앞 복도 벽에 기대섰다. 자판기는 잔돈을 뱉을 때마다 늙은 기침 같은 소리를 냈고, 커피는 뽑자마자 미지근했다. 3년 묵은 감지기 갈아 끼울 돈은 없다면서 자판기만 층마다 두 대씩 세워 둔 학교다.문이 열리고 4조가 우르르 들어가더니, 삼십 초도 안 돼서 안쪽이 시끄러워졌다."어? 야, 이거 누가 했어?""난 아닌데.""너지?""내가 이걸 왜 해. 새벽에 잠도 안 자고?""그럼 뭐야, 자료실에 귀신 붙었냐.""귀신이 표 정리를 이렇게 잘하면 그건 귀신이 아니라 조교지.""조교 귀신은 좀 슬프다.""슬프든 말든 난 이거 그대로 낼 거야.""야, 그럼 어젯밤에 나 혼자 끄적인 건 어쩌라고.""그걸 왜 했어.""과제니까 했지, 왜 하긴."문틈으로 웃음이 몇 번 새어 나왔고, 그 웃음 속에 그 애 목소리는 없었다.윤이서는 맨 뒤에서 그걸 받아 들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몇 번 나다가 한 번 멈췄고, 잠깐 그대로 있다가, 그냥 가방에 챙겨서 나갔다. 표정은 안 보였다. 볼 자리도 아니었고.그리고 숫자는.━━━━━━━━━━━━━━남은 시간 : D-1001━━━━━━━━━━━━━━나흘 깎였다. 하루에 하나씩, 아주 정상적으로.'안 되네.'밤새 만든 가설이 아침 한 번에 죽었다. 잘해 주면 밀린다는 게 틀렸다는 소린데, 그럼 지난주 그 엿새는 대체 뭐였나. 캔커피를 다 비울 때까지 곱씹어도 답이 안 나왔고, 답이 안
웃긴 일이다. 윤이서를 지키겠다는 놈이랑 윤이서한테서 물러나겠다는 놈, 목표가 완벽하게 똑같은 두 사람이 서로를 최악의 적으로 의심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이런 건 대본에도 안 나온다.* * *금요일 오후의 자료관은 비어 있었다.균열학 조별 과제 자료를 뽑으러 온 참이었다. 조는 그대로 4조라 얼굴을 완전히 피할 순 없어도, 자료 조사만 혼자 미리 해치우면 마주칠 일은 줄어든다. 다들 빠져나간 시간을 고른 것도 그래서고.서가 사이엔 종이 냄새랑 먼지가 가라앉아 조용했고,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났다. 창으로 든 늦은 볕이 서가 끝에서 길게 잘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료 뽑아 돌아서는데, 통로 끝에 윤이서가 서 있었다.손에 책을 든 채로. 우연이었을 거다. 같은 4조 과제였고 균열학 서가는 여기 하나뿐이니까, 피하려고 고른 시간에 같은 이유로 그녀도 와 있었던 거다.시선 내리고 옆 통로로 빠지려 했다."서."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낮고, 팽팽하고,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멈췄다. 이 거리에서 등을 돌리면 그건 모욕이다."돌아봐."돌아봤다. 윤이서는 서가에 등을 붙이듯 서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손끝은 떨리는데 시선은 안 떨렸다."입학 명단에서 네 이름을 봤을 때."들고 있던 책 모서리를 엄지로 한 번 눌렀다."잘못 봤다고 생각했어. 세상이 아무리 엿같아도, 그렇게까지 엿같지는 않을 거라고."아무 말도 안 했다."소문은 들었어. 재벌가에서 버림받았다며. 여자들한테 빌붙어 산다며. 그래, 그러라고 해.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살든 관심 없어. 근데."숨을 한 번 삼키고, 마지막 문장을 밀어냈다."여긴 왜 왔어. 하필 여기. 너 같은 게, 왜 여기 있어."변명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준비할 생각도 없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사실은 네가 아는 그놈이 아니라고. 전부 사실인데 전부 그녀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무슨 말이라도 해 봐."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져서, 그녀는 말을 끊고 한 번 숨을 골랐
동선 조정이고 뭐고, 시간표가 같으면 답이 없다.그녀는 강의실에 들어서다 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어제 복도의 3초가 그대로 재생됐다. 창백해지는 얼굴, 하얗게 쥐어지는 가방끈. 최대한 먼 대각선 자리에 앉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쪽을 안 봤다.수업이 끝나기 오 분 전에 교수가 자료를 넘겼다."조별 과제를 진행한다. 조 편성은 출석번호 순으로."교수 말에 명단이 화면에 떴고, 4조에서 아주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4조: 한도윤, 윤이서, 외 2명.강의실 어딘가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는데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근데 윤이서 등이 돌처럼 굳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이거 좀 곤란한데.'내가 손을 들기도 전에 다른 손이 먼저 올라갔다."교수님. 조 변경을 요청합니다."강현우였다.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더니 이유는 안 붙였다."제가 4조로 가겠습니다. 한도윤과 제 자리를 바꿔 주십시오."강의실이 웅성거렸다. 교수가 미간을 좁히고 명단을 다시 들여다봤다. 신입생 수석 요청이니 물리기도 애매했다."사유가 뭔가.""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그럼 들어줄 근거도 없는데.""근거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나중에 들을 거면 지금 안 바꿔도 되겠군."그때, 또 하나의 손이 올라갔다.윤이서였다."괜찮습니다."딱 한마디였다. 부연도 설명도 없이, 바꿔 달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냥 내 일이니 내가 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한마디.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강현우조차 반박할 말을 못 찾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손 든 채로 굳어 버린 건 오히려 그쪽이었다. 교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명단을 원래대로 뒀다."조는 편성대로 간다."4조는 그대로였다. 한도윤, 윤이서, 외 둘.'계산에 없던 전개인데.'내가 그린 그림은 손 안 대고 동선이 정리되는 거였다. 강현우가 조를 바꾸면 물러나면 그만이었는데, 그녀가 그 카드를 제 손으로 덮어 버렸다. 무슨 표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망은 아니었고.그리고 그때,
윤이서는 소리치지 않았다.가방끈을 쥔 손만 하얬다. 어깨가 안 닿게 벽에 붙어 걷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뛰는 거였다.몸의 기억이라는 게 참 얄궂다. 계좌 비밀번호는 사흘을 뒤져야 겨우 나오는데 이런 건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올라온다.중학교 3년 치. 이 몸의 원래 주인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나 실험한 기록이 통째로. 교과서가 창밖으로 날아갔고, 신발이 없어졌고, 옆에 있던 애들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붙어 있으면 다음 차례가 되니까.돈만 딸려 온 몸인 줄 알았는데, 죄까지 끼워 팔더라.그날 밤, 그 죄를 잠깐 밀어 두고 밀린 일부터 처리했다.밤 열한 시. 기숙사 방 불을 끄고 폰을 세 대 세웠다. 통화용, 한 번 쓰고 버릴 회선용, 그리고 아무 데도 안 연결된 수신 전용. 창밖에선 기숙사 앞 가로등이 벌레 때문에 지직거렸고, 그 소리 말고는 방이 조용했다. 하도 하다 보니 손에 익은 순서였다.첫 번째. 서부 연구소에 새로 들어갈 사람 명단.이름 두 개를 빼고 하나를 올렸다. 뺀 둘은 옛날에 이 몸 원주인이랑 술자리를 같이한 기록이 있는 놈들이고, 올린 하나는 어느 종이에도 나랑 엮인 적 없는 사람이다.강현우가 언제 서류를 파기 시작해도 안 이상한 상황이니 걸릴 이름은 명단에 오르기 전에 치우는 게 싸게 먹힌다.두 번째. 가온다인이랑 나 사이에 회사를 한 겹 더 끼웠다.이름만 있는 회사, 남의 손에 맡겨 둔 몫, 국경 하나, 그리고 오늘 얹은 걸로 넷째 겹. 저놈이 밤새 종이를 판다면 파면 팔수록 매끈한 막다른 길로 걸어 들어갈 거다.종이로 나를 잡는 건 진작에 안 되는 걸로 판정이 났고, 그 벽은 저놈이 자는 사이에도 알아서 두꺼워진다. 편한 벽이다.세 번째. 원주인이 옛날에 부순 문구점.주인한테 이번 달 치가 들어갔는지 확인하려고 비서실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예, 대표님.""주무시다 받으셨죠.""아닙니다.""목소리가 아닌데요.""조금 누웠습니다.""누
점심시간 식당은 소문의 2차 시장이었다."봤어? 아침 대련.""수석이 왜 굳이 걔를 지명해? 어제도 입학식에서 대놓고 시비 걸었잖아."맞은편 테이블에서 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숟가락을 들었다."망나니라며. 맞을 만하니까 그러겠지.""근데 걔 입학하고 나서 뭐 한 것도 없지 않냐? 어제부터 계속 당하기만 하던데.""그러네. 뭘 해야 욕을 하지."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그 대화를 배경음악처럼 흘렸다. 오늘 국은 미역국이었는데 미역이 세 가닥밖에 없었다. 이 학교, 등록금은 그렇게 받으면서.식판 하나가 툭 놓이더니 앞자리 애가 맞은편에 앉았다."여기 자리 있어?""앉고 나서 묻는 건 반칙이지.""어깨 괜찮아? 아까 소리 크던데.""멀쩡해.""근데 너 왜 안 때려? 서른 합이나 버텼으면 한 대쯤은 칠 수 있었잖아.""때려서 이길 상대가 아니니까.""그럼 왜 버텨?""버티는 건 이기는 거랑 상관없이 되니까."애가 숟가락을 문 채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됐다가, 곧 관두고 미역국 얘기로 넘어갔다."야, 근데 네 국에도 미역 세 가닥이지?""세 가닥.""내 것도 세 가닥. 이거 정량이야.""학교가 성실하네."여론이 갈라지고 있었다. 당해도 싸다는 쪽과, 이유 없이 저러는 건 이상하다는 쪽.욕하는 쪽은 그냥 두면 내 연막이 되고, 갸웃거리는 쪽은 나중에 쓸 데가 있다.문제는 강현우 쪽이었다.계획은 원래 단순했다. 3년간 아무 짓도 안 한다, 그럼 경계는 알아서 무뎌진다. 원한이야 기억이 만드는 거라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의심은 다르다. 그건 증거를 먹고 크는 거라 안 주면 알아서 굶어 죽는다.그런데 오늘 대련에서 확인했다. 저놈의 의심은 굶어 죽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보고 아는 한도윤이 아니라는 데까지 갔으니, 위험한 망나니였던 게 이제 정체 모를 뭔가가 돼 버린 거다.'전략 수정.'숨는 건 실패. 그럼 눈에 띄는 채로 굴린다. 어차피 소문은 최고의 연막이라, 스폰받는 망나니 구경하느라
평가장은 본관 뒤편 제1훈련장이었다.천장이 까마득히 높고 바닥엔 충격 흡수 술식이 깔린 거대한 홀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땀 냄새랑 나무 냄새가 먼저 훅 끼쳤고, 신입생들이 줄을 서는 동안 훈련장 벽면을 훑었다.벽을 두른 보호 장벽 발생 장치. 모서리 각인이 눈에 익었다.'가온다인 3세대 모델이네.'작년에 아카데미가 무더기로 주문한 물건이다. 값 흥정할 때 서류를 직접 봤으니 모를 수가 없지. 부도 직전에 주워 온 그 작은 기술회사가 이제 이 나라 훈련 시설 절반에 제 이름을 박고 있었다.줄에 서 있는데 어제 그 앞자리 애가 슬쩍 뒤로 끼어들었다."새치기 아니야. 원래 여기였어.""그렇다고 해 두자.""야, 근데 너 어디까지 나올 것 같아? 나는 딱 중간만 나오면 소원이 없겠는데.""중간이 제일 어려운 거야.""뭔 소리야, 중간이 제일 쉽지.""위든 아래든 한 번 찍히면 3년 가고, 중간은 아무도 안 외워 주거든.""그러니까 쉽다는 거 아니야.""외워 주는 사람이 없는 걸 정확히 맞히는 게 어렵다고.""너 진짜 이상한 애다."칭찬으로 들어 두기로 했다.기초 측정이 시작됐다. 근력, 반응속도, 마력 출력, 지구력. 측정 기기 앞에서 신입생들이 하나씩 제 숫자를 만들어 갔고, 환호가 터지기도 하고 어깨가 처지기도 했다.눈에 익은 얼굴 몇이 그 줄에 섞여 있었다.도진혁. 목검 쥔 자세부터 다른, 검 계열 최상위권. 수치가 뜰 때마다 주변이 짧게 술렁였다.그 옆줄 백진은 정반대였다. 숫자가 화려하진 않은데 측정 내내 자세 한 번 안 흐트러지는 게 오히려 눈에 걸렸다. 규율이 뼈에 박힌 놈.그리고 마법학부 쪽 줄 끝엔 측정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딴 데만 보는 여학생 하나, 정하람. 이론 수석이라더니 실기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전부 원작에서 아는 얼굴이다. 앞으로 이 아카데미를 굴려 갈 이름들. 지금은 그냥 얼굴만 익혀 둔다.내 앞줄에선 여학생 하나가 유독 시끄러웠다."괜찮아, 떨어지는 시험도 아닌데!" 긴장한 옆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