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
프롤로그.
‘짝—!’
고개가 돌아가는 속도보다 비릿한 통증이 먼저 뇌를 강타했다.
정점을 찍은 분노가 손바닥을 타고 재현의 뺨에 무겁게 박혔다.
고요하다 못해 서늘했던 실내에 파열음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흩어졌다.
“하늘아!”
뒤늦게 달려온 바다의 외침이 텅 빈 거실에 울려 퍼졌지만, 하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붉게 달아오른 재현의 얼굴을 쏘아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생경할 정도로 투명했다.
“내가 언제까지 네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놀아날 줄 알았어?”
하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얼음송곳처럼 예리하게 재현의 고막을 뚫고 들어갔다.
재현은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바로잡으며 하늘을 응시했다.
그가 아는 유하늘이 아니었다.
손끝만 스쳐도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그림자 뒤로 숨던 그 가련한 ‘내 여자’가 아니었다.
“누…나?”
“누나라고 부르지 마. 아니, 내 이름조차 네 입에 올리지 마. 그 불결한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거, 소름 끼치게 싫으니까.”
재현은 순간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자신이 견고하게 지어 올린 새장이, 단 한 번의 손짓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이 울타리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오만한 믿음이 발밑에서 산산조각 났다.
“네가 날 조종하려 들 때마다 눈치는 챘어. 그래도 그게 네 방식의 사랑이라 믿고 싶어서, 바보같이 널 믿어줬던 거야. 아니, 당해줬던 거지. 그랬더니 내가 여전히 네 손바닥 위에서 노는 광대로 보이니? 7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온 내가, 아직도 네 헛소리에 속아 넘어갈 그 어린 여자로 보여?”
하늘은 한 걸음 다가섰다.
재현이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뒤에는 차가운 벽뿐이었다.
공포의 주체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재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비굴한 눈빛은 찰나에 휘발되었고, 그 자리에 서늘한 본성이 올라왔다.
그는 붉게 부어오른 뺨을 혀로 밀어 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 많이 컸네, 유하늘.”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태도를 바꾼 재현의 눈에는 더 이상 애정도, 미련도 없었다.
오직 살기만이 감돌았다.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는데. 7년 전처럼 울고불고 매달려야 내가 좀 봐주지 않겠어?”
재현이 서서히 팔을 뻗어 하늘의 턱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하늘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곁에 서 있던 동혁이 그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새장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수고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하늘을 전율하게 했다.
하늘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재현의 가슴팍을 세차게 밀쳐냈다.
제법 힘이 실린 일격에 재현이 중심을 잃고 현관 밖 복도로 밀려났다.
철컥,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나기 직전, 하늘은 문틈 사이로 차갑게 얼어붙은 일갈을 내뱉었다.
“다신 찾아오지 마. 한 번만 더 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땐 바로 경찰서로 처넣을 거니까.”
재현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고 믿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지나치게 서늘했다.
하늘은 그런 재현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 내가 많이 큰 게 아니라, 내가 원래 너보다 컸어. 이 장유유서도 모르는 무식한 자식아.”
누나라는 지위를 이용해 가스라이팅을 일삼던 재현에게 던지는, 가장 원색적이고도 통쾌한 일침이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같이 쌓아 올린 공포의 벽이 무색할 만큼 조소 섞인 말투였다.
‘쾅—!’
문이 닫혔다.
두꺼운 문 너머로 재현의 비릿한 체취가 차단되자, 하늘은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졌던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등 뒤로 차가운 문을 기대고 선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거대한 숙제를 끝낸 뒤에 찾아오는 기분 좋은 전율이었다.
거실에 서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바다는 굳어버린 채 동생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남자의 그림자만 봐도 숨을 헐떡이던 하늘이 아니었다.
“하늘아… 너 괜찮아?”
바다의 떨리는 물음에 하늘은 깊은숨을 한 번 내뱉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는 더 이상 패배자의 흔적이 없었다.
“응, 오빠. 이제 진짜 괜찮아.”
실내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는 현관문 너머 복도에 홀로 남겨진 재현의 고막을 잔인하게 긁어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세상의 전부였어야 할 여자가, 이제는 다른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늘 씨.”
문틈 너머로 들려오는 구동혁의 음성은 낮고 단단했다.
그 안에는 재현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상대를 온전히 존중하는 자의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
하늘은 그 다정한 부름에 화답하듯, 떨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요. 저한텐 오빠도 있고, 그리고… 동혁 씨도 있잖아요.”
‘동혁 씨.’
재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다정한 호칭이, 생면부지의 남자에게는 저토록 쉽게 건네지고 있었다.
재현이 공들여 쌓아온 고립의 성벽이 타인들의 온기에 의해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나는 왜 빼?”
이때 시은이 서운하다는 듯 장난스레 끼어들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아이, 당연히 언니도 있지. 언닌 이미 내 가족인걸.”
하늘의 웃음 섞인 대꾸에 이어 실내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 평화로운 소음들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재현에게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박혔다.
재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황과 수치심으로 얼룩졌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비릿한 분노로 일그러졌다.
자신이 부여한 공포 없이는 숨도 못 쉬어야 할 존재가, 감히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가족’과 ‘연인’을 논하고 있었다.
재현은 문손잡이를 부서져라 움켜쥐려다 멈췄다.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그의 심장 밑바닥에서는 검은 타르 같은 증오가 차올랐다.
‘가족? 동혁 씨? 웃기지 마. 네가 돌아갈 곳은 결국 내 발밑이야, 유하늘.’
재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았다.
센서 등이 꺼진 어두운 복도,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비참함이 분노로 치환된 자리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독버섯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80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시은은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진 바다의 어깨를 가까스로 짊어졌다.포장마차를 나와 택시를 잡고, 그의 방 침대에 눕히기까지 몇 번이나 중심이 흔들렸는지 모른다.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이불도 덮지 못한 채 얕은 숨을 몰아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은은 이마에 맺힌 땀을 거칠게 훔쳐냈다.방 안에는 거칠게 널뛰던 남자의 죄책감이 잔흔처럼 흩어져 있었다.술 냄새와 함께 가라앉은 정적을 응시하던 시은은 바지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화면의 푸르스름한 불빛이 그녀의 굳은 얼굴을 비추었다.연락처 목록을 거슬러 올라가 ‘유하늘’ 세 글자를 찾아 누르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 시각, 동혁의 집 침대에 누워 있던 하늘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 거실 소파에서 나누었던 뜨거웠던 숨결과, 동혁이 남긴 호칭 숙제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던 참이었다.‘동혁 씨…….’입안으로 조용히 굴려본 이름이 낯간지러워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는데, 베개 옆에 두었던 휴대전화가 짧고 강한 진동을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시은이었다.오빠의 곁에서 제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온 언니.하늘은 가슴팍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통화 버튼을 밀었다.“여보세요.”최대한 덤덤하게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미세한 물기가 섞여 나왔다.수화기 너머로 잠시 거친 숨을 고르는 시은의 음성이 들려왔다.“어, 하늘아. 자고 있었어?”“아니. 무슨 일 있어?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하늘이 침대 위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시은이 제 오빠인 바다와 함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시은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해 봤어.”“…….”“괜찮니?”단순한 안부치고는 지나치게 묵직한 질문이었다.그 짧은 음절 안에 부모의 죽음과 오빠의 기만을 다 알아버린 하늘을 향한 염려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하늘은 이불자락을 쥔 손가락에 힘
79화. 죄인의 무게“글쎄요. 기회를 잡는 거라고 해두죠, 팀장님.”하늘이 일부러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며 생긋 웃었다.그 미소가 채 완성되기도 전이었다. 동혁은 하늘의 가느다란 허리를 힘껏 감싸안아 제 무릎 위로 완전히 당겨 앉혔다.단숨에 시야가 뒤바뀌며 동혁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자 하늘의 입술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동혁은 단 한 순간의 틈도 주지 않고 하늘의 목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며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조금 전의 서툰 입맞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맹렬한 돌진이었다.하늘의 얄미운 도발을 벌하기라도 하듯, 동혁은 거칠고 밀도 높게 그녀의 입술을 헤집었다.숨이 가빠진 하늘이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손을 올렸지만, 동혁은 도망칠 길을 전면 차단한 채 그녀의 작은 몸을 제 품 안으로 더욱 깊숙이 구속했다.거실을 채우던 잔잔한 TV 소리는 이미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조명 아래, 서로의 타는 듯한 숨결을 거칠게 나누는 두 사람의 실루엣만이 정적 속에서 짙은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포장마차의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투명한 소주가 가득 채워졌다.허름한 형광등 불빛이 잔술의 표면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바다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 작은 소주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안주 하나 집어 들지 않은 손가락 마디가 허옇게 질려 있었다.툭, 잔 위로 무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며 잔잔하던 술 표면에 파문을 일으켰다.“나는…… 부모를 죽인 살인자야.”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소음 가득한 가게 안으로 스며들었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은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야! 유바다!”시은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탁,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주변 테이블의 시선이 잠시 쏠렸지만, 바다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 눈물이 섞인 투명한 술잔에 고정되어 있었다.“사실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도 무서웠어. 그래서 하늘이를 살린 것에 대한 책임감에 더 미친 듯
78화. 첫 입맞춤동혁은 찌른 손가락이 무색할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뻔뻔하게 응수했다.그의 굵직한 음성에 묻어나는 웃음기가 하늘의 정수리 위로 부드럽게 쏟아졌다.하늘은 고개를 살짝 돌려 동혁의 단단한 턱끝을 올려다보았다.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푸른 불빛이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의 음영을 깊게 만들어주고 있었다.장난을 걸고는 있지만, 자신을 품에 안은 그의 품은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완강하고 아늑했다.그 완고한 온기가 하늘의 긴장감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켰다.온 세상이 나를 속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숨도 쉬지 못했던 몇 시간 전이 아득한 전생처럼 느껴질 만큼, 이 사소하고 유치한 실랑이가 그녀를 단단하게 현실로 붙들어 매고 있었다.“치사한 팀장님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면 더 신사적으로 굴 생각도 있습니다만.”동혁이 하늘의 어깨를 제 품 쪽으로 조금 더 밀착시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얕은 숨결에 하늘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웅크렸다.“……생각해 볼게요. 그러니까 당장 대답 안 하셔도 째려보지 마세요.”“째려본 적 없습니다. 기회를 주는 거지.”동혁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하늘은 기어이 참았던 자그마한 웃음을 터뜨렸다.지독한 슬픔의 밑바닥에서 자신을 건져 올려 마침내 소리 내어 웃게 만드는 남자.하늘은 동혁의 품에 등을 완전히 기대며, 그가 쥔 제 손가락 마디마디에 슬며시 힘을 주어 맞잡았다.호칭을 두고 투덜거리던 하늘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거실에는 다시금 영화의 잔잔한 배경음악만이 낮게 깔렸다.동혁의 품에 기대어 있던 하늘의 등 뒤로, 그의 심장 박동이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르고 묵직하게 울리는 것이 전해졌다.묘하게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감지한 하늘이 침을 삼키는 순간, 정수리 위로 동혁의 가라앉은 음성이 쏟아졌다.“……하늘 씨.”“네.”하늘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짐짓 장난기를 머금고 있던 동혁의 눈동자는 어느새 깊고 어두운 심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77화. 호칭“예?”“저는 회사에서 하늘 씨의 오빠인 유바다 씨의 팀장인 걸로 아는데. 여기선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동혁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짓궂게 속삭였다.갑작스러운 호칭 지적에 당황한 하늘은 자기도 모르게 동혁의 가슴팍에서 몸을 바짝 떼어냈다.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는 하늘의 뺨에는 채 마르지 않은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울다 지쳐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환기해 주려는 그의 속 깊은 배려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훅 치고 들어오는 연인으로서의 압박감에 가슴이 다시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동혁은 여전히 소파 뒤로 등을 기댄 채,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 그럼…… 뭐라고 불러요?”하늘이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제 손가락 끝만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렸다.조금 전 “사랑해요”라고 먼저 고백할 때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팀장님’ 세 글자가 아닌 다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목덜미가 화끈거렸다.“글쎄요. 연인 사이에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뭐가 있더라.”동혁이 턱을 괴며 짐짓 고민하는 척을 했다.스크린의 엷은 푸른 불빛이 그의 날렵한 턱선과 장난기가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비추었다.“오빠라고 부르기엔 바다 씨가 먼저 선점한 직함이라 하늘 씨가 헷갈릴 것 같고. 그렇다고 여기서까지 팀장님 소리를 듣자니 꼭 연장 근무를 하는 기분이라서 말이죠.”그의 능청스러운 투정에 하늘의 입가에서 기어이 자그마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슬픔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여자를 이토록 순식간에 끌어올려 웃게 만드는 것은, 오직 구동혁이라는 남자만이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었다.“가, 갑자기 이름 부르기엔 너무 어색해요.”하늘은 제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만 애꿎게 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구동혁이라는 남자가 가진 무게감과, 회사에서 항상 ‘팀장님’이라 부르며 굳어진 언어의 습관은 생각보다 단단했다.이제 와서 면전에 대고 “동혁 씨”라고 부르는 상상만 해도 온몸의 솜털이
76화. 언제까지 팀장님입니까?하늘은 제 손가락 사이사이를 촘촘하게 파고든 동혁의 커다란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가볍게 쥔 손이 아니었다.도망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마디마디마다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어지럽게 널뛰던 영화 속 배경음악이 아득한 귓전으로 밀려났다.지금, 이 거실에서 숨이 막힐 만큼 선명한 것은 오직 손끝을 타고 끊임없이 번져오는 남자의 강인한 체온뿐이었다.“……팀장님.”“영화에 집중 안 합니까.”동혁은 시선을 여전히 정면 화면에 고정한 채 나직하게 대꾸했다.겉으로는 평소처럼 무덤덤해 보였지만, 하늘의 손을 쥔 손등 위로 푸르게 돋아난 핏줄이 그의 속내 역시 아주 평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하늘은 힘을 주어 꼼지락거리던 발끝을 슬며시 내렸다.억지로 밀어내거나 뺄 생각은 애초에 들지도 않았다.오히려 그가 잡아 주는 완강한 압박감이, 맥없이 바닥으로 꺼지려던 하늘의 위태로운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주는 닻처럼 느껴졌다.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하늘이,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제 손을 꽉 맞잡은 그의 체온이 여전히 단단한 구원처럼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온전한 공간을 침범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하늘은 붉어진 눈가를 감추려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직하게 입을 뗐다.“죄송하지만…… 며칠만 더 신세 져도 될까요?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돼서요.”오빠의 집으로 돌아가 뒤엉킨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아직은 아주 조금 부족했다.동혁은 그런 하늘의 위태로운 망설임을 대번에 읽어내렸다.그는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오히려 당연한 명제를 증명하듯 무덤덤하면서도 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물론이죠. 하늘 씨가 있고 싶은 만큼 있으셔도 됩니다. 얼마든지.”“감사해요…….”“연인이 함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죠.”또다시 툭 던져지는 ‘연인’이라는 단어가 하늘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간질였다.구동혁이라는 남자가 새로이 지어 올린 울타리는 이토록 가차 없고 따스했다.남자의 겉치레
75화. 몸 따로 마음 따로불을 끄고 정성스레 끓여진 죽을 그릇에 옮겨 담는 하늘의 손길은 이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숟가락을 들어 뜨거운 죽을 한 입 입에 넣었다.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고소하고 슴슴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텅 비어 있던 속을 따뜻하게 채웠다.억지로 넘기는 불쾌한 식사가 아니었다.그것은 살기 위한, 그리고 마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발버둥이었다.‘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열세 살의 유바다가 감당해야 했을 부모의 무책임과 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밤새 약병을 바꾸며 떨었을 그의 절박함.그리고 그 끔찍한 진실을 혼자 짊어진 채 매일 밤 악몽을 꾸었을 오빠의 나날들.그것은 분명 자신을 향한 지독한 사랑이자 헌신이었다.하지만 가슴은 그 숭고한 의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어?’오빠를 만나면 고맙다고 울어야 할지, 왜 나를 속였느냐고 뺨이라도 때려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이 처참한 균열을 안은 채 앞으로 바다를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 할지, 그 앞에 서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다.하늘은 턱을 무릎 위에 얹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의 기만은 잔인했고, 오빠의 헌신은 눈물겨웠다.***‘띡, 띡, 띡, 띠리릭.’현관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제 무릎을 안 가슴팍으로 끌어당기고 있던 하늘의 귀가 쫑긋 들렸다.방 안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이내 안방 문틀 너머로 서서히 다가오는 묵직한 발소리를 들었다.“하늘 씨.”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들어선 동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하루 종일 바깥의 건조한 대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온 남자의 어깨엔 얇은 피로가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의 시선만큼은 방 안의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아, 팀장님. 오셨어요.”하늘은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목소리엔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