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밤새 가설을 하나 세웠고, 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시험했다. 가설이랄 것도 없었다. 그 애한테 뭘 해 주면 숫자가 밀린다, 그 한 줄이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해 봤다. 4조 실습 자료 정리를 새벽 세 시까지 대신 끝내 놓고 아무도 없는 자료실 책상 위에 슬쩍 올려 뒀다.
이름은 당연히 안 적었고, 조원 중 아무나 한 걸로 보이게 글씨도 반쯤 흘려 썼고, 딱 떨어지는 항목 두어 개는 아예 비워 뒀다. 너무 완벽하면 사람 손 냄새가 안 난다.
아침 자습 시간,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자료실 앞 복도 벽에 기대섰다. 자판기는 잔돈을 뱉을 때마다 늙은 기침 같은 소리를 냈고, 커피는 뽑자마자 미지근했다. 3년 묵은 감지기 갈아 끼울 돈은 없다면서 자판기만 층마다 두 대씩 세워 둔 학교다.
문이 열리고 4조가 우르르 들어가더니, 삼십 초도 안 돼서 안쪽이 시끄러워졌다.
"어? 야, 이거 누가 했어?"
"난 아닌데." "너지?" "내가 이걸 왜 해. 새벽에 잠도 안 자고?" "그럼 뭐야, 자료실에 귀신 붙었냐." "귀신이 표 정리를 이렇게 잘하면 그건 귀신이 아니라 조교지." "조교 귀신은 좀 슬프다." "슬프든 말든 난 이거 그대로 낼 거야." "야, 그럼 어젯밤에 나 혼자 끄적인 건 어쩌라고." "그걸 왜 했어." "과제니까 했지, 왜 하긴."문틈으로 웃음이 몇 번 새어 나왔고, 그 웃음 속에 그 애 목소리는 없었다.
윤이서는 맨 뒤에서 그걸 받아 들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몇 번 나다가 한 번 멈췄고, 잠깐 그대로 있다가, 그냥 가방에 챙겨서 나갔다. 표정은 안 보였다. 볼 자리도 아니었고.
그리고 숫자는.
━━━━━━━━━━━━━━
남은 시간 : D-1001 ━━━━━━━━━━━━━━나흘 깎였다. 하루에 하나씩, 아주 정상적으로.
'안 되네.'
밤새 만든 가설이 아침 한 번에 죽었다. 잘해 주면 밀린다는 게 틀렸다는 소린데, 그럼 지난주 그 엿새는 대체 뭐였나. 캔커피를 다 비울 때까지 곱씹어도 답이 안 나왔고, 답이 안 나온 채로 오전 수업 네 시간이 통째로 지나갔다.
점심시간에 정문 앞으로 검은 세단이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멈추는 걸 보고, 오늘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구나 싶었다.
경호원이 먼저 내려 뒷문을 열자 선글라스 낀 여자가 자갈을 또각또각 밟으며 교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삼십 대 중반, 어깨선이 칼처럼 선 정장. 연예 뉴스 머리기사에서 일 년에 열두 번은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급식실 창문마다 얼굴이 붙었다.
"저 사람 서미란 대표 아니야? 아르테 엔터, 그 시상식에서 봤는데."
"미쳤다. 여긴 왜 와?" "오디션 보러 온 거 아냐? 야, 나 머리 어때." "됐고 밥이나 먹어. 국 식는다." "지금 국이 문제냐." "국은 언제나 문제야. 식으면 못 먹어."답은 오 분 만에 나왔다. 서관 접견실로 나를 부르는 호출이 떨어졌으니까.
"우리 대표님, 얼굴 좋아졌네요?"
접견실 문을 열자 서미란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었다. 학교 물건이라기엔 지나치게 낡은 가죽 소파에 다리를 느긋하게 꼬고 앉았는데, 그 동작 하나에도 화면발이 배어 있었다. 서른여섯에 업계를 손에 쥔 여자의 여유란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교복 잘 어울리네. 아깝다. 내가 몇 살만 젊었어도 그 소문을 진짜로 만들어 드리는 건데."
"계약서나 줘." "어머, 재미없어."문을 닫고 맞은편에 앉자 소파가 푹 꺼지면서 먼지 냄새를 뱉었다. 탁자엔 손도 안 댄 종이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행정실 직원이 급하게 타 놓고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깐 궁금했는데, 뭐, 어차피 소문은 오후에 다 정해질 테니까.
저 농담이 반은 농담이고 반은 간 보기라는 것쯤은 안다. 이 여자는 방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공기 주인을 자기로 정해 놓고 시작하는 부류다. 얼굴이야 이 바닥에 흔하지. 이 여자 무기는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 쓰는 솜씨 쪽이고.
"밥은 먹고 다녀요? 얼굴이 반쪽인데."
"급식 나왔어. 오늘 제육." "제육이 나왔는데 얼굴이 그래요? 그럼 급식이 문제네." "급식은 죄 없어. 잠을 안 잔 내가 문제지." "그건 더 안 좋은 소식인데요. 열아홉이 뭐 하느라 밤을 새워." "숙제." "거짓말도 성의 없이 하시네." "성의 있게 하면 넘어가 줄 거야?" "아뇨. 그래도 기분은 좋잖아요." "그럼 다음엔 성의 있게 할게." "기대는 안 할게요."그러고는 웃으면서 서류철을 탁자에 올려놨다.
"이런 건 전화로 해도 되잖아."
"오늘까지 서명해야 하는 게 있어서요. 3년 전 그 투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거든요."내민 서류를 훑어보니 사실이긴 했다. 3년 전에 돈을 넣으면서 붙여 둔 약속 하나가 오늘 자정에 죽는 게 맞았다.
사실이긴 한데, 이건 팩스로도 되고 직원 하나 보내도 되는 일이었다. 굳이 본인이, 굳이 점심시간에, 굳이 정문으로 걸어 들어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안 붙었다.
"일부러 온 거지."
"어머, 티 났어요?" "티를 내려고 왔잖아." "역시 말이 통해서 좋아."그녀는 조금도 안 미안한 얼굴로 새 카드가 든 봉투를 밀었다. 미는 손끝이 봉투를 넘겨주면서도 뗄 생각은 없는 각도로 내 손등에 겹쳤고, 관리받은 손인데도 반 도쯤 서늘했다.
향수가 사무실 특유의 종이 냄새를 밀어내는가 싶더니 좁은 방 절반이 어느새 이 여자 영역이 되어 있었다.
"소문요? 그건 서비스예요. 얼굴 가리고 사는 게 취미시잖아요. 얼굴을 가리려면 가면이 필요하고."
그녀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구경하러 몰려든 학생들 쪽으로 아주 보란 듯이 손을 흔들었다. 창문 너머에서 비명 비슷한 소리가 터졌다.
"가면은 화려할수록 좋아요."
"가면값은 누가 내는데." "제 몫은 벌써 받고 있죠. 그쪽 이름 옆에 서 있는 값으로." "싸게 받네." "비싸게 받는 중이에요. 본인이 아직 얼마짜린지 모르실 뿐이지."나는 봉투를 빼냈다. 손을 물리는 대신 뗄 생각 없던 그 손끝을 봉투째 내 쪽으로 당겨서 그쪽이 먼저 놓게 만들었다. 손등에 온도가 잠깐 남았지만, 그걸 값에 넣을지 말지는 내가 정한다.
이 여자들은 늘 이런 식이다. 거래 위에 온도를 한 겹 얹어 두고, 그게 값에 포함되는 건지 아닌지 상대를 계속 헷갈리게 한다. 헷갈리는 쪽이 지는 게임이라서, 오늘은 저쪽 손끝이 미세하게 늦었고.
"다음엔 후문으로 와."
"싫어요. 후문은 그림이 안 나와서."그녀가 돌아간 뒤, 소문은 예상대로 잘 터져 줬다.
"길드장 다음엔 엔터 대표? 대체 몇 명이야?"
"봉투 주고 가는 거 봤어? 대낮에, 학교에서?" "쟤는 무슨 인생이 그렇게 풀리냐."마지막 목소리엔 경멸 반, 숨기다 만 부러움 반이 섞여 있었다. 침 뱉으면서 훔쳐보는 거다. 해명? 이번에도 생략했다. 연막은 두꺼울수록 좋으니까.
그 여유가 깨진 건 종례 직전이었다.
〈신입생 합동 야외 실습 일정 변경 안내〉
〈동부 구릉지 실습장 / 다음 주 화요일 → 이번 주 금요일로 조정〉
공지를 읽는 순간 교실 소음이 뚝 멀어졌다.
앞당겨졌다.
공지문을 응시하자 시야 한구석이 저릿해지면서 반투명한 글줄이 종이 위로 떠올랐다. 이 세계에서 나한테만 보이는 글자들.
━━━━━━━━━━━━
신입생 합동 야외 실습
플래그
■ 균열 잔재 폭주 (DANGER) ■ 감지 실패 □ 전원 생존예상 결과
사망 다수 — 신입생 포함남은 시간
3일 19:04개입 가능
YES━━━━━━━━━━━━
사람도, 회사도 아니었다.
3년 만에 처음 보는 종류의 창이었다.
* * *
예상 결과에 남은 시간까지 박아서 내미는 창이라니. 이렇게까지 친절한 게 좋은 징조일 리 없지.
'전원 생존'이라는 빈 네모. 지금부터 내가 켜야 할 칸이고, 방법은 늘 그랬듯 알아서 찾으라는 거고.
"드디어 실전이네! 야, 우리 조 같이 다니자."
"동부 구릉지면 소풍 아니냐? 거기 몇 년 전에 다 치운 데라던데."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밤새 가설을 하나 세웠고, 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시험했다. 가설이랄 것도 없었다. 그 애한테 뭘 해 주면 숫자가 밀린다, 그 한 줄이 전부였으니까.그래서 해 봤다. 4조 실습 자료 정리를 새벽 세 시까지 대신 끝내 놓고 아무도 없는 자료실 책상 위에 슬쩍 올려 뒀다.이름은 당연히 안 적었고, 조원 중 아무나 한 걸로 보이게 글씨도 반쯤 흘려 썼고, 딱 떨어지는 항목 두어 개는 아예 비워 뒀다. 너무 완벽하면 사람 손 냄새가 안 난다.아침 자습 시간,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자료실 앞 복도 벽에 기대섰다. 자판기는 잔돈을 뱉을 때마다 늙은 기침 같은 소리를 냈고, 커피는 뽑자마자 미지근했다. 3년 묵은 감지기 갈아 끼울 돈은 없다면서 자판기만 층마다 두 대씩 세워 둔 학교다.문이 열리고 4조가 우르르 들어가더니, 삼십 초도 안 돼서 안쪽이 시끄러워졌다."어? 야, 이거 누가 했어?""난 아닌데.""너지?""내가 이걸 왜 해. 새벽에 잠도 안 자고?""그럼 뭐야, 자료실에 귀신 붙었냐.""귀신이 표 정리를 이렇게 잘하면 그건 귀신이 아니라 조교지.""조교 귀신은 좀 슬프다.""슬프든 말든 난 이거 그대로 낼 거야.""야, 그럼 어젯밤에 나 혼자 끄적인 건 어쩌라고.""그걸 왜 했어.""과제니까 했지, 왜 하긴."문틈으로 웃음이 몇 번 새어 나왔고, 그 웃음 속에 그 애 목소리는 없었다.윤이서는 맨 뒤에서 그걸 받아 들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몇 번 나다가 한 번 멈췄고, 잠깐 그대로 있다가, 그냥 가방에 챙겨서 나갔다. 표정은 안 보였다. 볼 자리도 아니었고.그리고 숫자는.━━━━━━━━━━━━━━남은 시간 : D-1001━━━━━━━━━━━━━━나흘 깎였다. 하루에 하나씩, 아주 정상적으로.'안 되네.'밤새 만든 가설이 아침 한 번에 죽었다. 잘해 주면 밀린다는 게 틀렸다는 소린데, 그럼 지난주 그 엿새는 대체 뭐였나. 캔커피를 다 비울 때까지 곱씹어도 답이 안 나왔고, 답이 안
웃긴 일이다. 윤이서를 지키겠다는 놈이랑 윤이서한테서 물러나겠다는 놈, 목표가 완벽하게 똑같은 두 사람이 서로를 최악의 적으로 의심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이런 건 대본에도 안 나온다.* * *금요일 오후의 자료관은 비어 있었다.균열학 조별 과제 자료를 뽑으러 온 참이었다. 조는 그대로 4조라 얼굴을 완전히 피할 순 없어도, 자료 조사만 혼자 미리 해치우면 마주칠 일은 줄어든다. 다들 빠져나간 시간을 고른 것도 그래서고.서가 사이엔 종이 냄새랑 먼지가 가라앉아 조용했고,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도 안 났다. 창으로 든 늦은 볕이 서가 끝에서 길게 잘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료 뽑아 돌아서는데, 통로 끝에 윤이서가 서 있었다.손에 책을 든 채로. 우연이었을 거다. 같은 4조 과제였고 균열학 서가는 여기 하나뿐이니까, 피하려고 고른 시간에 같은 이유로 그녀도 와 있었던 거다.시선 내리고 옆 통로로 빠지려 했다."서."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낮고, 팽팽하고,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멈췄다. 이 거리에서 등을 돌리면 그건 모욕이다."돌아봐."돌아봤다. 윤이서는 서가에 등을 붙이듯 서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손끝은 떨리는데 시선은 안 떨렸다."입학 명단에서 네 이름을 봤을 때."들고 있던 책 모서리를 엄지로 한 번 눌렀다."잘못 봤다고 생각했어. 세상이 아무리 엿같아도, 그렇게까지 엿같지는 않을 거라고."아무 말도 안 했다."소문은 들었어. 재벌가에서 버림받았다며. 여자들한테 빌붙어 산다며. 그래, 그러라고 해.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살든 관심 없어. 근데."숨을 한 번 삼키고, 마지막 문장을 밀어냈다."여긴 왜 왔어. 하필 여기. 너 같은 게, 왜 여기 있어."변명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준비할 생각도 없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사실은 네가 아는 그놈이 아니라고. 전부 사실인데 전부 그녀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무슨 말이라도 해 봐."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져서, 그녀는 말을 끊고 한 번 숨을 골랐
동선 조정이고 뭐고, 시간표가 같으면 답이 없다.그녀는 강의실에 들어서다 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어제 복도의 3초가 그대로 재생됐다. 창백해지는 얼굴, 하얗게 쥐어지는 가방끈. 최대한 먼 대각선 자리에 앉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쪽을 안 봤다.수업이 끝나기 오 분 전에 교수가 자료를 넘겼다."조별 과제를 진행한다. 조 편성은 출석번호 순으로."교수 말에 명단이 화면에 떴고, 4조에서 아주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4조: 한도윤, 윤이서, 외 2명.강의실 어딘가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는데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근데 윤이서 등이 돌처럼 굳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이거 좀 곤란한데.'내가 손을 들기도 전에 다른 손이 먼저 올라갔다."교수님. 조 변경을 요청합니다."강현우였다.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더니 이유는 안 붙였다."제가 4조로 가겠습니다. 한도윤과 제 자리를 바꿔 주십시오."강의실이 웅성거렸다. 교수가 미간을 좁히고 명단을 다시 들여다봤다. 신입생 수석 요청이니 물리기도 애매했다."사유가 뭔가.""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그럼 들어줄 근거도 없는데.""근거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나중에 들을 거면 지금 안 바꿔도 되겠군."그때, 또 하나의 손이 올라갔다.윤이서였다."괜찮습니다."딱 한마디였다. 부연도 설명도 없이, 바꿔 달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냥 내 일이니 내가 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한마디.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강현우조차 반박할 말을 못 찾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손 든 채로 굳어 버린 건 오히려 그쪽이었다. 교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명단을 원래대로 뒀다."조는 편성대로 간다."4조는 그대로였다. 한도윤, 윤이서, 외 둘.'계산에 없던 전개인데.'내가 그린 그림은 손 안 대고 동선이 정리되는 거였다. 강현우가 조를 바꾸면 물러나면 그만이었는데, 그녀가 그 카드를 제 손으로 덮어 버렸다. 무슨 표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망은 아니었고.그리고 그때,
윤이서는 소리치지 않았다.가방끈을 쥔 손만 하얬다. 어깨가 안 닿게 벽에 붙어 걷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뛰는 거였다.몸의 기억이라는 게 참 얄궂다. 계좌 비밀번호는 사흘을 뒤져야 겨우 나오는데 이런 건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올라온다.중학교 3년 치. 이 몸의 원래 주인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나 실험한 기록이 통째로. 교과서가 창밖으로 날아갔고, 신발이 없어졌고, 옆에 있던 애들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붙어 있으면 다음 차례가 되니까.돈만 딸려 온 몸인 줄 알았는데, 죄까지 끼워 팔더라.그날 밤, 그 죄를 잠깐 밀어 두고 밀린 일부터 처리했다.밤 열한 시. 기숙사 방 불을 끄고 폰을 세 대 세웠다. 통화용, 한 번 쓰고 버릴 회선용, 그리고 아무 데도 안 연결된 수신 전용. 창밖에선 기숙사 앞 가로등이 벌레 때문에 지직거렸고, 그 소리 말고는 방이 조용했다. 하도 하다 보니 손에 익은 순서였다.첫 번째. 서부 연구소에 새로 들어갈 사람 명단.이름 두 개를 빼고 하나를 올렸다. 뺀 둘은 옛날에 이 몸 원주인이랑 술자리를 같이한 기록이 있는 놈들이고, 올린 하나는 어느 종이에도 나랑 엮인 적 없는 사람이다.강현우가 언제 서류를 파기 시작해도 안 이상한 상황이니 걸릴 이름은 명단에 오르기 전에 치우는 게 싸게 먹힌다.두 번째. 가온다인이랑 나 사이에 회사를 한 겹 더 끼웠다.이름만 있는 회사, 남의 손에 맡겨 둔 몫, 국경 하나, 그리고 오늘 얹은 걸로 넷째 겹. 저놈이 밤새 종이를 판다면 파면 팔수록 매끈한 막다른 길로 걸어 들어갈 거다.종이로 나를 잡는 건 진작에 안 되는 걸로 판정이 났고, 그 벽은 저놈이 자는 사이에도 알아서 두꺼워진다. 편한 벽이다.세 번째. 원주인이 옛날에 부순 문구점.주인한테 이번 달 치가 들어갔는지 확인하려고 비서실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예, 대표님.""주무시다 받으셨죠.""아닙니다.""목소리가 아닌데요.""조금 누웠습니다.""누
점심시간 식당은 소문의 2차 시장이었다."봤어? 아침 대련.""수석이 왜 굳이 걔를 지명해? 어제도 입학식에서 대놓고 시비 걸었잖아."맞은편 테이블에서 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숟가락을 들었다."망나니라며. 맞을 만하니까 그러겠지.""근데 걔 입학하고 나서 뭐 한 것도 없지 않냐? 어제부터 계속 당하기만 하던데.""그러네. 뭘 해야 욕을 하지."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그 대화를 배경음악처럼 흘렸다. 오늘 국은 미역국이었는데 미역이 세 가닥밖에 없었다. 이 학교, 등록금은 그렇게 받으면서.식판 하나가 툭 놓이더니 앞자리 애가 맞은편에 앉았다."여기 자리 있어?""앉고 나서 묻는 건 반칙이지.""어깨 괜찮아? 아까 소리 크던데.""멀쩡해.""근데 너 왜 안 때려? 서른 합이나 버텼으면 한 대쯤은 칠 수 있었잖아.""때려서 이길 상대가 아니니까.""그럼 왜 버텨?""버티는 건 이기는 거랑 상관없이 되니까."애가 숟가락을 문 채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됐다가, 곧 관두고 미역국 얘기로 넘어갔다."야, 근데 네 국에도 미역 세 가닥이지?""세 가닥.""내 것도 세 가닥. 이거 정량이야.""학교가 성실하네."여론이 갈라지고 있었다. 당해도 싸다는 쪽과, 이유 없이 저러는 건 이상하다는 쪽.욕하는 쪽은 그냥 두면 내 연막이 되고, 갸웃거리는 쪽은 나중에 쓸 데가 있다.문제는 강현우 쪽이었다.계획은 원래 단순했다. 3년간 아무 짓도 안 한다, 그럼 경계는 알아서 무뎌진다. 원한이야 기억이 만드는 거라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의심은 다르다. 그건 증거를 먹고 크는 거라 안 주면 알아서 굶어 죽는다.그런데 오늘 대련에서 확인했다. 저놈의 의심은 굶어 죽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보고 아는 한도윤이 아니라는 데까지 갔으니, 위험한 망나니였던 게 이제 정체 모를 뭔가가 돼 버린 거다.'전략 수정.'숨는 건 실패. 그럼 눈에 띄는 채로 굴린다. 어차피 소문은 최고의 연막이라, 스폰받는 망나니 구경하느라
평가장은 본관 뒤편 제1훈련장이었다.천장이 까마득히 높고 바닥엔 충격 흡수 술식이 깔린 거대한 홀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땀 냄새랑 나무 냄새가 먼저 훅 끼쳤고, 신입생들이 줄을 서는 동안 훈련장 벽면을 훑었다.벽을 두른 보호 장벽 발생 장치. 모서리 각인이 눈에 익었다.'가온다인 3세대 모델이네.'작년에 아카데미가 무더기로 주문한 물건이다. 값 흥정할 때 서류를 직접 봤으니 모를 수가 없지. 부도 직전에 주워 온 그 작은 기술회사가 이제 이 나라 훈련 시설 절반에 제 이름을 박고 있었다.줄에 서 있는데 어제 그 앞자리 애가 슬쩍 뒤로 끼어들었다."새치기 아니야. 원래 여기였어.""그렇다고 해 두자.""야, 근데 너 어디까지 나올 것 같아? 나는 딱 중간만 나오면 소원이 없겠는데.""중간이 제일 어려운 거야.""뭔 소리야, 중간이 제일 쉽지.""위든 아래든 한 번 찍히면 3년 가고, 중간은 아무도 안 외워 주거든.""그러니까 쉽다는 거 아니야.""외워 주는 사람이 없는 걸 정확히 맞히는 게 어렵다고.""너 진짜 이상한 애다."칭찬으로 들어 두기로 했다.기초 측정이 시작됐다. 근력, 반응속도, 마력 출력, 지구력. 측정 기기 앞에서 신입생들이 하나씩 제 숫자를 만들어 갔고, 환호가 터지기도 하고 어깨가 처지기도 했다.눈에 익은 얼굴 몇이 그 줄에 섞여 있었다.도진혁. 목검 쥔 자세부터 다른, 검 계열 최상위권. 수치가 뜰 때마다 주변이 짧게 술렁였다.그 옆줄 백진은 정반대였다. 숫자가 화려하진 않은데 측정 내내 자세 한 번 안 흐트러지는 게 오히려 눈에 걸렸다. 규율이 뼈에 박힌 놈.그리고 마법학부 쪽 줄 끝엔 측정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딴 데만 보는 여학생 하나, 정하람. 이론 수석이라더니 실기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전부 원작에서 아는 얼굴이다. 앞으로 이 아카데미를 굴려 갈 이름들. 지금은 그냥 얼굴만 익혀 둔다.내 앞줄에선 여학생 하나가 유독 시끄러웠다."괜찮아, 떨어지는 시험도 아닌데!" 긴장한 옆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