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자시가 되도록 우문호가 돌아오지 않자 침상에 누워 엎치락뒤치락 하며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녹주를 불러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 알아보라고 했지만, 녹주도 소식이 없다며 어깨를 으쓱했다.‘혹시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건가?’보통 큰 사건이 벌어지면 관아에서 늦게까지 연장근무를 했다. 그때마다 우문호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게 서일을 보내 늦는다고 알려주었는데 오늘은 서일도 오지 않았다.밖에서 ‘쿵쿵’하는 발걸음 소리가 나자 원경릉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그녀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주가 뛰어 들어오더니 “왕비님, 서일이 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했다.원경릉은 피투성이가 된 서일을 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녹주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며 “왕비님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었다.“왕야는?” 원경릉이 마음을 다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서일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녀를 보았다.“일 났습니다! 왕야께서 돈을 많이 잃고, 화가 잔뜩 나셔서 물건을 집어 던지시는 걸 구사가 말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왕야와 구사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둘이 집현국에서 치고받고 난리도 아닙니다! 소인이 말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라 왕비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일이 황상 귀에 들어가면 분명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마차를 준비하거라!”원경릉은 내심 우문호가 암살 사건에 휘말린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도박을 하다가 싸움을 한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다.저번에도 구사랑 치고받고 하더니, 이 두 사람은 무슨 애증관계인지 둘이 애틋하다가도 이따금 죽기 살기로 싸운다. “서일. 어쩌다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습니까?” 서일이 피를 닦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아 이거요? 돼지 피입니다. 집현국에서 돼지를 잡았거든요. 싸우는데 상대 패거리가 저보고 미천한 신분이라며 돼지 피를 들이부었습니다.”‘패싸움? 한 국가의 친왕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과 모여서 도박을 하는 것도 모자라 패싸움을 하다니.’서일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몸
“은화라고요? 얼마나요?” 원경릉은 애써 침착하게 웃어 보였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끓어올랐다.“삼백 냥.”“이백 냥.”“백오십 냥이요!”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뭐가 이렇게 많아?”우문호가 화가 나서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들은 본왕이 술에 취한 틈에 한몫 뜯어내려고 달려드는 거야!”그때 서일이 원경릉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정말입니다. 저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서일아 저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해라. 은화는 내일 궁으로 와서 받아 가세요! 초왕부에는 은화가 부족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황상께 받은 은화가 있으니 그거로 드리겠습니다.”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궁으로 들어오라고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래요. 내일 아침이니까 잘 기억하세요.” 원경릉이 답했다.그중 청색 옷을 입은 사내가 손을 들었다. “왕비님, 설마 돈을 떼먹으려고 하시는 겁니까?”“떼먹는다고요? 이게 어딜 봐서 돈을 떼먹으려고 하는 거죠?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서일아 경조부의 병사들 보고 오늘 도박판에 있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라고 하거라!” 원경릉이 소리쳤다.“예!” 서일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서일이 몸을 돌려 경조부로 향하자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우문호는 화가 잔뜩 나서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이 자식들 봐라? 버러지 같은 것들! 이러고도 본왕의 처제를 얻겠다고 한 것이냐!”원경릉은 그의 말을 듣고 화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를 부축했다. 그 순간 구사가 우문호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네가 그러고도 내 친구인 것이냐? 내가 너에게 속마음도 터놓았잖아! 그걸 알고서도 원경병에게 신랑감을 구해줘?”원경릉은 구사를 막아서며 왕부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예. 처형” 구사가 위엄 있는 원경릉의 표정을 보고 머리를 숙였다. 원경릉은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우문호의 체면을 생각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려고 했으나 하나같이 속이 시커먼
마차가 왕부에 도착했을 때 원경릉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우문호는 부드러운 비단 이불로 그녀를 안아 들어 왕부로 들어왔다. 구사는 고개를 떨군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항상 씩씩하던 그녀와 상반되는 모습에 모두들 긴장했다. 만약 원경릉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구사와 원경병과 혼인은 물 건너간 셈이다. 구사는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뜯었다.어의가 왕부에 도착했다.우문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괜찮아. 진찰받고 나면 괜찮을 거야.”원경릉은 우문호를 한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화낼 기운도 없었다.“가서 옷 갈아입고, 세수하고, 술 냄새 좀 빼고 와. 이 냄새 때문에 계속 메슥거리니까.”우문호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멀리 떨어져 있으면 되잖아. 어의가 진찰하는 것만 보고 가서 옷 갈아입을게.”“나가라고!” 원경릉이 그를 노려보았다.우문호가 문 앞에 서있어서 그런지 바람에 술 냄새가 공기에 퍼졌다. 그 냄새를 맡자 원경릉은 또 토 했다.어쩔 수 없이 우문호는 밖으로 나갔고, 구사가 그녀의 옆을 지켰다. “왕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넌 죽었어.” 우문호가 구사에게 말했다.“다 네 잘못이지.”구사가 반박했다.“본왕의 잘못이라고? 내가 너보고 밑장 뺀 놈들 조사하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한 게 누군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하나만 물을게. 그들을 집현국에 모이라고 한 이유가 뭐야?”“놀려고! 왜 나는 놀지도 못하냐?”구사는 뻔뻔한 우문호에게 화가 났다.“놀려고? 웃기지 마! 너 원경병의 신랑감을 찾기 위해 모은 거잖아! 긴 세월을 함께 보낸 형제는 나 몰라라 하고 원경병에게 부잣집 도련님을 소개하려고? 그 사내들이 도대체 뭘 잘하는데? 놀고먹고 하기 밖에 더 해? 그들은 원씨 아가씨를 힘들게 할 거라고!”“그렇게 나쁜 놈들일 줄 내가 알았겠어? 본왕도 몰랐다고! 그저 명문가 자제들이래서 소개만 받은 거야!”우문호가 짜증을 냈다.원경릉은 그들의 다투는 소리에 참다못해 베개를 던졌다. “
어의는 다시 진맥을 짚더니 희상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8주, 9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희상궁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서일! 빨리 왕야의 영패(令牌)를 가지고 입궁해서 조어의를 모시고 오세요!”“알겠습니다!” 서일이 달려 나갔다.우문호는 새하얖게 질린 얼굴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난다고 하니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안에서 희상궁이 나오는 것을 보자 그가 희상궁을 불러 세웠다.“희상궁, 원경릉은 어때? 심각해?”희상궁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조어의를 불렀습니다. 왕야께서도 어서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 왕비를 돌보셔야죠.”우문호는 희상궁의 엄숙한 말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원경릉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달려가서 목욕을 했다. 탕양 역시 왕비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어의는 자신의 진맥이 틀렸을까 조마조마했다. 이런 중요한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황실의 모든 이목이 친왕비의 임신에 집중되어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어의는 더욱 신중했다.희상궁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는 이 결과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조어의를 불러오라고 한 것이다.‘왕비님께서 올해 자금탕을 드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자금탕과 자금단은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귀한 약이지만 한번 복용할 때마다 몸이 많이 상한다. 그래서 해독 약을 복용한다 해도 삼 년은 임신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근데 삼 개월 만에 임신이라니? 희상궁은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구사는 창백한 얼굴로 문 앞 돌계단에 앉아있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인생이 초왕 때문에 산산조각 난 기분이었다. ‘초왕은 분명 내가 자신과 같은 집안사람이 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게 분명해. 한낱 호위보다는 부잣집 도련님을 소개해 주고 싶겠지……’원경릉은 희상궁과 어의의 표정을 보고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했다. ‘제발…… 난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이런 시기에 임신을 하면,
원경릉은 죽을 몇 수저 떠먹더니 죽 안에 들어있는 조개 비린내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죽을 멀리 치웠다.“그만 먹을래 토할 것 같아.”우문호는 헛구역질을 하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아파서 어의를 보고 버럭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병인데 그래? 진찰을 했으면 알 것 아니냐! 먹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토를 하면 속이 상할 것 아니냐!”“조어의가 오면 진찰을 해보고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소인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어의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우문호는 어의의 태도에 화도 나고, 구역질을 하는 원경릉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서 세모눈이 됐다. 희상궁이 어의를 부르더니“이만 돌아가세요.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발설하면 안되는 거 아시죠?”라고 말했다.“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어의가 물건을 챙기자, 희상궁은 어의에게 줄 은화를 챙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전상궁이 있었다. 그녀는 희상궁을 불렀다. 두 사람은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어의가 진찰한 게 오진 일 수도 있으니 절대 왕야께는 말씀드리자 마. 이따가 다른 어의가 오면 다시 상의하자.” 전상궁이 말했다.“내 뜻도 같아.”희상궁이 답했다.전상궁은 한숨을 내쉬며 “정말 임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다만 왕비께서 자금탕을 복용한 게 마음에 걸리네……. 해독을 해도 삼 년이 걸리는데 말이야.”라고 말했다.“맞다! 안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자금탕 누가 만든거야? 왕비께서 얼마나 드셨지?”희상궁이 물었다.“탕어른이 배합하셨어. 양은 아마 다 똑같은 양 일걸? 왕비께서 먹고 난 후 왕야께서 해독탕을 주셨으니까, 그때 어느 정도 해독은 됐을 거야.”“해독탕이 그닥 도움이 안 돼. 자금탕을 먹자마자 해독탕을 먹었으면 몰라도…… 당시에 왕비가 몸이 너무 안좋으셔서, 자금탕이 폐부까지 퍼졌을 텐데.”희상궁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기간 동안 왕비의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그러니까 말이야! 사실 나는 계속 왕비의 상태를 염려하고 있었어. 근데 기침
원경릉을 진맥한 어의우문호의 마음은 초조해서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데, 손가락으로 붉은 실을 지그시 누르는 조어의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조어의는 손가락을 누르자 마자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원경릉을 뚫어지게 쳐다본다.“무슨 일이야?” 우문호가 물었다.조어의는 예를 표하며, “소신이 붉은 실로 진맥하도록 윤허하시니 감읍합니다!”우문호는 머리에 열이 올라서 눈을 흘기며 조어의 귓가에 큰 소리로 쩌렁쩌렁하게: “방금 직접 손목에 진맥하라고 했지 않느냐.”조어의가: “규정이 이렇습니다.”원경릉이 팔을 뻗어 조어의에게, “무슨 병인지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세요.”원경릉은 방금 안에서 목욕할 때 약 상자를 흘끔 보니 별다른 약은 없고, 엽산제와 착상을 돕는 주사제만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큰 문제는 없구나 생각하고 있다.조어의는 눈을 감고 왼손을 진맥하고 오른손으로 바꾸고, 오른손을 짚었다가 또 다시 왼손으로 바꾸었다.우문호는 마음이 급해서 조어의를 저리 치워버리고, 자기가 의술을 배워 오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드디어 조어의가 눈을 뜨고 묻길: “왕비마마 달거리는 얼마나 늦어졌습니까?”원경릉이 웃으며: “방금 시작했어요.”조어의가 의아해하며 한숨을 쉬고: “그건 달거리가 아니라 왕비마마는 가슴에 울혈이 있고 기혈이 다소 부족한지라, 태아가 불안정해 유산 기미를 보이는 것입니다.”우문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헛소리인가? 태아가 불안정하다니? 왕비가 언제 회임을 했다고? 진맥을 제대로 한 게 맞느냐?” 조어의는 침착하게 귀를 한 번 후비며 우문호의 목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는 티를 내고, “활맥이 짧은 게 끊이지 않습니다. 왕비마마는 지금 가슴에 울혈이 있으시니, 생각컨데 오늘밤 노한 기운이 심장에 미치면 습관성 유산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소신이 일단 약방문을 써드릴 테니 바로 왕비마마께서 드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태아가 불안정하고 피가 비쳤으니 앞으로 며칠은 침대에 꼼짝 말고 누워 쉬셔야만 합니다.”우문호는 당황해서 원경릉
원경릉이 회임?어의가 손가락을 구부려 다시 맥을 짚으려 뻗자 원경릉이 열 받아서, “진맥 안 해, 다들 나가요. 나 혼자 마음 좀 가라앉히게.”“원 선생……”“입 다물어요. 절 원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고 당신도 나가요. 당신이 오늘밤 도박에 싸움박질 한 게 내 화를 돋운 거니까.” 원경릉이 노해서 말했다.어의는 눈이 똥그래져서 뻗었던 손을 움츠리며: “분명 그럴 겁니다. 첫 임신일 경우 성정이 급하게 변하고 초조함을 참지 못하기도 하지요. 상당부분 임신 증상입니다. 왕야께서는 절대로 왕비마마를 노하게 하시면 안됩니다.”우문호는 깜짝 놀라 원경릉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원경릉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포효하는 사자 같은 모습에 다시 열 뻗칠 까봐 감히 엄두도 못 냈다.“그……그럼 우린 밖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날 불러.” 우문호가 부드럽게, “절대 화내지 말고, 열 받지 말고, 우리 아들 다치게 하지 말자.”원경릉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열 받아서 몸을 부르르 떨며, “나가!”우문호는 한 손에 어의를 붙들고 바람같이 도망쳐 나왔다. 그저 원경릉이 다시 열 받아서 폭발할까 걱정이다. “왕비마마, 역정을 내시면 안되요.” 희상궁이 아직도 권할 태세인 것을 보고 원경릉이 홱 고개를 돌리며, “상궁도 나가요, 나 혼자 마음 좀 가라앉히게. 문도 닫고.”희상궁은 그저: “그럼 알겠습니다. 쇤네들은 나가 있겠으니 무슨 일이 있으시면 불러주세요.”희상궁과 전상궁, 녹주 등은 모두 밖으로 나가고 문도 닫혔다.밖에서 사람들이 멀뚱멀뚱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서일이 탕양을 한번 보더니 또 왕야를 보고, 에휴, “왕야 왔다 갔다 좀 하지 마세요. 정신 사납잖아요.”탕양이 버럭 화를 내며: “여봐라, 서일을 끌어내고 소월각에는 한 걸음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해라.”왕야는 좋아서 그러는 줄 아나? 정말 분수를 모르는 인간이다.구사는 겨우 입을 떼며 우문호에게: “오늘밤은 전부 내 잘못이야, 만약 왕비께서 역정을 내시는 바람에 유산이라도 하시는
원경릉의 임신 사실과 주의사항임신 테스트기에 붉은 줄이 하나에서 두 줄로 변하고, 심지어 두줄이 빠르고 선명하게 변하는 것이 증오스럽고 이렇게 짜증나는 빨간색은 처음이다.원경릉이 침대로 기어가는데 가슴은 쿵쾅대고, 머리속은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건지 너무 많은 생각이 드는 건지 혼미한 상태다.원경릉은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그녀는, 임신했다. 자금탕을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졌는데, 도대체 임신한지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유산의 전조 증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이가 버티지 못할 수 있고,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자금탕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그래서 약 상자에 있던 착상을 돕는 약은 원경릉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하지만 원경릉도 잘 알고 있다. 만약 이 아이를 지우고 싶다면, 나가서 며칠 뛰어다니기만 해도 유산이 확실하다.그렇게 되면 낙태 원인은 뭐가 될까? 원경릉은 합리적이 이유를 찾아내야만 한다.머리를 빠르게 굴려보고, 그렇지, 자금탕이 있지. 자금탕은 임산부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뱃속에 아이는 사산된다.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한 대 쥐어 팼다. 원경릉 이 짐승만도 못한 것아.그래 이렇게 하자!원경릉의 한 마디, “누구 없느냐?”문이 부서질 듯 열어 젖혀지며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밀어 닥쳐 열 쌍의 눈이 원경릉을 초롱초롱 쳐다봤다.심지어 마당밖으로 쫓겨난 서일마저 문 입구로 달려와 고개를 들이밀었다.“있어, 나 있어.” 우문호가 바람같이 들어왔다.원경릉이 자신의 계획을 생각하니 마음속으로 우문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밀려와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 방금 그렇게 심하게 말하는 게 아닌데.”우문호는 원경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냐, 넌 지금 누구에게도 화를 낼 권리가 있어.”“내 생각에 나 임신한 게 맞는 것 같아.” 원경릉이 말했다.어의가: “회임이 맞아요, 진맥이 틀린 적은 결단코 없습니다.”우문호는 코끝이 시큰해서 원경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우문호 일행은 강북부로 향하는 내내 북방의 풍경과 풍속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속도는 매우 느리긴 했지만 말이다.그날 밤, 우문호는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나 온몸에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그러자 원경릉이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오? 악몽을 꾼 것이오?”우문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직 날씨가 덥지 않은 데다가 북방에 있어 오히려 날씨까지 쌀쌀했기에, 그는 아직도 악몽이 생각나는 듯,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꿈에서 셋째 형님이 피투성이인 채 죽어가고 있었소…”원경릉은 그저 꿈이라 생각하고 위로해 주려 했지만, 이내 우문호의 강한 감응 능력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 꿈이 형제간의 영적 감응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우문호도 점점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강북부가 비록 평온해 보여도 사실 북당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오.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고, 북막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게다가 셋째 형님도 무모한 사람이니,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지 걱정되오. 원 선생, 어서 빨리 가야겠소.”원경릉이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내가 먼저 가겠소. 정말 상처를 입었다면, 내가 가야지 도움이 되지 않겠소? 게다가 난 빨리 갈 수 있잖소.”“좋소. 그럼 먼저 가시오. 우리도 곧 출발하겠소.”우문호는 너무 생생한 꿈 탓에, 더 이상 천천히 갈 수 없었다.“사람을 불러야겠소.”원경릉은 재빨리 옷을 입은 후, 우문호에게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먼저 가겠소.”“조심하시오.”우문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원경릉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원경릉이 사라지자마자 우문호는 방 문을 두드리며, 출발하자고 소리쳤다.우문호의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출발이라니, 무슨 큰 일이 생긴 걸까?이때 수보가 겉옷을 걸치고 나오며, 우문호의 팔을 잡고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우문호가 답했다.“나도 모르네. 하지만 셋째 형님에게 무슨 일
스무 명이 넘는 자 중 단 한 명만 생포하고 나머지는 전부 섬멸되었다.안왕은 재빨리 위왕의 혈을 눌러 지혈한 후, 중상을 입은 위왕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저 의원을 찾으러 간 사람이 있었기에, 의원은 이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이때 안왕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원의 옷깃을 움켜잡았다.“살리시게, 살려야 하네. 꼭 살아야 하네.”의원이 바로 약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진정하십시오.”의원이 위왕의 옷을 가위로 자르자마자, 상처가 바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먼저 지혈한 덕분에 저택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하지만 심각한 부상 상태와, 깊은 복부의 자상 때문에 장기를 다친 것으로 판단한 의원은 간단한 처리를 마친 후, 안왕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한 탓에, 치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성에서 다치셨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강북부는 의료가 낙후된 지역이다. 비록 혜민서를 설립한 이후 의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긴 했지만, 경성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안왕이 숨을 헐떡이며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중상을 입었는데 어찌 도성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긴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참 문제입니다. 황실 친왕이 자금단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택에 있습니까?”“없네!”안왕은 위왕의 호흡이 점점 미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갖고 있던 자금단은 이미 먹은 지 오래된 것이네.”“경성… 경성으로…”의식을 잃은 위왕은 그저 경성이라는 말만 중얼거렸다.안왕은 눈물을 닦으며 무릎을 꿇었다.“형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의원이 약을 썼으니, 황후가 오실 때까지 며칠만 버티십시오.”심각한 상황이니, 경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리지만, 황후는 아마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성으로……”위왕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계속해서 경성을 찾았다. 그곳은 그가 너무
위왕은 마음속에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섯째가 곧 강북부에 오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일은 소문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순행했으니, 소문이 새어나가게 마련이다.설령 그가 강북부에 온다고 밝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최종 목적지가 강북부라는 것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막인들이 다섯째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아무래도 단 한 순간도 북막인의 야심은 멈춘 적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방심하지 않고, 허점을 찾아내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이들을 감시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이기에, 그는 이 일을 아직 넷째에게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그들이 진짜 금나라 상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사이만 영향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장이지만,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마음먹은 자가 부추기면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될 수 있는 법이기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감시 끝에 마침내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처음엔 열댓 명 정도였던 이들 무리는 이틀 사이 스무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새로 온 자들은 앞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강호 인사의 분위기를 풍겼으며, 무공 또한 약하지 않아 보였다.위왕은 경계심을 품고, 밤새 직접 사람들을 이끌어 조사에 나섰다.앞서 만났던 금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질문에 순순히 응했지만, 새로 온 강호인들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위왕의 질문에도 그저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며 북당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위왕은 건방진 그들의 태도에, 몇 마디 호통을 쳤고, 그 모습에 강호인들은 참지 못하고 바로 위왕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위왕은 조사하기 위해 온 터라, 데리고 온 부하도 단 몇 명 뿐이었기에, 상대가 일반적인 조사에도 이렇게 쉽게 공격하려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앞서 온 금나라인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들이 손을 쓰자, 사태가 수습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강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홉째와 함께 남강의 풍경을 둘러보고, 북강에도 다녀왔다.지금 북강 백성들은 조정에 대한 소속감이 아주 강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강을 다스린 정책이 정말 훌륭했기에, 백성들 모두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깊어진 것이었다.황제와 황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길가에 모여서 열렬히 환영했다.그들은 이번 순행 내내 오계부에서 신분을 밝힌 것 외에는 항상 미복으로 다녔다. 하지만 남강에서 우문호는 황제의 신분을 드러냈다.우문호는 백성들의 신뢰와 경외심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고, 매우 기뻤다. 그는 줄곧 원경릉의 손을 잡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과거 북강은 방어를 위해 무술 함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산 아래 평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정화를 구하러 왔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기쁜 마음과 함께 우문호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것은 결코 그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남강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원경릉은 만아와 여덟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곧 변성으로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남강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원 선생, 그들에게 말했소?"길에서 우문호가 물었다."아니, 몰래 가는 것이오."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교활하구먼. 그래도 만두가 이미 알려줬을 수도 있을 텐데."지금은 경단과 찰떡, 그리고 계란이 셋만 그곳에 있었다."셋이 다섯 개 성을 다스린다니, 분명히 힘들 것이오."원경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이제는 태평해 보이니."우문호도 아이들이 안쓰러웠다."이번에 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쉬게 해줘야 하오."사실 성하나를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 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한편, 강북부에서는 최근 강북부 무구산 주변에 신비한 상단
그러자 홍엽이 그를 바라보며 멈칫했다."자네가 중매를 서겠다고?""안 되오?""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기 혼사도 해결 못 하는데 중매는 무슨. 난 못 믿네!"냉정언이 어깨를 으쓱였다."못 믿으면 말고. 이래 봬도 내가 명문가 아가씨나 협녀를 많이 알고 있소."홍엽은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알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소개해 주시게!"냉정언은 웃으며 그의 손목을 옆으로 밀어냈다."중매 값이 워낙 비싸서. 십만 냥 아니면 쉽게 안 나서오.""돈이 대수요?"홍엽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지금 한집에 살고 있소. 그러니 자네가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다 알고 있네. 그동안 꽤 많이 챙겼으니, 돌아가서 돈은 두둑이 주겠네."그 말에 냉정언이 깜짝 놀랐다."내 돈을 노리고 있었소? 진짜 도둑을 집에 들였군! 늙어서 쓸 돈이네, 그 돈을 혼사에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명여가 우리를 챙길 테니,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홍엽이 새침하게 말했다."나도 돈이 많소. 다만 남의 돈을 쓰는 게 훨씬 재밌을 뿐이네."냉정언이 숨을 들이쉬었다."안 되겠네. 경성에 돌아가자마자 자네를 쫓아내야겠소."홍엽이 말했다."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시게. 게다가 자네가 나를 청할 때, 뭐라고 했는가?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오?""이야, 홍엽, 어찌 이리 뻔뻔스러워진 것이오?""뻔뻔하지 않으면, 어찌 당신 집에서 이렇게 공으로 먹고살 수 있겠나?"홍엽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수보, 신을 모시는 건 쉬워도 보내는 건 어렵다고 하잖소. 이미 집안에 들어갔으니, 쫓아내기는 힘드네. 후회해도 소용없소. 수보의 등골 빼먹다 죽을 것이오. 관에 수의까지 얻어 쓸 생각이라, 죽으면 자네가 장례식까지 마련해줘야 하네."수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애써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짜 뻔뻔하오!"홍엽은 박장대소했다.멀리 복도 끝에
“예,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놀고 싶기도 합니다.”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신이 난듯 몸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여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홉째와 나가면 큰 산도 있고, 꽃도, 나무도 많습니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뭐든지 엄청 많았습니다.”우문호는 웃으며, 못내 안쓰러움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궁 안에 가두고, 거의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이곳이 마음에 들면, 좀 더 오래 있어도 된다.”우문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 정말 좋습니다. 다만, 형님과 형수님이 그리웠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여덟째는 흥이 오른 상태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시지요! 아홉째가 형님이 내일 오신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는 뒤돌아 원경릉에게 외쳤다.“형수님, 빨리 따라오십시오. 맛있는 거 많습니다.”미색은 웃으며 꾸짖었다.“이 무심한 녀석, 다섯째 형수님만 챙기고, 여섯 형수가 배고픈지는 묻지도 않는 것이냐?” 여덟째는 그제야 미색을 본 듯,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여섯째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여섯째 형님도 오신 것입니까? 와, 너무 좋습니다!”“질투하다니?”원경릉은 미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여덟째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아유, 참!”미색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여덟째는 바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그림과 책자를 선물하는 여섯째 형수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그럼 같이 드시지요. 음식 많습니다.”“장난이다. 난 질투 안 해.”미색은 기쁘게 말했다.여덟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고, 다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원경릉이 만아에게 말했다.“정말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예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말도 많이 하네. 이 모든 게 아홉째 덕분이다.”만아는 웃으며 말했다.“예, 둘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더
원경릉은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원 선생, 행복하오?”“행복하오.”“하하하. 지금이 아닌, 나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는 것이오.”“모든 순간이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오!”원경릉은 스스로를 자조하듯 웃었다.“나 같은 집순이가 이렇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줄 누가 알았겠소?”한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사랑 없는 삶도 부족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사랑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지만, 사랑은 사실 정말로 중요했다.산꼭대기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그리고 함께 늙어간 후, 다시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영산에서 내려온 후, 그들은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남강이었다.명절이 지난 뒤, 아홉째는 여덟째를 데리고 먼저 남강으로 돌아갔다. 다들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남강 땅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건, 정화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남강으로 가는 내내 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냉정언이 물었다.“남강에 가면, 못난이를 만날 것이오?”“만나야지.”홍엽이 답했다.“물론 만나야지!”못난이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니, 만나야 했다. 못난이가 종종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자기 상황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반면 아홉째는 편지에서 북강의 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지금의 남강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었고, 북강과 남강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익 문제로 양측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아홉째는 편지에서 못난이가 북강의 민심을 얻었고, 성격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고 전했다.홍엽의 마음엔 기대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도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못난이도 잘 지내길 바랐다.우문호는 남강에서 돌아온 후, 변방으로 갈
그 일을 떠올리자, 꿈에서 본 일이라 그런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든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한가한 노인이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무상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소봉을 떠올렸다.그들은 줄곧 전형적인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고, 그녀는 후궁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그렇게 평범하게 평생을 함께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날, 그는 마음속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평생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아팠다.세 사람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유아독존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커졌지만, 모든 소란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모든 소문도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세 사람이 여행하는 영상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유아독존은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현실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으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기에 악성 댓글을 다는 자들은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그리고 어느 날, 추 어르신이 오래도록 인터넷의 댓글을 훑어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이내 해가 지는 장면을 찍어 짧은 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영상에 한마디만 덧붙였다.“분쟁 없이, 오직 평화만 있기를.”그는 모든 다툼이 끝나길 바랐고,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말로만 승부를 겨루는 사람은 그들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음... 무엇보다 적이 될 자격도 없었다!영상이 올라간 지 이틀 뒤, 유아독존은 마침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질투와 시기로 무술을 모독한 것을 사죄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계정을 태그해 진심으로 사과했다.진심 어린 사과는 항상 용서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도 마침내 욕설을 멈췄다.
삼대 거두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숙취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이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몽롱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하늘에 떠 있는 주황빛 구름은 점점 짙은 금빛으로 변했고, 금빛 가장자리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요공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꿈을 꿨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무슨 꿈을 꿨는가?""꿈에서 숭이가 사내에게 속았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해줬다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놀라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자네도 꾼 것인가?""그렇네!""그렇네!""설마 우리 셋이 똑같은 꿈을 꾼 것이오?"소요공도 깜짝 놀랐다.그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였는데, 꿈에서는 그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리고, 이 꿈은 당시 엄청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감정 해소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스트레스를 주먹질로 시원하게 풀어냈다.한편, 무상황은 자신이 황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하는가?"추 어르신이 흥분한 듯 말했다."물론 기억은 나네. 당시엔 소봉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적성루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했네. 게다가 나도 자네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서 황후를 소홀히 했네. 그래서 적성루 상궁과 숭이를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했지."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꿈속에서 다시 겪은 덕분에 자세히 생각났다.그때 어서방의 회의가 끝나고, 소복이 무심히 물었다."폐하, 황후 마마를 오랫동안 못 뵙지 않으셨습니까?"그는 소복의 말이 소봉을 보러 가자는 암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