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47화. 재판바다는 현관에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로, 잠시 그냥 서 있었다.어둠 속에서 집이 낯설었다.같은 벽, 같은 가구인데 공기가 달랐다.뭔가가 배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성으로는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쉽게 떼지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조명을 켰다.빛이 거실을 채웠다.바다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하늘의 가방을 찾아 침실로 향하면서, 지나치는 것들을 눈으로 훑었다.현관 도어락. 손잡이. 창문 잠금장치.눈에 보이는 이상은 없었다.그게 오히려 더 찜찜했다.아무 흔적도 없이 드나들었다는 뜻이니까.세면도구를 챙기며 욕실을 한 번 봤다.칫솔, 스킨, 수건. 별것 아닌 것들인데 손이 잠깐 멈췄다.동생이 이걸 다시 쓰러 돌아와야 한다.그 생각 하나가 바다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가방에 물건을 넣으면서 그는 집 안 조명을 전부 켰다.이유는 없었다.그냥 켰다.환해야 할 것 같았다.하늘이 돌아왔을 때,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야 할 것 같았다.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취조실은 좁았다.누런 형광등 아래 재현은 등을 곧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수갑을 찬 손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으로 쇠를 가볍게 두드렸다.긴장한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조찬수가 서류를 펼쳤다.도어락 입력 시도 기록. 날짜와 시각이 찍힌 로그가 열두 줄이 넘었다.틀린 번호를 하나씩 눌러가며 맞는 것을 찾아낸 흔적이었다.그 옆에는 수십 개의 발신 번호 목록. 재현이 번호를 바꿔가며 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록이었다.마지막 날짜에는 하늘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는 통신 기록이 붙어 있었다.그다음 재현이 한 일은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서류 맨 아래에는 하늘의 몸에서 확인된 멍 사진, 그리고 납치 당일 현장에서 확보된 녹음 파일 재생 기록이 있었다.조찬수는 한 장씩 재현 앞에 밀었다.재현은 내려다봤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전 누나를 지키려고 했던 것뿐이에요."목소리가 낮고 차분했다.억울
46화. 새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새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동혁의 말대로 이제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감각이 기억하는 공포는 예고 없이 몸을 짓눌렀다."팀장님, 저는…, 저는 제가 그 문을 열어준 줄 알았어요.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래서 다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줄 알고….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하늘의 목소리가 젖은 종이처럼 찢겨 나왔다.재현이 도어락을 누르던 그 경쾌한 기계음은 그녀에게 있어 자신을 향한 불신이자 낙인이었다.동혁은 그런 하늘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침대 난간 너머로 시선을 낮췄다."하늘 씨 잘못 아닙니다. 이재현이 비정상적이었던 거예요. 지문을 읽든, 소리를 듣든… 놈은 처음부터 하늘 씨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동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하늘 씨가 연 문은 없어요. 그러니 자신을 가두지 마세요."그 말에 참았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오빠 앞에서도, 형사 앞에서도 보이지 못했던 가장 깊은 곳의 자책이었다.동혁은 손을 뻗어 하늘의 떨리는 손등 근처에 살포시 얹었다.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어주는 적당한 거리의 온기가 오히려 하늘을 숨 쉬게 했다.한참을 울던 하늘이 진정될 때쯤, 병실 밖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바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돌아온 조찬수 형사였다.그는 문틈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확인하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깨어났군요. 몸은 좀 어때요?"조찬수의 물음에 하늘은 젖은 눈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조찬수는 침대 발치에 서서 수첩을 꺼내려다,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지금은 취조보다 안정이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이상현 씨는 돌아갔습니다. 법대로 하겠다고 못 박아 뒀으니 다시는 병실 근처에 얼씬도 못 할 겁니다. 그리고…."조찬수는 잠시 동혁을 힐끗 본 뒤 말을 이었다."유하늘 씨, 이재현은 이제 못 나옵니다."단호한 목소리가 병실의 정적을 갈랐다.하
45화. 드디어 열린 새장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밴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바다는 침대 옆 보조 의자에 몸을 구부린 채, 창백하게 질린 하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힘없이 늘어진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만이 동생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바다는 흐릿해진 시야를 닦아낼 생각도 못 한 채, 하늘의 손등 위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병실 구석에서 묵묵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조찬수 형사가 나직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이재현의 구속은 피하지 못할 겁니다.”조찬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위로보다는 형사로서 내리는 판결에 가까운 확신이었다.“현장 체포에 증인들도 확실하고, 확보한 음성 파일이랑 아파트 CCTV 동선까지 일치합니다. 변호사 군단을 데려와도 이번엔 못 빠져나갑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그때, 정적을 깨고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고가의 코트를 걸친 중년의 남자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이닥쳤다.이재현의 아버지, 이상현이었다.그는 병실 안의 공기를 살피기도 전에 바다의 앞으로 달려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둔탁한 소리가 타일 바닥을 울렸다.“제가 자식놈을 잘못 키웠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이상현은 바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듯 손을 내밀었지만, 바다는 혐오감이 서린 눈으로 그 손을 피해 의자를 뒤로 물렸다.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그 비굴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바다는 입술을 짓씹었다.아들은 제 죄를 정당화하며 비웃고, 아비는 그 죄를 돈과 권력으로 덮으려 무릎을 꿇는다.부자(父子)가 보여주는 이 기만적인 연극의 형태는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바다의 목소리는 분노를 넘어 차갑게 식어 있었다.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리는 바다를 대신해 조찬수가 앞을 막아섰다.“이미 모든 증거와 증인이 확보된 사건입니다. 아드님을 정말로 생각하신다면, 이제라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44화. 체포재현은 거실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집 안을 헤집는 사람들을 구경하듯 내려다보았다.입가에 걸린 느슨한 비소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지루한 연극이라도 되는 양 여유로웠다.“하늘 씨 어디다 숨겼습니까!”늘 얼음장 같던 동혁의 이성이 처음으로 파열음을 냈다.평소의 절제된 모습은 간데없이, 핏발 선 눈으로 내지르는 고함이 거실의 정적을 찢었다.재현은 눈썹을 까닥이며 과장되게 몸을 움츠렸다.“와, 무서워라. 우리 팀장님, 화도 낼 줄 아는 사람이셨네? 근데 어쩌죠, 난 진짜 모른다니까요?”재현의 빈정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바다가 주머니에서 액정이 박살 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떨리는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자, 재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흘러나왔다.짐승 같은 고함과 하늘의 비명, 그리고 강제로 끌려가는 둔탁한 마찰음.순간, 재현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가면이 조각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단단하게 고정되었던 눈매가 미세하게 경련했고, 입가에 머물던 비소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이래도, 이래도 발뺌할 거야?”바다는 당장이라도 재현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그를 쏘아보았다.전신을 타고 흐르는 분노 때문에 휴대전화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재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셔츠 깃을 거칠게 매만지며 시선을 피했다.“……아니, 뭐. 누나를 좀 억지로 데리고 나오긴 했는데. 정말 단지 근처에서 얘기만 하고 헤어졌다니까요? 저 소리는 누나가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진정시키느라 그랬던 거고.”“이재현 씨. 아파트 CCTV 동선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당신 차 뒷좌석에 억지로 태워지는 유하늘 씨 모습, 아주 선명하게 찍혔단 말입니다. 거짓말인 거 다 아니까, 하늘 씨 어딨는지 당장 말해!”조찬수의 단호한 압박에 재현의 얼굴에서 마침내 핏기가 가셨다.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눈빛이 번뜩였다.하지만 여기서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라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턱 근육을 단단히 세우며 이빨 사이로
43화. 당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조찬수와 형사들은 별장 주변부터 살폈다.거실의 희미한 불빛 외엔 전부 커튼이 쳐져 있어 안의 상황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어떻게 하죠? 그냥 밀고 들어갈까요?”박 형사가 낮게 속삭이며 현관문 손잡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조찬수는 잠시 턱끝을 만지며, 고민에 빠졌다.영장 없는 가택 침입은 나중에 독이 될 수 있었지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직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진 신호를 보냈다.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며 데크를 밟았다.나무판자가 비명을 지르지 않게 체중을 분산하며 현관 앞에 섰다.똑, 똑, 똑.박 형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노크 소리는 밤의 정적 속으로 무력하게 흩어졌다.안에서는 그 흔한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조찬수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그는 박 형사를 뒤로 물리고 직접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거칠고 단호했다.“이재현 씨! 경찰입니다. 안에 있는 거 다 압니다. 문 여세요!”조찬수의 외침이 텅 빈 복도를 울리는 울림처럼 돌아왔다.문 뒤에서 바다와 시은은 서로의 손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고, 동혁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별장 주변의 탈출로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바다의 심장 소리가 귓전을 때릴 만큼 커졌을 때였다.끼이익—.기름칠이 덜 된 경첩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틈새로 쏟아진 빛과 함께 나타난 인물은 뜻밖에도 너무나 평온한 모습의 이재현이었다.실크 소재의 짙은 감색 잠옷 차림을 한 그는, 방금 자다 깬 듯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입가에는 수면의 여운이 남은 듯한 나른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아니, 이 밤중에 무슨 실례입니까? 형사님들.”재현은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조찬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당황하거나 겁먹은 기색은커녕, 오히려 불청객을 맞이하는 집주인의 여유로운 짜증이 묻어났다.뒤편에 선 바다를 발견한 재현의 눈동자가 잠시 가늘어졌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42화. 일촉즉발재현은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진 하늘을 굽어보았다.방금 전의 폭발적인 광기는 어디로 갔는지, 그의 얼굴에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비탄이 서려 있었다.그는 느릿하게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하늘과 눈높이를 맞췄다..“그러게, 왜 자꾸 내 말을 안 들어, 누나.”재현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하늘의 붉게 부어오른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깃털을 만지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가해자의 손길이라기엔 지나치게 애틋해서 더 기괴한 온기였다.하늘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거북이처럼 어깨를 말아 쥐었다.그 사소한 거부의 몸짓에 재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왜 내가 옆에 있는데 다른 남자를 앉혀두고 웃어? 왜 그 팀장이라는 놈이랑 그렇게 길게 대화를 나눠. 사람 질투 나게.”그는 정말로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재현에게 있어 하늘의 외부 소통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정해진 궤도를 이탈한 행성처럼 보였다.그는 하늘의 턱끝을 들어 올려 억지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공포로 초점이 흐릿해진 하늘의 눈동자 속에 오직 자신만이 담기길 원하는 갈구였다.“나만 보기로 약속했잖아. 그날 우리 분명히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누나는 자꾸 약속을 안 지켜서 나를 이런 나쁜 놈으로 만들어? 나는 누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재현은 억울하다는 듯 웅얼거리며 하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그의 눈에 고였던 눈물 한 방울이 하늘의 뺨 위로 툭 떨어졌다.가해자의 눈물이 피해자의 얼굴 위에서 번지는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그는 나직하게 결론을 내렸다.“약속 안 지킨 누나가 나쁜 거야. 이건 다 누나가 자초한 거야, 알지?”그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다시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재현의 등 뒤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그림자는 거대한 손이 되어 바닥에 쓰러진 하늘을 완전히 집어삼킬 듯 덮쳐오고 있었다.“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