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6화. 조금씩 만들어지는 새장
재현은 익숙한 솜씨로 핸들을 돌려 번화가 한복판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누나, 내가 진짜 괜찮은 디저트 맛집 알아냈거든. 사진 보자마자 누나랑 꼭 와야겠다 싶더라고. 누나가 좋아할 만한 게 너무 많아.”
재현의 목소리는 여느 평범한 연인들처럼 들떴지만, 조수석의 하늘은 자꾸만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이 시각에는 실습 이론 수업이 한창일 터였다.“근데 재현아, 나 이렇게 수업 빠지면 안 돼. 이번엔 꼭 합격해서 자격증 따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하늘의 조심스러운 항변에 재현이 신호 대기 중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해사하던 얼굴에 미묘한 그늘이 졌다.
그는 마치 상처받은 아이 같은 눈을 하고 낮게 읊조렸다.
“누난 나랑 있는 게 싫어?”
“……그런 뜻이 아니라.”
“난 누나 보고 싶어서 밤새 한잠도 못 자고 달려온 건데. 누나는 자격증 공부가 나보다 더 중요한가 봐.”
말투는 앙탈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이토록 원한다는 사실, 맛있는 걸 보고 자신을 떠올렸다는 그 고백 앞에서 하늘은 무너졌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를 냉정하게 밀어낼 줄 모르는 성정이었다.
미움받을까 봐, 혹은 이 다정한 관심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워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는 성격.
자기 자신도 답답하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었다.
하늘은 차라리 이 상황을 긍정하기로 했다.
바다와 시은 외에 타인이 자신을 이토록 열렬히 좋아해 주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저 고맙고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어느새 도착한 카페는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재현은 익숙하게 창가 명당 자리를 골라 하늘을 의자에 앉혔다.
“누나,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누나가 좋아할 만한 거로만 싹 골라 올게.”
“응, 고마워.”
하늘은 재현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놓인 달콤한 연애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
간혹 느껴지는 이질감조차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덮어버렸다.
결핍된 애정 속에서 자란 하늘에게, 통제와 사랑을 구분하는 일은 너무나 가혹한 숙제였다.
***
한편, 휴무를 맞아 친구들과 근처를 지나던 시은은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통유리 너머,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
하늘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다가가려던 시은의 발걸음이 급정거하듯 멈췄다.
한 남자가 화려한 디저트 접시를 양손에 가득 들고 해맑게 웃으며 하늘의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시은의 머릿속에 이성적인 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잠깐, 지금 시간이면 하늘이 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자격증 시험이 코앞이라며 그렇게 성실하게 다니던 학원이었다.
그런 하늘이 수업까지 빼먹고 번화가 한복판에서 남자와 디저트를 먹고 있다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 그리고 하늘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낚아채며 웃는 남자의 손길까지.
“시은아, 안 오고 뭐 해?”
뒤처진 시은을 친구들이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은은 홀린 듯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 위로 주저 없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바다]
신호음이 울리는 짧은 순간, 시은은 유리창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가 위태로운 그 모습 위로 바다의 얼굴이 겹쳤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툭 끊겼다.
곧바로 액정 위에 익숙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메시지 남겨 주세요.]
시은은 짧게 혀를 찼다.
복학 준비로 전공 서적과 씨름하고 있을 바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창밖의 두 사람을 시선에 고정한 채 타자를 쳤다.
[바다야, 너 동생 연애하는 거 알고 있었어? 나 지금 번화가 디저트 카페인데, 하늘이가 웬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봤거든.]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손바닥에 짧은 진동이 전해졌다.
바다의 답장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카페라고?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은 들었어.]
바다 특유의 덤덤한 말투였지만,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 하나에서 미세한 균열이 느껴졌다.
시은은 카페 유리창 너머로 재현이 하늘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정한 연인의 몸짓이었으나, 하늘의 어깨는 여전히 경직된 채였다.
[어떡할까? 내가 가서 아는 척이라도 할까? 얼굴은 사람 좋아 보이는데, 학원까지 빼먹게 만든 게 영 마음에 안 들어서.]
시은은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감각이 경고등을 울리고 있었다.
저 남자의 웃음은 지나치게 매끄러웠고, 그 뒤에 숨겨진 서늘함은 오후의 햇살 아래서도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바다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 넌 그냥 네 일 봐. 일단 지켜보자.]
바다의 단호한 거절에 시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하늘아,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여기 있어?"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바다가 긋는 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
[알았어. 이따 저녁에 집에서 둘이 얘기 잘해 봐.]
시은은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친구들이 멀리서 다시 그녀를 불렀다.
시은은 다시 한번 카페 안을 돌아보았다.
재현은 어느새 하늘의 손목을 자연스럽게 쥐고 있었고, 하늘은 그 손길이 익숙한 듯 저항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기묘한 풍경을 등진 채 시은은 빠른 걸음으로 친구들을 향해 걸어갔다.
***
재현은 공들여 골라 온 조각 케이크를 정성스럽게 갈라 하늘의 입가로 밀어 넣었다.
달콤한 크림이 입술에 닿는 감각과 함께, 기분 좋게 휘어지는 재현의 눈매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어때? 맛있지.”
“응. 진짜 맛있다. 넌 이런 데를 어떻게 다 찾아내?”
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재현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누나 주려고 밤새 검색했지. 좋아할 것 같아서.”
“고마워, 재현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하는 일인데, 당연한 거 아냐?”
사랑하는 사람.
그 간지러운 단어가 고막을 타고 넘어와 심장 부근을 간질였다.
재현의 집요한 시선도, 가끔 숨이 막힐 만큼 몰아붙이던 연락들도 그 단어 하나면 마법처럼 함축되었다.
사랑하니까.
나를 너무 아껴서 그러는 거니까.
하늘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이 압도적인 다정함이 가짜일 리 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근데 나, 아까 학원 빠진 게 계속 마음에 걸려. 자격증 따야 하거든. 이제 곧 아르바이트도 가야 하고.”
하늘이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내자, 재현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겨우 하루인데 뭐. 알았어, 이제 안 그럴게. 됐지?”
“응. '꼭'이야?”
“약속. 나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걸고 흔드는 재현의 모습은 영락없는 스무 살 소년이었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재현은 화제를 돌리듯 자연스럽게 하늘의 손등을 덮어 눌렀다.
“근데 누나. 그 피시방 아르바이트, 꼭 계속해야 해? 내가 저번에 말한 대로하면 안 될까?”
“안 돼, 재현아. 그건 저번에도 말했잖아.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돈 문제로 빚지고 싶지 않아.”
하늘의 단호한 태도에 재현의 눈빛이 찰나의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서운함으로 포장되었다.
그는 잡고 있던 하늘의 손을 끌어당겨 제 뺨에 비벼댔다.
“누나, 빚이라니. 말이 너무 서운하다. 난 돌려받을 생각 추호도 없어.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래. 내 마음 같아서는 그냥 좋은 집 하나 얻어서 우리 둘만 함께 살고 싶을 정도라고.”
우리 둘만 함께.
그 말은 달콤한 제안인 동시에 지독한 고립을 예고하는 선언 같았다.
하늘은 재현의 눈에 어린 집요함을 읽어내지 못한 채, 그저 과한 애정 공세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 받을게. 아직은 내 힘으로 해보고 싶어.”
재현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하늘의 손목을 조금 더 세게 쥐었을 뿐이다.
하늘의 손목을 쥔 재현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아주 미묘한 변화였다.
“……아파.”
하늘이 작게 중얼거리자, 재현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해, 누나. 내가 또 힘 조절을 못 했네.”
그는 곧바로 손을 풀어주며 미안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손목에서 손등으로, 다시 손가락 사이로.
“근데 누나.”
재현이 낮게 웃었다.
“아까 그거.”
“……응?”
“학원 빠진 거.”
순간, 하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재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앞으로도 가끔은 이렇게 나랑 놀아줄 거지?”
부드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손을 쥐고 있는 힘은 전혀 부탁이 아니었다.
하늘은 잠깐 망설였다.
아주 잠깐.
“…응. 가끔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재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하늘의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다 댔다.
가볍게, 스치듯.
“역시 우리 누나야.”
속삭이듯 이어진 말.
“말 잘 듣네.”
그 순간 하늘의 휴대전화가 테이블 위에서 짧게 울렸다.
[바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
그리고, 그걸 먼저 본 건 하늘이 아니라 재현이었다.
재현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휴대전화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향해 올라왔다.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누나.”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전화, 받아야 해?”
재현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하늘의 휴대전화를 덮어 누르는 그의 손길은 지독히도 무거웠다.
액정 너머로 '바다'라는 이름이 명멸할 때마다 재현의 눈동자 속에는 기이한 유열이 스쳤다.
그는 하늘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비어 있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끝을 부드럽게 치켜올렸다.
“우리 지금 되게 행복하잖아. 이 분위기, 깨고 싶지 않은데. 그치?”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신호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89화. 다시 다가오는 어둠단어의 매끄러운 이음새가 부끄러움에 툭툭 끊어져 나갔다.생전 처음 제 입으로 뱉어본 낯선 호칭이 혀끝을 스치자마자, 하늘은 제풀에 민망해져 칼을 쥔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귀 끝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그 작은 읊조림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혁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남자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일렁였다.제 고집으로 밀어붙인 결과물이었음에도, 막상 하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두 글자가 주는 파괴력은 동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뚝딱거리는 연인의 목소리가 이토록 가슴 깊은 곳을 난도질하듯 간지럽힐 줄은 몰랐다.동혁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밀려오는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직하게 실소를 흘렸다.입매가 걷잡을 수 없이 호선을 그리며 무너져 내렸다.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렸다.“……한 번 더 들어보려다가 내가 먼저 녹을 것 같네.”동혁이 패배를 인정하듯 낮게 읊조리며, 얼굴을 드러낸 하늘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툭 기댔다.가까워진 거리 사이로 서로의 가쁜 숨결이 엉겨 붙었다.하늘은 제 손목을 쥔 동혁의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놀리던 장본인 역시 전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이제 만족했어요? 정말 부끄러워 죽겠어.”하늘의 앙탈 같은 부끄러움에 동혁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단단하던 그의 가슴팍이 부드럽게 들썩이며 낮고 묵직한 웃음소리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사내에서는 결재 서류의 오타 하나도 용납하지 않던 구 팀장의 서슬 퍼런 이성이, 고작 여자의 수줍은 투정 한 자락에 이토록 무력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동혁은 얼굴을 감싸 쥔 하늘의 가냘픈 손목을 살며시 쥐어 아래로 내려놓았다.“그렇게 부끄러워할 거면서 대답은 또 어떻게 참고 했습니까.”동혁이 하늘의 붉어진 뺨을 제 손가락 등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서늘한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하늘은 으스스 몸을 떨며
88화. 자기야 2동혁은 이제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을 쉬듯, ‘자기’라는 낯선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 물었다.동혁의 단단한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낀 채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기는 하늘의 뺨 위로 한층 더 진한 홍조가 번져나갔다.숨길 수 없는 열기가 귀 끝을 지나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자기라니. 진짜 낯간지럽게 무슨…….’하늘은 애써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하지만 그런 새침한 생각과 달리, 얄미울 정도로 뻔뻔한 남자의 다정함이 가슴 밑바닥을 간지럽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돌려세운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한 호선이 맑게 피어올랐다.마침내 제 나이에 걸맞은 소박하고도 완전한 행복이 걸린 순간이었다.동혁은 제 팔뚝에 닿는 하늘의 미세한 떨림과,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는 옆얼굴을 놓치지 않았다.장난스럽게 던진 애칭이었지만, 그것이 하늘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억을 지워내고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는 것은 꽤 짜릿한 일이었다.동혁은 카트를 쥔 손에 슬며시 힘을 주며, 하늘이 걷기 편하도록 제 보폭을 한 번 더 고쳐 잡았다.***조리대 위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짙게 베어났다.마트에서 사 온 재료들이 알록달록하게 그릇을 채우고 있었고,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큼직한 손으로 김발을 쥐고 제법 진지한 미간을 한 채 김밥을 단단하게 말아내는 것은 동혁의 몫이었다.하늘은 동혁이 흐트러짐 없이 잘 말아둔 김밥을 도마 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예쁘게 썰어 하얀 접시에 차곡차곡 담아냈다.서툴지만 제법 합이 맞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일상의 한 페이지였다.하늘은 칼끝에 묻은 참기름을 쓱 닦아내며, 예쁘게 썰고 남은 못생긴 김밥 꼬투리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속 재료가 삐죽이 튀어나와 가장 간이 잘 밴 놈이었다.하늘은 그것을 동혁의 입가로 쑥 내밀며 장난스레 속삭였다.“원래 김밥은 이 끝부분이 제일
87화. 자기야동혁의 깔끔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한마디에 하늘이 입을 벌린 채 뱉으려던 유구한 변명들이 공중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당황한 하늘이 동혁의 옆구리를 손가락 끝으로 콕 찌르는지도 모른 채, 동혁은 아주 자연스러운 얼굴로 아주머니가 건넨 햄 조각을 받아 하늘의 입가에 동혁은 이쑤시개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햄 조각을 하늘의 입술 근처로 슬며시 가져다 댔다.아주머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자기야. 한 입 먹어봐.”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노골적인 애칭에 하늘의 사고회로가 순간 정지했다.깜짝 놀란 하늘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동혁을 향했다.‘자기’라는 단어가 이토록 매끄럽게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정작 동혁은 당황한 하늘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히 태연했다.오히려 기회가 왔다는 듯 짐짓 다정한 눈빛을 가장하며,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입 크기의 햄을 쏙 집어넣었다.짭조름하고 고소한 기름진 맛이 입안에 퍼지는 동안에도 하늘은 씹는 것조차 잊은 채 붉어진 얼굴로 그를 째려보았다.“어때? 맛있어?”반말과 존댓말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동혁의 나직한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시식 코너 아주머니는 눈앞의 젊은 부부가 부려대는 닭살 돋는 애정 행각이 그저 흐뭇한지 껄껄 웃으며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하늘은 쏟아지는 민망함을 삼키려 서둘러 우물우물 햄을 씹었다.아주머니 앞에서 대놓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순순히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이었다.“네, 네…… 맛있네요.”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하늘의 귀 끝이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남자의 완벽한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진 짓궂은 장난기에 완전히 말려든 꼴이었다.동혁은 귀여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얌전히 햄을 받아먹는 하늘의 부리 같은 입술을 보며 속으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색시 입맛에 맞다니 신랑이 사줘. 이 햄을 팬에서 달달 볶듯이,
86화. 햄 볶듯이 행복하게툭,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하늘은 눈을 번쩍 떴다.암막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정신이 맑아지기도 전에 가슴을 옥죄어오는 압박감이 먼저 찾아왔다.오늘 토요일, 사람 많은 대형 마트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출발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건만, 사방이 카트와 낯선 타인들로 가득 찬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치끝이 찌릿하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숨이 조금씩 가빠지자, 하늘은 본능적으로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받아온 하얀 약 봉투가 손끝에 걸렸다.정제되지 않은 불안을 가라앉혀 줄 신경안정제.하늘은 약봉지 하나를 뜯어 손에 쥔 채 서둘러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온기 없는 방 안에 혼자 갇혀 있다가는 불안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거실로 나오자 옅은 커피 향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동혁이 고개를 돌렸다.단정하게 정돈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요동치던 심장 소리가 신기하게도 아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일어났어요?”동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부드럽게 깼다.하늘은 제 손에 쥔 약봉지를 슬그머니 손바닥 안으로 감추며 메마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네……. 일찍 일어나셨나 봐요.”“평소 습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휴일인데도 눈이 번쩍 떠지더군요.”동혁이 소리 내어 가볍게 웃었다.무장해제 된 편안한 웃음이었다.하늘은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려던 하늘은 식탁 위를 보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하얀 식탁보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상.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몽글몽글한 스크램블 에그가 노란 주스 잔과 함께 예쁘게 놓여 있었다.하늘이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다 동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천천히 다가왔다.“장 보러 가기 전에, 속을 좀 채우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부지런하셔라…….”하늘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어버렸다.남자의
85화. 즐거운 주말“팀장님…….”‘쪽.’갑자기 거리를 좁혀온 동혁의 입술이 하늘의 달아오른 입술 위로 짧고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서늘한 향수 냄새와 함께 뜨거운 온기가 부딪쳤다.“팀장님 금지라고 했을 텐데요.”동혁이 하늘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사내에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오직 제 연인 앞에서만 무장해제 되는 어여쁜 웃음이었다.남자가 이토록 예쁘게 웃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의 호선 그린 입매가 저녁 조명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바, 밥 먹다 말고 진짜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밥이나 먹어요.”하늘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려 허둥지둥 숟가락을 쥐고 국물을 크게 떠 넣었다.뜨거운 국물 때문인지, 방금 전의 입맞춤 때문인지 두 뺨이 새빨간 장미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귀 끝까지 붉어진 채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하늘을 보며, 동혁은 흐뭇한 눈길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토요일에 같이 장 보러 가요.”동혁이 물컵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못을 박았다.단순히 흘러가는 말이 아닌, 주말의 일정을 확실하게 고정해 두겠다는 다정한 통보였다.세상 밖으로 나가 적응하겠다던 하늘의 조금 전 결심을, 그는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고 곧장 현실의 계획으로 실행에 옮겨준 것이다.“네!”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활기차게 대답했다.붉게 물들었던 두 뺨에는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만큼은 주방의 정적을 단숨에 깨뜨릴 정도로 싱그럽고 청량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일부러 숟가락으로 밥알을 꾹꾹 누르며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냈다.오빠라는 거대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첫걸음이 구동혁이라는 남자와 함께라는 사실이, 두려움보다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동혁은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한 하늘의 정수리를 보며 가볍게 콧노래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저렇게까지 정직하게 반응해 주니, 앞으로 다가올 주말이 벌써 길게 느
84화.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프러포즈어둠이 밀려든 거실에는 낮게 맞물리는 숨소리와 옷가지가 스치는 서글픈 마찰음만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동혁의 입술은 하늘의 도발을 집어삼키듯 집요했고,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손길에는 빈틈이 없었다.밀어낼 생각도 없으면서 동혁의 단단한 어깨를 유영하듯 쥐고 있던 하늘의 손가락 끝이 점차 잘게 떨려왔다.얼마나 숨을 나눴을까.입술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노골적으로 얽혔다.하늘은 붉게 달아오른 숨을 몰아쉬며, 제 목덜미를 받치고 있는 동혁의 손등 위로 뺨을 살며시 기댔다.“……반응이 너무 정직하신 거 아니에요?”하늘이 자극적인 장난기를 거두고 조금은 물기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동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하늘의 젖은 입술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의 시선은 하늘의 얼굴을 지나 거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종이 쇼핑백으로 향했다.유바다가 밤새 피를 말려가며 개어놓았을 동생의 흔적들.동혁은 그것이 하늘에게 줄 안도감과 슬픔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정직하지 않으면 잡아두질 못하니까.”동혁이 하늘의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밀착했던 몸을 한 걸음 물리 시켰다.남자의 품이 떨어져 나가자 차가운 거실 공기가 그새를 메웠다.동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은 먹었습니까.”“아직요. 팀장님 기다리느라.”“구동혁입니다.”동혁이 냉장고 문을 열며 낮게 정정했다.“집에서까지 그 딱딱한 직함으로 불리고 싶진 않군요. 입을 맞추고 싶을 때 부르는 치트키라면서, 방금은 도발치고 너무 진지했습니다.”하늘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냉철하기로 소문난 남자가 제 호칭 하나에 이토록 예민하게 구는 모양새가 제법 비현실적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하늘은 소파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조리대 위에 늘어놓는 동혁의 등판을 가만히 응시했다.완벽하게 재단된 와이셔츠 위로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