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리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짙은 향이 밀려들었다.
달콤하면서도 과일처럼 싱그럽고, 끝에는 묵직한 향이 남았다. 나는 아이를 안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아브라함 다비…….”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돌보던 장미였다. 봄이 오면 흙투성이가 되어 가지를 정리하고, 새순이 얼마나 올라왔는지 매일 확인하던 꽃. 집이 무너진 뒤에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색과 향이었다. 살구빛 꽃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정원으로 나갔다. 품 안의 아이가 잠결에 작게 몸을 움직였다. 태윤이 뒤따라와 내 옆에 섰다.“옛집에 있던 장미를 옮긴 건 아니야.”“알아.” 그때 들었던 설명이 다시 떠올랐다. 남아 있던 사진과 식재 기록을 찾아 같은 품종을 구했고, 이 집의이음이가 두 살을 넘기자 해준이와 자주 다퉜다. 이날은 해준이가 아끼는 빨간 소방차가 원인이었다. 둘이 양쪽에서 잡아당기자 사다리가 휘었다.“내 거야!”“이음이 거!”“부러지겠다. 잠깐 놓자.” 내가 무릎을 꿇자 해준이가 손에 힘을 조금 뺐다. 태윤도 이음이에게 말했다.“오빠 거야. 빌리고 싶으면 물어봐.” 입술을 삐죽거리던 딸과 해준이는 한동안 말다툼을 했다. 그러다 해준이가 차체를 쥔 채 말했다.“같이 하면 돼. 내가 차 운전할게. 이음이는 소방관.” 이음이가 인형을 들고 달려갔다. 몇 분 전의 싸움은 없었던 듯했다. 태윤과 나는 동시에 소파에 주저앉았다. 붉은 소방차가 거실을 지나갈 때 우리는 다리를 들어 길을 비켰다. 태윤에게도 예전에 그 장난감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말하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이제 두 아이가 함께 놀 때만 상자 한가운데에 놓는 차였다. 그날 저녁에는 해준이가 아빠 서재에서 만년필을 빌려 달라고 했다. 태윤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다가 뚜껑을 잠근 채 손에 쥐여 주었다.“책상 위에서만.” 해준이는 금빛 펜촉을 보고 싶어 했지만 뚜껑을 열 수 없다는 걸 알고 돌려줬다. 태윤은 펜을 받으며 아들의 머리를 헝클었다. 소방차에도, 자기 물건에도 같은 규칙이 필요하다는 걸 둘 다 알게 된 듯했다. 다음 날에는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해준이가 유치원에서 만든 왕관의 별을 이음이가 뜯어 놓았다.“이음이 싫어!” 이음이가 울었다. 해준이는 찢어진 자리를 붙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별 모서리를
걷기 시작한 이음이에게 서재는 새로운 놀이터였다. 어느 날 태윤이 부르는 소리에 가 보니 서류 몇 장이 바닥에 흩어져 있고, 딸 손에는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아빠 거.”“그래. 돌려줘.”“싫어.” 태윤은 무릎을 꿇고 흰 종이와 빨간 크레용을 내려놓았다.“여기에는 마음대로 그려도 돼. 펜은 아빠한테 주고.” 이음이는 둘 다 쥐려 했다. 태윤이 크레용을 든 손을 뒤로 빼고 빈손을 내밀자 한참 바라보다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곧 종이에 빨간 선이 그어졌다. 태윤이 서류를 주워 올리는 동안 딸은 그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이음이는 종이에 아빠 얼굴을 그리는 듯했다. 빨간 선 하나를 긋고 태윤을 올려다본 뒤 또 그렸다. 내가 바닥의 서류를 주워 주는 동안도 그의 소매를 쥐고 있었다. 만년필보다 오래 붙잡은 건 그 소매였다. 그 뒤 낮은 서랍 하나에는 잠금장치가 달렸다. 중요한 서류와 날카로운 편지칼을 치웠다. 대신 옆 서랍은 이음이 몫이 됐다. 종이와 크레용이 든 곳을 딸은 보물 상자처럼 열고 닫았다. 해준이도 자기 상자를 달라고 했다.“서재에서 일하기 불편하지 않아?”“불편해.” 태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딸이 그린 붉은 선을 비싼 액자에 넣어 걸었다. 내가 치울까 묻자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그건 그냥 둬.”◇ 첫 신발을 사러 온 가족이 아동화 가게에 갔다. 직원은 이음이 발을 잰 뒤 흰색, 노란색, 빨간색을 꺼냈다. 태윤은 소재를 살피며 흰색을 가리켰다. 해준이는 노란색이 빠를 것 같다고 했다.
이음이가 소파를 붙잡고 서기 시작한 뒤로 거실은 바빠졌다. 작은 발이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해준이가 뒤를 따라다녔다.“넘어져, 이음아.” 태윤은 모서리마다 보호대를 붙이고 낮은 탁자까지 치웠다. 내가 안전 교육장 같다고 하자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넘어질 곳을 줄인 거야.” 어느 오후, 이음이가 소파에서 손을 뗐다. 한 발을 내디딘 뒤 그대로 주저앉았다. 태윤의 손이 먼저 나갔지만, 딸은 울지 않았다. 매트를 짚고 몇 번 미끄러진 끝에 혼자 다시 일어섰다.“안 일으켜 줘도 되는 거야?”“응. 다시 해 보려나 봐.” 이음이는 아빠 쪽을 돌아봤다. 태윤이 바닥에 앉아 팔을 벌렸다.“이음아. 이리 와.” 딸은 아빠 얼굴과 바닥을 번갈아 보고, 잡았던 천을 다시 만졌다. 태윤은 더 부르지 않고 기다렸다. 해준이가 내 무릎에 기대 속삭였다.“아빠 숨 안 쉬어.” 태윤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해준이의 손을 잡았다. 소파 모서리 보호대가 조금 삐뚤었는데, 태윤은 접착력이 약해진다며 다시 붙이는 것도 막았었다. 그 아래서 딸의 발이 바닥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천에서 떨어졌다. 한 발, 두 발, 세 발. 맨발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음이는 휘청일 때마다 발가락을 벌렸다. 거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해준이가 내 옷을 당기는 힘으로 그 아이도 숨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태윤은 팔을 뻗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아빠.” 태윤의 얼굴이 무너졌다. 마
건우 아버지가 손을 뻗는 순간, 가방 안에서 긴급 호출을 작동시켰다.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등록해 둔 경비실과 태윤에게 현재 위치와 함께 자동으로 시작된 현장 녹음이 전송됐을 것이다.“당신 때문에 다 잃었어!” 팔목을 잡혔다. 손을 빼려 했지만 남자의 손가락을 떼어 낼 수 없었다. 내 손톱만 피부를 긁었다.“놓으세요!” 남자의 팔이 올라갔다. 그때 주차장 끝의 비상등이 깜빡이고, 휴대전화에서 경비원이 오고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남자가 고개를 돌린 사이 팔을 빼서 차 뒤로 물러났다. 차체를 짚은 손까지 떨렸다. 구두 뒤축을 다시 딛고 거리를 벌렸다.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들었다. 발 아래에는 떨어진 선물 가방이 있었다. 태윤에게 어떻게 건넬지 생각하며 골랐던 시계인데, 지금 주우려고 몸을 낮출 수는 없었다. 복도 쪽에서 여러 명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맨 앞의 백화점 경비원이 남자를 막았다. 이어 박현석과 이동훈, 그리고 태윤이 들어왔다. 남자가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 둘이 붙잡았다.“이건 집안일이라고!”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볼 수 없었다. 붉게 자국이 남은 손목을 감싼 채 차 옆으로 기댔다. 태윤은 내 손목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주먹이 굳어 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태윤. 여기 있어 줘.” 한 번 더 말하려는데 이가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태윤이 재킷을 벗어 어깨에 둘렀다. 그의 손도 떨고 있었다.“알았어. 여기 있을게.” 그는 남자 쪽으로 가지 않았다.
지하 4층 전용 주차장에는 차 몇 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지상의 소란도 끊겼다. 배관을 따라 늘어선 희미한 조명이 검은 차체 위로 길게 번졌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공조기가 멀리서 낮게 울었다. 나는 시계 상자가 든 종이 가방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조용해서 내 발걸음이 필요 이상으로 크게 들렸다. 구두 굽이 콘크리트를 두드렸다. 차를 부를까 하다가, 몇 걸음 앞에 세워 둔 내 차로 향했다. 어쩐지 공기가 차가워 스카프를 당겼다. 딸깍, 딸깍. 내 발소리 뒤로 조금 늦은 소리가 따라왔다. 멈추자 그 소리도 멈췄다. 넓은 곳이라 울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차까지 몇 걸음. 가방 속 열쇠를 쥐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강태윤 아내는 팔자도 좋군.” 돌아보니 맞지 않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고, 손에는 꺾인 담배가 들려 있었다. 얼굴이 낯익은 것 같으면서도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누구시죠?” 차와 엘리베이터 중 어느 쪽이 가까운지 재고 있었다. 남자는 내 질문에 비웃음을 흘렸다.“유치원에서 멋대로 찍고, 내 아내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넣어 준 여자 얼굴을 내가 잊겠어?” 건우 아버지. 샛별유치원 앞에서 수정 씨의 뺨을 때리고, 라운지에서는 목을 잡았던 남자였다. 지금은 그때의 말끔한 모습도 없었다. 닳은 구두와 얼룩진 넥타이, 눈 밑의 깊은 그늘. 술 냄새가 가까워졌다.“그 영상 때문에 경찰이 끼어들고 변호사까지 왔어.
이음이와 해준이가 같은 밤 열이 났다. 거실 불을 낮춰도 잠을 못 이루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둘 다 옷자락을 붙들었다. 태윤이 돌아왔을 때 해준이는 겨우 졸고 있었다. 그는 소아과에서 받은 안내문을 들었다. 넥타이를 풀던 손이 멈췄다. 두 아이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다. 내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이음이가 옷자락을 잡았고 해준이는 눈을 뜨려 했다. 태윤은 먼저 아이들 가슴이 오르내리는 속도를 살폈다.“물은 마셨어?”“조금씩. 이음이는 38.1도, 해준이는 37.8도야.” 태윤은 아이들의 숨소리를 듣고 물과 갈아입힐 옷을 가져왔다. 약 먹일 시간을 적고 체온계를 곁에 놓았다. 침착해 보였지만 넥타이조차 풀지 못한 채였다. 한밤중에 해준이가 일어났다.“아빠…… 물.” 태윤이 등을 받치자 아이가 빨대로 두 모금 마셨다.“고마워.” 그 말에 태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 해준이는 다시 잠들면서 아빠의 소매에 뺨을 댔다.“이제 네가 자. 한 시간이라도.”“이음이가 울 거야.”“울면 안고 있을게. 네가 쓰러지는 것보다 낫잖아.” 딸을 넘기자 어깨가 가벼워졌다. 이음이는 잠깐 칭얼대다가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소파에 누워 그의 발소리를 듣다가 잠들었다. 아이를 안고 거실을 천천히 오가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또 울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새 나를 깨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침에 알았다. 눈을 뜨니 창가가 밝아 있었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