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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화

Author: 유애
저녁에 명원제가 건곤전에 문안하러 왔다. 그는 태상황의 상태가 전보다 호전된 것을 확인 한 후 돌아갔다. 원경릉은 명원제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줄곧 한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명원제가 자리를 떠난 후, 상선은 늘 그래왔듯 자기 전 태상황의 몸을 정성스레 닦았고, 원경릉은 외전으로 자리를 피했다.

이 틈을 타 그녀는 자신에게 주사를 놓았다. 상처가 난지 꽤 되었기도 하고 계속해서 자극이 있었던지라 고름이 잡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 주사를 놓은 후, 그녀가 잠시 엎드려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녀의 목구멍에서는 비릿한 맛이 느껴졌으며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나무 아래에 피를 토하고는 나무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기위해 애썼다.

“왕비님, 왜그러십니까?” 등뒤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손을 저으며 “체한 것 같습니다. 별일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상선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원경릉은 ‘왜 피를 토한거지’ 하는 의구심을 꾹 참고 궁으로 돌아갔다. 침상에 반쯤 걸터 앉은 태상황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이었다.“태상황님,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원경릉이 말했다.

태상황은 팔을 걷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인이 상전을 내보냈으니, 너는 네 일에만 집중하거라.”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태상황의 심장박동과 호흡을 확인해보았다. 호흡이 약간 불안정했다. 원경릉은 도파민을 꺼내 링거를 놓았다. 그녀는 설저환 한 병을 꺼내 태상황에게 주면서 “이 약은 응급시에 드셔야 합니다. 가슴이 아프거나 숨이 막히면 혀 아래에 넣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태상황은 손을 내밀어 설저환을 한움큼 받았다. 잠시 후, 원경릉이 한손에 각양각색의 약을 한움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물을 가지고 왔다. 태상황은 조금 짜증나는 목소리로 “이게 다 뭐야?”라고 말했다.

“다 드셔야 할 약입니다.”원경릉이 약을 내밀었다. “안 먹는다!”태상황은 약의 색깔을 보고 거부감이 들었다. “반드시 드셔야 합니다.” 원경릉이 단호한 어투로 태상황에게 말했다. “이걸 드셔야 좋아지십니다. 이 약들은 쓰지도 않습니다.”

태상황은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원경릉을 보았다. “귀찮다!”라고 말하면서도 몇알을 집어 입에 넣자 원경릉이 물을 가져다 주었다. 태상황은 입에 들어온 약들을 씹기 시작했다. 한순간 그의 얼굴이 소금덩어리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씹지 말고 삼키십시오!” 원경릉이 급히 물 잔을 내밀었다. 어찌 약을 씹어 삼킬 생각을 하지? 설마 이런 약들이 궁에는 없었나?

물 한잔을 다 마시고 나서야 입안에 쓴 맛이 사라졌다. 태상황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회복하기만 하면, 널 가만 안둘 것이야.” 원경릉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태상황의 저런말을 듣고 웃음이 나온다니 자신의 간이 배밖으로 나온건 아닌가 생각했다.

태상황은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중얼중얼 몇마디를 덧붙이고는 천천히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원경릉은 베개를 들어 그가 누울 수 있게 도왔다.

링거를 다 맞는데 한시간 정도가 걸렸을까 원경릉이 바늘과 링거 병을 정리하자마자 상선이 어의를 데리고 들어왔다. 상선은 원경릉에게 “태상황께서 잠이 드셨으니, 왕비는 외전에서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오시지요.” 라고 말했다. 원경릉은 몹시 지친 상태였고, 태상황의 상태를 보니 오늘 밤은 별일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원경릉은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잠이 깬 그녀는 조심스레 건곤전 안을 살폈다. 상선은 땅바닥에 앉아서 졸고 있었고, 태상황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다시 외전으로 돌아온 그녀는 눈을 비비며 약을 한알 삼키고 다시 잠에 들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그녀는 심한 통증에 잠에서 깨었다. 피를 토하고 오장육부가 당기는 듯한 통증이 계속 되었다. 그녀는 소염제 몇 알을 되는대로 삼키고 통증이 완화되자마자 내전으로 들어갔다. 잠에서 깬 상선은 밖에 있는 궁인에게 따듯한 물을 길러오라고 하며, 길러오는 김에 원경릉이 쓸 물도 길러오라고 하였다. 원경릉은 궁인이 길러온 물로 세수를 하였다.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난 태상황을 상선이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낡이 밝자 태후가 문안을 하러 왔다. 원경릉은 자신의 양 볼을 치며 정신을 차리기위해 애썼다. 태후의 청색 비단 위에 만수무강 무늬가 새겨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하얀 얼굴이 참 깨끗해보였다. 태후 옆에는 주명취가 서있었다. 원경릉이 태후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하는데 주명취가 그녀이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초왕비.”

원경릉은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짙은 색깔의 넓은 소매 틈으로 하얀 두손이 드러났고 꽃무늬를 덧씌운 보호 장갑을 끼고 있었다. 손가락에도 반지 몇개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바늘이나 면도날 처럼 날카로운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 장갑 새끼손가락 부근에 이상하게도 까슬까슬한 무언가가 있었다. 원경릉이 손을 빼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스쳤는데 차갑고 딱딱한 것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역시 주명취였구나!

밖에 있던 궁인들이 들어와 태상황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태상황님 초왕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상황은 상선의 손을 밀치며 “들라하게!” 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푸바오는? 푸바오를 데리고 와라”라고 했다. 이를 본 태후가 “짐승을 찾는걸 보니 많이 좋아지셨군요.” 라고 했다. 태상황은 얼굴을 찌푸리며 태후를 바라보았다. “짐승? 그 아이가 이름이 없느냐?” 태후는 침상 옆에 앉아서 수건을 들고 그의 얼굴과 귀밑을 닦으며 말했다. “있지요. 푸바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이 들어오는 이름이지요.”

우문호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건곤전 안으로 들어섰다. 이전에는 주명취와 원경릉이 있으면 주명취에게만 눈을 돌렸던 그의 눈길이 오늘은 원경릉에게만 향했다. 그는 원경릉을 훑어보고는 태상황에게 다가가 문안을 드렸다.

주명취는 고개를 떨구고 한걸음 물러서 올라오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우문호가 내게 눈길조차 안준단 말이야?’

“어찌 이리 이른 아침부터 입궐을 했는가?” 태상황이 초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손자. 황조부가 염려되어 왔습니다.” 우문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얼굴이었다. “과인은 괜찮다!” 태상황이 손자를 위로하듯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원제와 황후, 그리고 예친왕까지 도착했다. 원경릉은 한쪽으로 물러서 있었다. 주명취는 그녀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명취는 온화한 얼굴로 원경릉에게 말했다.

“어제 밤 힘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원경릉은 대꾸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의가 탕약을 다려왔다. 태상황은 고개를 돌리며 화를 냈다. “가져가라! 과인은 마시지 않겠다!”

이를 본 사람들이 태상황을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았다. 명원제와 태후도 말을 거들었지만, 그는 입도 대지 않았다. 이를 본 태후는 걱정과 근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걸 보고 있던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말을 했다.

“황조부, 약은 반드시 드셔야합니다.”어찌 존재감이 없었는지 궁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할 뻔 했다. 명원제는 원경릉의 말에 태상황이 노할까 걱정하며, 못마땅한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 옆에 있던 주명취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 사이로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참으로 어리석다. 태상황이 저리 노하셨것만. 태후도, 황제도 설득하지 못하는 마당에 네까짓 것의 말을 듣는다고? 일부로 이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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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의 왕비   제3577화

    원 할머니는 방 안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흐뭇하게 웃으며, 원경릉에게 말했다.“저 사람들이 정말 술을 끊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조금만 덜 마시고, 취해서 쓰러지는 일만 줄어도, 수명은 더 늘어나는 법이지.”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큼지막한 고기에 술까지 벌컥벌컥 곁들이는 것이, 듣기엔 참 행복한 인생 같지만, 사람은 결국 생로병사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단다.”원경릉은 할머니가 정말 이들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살면서 진심으로 마음이 맞는 벗이 하나만 있어도 복인데, 이렇게 많으니, 그건 더 큰 복이었다.하지만 ‘오랜 벗’이란 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오랜’이라는 말이었다. 이들이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원 할머니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었다.예전엔 아무리 욕을 해도 듣질 않던 사람들이, 큰 병을 앓고 온 사람이 돌아오자마자 쓰러지자, 다들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그들이 겁을 먹은 것도, 원 할머니를 정말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원경릉이 조용히 물었다.“뵐래요?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들여보내라.”원 할머니는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아까 너무 심하게 야단도 쳤으니, 좀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조심조심 들어왔다. 다들 원 할머니가 눈을 뜨고 있는 걸 보고,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표현에 서투른 사람들이라, 그저 말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술에서 깬 흑영 어르신은 사실 말이 제일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일 먼저 입을 열어, 황후에게 원 할머니의 병세를 물었다.원경릉은 병이 거의 다 회복됐지만, 재발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한두 해 정도가 중요한 관찰기라, 무리하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전했다. 식사도 균형 있어야 하고, 기름지고 짠 음식이나 고기구이 같은 건 절대 안 된다고 설명했다.다들 말은 없었지만, 속으론 잘 새긴 듯했다. 그들은 방을 떠난 후, 바로 사랑방으로 들어가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술을 줄이는 것 외에도,

  • 명의 왕비   제3576화

    원경릉은 늘 중재하려고 애쓰곤 했었지만, 이번엔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마당에 버려진 술 단지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니, 정말 과하지 않은가?원경릉은 주위를 둘러보고 희 상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바로 물었다.“희 상궁은 어디 계십니까?”주 어르신은 머뭇거리며 말했다.“사식이를 보러, 추 상궁과 부인들을 데리고 궁으로 갔습니다.”“집안의 여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으니, 이렇게까지 날뛸 수 있었던 거지.”원 할머니가 냉소를 지었다.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숙취에 좋은 국을 끓여오겠습니다.”큰 솥으로 숙취를 풀어주는 국을 끓여오자, 다들 비틀거리며 마시러 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해, 토해버린 이들도 있었다. 어르신은 토하고 나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뻗고 말았다.원 할머니는 정말 화가 나서 욕을 퍼부었다.“내가 넋이 나갔지. 그곳에서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가, 이렇게 괜히 돌아와서 고생이라니?”원 할머니는 말은 그렇게 해도, 침을 넣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내며, 그들이 취한 모습은 자주 봤었다. 하지만 이렇게 토하며 쓰러지는 건 처음이라, 보아하니 이번엔 숙취가 심각한 듯했다.원경릉도 가만히 있지 않고, 술에 심하게 취한 몇 명을 골라 수액을 달았다.무상황은 술 단지 개수를 세러 갔다가, 산처럼 쌓인 단지를 보고 혀를 찼다. 보아하니, 한 사람당 적어도 열 근은 마셨을 것이다. 그렇게 고생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원 할머니는 힘들어서 허리고 곧게 펴지 못했고, 원경릉은 그녀의 모습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원 할머니는 그래도 돌아오길 잘했다고 말했다. 다들 이대로 계속 마셨다면, 정말 무슨 큰일이 생길지도 몰랐다.원경릉은 할머니에게 쉬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직접 돌보겠다고 나섰고, 돌보는 와중에도 계속 욕을 퍼부었다.그때, 술기운이 올라온 흑영 어르신이 계속 누구에게 침을 놓겠다고 소리쳤다. 보아하니 꽤 취한 모양이었다.무상황도 화

  • 명의 왕비   제3575화

    집으로 돌아갈 때는 반드시 선물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 원 할머니의 뜻이었다.무상황은 원래 오면 뭐라도 사서 돌아갔었지만, 주로 원 할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원 할머니가 지금 이곳에 있으니, 무상황은 따로 선물을 사는 것이 번거롭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선물을 사는 일행과 함께하지 않고, 줄곧 집에만 있었다.원경릉은 오빠와 주진,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며 가격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파운데이션, 립스틱, 향수, 액세서리 등을 샀다.숙왕부의 어르신들에게 술과 담배를 사줄 생각이었으나, 할머니가 그들은 즐길 자격이 없다며 원경릉을 막았다.하긴 검사와 치료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으니, 어찌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대신 그들에게는 좋은 브랜드의 육포, 노인용 분유, 칼슘, 비타민 등을 사주었다.가끔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할 순 있지만, 술을 직접 사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 할머니에게는 한두 번 눈감아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원경릉은 이번에 현대로 왔다는 것을 숙왕부에 알리지 않았다. 할머니의 병세를 확인했을 때, 돌아갈 상황이 아니면 그들이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래도 할머니와 함께 돌아갈 수 있어서 너무도 다행이었고, 숙왕부 어르신들에게도 깜짝선물이 될 것이다.일행은 북당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떠나, 저녁이 되어서야 숙왕부에 도착했다.마침 숙왕부는 첫 번째 공사를 끝마쳤고, 안풍 친왕 부부도 자리를 비웠으니, 고기와 술을 사서 집에서 자축하기로 했다. 다들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릴 때, 누군가 크게 외쳤다."또 취한 것이오? 다들 취한 것이오?"그 목소리는 너무도 익숙했고, 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감을 풍겼다.다들 취한 채로 고개를 돌리고,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심지어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물을 길어다가 머리에 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물에 젖어 있었다. 흑영 어르신들은 젖은 옷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줄지어 마당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다들 머리를 숙이고,

  • 명의 왕비   제3574화

    아버지를 달래는 일에 있어서, 택란은 나름대로 경험이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부드럽고 다정한 면을 그녀와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는 유난히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웠을 것이다. 사탕이는 서로 마음을 확인한 기쁨에서 빠져나와, 택란의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를 달래러 돌아갔다.서일은 황제와 함께 반쯤 취한 상태로 방으로 돌아왔다. 요즘 그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런 일조차도 경사로 포장되어야 했다. 그는 곧 후작으로 책봉되어 그만의 저택이 생기게 될 것이다. 관직이 올랐으니, 분명 좋은 일이 아닌가?딸의 혼담이 오가고 있고, 장래 사위도 괜찮은 사람이니 이것 또한 기쁜 일 아닌가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일은 도무지 기쁘지 않았다. 그는 큰 야망 없이 그저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서일은 남에게 밀려도 반항하지 않기에, 황제가 어쩔 수 없이 그를 위해 앞장서야 했다. 그리고 작위 책봉은 겉보기엔 자손에게까지 복이 내려가는 일이지만, 그가 원하던 평온하고 한가로운 삶을 잃는 대가도 있었다.그는 지금처럼 삶이 계속되길,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조금 전 술을 마실 때, 황제가 갑자기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했다. 그 말이 서일의 눈시울을 붉혔다.황제가 말했다.“언젠가는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게 된다. 그때가 되면 딸이 시집간 것도 별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그는 가끔 말을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하는 황제가 정말 얄밉다고 생각했다. 어찌 인생의 진실을 굳이 드러내야 하는가? 서일은 그런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선생도 유생의 성향에 맞게 가르치듯이, 황제도 신하의 성격에 따라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탕은 직접 아버지를 위해 술을 깰 수 있는 국을 끓여주었다. 서일은 침상에 반쯤 기대어, 눈시울을 붉혔다.“제 혼사 때문에 아버지께서 어려움을 겪으시거나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저는 평생 시집가지 않겠습니다. 제게는 세상에서 부모님보다 더 중요한 분은

  • 명의 왕비   제3573화

    가장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은 서일과 다섯째였다. 두 아버지는 결국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특히 서일은 사탕이가 그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고 마음이 뜯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세게 아프진 않지만 아주 불쾌했다.다섯째 역시 씁쓸했다. 만물에는 자연스러운 이치가 있는 법. 해가 지는 것처럼 언젠가 딸도 시집갈 것이며, 결코 주관적인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그는 사탕이를 생각하다, 택란을 떠올렸고, 택란을 생각하다 세상을 떠올렸다. 참으로 웃기는 일 아닌가? 회임부터 출산, 옹알이에서 말대꾸, 미숙함에서 밖으로 나가기까지. 아이가 걸어가는 길은 가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하지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그녀의 과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나, 앞으로 여생을 함께하게 되고,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면, 부모와 가족은 점점 뒷자리로 밀려나게 되니 말이다.힘들게 키운 딸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니? 헛고생한 것인지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이 모든 게 남자에게 되돌아오는 업보일까? 왜냐하면 그도 다른 아버지에게서 딸을 빼앗아 왔고, 그 딸은 그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녀의 아버지도 구석에서 조용히 마음을 치유해야 하고, 사위가 찾아오면 웃음을 지으며,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우문호는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폐하,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서일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이런 상황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술 한잔을 하며, 사탕이가 어릴 적을 떠올리는 것뿐이다."가자. 옆에서 함께하마."다섯째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이렇게 가슴 아픈 일인데도 기쁜 일이라고 불러야 하니, 속이 뒤집히는구나.""그만하십시오. 저도 울고 싶습니다."서일은 코를 훌쩍이며 뒤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호숫가 정자 안에 앉아 있었고, 사탕이는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서일은 이 나이에 눈이 이렇게 좋

  • 명의 왕비   제3572화

    맥청화는 속으로 얼마나 기쁜지, 얼굴에 전부 드러나고 있었다. 바짝 뒤쫓아오던 목여 태감은 몇 마디 하려다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가장 아끼는 공주가 복도 한쪽에 숨어 있는 것을 보고, 순간 공주께서 맥 공자에게 외면당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인사도 받지 못하고 돌아섰으니, 혹시나 그녀가 실망하진 않았을까 걱정되었다.목여 태감의 마음속에는 나름의 순위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계란 공주는 가장 첫번째였다. 공주의 희로애락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그는 맥청화와 서이당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당장이라도 위로하러 달려가고 싶었다.‘세상에, 공주께서 외면당하시다니… 저 맥 공자도 못된 인간이구먼.’목여 태감이 복도로 다가가, 공주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서 손 하나가 쑥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어 태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태감, 어서 숨으시오. 지금 몰래 엿보는 중이오.”그제야 태감은 태자와 둘째 황자가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있는 장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목여 태감도 얼른 그들 뒤에 숨었지만, 그들 뒤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뒤돌아보니... 황제와 황후, 서일과 서일의 부인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다들 눈을 반짝이며, 맥청화와 서이당이 있는 정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맥청화와 서이당은 정원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발을 맞춰 나란히 걷고 있으니, 사탕의 몸은 어느새 맥청화에게 가려져 버리고 말았다. 맥청화는 사탕을 우연히 마주칠 줄 몰랐기에, 아무런 말도 준비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를 본 순간 긴장까지 확 밀려왔다. 그날은 그렇게 긴장하지 않았는데, 궁에 있으니 무형의 압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맥청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꽃구경 겸 산책을 제안했다. 그리고 계속 머리를 굴리며 함께 대화할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무슨 이야기를 해도 유치하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사탕은 두 사람이 만날 걸 알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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