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연이 참 신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윤지은은 마치 마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마저 매료시켰다.나는 마음이 따뜻한 한편 기뻤다.검사를 마친 뒤 우리는 함께 병원을 나섰다.“괜찮겠어? 힘들면 오늘 저녁 식사는 먼저 취소할게.”윤지은이 말한 건 다름 아닌 건 다름 아닌 상견례다.나는 얼른 말했다.“취소하면 안 돼요. 난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이건 사전에 약속한 것이라 나는 윤해철과 이영미한테 변덕스럽다는 인상을 안겨주기 싫었다.내 몸에 난 상처는 작은 상처들이었기에 괜찮았다.“정말이야?”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정말 괜찮아요. 이것 봐요. 괜찮잖아요.”나는 말하면서 일부러 윤지은 앞에서 복싱 시범을 보여줬다.내 행동에 윤지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알았어. 취소 안 할게.”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윤지은이 불편해할 정도로 빤히 바라봤다.“왜 자꾸 그렇게 봐?”“지은 씨가 나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다.윤지은은 나를 힐끗 노려봤다.“싫어? 그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까?”“아니요. 좋아요.”지금의 윤지은은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어 나는 이미 매료되었다.나와 부모님을 호텔에 데려다준 윤지은은 우리더러 푹 쉬라고 하면서 저녁에 데리러 오겠다고는 떠나갔다.부모님 역시 내가 걱정되고 마음 아팠는지 한사코 휴식하라고 권장했다.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휴식을 취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또 하루 종일 잔소리할 게 뻔헸으니까.나는 곧바로 단잠에 빠졌다. 꿈에서 나는 윤지은과 결혼해 귀여운 아들딸을 낳았고,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한 가족을 이루었다.임천호라는 잠재적 위험이 사라져서인지 나도 부담이 사라져 좋은 꿈을 꾼 게 틀림없었다.나는 힘껏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어머니, 몇 시에요?”“곧 있으면 7시야.”그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내가 2시간이나 잤다니.’‘평일 낮에는 휴식도 안 하는데
“무조건 잡혀.”“하지만 임천호 손에 총이 있어요.”내 걱정에 윤지은이 대답했다.“방금 들어간 경찰들 모두 특공대 대원들이야. 훈련을 잘 받은 데다 방어 도구도 있어 괜찮아.”그때 위층에서 갑자기 ‘탕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으니 누가 총을 쏜 게 틀림없었다.총소리를 직접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너무 무섭고 공포스러웠다.몰려들어 구경하던 주민들도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곧이어 또 몇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이번에 나는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기대되었다.남자라면 평생 한 번쯤 총을 손에 쥐어 보고 싶어 할 거고, 영웅이 되고 싶어 할 거다.하지만 내 수준은 아직 멀었다.얼마 뒤,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보아하니 전투가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공대 대원들이 임천호를 연행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임천호는 한 손이 피범벅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하’ 웃어 댔다.“괜찮아. 정수호가 있으니 저승길 외롭지는 않겠어.”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한 나를 본 임천호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정수호, 너 안 죽었어?”나는 싱긋 웃었다.“여자 친구 덕에 아무 일도 없었어.”에어매트를 발견한 임천호는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렸다.그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정수호, 네가 감히 나를 속여? 내가 죽어서도 너 가만 안 둬. 아...”임천호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특공대 대원들에게 잡혀 꿈쩍도 하지 못했다.그렇게 임천호는 경찰차로 끌려 올라갔다.일이 일단락되자, 윤지은은 검사받으러 가야 한다며 나더러 얼른 구급차에 타라고 명령했다. 나는 두말없이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참, 우리 어머니한테 전화 좀 해 봐요. 두 분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걱정하지 마. 이미 사람을 보내 두 분 데리러 갔어. 바로 병원으로 이송될 거야.”“병원은 왜 가요? 호텔로 데려다주면 돼요.”“두 분이 이런 일을 겪고 호텔로 갈 것 같아? 네가
고개를 숙여 내 손에 들린 빗자루를 본 순간, 나는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방금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척한 건 임천호를 상대할 때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심지어 속으로 우쭐거리며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자부하느라 임천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런데 임천호는 내 속내를 미리 꿰뚫어 보고 일부러 맞춰준 거였다니.임천호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도 모른다.그게 진짜든 가짜든, 임천호가 총을 갖고 있다면 나를 제압하기에 충분하다.내 손에 들린 빗자루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뜨거운 감자처럼 느껴져 당장 던져버리고 싶었다.나는 임천호를 협조해 계속 청소하는 척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부모님이 안전한 곳에 도착한 것을 확인했으니까.전화 건너편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린다는 건, 두 분이 사람 많은 곳에 도착했을 거라는 뜻이다. 보아하니 강용재가 두 분을 어떻게 하지 않을 모양이다.나는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윤지은과 두 명의 경찰도 이미 보냈으니 나를 구하러 올 사람도 없을 거다.‘이제 곧 윤지은과 약혼해야 하는데, 이렇게 죽는다고?’“정수호, 난 이미 네가 원하는 대로 했어. 이제 네가 약속 지킬 때야.”임천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총을 느긋하게 만지작거리며 가끔 총구를 내 쪽으로 겨누었다.나는 임천호를 차갑게 바라봤다.“이제야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너를 무서워하는지 알겠네. 넌 사람도 아니야. 악마야.”“하하하. 칭찬 고마워.”임천호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못 뛸 것도 없어.’‘어떻게 죽든 죽을 텐데.’‘직접 뛰어내리는 게 임천호 총에 맞아 떨어지는 것보다는 나아.’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아래를 흘긋거렸다. 그런데 웬걸?윤지은이 사람들더러 아래에 에어매트
“괜찮아요. 길을 따라 내려 가요. 그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도 산속으로 잡아갈 테니까 큰길로 나가면 괜찮을 거예요.”[알았어. 지금 네 아버지와 같이 도로로 나가는 중이야. 그런데 너는? 너는 지금 어때?]어머니는 걱정에 울음을 터뜨렸다.이제 곧 가족과 이별할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좋지 않았다.나는 씁쓸함을 삼키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돈이라 저를 해치지 않아요.”[그럼 다행이네. 다행이야...]전화 건너편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 두 분이 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나는 속으로 두 분이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산속이라 신호가 나쁜 탓에 목소리는 자꾸만 끊겼다.그걸 기다리다 짜증이 난 임천호는 여러 번이나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안돼. 우리 부모님은 연세가 있고 강용재는 건장한 청년인데, 그 자식이 또 우리 부모님을 잡아가면 어떡해?”내 말에 임천호의 표정은 차가워졌다.“난 반드시 부모님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해. 그래야 뛰어내릴 수 있어.”“젠장, 네가 그렇게밖에 계속 서 있으면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그, 그럼 거기 있는 청소 도구라도 건네줘. 청소하는 척할게.”임천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옆에 있던 빗자루를 건넸다.나는 바닥을 쓰는 척하며 전화기에 대고 부모님의 현재 상황을 확인했다.“젠장.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 벌써 몇 분째인지 알아?”임천호는 또다시 짜증 냈다.“뭘 그렇게 재촉해? 이렇게 높은 곳에 선 나도 서두르지 않는데. 아니면 네가 여기 서 보던가. 얼마나 무서운데.”임천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정수호, 네가 뛰어내리지 않아도 널 죽일 방법은 수없이 많아. 그런데 내가 왜 안 죽이는지 알아?”그건 나 역시 의문이었다.임천호는 얼마든지 내 위급한 상황을 이용해 다른 방식으로 나를 협박할 수도 있다.하지만 임천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뛰어내리기를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왜 그러는데?”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임천호는 내가 직접 뛰어내리는 걸 지켜보려고 빤히 쳐다봤다.나는 창문을 열고 이를 악문 채 창가에 섰다.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무 높아 아찔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머리가 어지럽고 괴로웠다.나는 고개를 돌려 임천호를 바라봤다.“이제 내가 여기서 손 놓으면 바로 떨어져. 그러니 강용재한테 전화해서 우리 부모님부터 풀어 줘.”“지금 나한테 요구를 제기하는 거야?”임천호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아니. 못 믿어서 그래. 난 내 목숨으로 우리 부모님을 지킬 수 있지만, 네가 약속 안 지키면 내가 뭐가 돼?”“넌 사람이 너무 악랄해서 우선 우리 부모님 안전부터 보장해야겠어.”“하하. 내가 말했지. 내가 원하는 건 네 목숨이라고. 네 부모님은 전혀 관심도 없어.”임천호는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나는 순간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잔말 말고 전화해. 안 그러면 소리칠 거니까. 이따가 여기 사람 모이면 네가 어떻게 빠져나가나 보자고.”임천호는 내 반응에 미간을 찌푸렸다.임천호가 원하는 건 내 목숨이지 내 부모님이 죽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내가 이렇게 협박하니 다시 경계했다.“좋아. 약속할게.”임천호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강용재한테 전화했다.“그 두 노인네 풀어 줘.”“됐어. 네가 말한 대로 했으니 뛰어내려.”“안돼. 부모님 목소리 들어야겠어.”“정수호, 기어오르지 마!”임천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나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난 부모님이 안전한지만 확인하려는 거야. 강용재가 너랑 같을지 누가 알아? 약속 안 지키면 어떡해?”임천호는 다시 한번 강용재에게 전화해 스피커폰 모드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그 순간 건너편에서 ‘윽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는 확실히 부모님 목소리가 맞았다.“아버지, 어머니, 그 자식들이 아무 짓도 안 했죠?”입을 막고 있던 천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수호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 사람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어머니, 걱정하지
“그런데 넌 객기가 있어. 그래서 깡이 있다고 한 거야. 하지만 그건 진짜 깡이 아니야. 내 눈에 넌 여전히 찌질해.”나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 임천호의 비아냥에도 전혀 불편한 감은 없었다.임천호가 나를 칭찬하든 비아냥대든 상관없다. 임천호 생각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내 눈에 임천호는 자기가 아직 완전한 패배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발악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증명하려 할수록 더 실패자 같다.아무리 위엄 있는 사자라도 사자 무리에서 벗어나면 그저 외톨이일 뿐이다.임천호 역시 내 앞에서만 센척할 뿐이고.“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난 부모님이 어디 있는지만 알고 싶어. 두 분 잘 있어?”“뭘 그렇게 서둘러. 내 목적은 너야. 네 부모님은 안 건드려. 우선 앉아서 얘기나 할까?”“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나?”“얘기할 수 있는 거야 많지. 네가 왜 이태웅과 손을 잡고 나를 모함했는지? 네가 날 모함한 일을 소여정은 아는지...”이 일로 소여정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얼른 대답했다.“여정 누나는 몰라. 내가 이태웅 부시장님과 합의해서 한 거니까.”“진짜야?”“나는 못 믿는다 쳐도 여정 누나까지 못 믿어?”나는 살짝 마음이 조급해졌다.“난 못 믿는다고 한 적 없어. 그냥 확인해 보는 것분이지.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내가 흥분했나?’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나는 여전히 내 감정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그도 그럴 게, 너무 끌려다니다 보니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나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았다.“우리 부모님 풀어주면 네가 원하는 거 다 할게. 나를 미워하는 거 알아. 죽여도 돼. 반항하지 않을게.”“하하. 죽이라고? 내가 지은 죄가 이미 너무 많아서 살인죄까지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아.”“그럼 원하는 게 뭔데?”“네 손으로 죽어!”임천호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그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져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내 손으로 죽으라고?”“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