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우리 부모님과 뭔 상관인데요?”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그럼 우리 부모님과는 뭔 상관인데?”윤지은이 되물었다.그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하긴, 이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이다. 게다가 윤지은의 태도는 매우 명확했다. 그런데 내가 윤지은의 부모님까지 들먹인 건 윤지은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서다.나도 이 일의 핵심은 윤지은이라는 걸 알고 있다. 윤지은은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 여성이다. 때문에 윤지은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윤지은의 부모님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그런데 문제는 윤지은이 현재 나를 자기 손아귀에 쥐고 부숴버리려 하고 있다는 거다.나는 헤실 웃으며 아부하는 듯 다가갔다.“지은 씨, 농담하는 거죠?”“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윤지은은 또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나는 머리가 찌근거려 머리를 긁적였다.“사실 지은 씨랑 결혼하는 거, 안 될 것도 없어요. 하지만 우선 제 문제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저도 쓰레기처럼 여자 친구와 헤어지지도 않고 지은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거든요.”윤지은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너 원래 쓰레기야. 그래서 내가 회수해주려는 것뿐이야. 누가 뭐 너랑 행복하게 살겠대?”‘이건 나더러 죽으라는 거잖아.’나는 한동안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국 뻔뻔하게 말했다.“내가 쓰레기라면 끝까지 쓰레기로 살래요. 결혼은 못 해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그때 윤지은이 또 툭 하고 내뱉었다.“꺼져.”나는 얼른 도망치듯 방문을 나섰다.“어? 수호 군, 어디 가나?”“수호 군, 신발 두고 갔어.”나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숨에 윤씨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차에 올라탄 뒤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나는 윤지은이 나한테 단단히 화났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아마도 윤지은에게 갈가리 찢길지도 모른다.천수당에 도착한 뒤에도 나는
“나도 초조해. 나 선영이한테 여러 번 고백했는데 계속 차여. 나 어떡해야 해?”현성이도 자기만의 고민이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두 사람 진도도 많이 뺐잖아. 그런데 왜 거절해?”“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아직은 아니래. 난 지금이 사귈 때인 것 같거든.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손도 잡았는데 또 뭘 더 해야 하는데?”나는 문득 궁금했다.“두 사람 호텔 방 잡은 날 뭐 했는데?”“꼭 껴안고 잤어.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나 이래 봬도 매너 있는 남자야.”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밤새도록 참을 수 있어?”“어렵긴 했지. 그런데 선영이가 싫다는데 강제로 할 수는 없잖아. 수호야, 네가 나중에 선영이 생각 물어봐 줄 수 있어? 난 선영이가 거절할까 봐 걱정돼.”이건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나는 단번에 승낙했다.내가 현성이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가게 직원이 갑자기 헐레벌떡 달려왔다.“사장님들, 큰일 났어요. 가게에 엄청 무섭게 생긴 사람이 와서 정 사장님을 찾아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임천호가 떠올랐다.무섭게 생긴 데다 나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임천호 외에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아마도 어젯밤 일 때문인 듯싶다.임천호는 이태웅과 윤해철한테서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니 나에게 시비 걸러 찾아왔을 거다.예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무서워했을 테지만 지금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나는 얼른 중앙홀로 나갔다. 그랬더니 역시나 임천호와 강용재가 서 있었다. 하지만 소여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아마도 임천호가 소여정을 오지 못하게 했거나 소여정 몰래 나를 찾아온 것일 테다.어느 쪽이든 가게에 왔으니 손님 대우를 해야 했기에 나는 웃으며 다가갔다.“임 회장님, 어서 오세요. 약 지으러 왔나요? 아니면 진찰받으러 왔나요?”강용재는 어두운 얼굴로 나를 밀쳤다.그 순간 나도 얼굴을 팍 구기며 말했다.“왜 사람을 밀치고 그러죠?”강용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어
하지만 나는 임천호가 단지 표면상으로만 인정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임천호는 통제욕이 강한 사람이라 자기 여자가 나와 엮이는 걸 절대 용납할 리 없다.다만 아직은 화를 낼 명분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그 명분을 찾으면 분명 폭풍우가 휘몰아칠 게 뻔하다.나는 임천호와 대화하면서 가끔 강용재 쪽을 바라봤다.그때 강용재가 손가락으로 최상급 산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야생 산삼은 얼마지?”현성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이건 최상급 야생 산삼이라 가격이 이 정도거든요.”현성은 손가락 8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건 8천만 원이라는 뜻이었다.그러자 강용재는 고민도 없이 말했다.“이거 줘. 임 회장님이 살 거야.”현성은 나를 보며 눈빛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물었다.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을 주라고 눈빛을 보냈다.현성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야생 산삼을 꺼냈다. 하지만 포장하려고 준비할 때 강용재가 갑자기 말했다.“우선 효과부터 확인해 봐야겠는데.”“우리 가게 약재는 모두 품질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전문가를 불러 감정해 봐도 돼요. 만약 가짜면 3배의 가격을 배상해 줄 수 있어요.”3배의 가격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임천호가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계속 알 수 없었는데 이 순간 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약재는 다른 상품과 달리 코드나 고유 번호가 따로 없다.때문에 임천호가 우리 가게에서 산 산삼과 자기가 가져온 가짜 산삼을 바꿔치기라도 하면 우리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거다.게다가 한꺼번에 좋은 약재 몇 가지를 더 산다면 우리 가게 재정 상황을 뒤흔들기에도 충분하다.생각이 끝난 나는 얼른 다가가 산삼 사진을 몇 장 찍고 그 자리에서 설명하기 시작했다.“이 산삼은 88년짜리 야생 산삼이에요. 산삼 뿌리 부분을 보면...”나는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임천호가 바꿔치기할까 봐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그러자 바로 눈치챈 현성도 따라서 보충 설명했다.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현성은 서둘러 포장하지 않고 내 눈치를 살폈다.이에 나는 현성에게 포장하라고 눈빛을 보냈다.이정도 최상급 약재를 팔 수 있다면 우리 가게 매출은 평소의 두 배가량 될 수 있었다.이렇게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임천호가 누구인가? 그는 강북 3성에서 유명한 효웅이다. 그런 그가 묵묵히 손해를 감수할 리가 없었다.임천호는 돈을 지불할 때 현금도 카드도 아닌 수표를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귀띔했다.“Y 머니 캐피탈에서 나한테 4억을 빚졌거든. 약값이 총 2억 4천만 원이라고 치고 나머지는 내가 주는 팁이라고 생각해.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 여정이 몸이 그렇게 빨리 회복하지 못했을 테니까.”임천호는 역시 늙은 여우였다.고액의 수표를 줘서 내가 직접 돈을 받게 하고, 내가 가면 회사 직원더러 나를 괴롭히게 할 모양이었다.그렇게 되면 내가 나중에 뒷배를 찾아 도움을 청해도 이 임천호한테 돈을 받아낼 수 없다.때문에 나는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척 고민됐다.받는다면 임천호의 덫에 걸려들게 되고, 안 받으면 1억 6천 원을 공짜로 벌 기회를 잃게 된다.1억 6천 원!그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옛말에 간 큰 놈은 배불러 죽고, 간이 작은 놈은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나와 임천호의 원한은 오래 전에 생겼기에 하나 더 얹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때문에 생각을 마친 나는 그 수표를 순순히 받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임 회장님.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또 찾아주세요.”“하하. 그러지.”임천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가게를 떠났다.임천호와 강용재가 떠난 뒤 현성이 다급히 말했다.“수호야, Y 머니 캐피탈은 강북이 아니라 S시에 있는 회사야. 아마도 임천호가 관리하는 회사일 수 있어.”“나도 예상했어.”내 대답에 현성이 또 물었다.“그럼 정말 S시에 가서 수표를 교환하려고? 네가 떠나 뒤 저 두 사람이 또 가게로 찾아오면 어떡해?”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수표 교
“어머,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우리가 한창 대책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익숙한 실루엣이 문밖에서 걸어 들어왔다.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윤미화가 눈웃음을 치며 들어오고 있었다.“윤 사장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수호 씨 찾으러 왔지. 새로운 임무가 생겼거든. 조사 대상이 S시에 있어서 나랑 같이 갈 거야.”나는 그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S시요? 윤 사장님도 S시로 가려고요?”“응. 왜? 수호 씨도 가려고 했어?”“네. S시에 Y 머니 캐피탈이 있는데 이 지표를 그곳에서 현금화해야 하거든요.”“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마침 잘됐네. 같이 가.”윤미화가 같이 간다고 하니 너무 잘된 일이었다.윤미화는 비록 여자지만 보통 여자가 아니다.그도 그럴 게, 혼자 탐정 사무소를 꾸린 것도 모자라, 상대가 아무리 큰 인물이라도 모두 조사하니 그것만 봐도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게다가 수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있어 윤미화와 함께라면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상의 끝에 우리는 내일 출발하기로 결정했다.만약 4억을 현금화해 올 수 있다면 우리 가게는 대박 나는 셈이다. 이 돈이라면 옆 가게가 아무리 우리 고객을 빼앗아도 우리에겐 큰 지장이 없다.그날 오후 나는 월세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다만 남자라 챙길 게 별로 없었다. 나는 고작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운동할 때 필요한 아령을 챙겼다.비록 더 이상 변석훈의 가르침을 받지 않지만 나는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목적에 달성하는 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반드시 매일 견지해야 한다.그날 저녁, 나와 윤미화는 함께 식사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윤미화가 사람을 몇 명이나 더 데려갈지 묻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이번에 조사할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 위함이었다.“서나연.”“서나연? 어쩐지 좀 익숙하네요?”나는 갑자기 눈이 커다래졌다.“임천호의 아내? 서지예의 친언니요? 누가 서나연을 조사하라고 했는데요?”나는 순간 그 사람이 임천호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
나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소여정은 임천호에게 나를 지켜주려 한다는 걸 들키기 싫어 이런 우회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을 거다.만약 소여정이 정말 서나연을 조사하고 싶었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게다가 서나연은 소여정의 지위를 전혀 위협하지 못하고 있기에 몰래 서나연을 조사하라고 할 이유가 없다.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생각한 가능성에 힘만 실렸다.식사를 마친 뒤 나는 소여정에게 전화해 묻고 싶었지만 임천호의 의심을 살까 봐 결국 아무 문자도 보내지 못했다.그날 저녁, 주선영은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는 문득 현성이 낮에 했던 말이 떠올라 주선영에게 현성에 대한 일을 물었다.“선영아, 너 현성을 어떻게 생각해?”나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주선영의 얼굴은 갑자기 발그스름해지더니 부끄러워했다.“선배,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현성이 부탁했어. 몇 번이나 고백했는데 계속 거절해서 불안했나 봐.”나는 숨기지 않고 모두 진실대로 토로했다.“너 현성이가 마음에 안 들어?”나는 다른 방식으로 물었다.그러자 주선영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현성 선배 무척 다정하고 착해요. 저한테도 잘해주고요.”“그럼 왜 사귀기 싫은 건데?”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내 질문에 주선영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심지어 귀뿌리까지 후끈 달아올랐다.“저,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현성 선배 여자 친구가 되면 그걸 해야 하잖아요. 저, 전 그게 무서워요...”나는 그 이유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그 이유 때문이었어? 하하하.”주선영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선배, 왜 웃어요? 제가 우스워요?”“아니. 그 반대야. 너무 귀여워서 그래. 그럼 하나만 물을게. 너 왜 현성이랑 사귀고 싶어? 달콤한 연해가 해보고 싶어?”이번에 주선영은 숨기지 않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에 내가 말했다.“그럼 된 거 아니야. 달콤한 연애가 하고 싶으면서 또 무섭다고 하는 건 모순되잖아.”“그런데 그걸 안
“그, 그러면 고민 좀 해볼게요. 현성 선배한테 너무 조급해 말라고 전해줘요.”주선영은 말하는 내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역시 연애를 못 해본 여자애는 단순한가 보다.우리는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주선영이 먼저 방으로 가 휴식을 취했고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웠다.그로부터 얼마 뒤, 핸드폰이 징징 울리더니 현성이 어떻게 됐냐고 묻는 문자가 도착했다.나는 주선영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모두 솔직히 말했다.[주선영도 너 좋아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인내심 가지고 기다려. 시간을 좀 줘. 상대는 연애가 처음이고 경험이 없어 무서워하는 것도 정상이야.]내 대답에 현성은 무척 기뻐했다.[안 서두를게. 선영이 마음만 알면 돼. 나 참을 수 있어. 수호야, 너 진짜 엄청 도움 됐어. 나중에 내가 선영이랑 결혼하면 너한테 감사비 두둑하게 챙겨줄게.]우리는 한참 얘기하다가 대화를 끊었다. 이윽고 나는 소파에 누워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나는 임천호와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날이 오게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예전처럼 임천호가 두렵지도 않았다.사람은 많은 일을 겪어야 성장한다는 게 맞는 말인 듯싶다.나는 소여정을 떠올렸다가 윤지은을 떠올렸다, 한참 뒤에는 형수를 떠올렸다가 또 애교 누나를 떠올렸다.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리다 보니 결국 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다음 날, 곧바로 윤미화와 S시로 가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우리는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내가 먼저 도착해서 약 20분 정도 기다렸더니 윤미화의 차가 나타났다.“차는 한 대로 움직이자고. 그래야 갈 때 심심하지 않고 기름값도 아낄 수 있잖아.”마침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나는 우선 차를 주차한 뒤 윤미화의 차에 올랐다.윤미화는 탐정 사무소의 남직원도 데려왔다. 나까지 합치면 남자는 도합 4명이었다.가는 동안 우리 남자 넷은 서로 번갈아 가며 운전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내가 운전하고 윤미화가 조수석에 앉았다.윤미화는 오늘 운동
“여자를 엎어치기 한 거 아니에요?”“그건 너무 매너 없네.”직원들은 반전의 결말을 떠올리려고 토론하기 시작했다.그때 윤미화가 피식 웃으며 나를 봤다.“수호 씨는 어떨 것 같아?”“죄송하지만 이거 인터넷에서 봤어요. 결말은 남자가 여자를 둘러메고 경찰서로 갔어요. 여자애가 미성년자라고요.”“이것도 어려워하지 않다니. 좋아. 하나 더. 어느 날 혜성이라는 남자가 병원에 병 보러 갔는데 접수할 때 어떤 과로 접수해야 할지 몰라 간호사한테 도와달라고 했어.”“그러자 간호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혜성은 발끝 거기요라고 했어. 그 결과 어떻게 됐을까?”윤미화의 질문이 떨어지기 바쁘게 직원들은 머리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발끝이면 정형외과지.”“그렇게 간단하면 문제로 안 냈겠지.”“분명 반전이 있을 거야. 생각해야 해.”윤미화는 나머지 세 명이 답을 알아 맞추지 못하자 또 나를 봤다.“수호 씨 대답은? 이번에도 답을 알아?”“미안하지만 이것도 인터넷에서 봤어요. 안 봤어도 답이 뭔지 알겠지만.”“재미없어. 왜 다 알아?”윤미화는 화가 난 듯 나를 째려봤다.‘내가 박학다식한 게 내 탓인가?’“수호 씨, 답이 뭔데?’그때 반나절이나 상의해도 답을 얻지 못한 나머지 세 명이 나에게 물었다.나는 웃으며 말했다.“정혀외과와 비뇨기과요.”“왜 비뇨기과인데?”“발끝... 거기. 발끝과 거기. 잘 생각해 봐요.”내 말을 듣고 잠시 되짚던 셋은 바로 깔깔 웃어댔다.나는 그런 셋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이제 이런 걸 봐도 웃기지 않은데 말이다.처음에 이걸 인터넷에서 봤을 때 나는 무척 부끄러워했고 반응이 이 세 명과 비슷했다.나는 문득 내가 이젠 늙어 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 경험이 많은 것도 좋은 일은 아니네.’윤미화는 오기라도 생겼는지 꼭 내가 모르는 걸 내겠다며 기를 썼지만, 윤미화가 몇 개를 내든 나는 모두 답을 알고 있어 재미가 없었다.“윤 사장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내요. 이번에는 정말 모를 수 있잖아요.”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