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나는 욕조에 누워 핸드폰으로 쇼츠를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나는 바로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문 열어요!”윤지은의 목소리였다.나는 순간 마음이 찔려, 윤지은이 내 다른 신분을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정말 따지러 왔으면 어떡하지?’그렇다면 절대 문 열어주면 안 된다.나는 욕조에서 나와 목욕 타월로 몸을 두르고 문 앞에 다가가 물었다.“내 방에는 왜 왔어요?”“할 얘기가 있으니까 문 열어요!”“할 말 있으면 밖에서 해요.”나는 문을 열 배짱도, 마음도 없었다.그러자 윤지은이 싸늘한 경고를 날렸다.“셋 셀 테니까 순순히 열어주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차버릴 태니까.”“미쳤어요? 갑자기 화내면서 찾아와 문 열라고 하는 게 어디 있어요? 그쪽이 나한테 뭐 할 줄 알고? 그리고 할 말 있으면 밖에서 말하라니까, 왜 자꾸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목적이 뭐예요?”윤지은은 내 설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카운터를 시작했다.“셋, 둘...”나는 이렇게 가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윤지은은 워낙에 막무가내기에 나는 얼른 침대 쪽으로 달려가 프런트에 전화했다.“여보세요? 여기 미친 여자가 자꾸만 내 방문을 차고 있어요. 얼른 와서 데려가요.”‘내가 쫓아내지 못한다고 호텔 직원도 쫓아내지 못하겠어?’나는 전화를 끊은 뒤 방에서 기다렸다.하지만 미친 듯이 쾅쾅거리며 문을 걷어차는 소리에 너무 섬뜩했다.다행히 호텔의 서비스가 좋아 3분도 안 돼서 직원이 도착했다.호텔 직원이 나서니 나는 그제야 안심됐다.‘이제는 함부로 하지 않겠지?’“아가씨, 왜 그러십니까?”“이 문 열어.”나는 문에 바싹 기대 밖의 대화를 들었다. 하지만 밖의 대화에 어리둥절했다.‘여긴 고객님이 아니라 아가씨라고 하나?’‘방금 그게 윤지은 목소리인가?’내가 멍해 있을 때,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그러더니 윤지은이 싸늘
윤지은이 그저 평범한 의사인 줄 알았는데, 배경이 이렇게 빵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나는 한순간에 기가 죽어 윤지은을 보며 말까지 더듬었다.“대,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윤지은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차갑게 물었다.“아까 백연우랑 잤지?”나는 윤지은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 거짓을 말해야 할지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머리가 너무 복잡해 언어 기능도 상실한 기분이었다.내가 계속 대답하지 않자 윤지은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묻잖아. 왜 멍때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결국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아니요. 계속 방에 있었어요.”나는 고민한 끝에 결국 거짓말을 선택했다.이 여자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친구와 잤다는 걸 안 될 것 같았다.사람은 무서운 소유욕을 갖고 있는 데다 쉽게 질투하는 동물이다.이미 본인과 잤는데, 친구와도 잤다는 걸 알면 윤지은은 본인이 백연우보다 못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때문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윤지은은 믿기지 않는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정말? 한 시간 넘게 목욕하고 있었다고? 껍질 벗겨질까 걱정도 안 되나?”나는 뻔뻔하게 말했다.“이런 곳에 처음 왔으니 뭐든 잘 누려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좀 오래 한 건데, 안 돼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의심을 풀었다.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내내, 내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윤지은은 탐정처럼 내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봤다.난 윤지은이 여자 셜록홈즈라 불릴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걸 알고 있다.그래서 내가 썼던 종이를 방까지 가져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지 않으면 빼도 박도 못할 테니까.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자의 치밀함과 논리적 사고 능력을 쉽게 봤다.유지은은 욕조 앞에 다가가 허리를 숙인 채 안을 쓱 만지더니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다.“거짓말하네.”나는 너무 당황해서
윤지은의 압박에 나는 심장 박동이 멈춘 것 같았다.특히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두 눈을 보면 마치 내 모든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불편해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나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그런 거 아니에요.”윤지은은 차가운 얼굴로 나한테 걸어왔다. 그녀는 남의 기분을 잘 엿보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내가 대답할 필요도 없이 답을 얻었다.그 시각 윤지은은 마음이 복잡했다.입으로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꾸만 부정했지만 내가 자기 친구 백연우랑 잤다는 추측이 들자 너무 괴로웠다. 마음이 복잡해 딱 어떤 기분이라고 정의 내리기도 힘들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윤지은에게 진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차갑게 말했다.“고개 돌려서 나 봐.”명령 투인 말투와 부잣집 아가씨라는 신분은 나에게 압박으로 작용했다.솔직히 겁먹었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이 호텔 전체가 윤지은네 건데,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나는 조심스럽게 윤지은을 바라봤다. 이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었지만 아주 엉망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대체 뭘 원해요? 내가 윤지은 씨한테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솔직히 말해. 내 친구 백연우랑 무슨 사이냐?”윤지은은 역시나 내가 솔직히 말하는 걸 듣고 싶어 했다.하지만 나는 너무 무서웠다. 윤지은이 나를 계속 몰아붙이는 게 뭐 하자는 건지 모르니까.결국 나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안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요.”윤지은은 내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그 순간 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이 여자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윤지은은 나를 보며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 그럼 가서 백연우한테 말해. 백연우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한다고.”“미쳤어요? 뜬금없이 가서 그런 말을 왜 해요?”나는
“안 그러면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마지막 한 마디는 협박이 아닌 강조였다. 심지어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그 때문에 나는 백연우와 있었던 일을 더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로 억울하고 답답해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침대에 눕혀 혼내주고 싶었다.“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가서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너무하지 않아요?”나는 윤지은의 위세에 눌려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연우를 찾아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방금 전에 그런 짓을 했는데 이제 와서 안 좋아한다고 하는 건 매너가 아니니까.윤지은이 나한테 자꾸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건 내가 정말 백연우한테 그런 말을 하길 바라 것보다 시험해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혹은 내 입으로 직접 솔직한 말을 듣고 싶거나.윤지은은 내가 끝까지 부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오히려 이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내가 바로 인정하면 윤지은은 오히려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까.윤지은은 결국 한 걸음 양보해서 말했다.“그래요, 뭐 이번에는 용서해 줄게요. 하지만 잘 들어요. 앞으로 내 친구 세 명 중 그 누구에게도 손대지 마요!”“만약 상대방이 나를 건드리면요?”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그랬더니 윤지은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걔네가 어딜 만지면 수호 씨 어딜 망가뜨릴 거예요.”‘헐.’‘카리스마 사장님에 관한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어쩜 이리 막무가내지?’나는 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부잣집 아가씨의 명령이니까.”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노려보더니 내 방에서 나가 808호실로 돌아갔다.엉망이 된 방 안을 보니 지은은 마음이 어수선해 바로 담당 부서에 전화했다.“808호실 모든 침구 세트 바꿔. 싹 다!”“네, 아가씨.”호텔 직원의 업무 처리 효율은 대단했다.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방 안의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었다.심지어
순간 웃음이 터졌다.‘뭐야? 내가 자기 없으면 못 사는 줄 아나? 어디서 아가씨 성질을 나한테 부려?’‘누가 신경이나 쓰는 줄 아나?’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 비위를 맞춰야 했다. 안 그러면 희롱하지 못하니까.결국 나는 윤지은에게 답장했다.[내가 설마 그쪽을 차단했겠어요? 전에는 실수로 연락처가 지워진 것뿐이에요.][내가 바보인 줄 아나!]나는 웃는 이모티콘을 쓰며 답장했다.[진짜예요. 그쪽처럼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여자를 내가 왜 차단하겠어요?][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전에 한 말 생각해 봤어요?][생각해 봤는데, 사귀어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우선 만나지 않을 수 있어요?][만나 보지도 않고 어떻게 연애한다는 거예요?][안될 것도 없죠. 우선 연락하면서 서로 알아가면 되죠. 난 좀 늦게 끓는 성격이라 먼저 만나면 어색할 거예요.][그럼 됐어요. 다른 사람 찾지 뭐.]나는 사실 어장관리를 하려고 이렇게 말한 건데, 윤지은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의외의 대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었다.그 시각, 윤지은의 마음은 이미 다른 데로 가버렸다. 오히려 그녀야 말로 나와 사귈 생각이 사라져 나를 자기 어장에 들일 생각이었다.집사 아저씨가 신원 조사를 끝내면 나를 꼬셔내 얼굴을 직접 볼 계획이었으니까.그때, 윤지은의 핸드폰이 윙윙 진동했다.헤드폰을 들어 확인하니 다름 아닌 어머니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윤지은은 미간을 좁혔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다만 말투가 쌀쌀맞았다.“엄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전화해요?”이영미는 전화 건너편에서 씩씩거렸다.[나 네 아빠랑 못 살겠어. 이혼할 거야. 지은아, 너 지금 어디야? 엄마가 네 집으로 갈게, 앞으로 우리 모녀가 같이 살자.]윤지은 어머니의 말에 어리둥절했다.“무슨 상황이에요? 또 아빠랑 싸웠어요?”‘한 달 전에도 싸우고 친정에 가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했으면서.’이영미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계속 화만 냈다
애교 많은 여자는 운명도 좋다는데, 윤지은은 자기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아버지는 항상 어머니한테 고분고분하고 뭐든 들어주고 예뻐해 줬으니까.심지어 이영미가 윤지은을 낳을 때 너무 아파 둘째는 절대 안 낳는다고 쐐기를 박아 두는 바람에, 윤해철은 정말로 아내에게 둘째를 낳지 못하게 했다.부모님이 아무리 닦달을 해대도 윤해철은 계속 마누라 편만 들어 결국 윤씨 가문에 후손이라곤 윤지은 한 명뿐이다.때문에 윤해철은 어릴 때부터 딸을 미래에 자기 회사를 잇는 후계자로 정성껏 키웠다.하지만 윤지은은 재계에 전혀 관심이 없고 의학을 좋아했고, 어머니처럼 고집스럽기까지 해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대에 합격했다.그때로부터 두 부녀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다만 윤지은은 그딴 건 상관하지 않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뭐든 했기에 지금 두 부녀 사이가 매우 긴장하다20분도 채 안 되어 이영미가 용천 호텔에 나타났다.“사모님...”“쉿!”이영미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호텔 지배인에게 말했다.“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여기 고객과 똑같이 대해. 아가씨는 어디 있지? 방은 몇 호실이야?”이영미는 누가 제 신분을 알아챌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그 모습은 귀엽기도 하면서 조금 웃겼다.지배인이 다급히 말했다.“아가씨는 VIP 구역 808호실에 묵고 계십니다.”“그래, 알았어. 다들 일 봐. 별일 없으면 나 방해하지 말고.”이영미는 곧장 VIP 구역으로 향했다.그리고 얼마 뒤 808호실 앞에 도착했다.윤지은은 조심조심 행동하는 어머니를 보자 말문이 막혔다.“엄마, 뭐 해요?”“쉿,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오는 내내 조심하면서 왔어. 얼른 들어가게 좀 비켜 봐. 아는 사람 만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안 그러면 네 아빠... 아니, 그 남자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 거 아니야.”이영미는 매번 화날 때마다 남편을 낯선 사람처럼 대하며, 윤해철을 그 남자라고 칭한다.그것에 이미 익숙해진 윤지은은 팔짱을 낀 채 ‘또 왜 이러지?’하
“지은아, 네 아빠 혹시 밖에 여자 있는 거 아니겠지?”오는 내내 이영미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 가슴이 답답했다.그 말을 들은 윤지은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세상 남자가 모두 바람을 피워도 아빠는 절대 그럴 분 아니에요.”딸의 말에 이영미는 아주 만족했다. 그와 동시에 행복감이 밀려왔다.하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그럼 왜 나한테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 건데? 스무날이나 전화도 안 하고, 내가 먼저 찾아갔는데 열정적으로 맞아주지도 않고. 남자들이 이러는 건 바람피우거나 바람피우기 직전이거나 둘 중 하나야. 지은아, 엄마가 불안해서 그러는데, 네가 네 아빠 좀 조사해 줄 수 없을까?”윤지은은 어머니한테 물 한 컵을 따라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는 아빠랑 이혼한다면서요? 바로 이혼하면 될 건데 뭔 조사를 해요?”이영미는 순간 난감해졌다.그건 솔직히 그냥 해본 소리지, 절대 이혼할 마음이 없었다.“너도 참, 자식들은 부모 이혼을 뜯어말린다고 하던데, 넌 어쩜 아빠랑 엄마를 이혼하라고 부추기냐?”윤지은은 어머니 옆에 앉으며 솔직하게 말했다.“그건 엄마가 아빠랑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걸 아니까 그렇죠. 항상 이런 방식으로 애교 부려 아빠가 엄마를 찾아오게 하려는 거잖아요. 아빠 마음속에 여전히 엄마가 있고 엄마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안 그래요?”이영미는 이내 씩 웃었다.“역시 우리 딸, 아주 엄마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그런데 네 아빠는 아니잖아. 네 아빠가 내 마음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윤지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빠가 정말 엄마를 모른다고 생각해요?”“무슨 뜻이야? 네 아빠가 내 마음을 알면서 일부러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면 더 나쁜 거잖아. 흥! 내가 떠나지 않을 걸 알고 일부러 찾으러 오지 않았다니.”“엄마, 엄마는 본인이 너무 아빠한테 달라붙는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윤지은은 참지 못하고 독설을 퍼부었다.이영미는 그런 딸의 말을 반박했다.“내가 언제 달라붙었어?”윤지은
윤지은은 더 기가 막혔다.“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해요? 지난번에 싸운 것도 정말 이해가 안 가요. 물 온도 45도에 맞춰 달라고 했는데, 55도에 맞춰 줬다고,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 억지 아니에요?”이영미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 말했다.“맞잖아. 내가 45도짜리 물먹고 싶다면 네 아빠는 항상 1도도 차이 나지 않게 잘 맞춰 줬어. 지난번처럼 그런 적은 없었다고. 내 입천장이 다 데어 까질 뻔했다니까.”아직도 투정 부리는 어머니를 보니 윤지은은 한숨이 났다.“엄마가 너무 귀찮게 해서 아빠도 이제 지친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그런 거라고요.”“그런데 딸, 엄마 그거 사람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애교 부리는 거야. 네 아빠가 어떤 사람인데. 사업에 성공한 중년 남자야. 밖에서 얼마나 많은 대접을 받겠어? 지금껏 네 아빠가 이룬 성과는 네 아빠가 두 손으로 이뤄낸 거야.”“그런 남자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 알뜰살뜰 보살펴주는 여자가 필요할 것 같아? 아니야. 네 아빠는 독립적인 사람이라 자기를 보살펴주는 것보다 자기가 보살펴줄 수 있는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나를 잘 보살펴주고, 예쁘게 키워놓으면 매번 나를 데리고 술자리나 파티에 참석할 때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게 더 성취감 있을 거라고. 내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는 것도 네 아빠의 성취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야. 남자는 애교 많은 여자를 좋아해, 이건 너도 인정해야 한다.”윤지은은 마음이 조금 흔들려 어머니 말이 진짜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싸우는 걸 본 적이 확실히 드물긴 하다. 심지어 어머니가 말하는 다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티격태격하며 사랑하는 거로만 보일 정도니까.‘엄마 같은 여자가 정말 남자 마음을 잡는 여자라고?’‘그럼 난 왜 엄마의 이런 성격을 물려받지 못했지?’윤지은은 남자에게 인내심이 거의 없다. 남자한테 애교 부리라는 건 윤지은한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거다.심지어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