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비가 창을 두드렸고, 바람이 숲을 훑는 소리가 밤새 이어졌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아버지의 회사. 태윤이 숨긴 자료. 지후가 보여 준 문서. 서유라가 흘린 말. 그동안 나는 서로 다른 조각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 붙였다. 태윤이 윤성홀딩스를 무너뜨렸다. 나를 붙잡은 것도 복수와 소유욕 때문이었다. 지후는 그 진실에서 나를 구해 주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만큼은 이제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앞의 문장들도 다시 봐야 한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방문이 열렸다. 지후가 들어왔다. 손에는 태블릿과 얇은 파일철이 들려 있었다.“안 자네.”“무슨 일이에요?”“네가 그렇게 확인하고“주워.” 지후가 말했다.“싫어요.”“윤서린.” 처음으로 이름 전체를 불렀다. 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경찰이나 병원에 데려다 줘요.”“지금도 내가 널 해치려 한다고 생각해?”“내가 싫다고 한 일을 계속하려 하잖아요.”“널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는 거야.”“정상인지 아닌지, 그걸 왜 한지후 씨가 정해요?” 그가 다가왔다. 나는 침대 옆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뒤로 움직였다.“오지 마요.”“약 하나 먹는 게 그렇게 무서워?”“약이 무서운 게 아니에요.” 나는 그를 똑바로 봤다.“당신이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게 무서워요.” 지후의 발이 멈췄다. 그 순간 나는 테이블 위 물컵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지후가 반사적으로 아래를 보는 사이, 나는 창문 쪽으로 달렸다. 미리 봐 둔 보안 센서 케이블 덮개를 잡아당겼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경보음이 집 안에 울렸다.“뭐 하는 거야!” 지후가 달려왔다. 나는 창문에서 물러나 문 쪽으로 뛰었다. 예상대로 보안 이상을 확인하려고 잠금이 잠깐 해제되어 있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지후가 내 팔을 붙잡았다.“놔요!”“진정해!”“싫어!” 나는 몸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복도로 한 발 내
지후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아?”“그래서요?”“7년이야.”“7년 기다리면 사람을 가둘 권리가 생겨요?”“강태윤은 했잖아.”“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화냈다고 했잖아요.”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그 사람이 틀렸던 방식까지 따라 하면서 자기는 다르다고 말하지 마요.” 지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나는 그 사람처럼 너를 상처 입히지 않아.”“이미 상처 입혔어요.”“난 널 구했어.”“병원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준 것까지는 고마워요.”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그 뒤에 내 휴대전화를 가져가고, 문을 잠그고, 내가 입을 옷과 연락할 사람과 임신을 어떻게 할지까지 정하려 한 건 구해 준 게 아니에요.” 지후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찰싹. 뺨에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우리 둘 다 움직이지 못했다. 지후는 자기 손을 바라보며 창백해졌다.“……서린아, 내가…….”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오지 마요.”“미안해.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무슨 뜻이었든, 한 건 한 거예요.” 손바닥으로 뺨을 눌렀다. 지후의 눈이 흔들렸다. 잠깐, 그가 정말로 멈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ldqu
나는 태블릿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려 화면이 잘 눌리지 않았다. 재건안에는 자산 매각 순서와 채무조정, 핵심 사업 유지 방안이 적혀 있었다. 완벽한 구제 계획은 아니었다. 인력 감축 가능성도 있었고, 일부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조건도 보였다. 그런데 ‘해체 후 매각’과는 달랐다. 회사를 남기려는 문서였다.“태윤이 이걸 실제로 아버지에게 제안했어요?”“했어.” 지후가 말했다.“네 아버지는 처음엔 들으려고 했지.”“그런데 왜…….”“내가 다른 정보를 줬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후는 태블릿 안의 채권 양수도 내역을 가리켰다.“강태윤이 채권을 모으고 있다. 담보권도 확보하고 있다. 그 사실만 보여 주면 됐어.”“사실을 왜곡한 거네요.”“거짓말할 필요도 없었어.” 그가 웃었다.“사실만 보여 주고 먼저 의미를 정해 주면, 사람은 그쪽으로 읽으니까.” 가슴이 아팠다. 나도 그랬다.‘채권 취득’이라는 글자를 보고 약탈이라고 생각했다.‘담보 보전’을 보고 아버지의 회사를 잡아먹으려 했다고 확신했다. 그 뒤에 붙어 있던 재건안은 읽지 않았다.“당신이 아버지한테 태윤이 회사를 빼앗으려 한다고 말했어요?”“내가 직접 한 말도 있고, 주변을 통해 들어가게 한 말도 있어.”“왜.” 알면서도 물었다. 지후는 잠시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비가 창을 두드렸고, 바람이 숲을 훑는 소리가 밤새 이어졌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아버지의 회사. 태윤이 숨긴 자료. 지후가 보여 준 문서. 서유라가 흘린 말. 그동안 나는 서로 다른 조각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 붙였다. 태윤이 윤성홀딩스를 무너뜨렸다. 나를 붙잡은 것도 복수와 소유욕 때문이었다. 지후는 그 진실에서 나를 구해 주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만큼은 이제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앞의 문장들도 다시 봐야 한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방문이 열렸다. 지후가 들어왔다. 손에는 태블릿과 얇은 파일철이 들려 있었다.“안 자네.”“무슨 일이에요?”“네가 그렇게 확인하고 싶다니까 보여 주려고.” 그가 의자에 앉아 태블릿을 켰다. 화면에는 오래된 문서가 떠 있었다. 윤성홀딩스의 자금조달 현황, 단기채 만기 일정, 투자자 리스트. 7년 전 날짜였다.“이게 뭐예요?”“네 아버지 회사가 무너지기 직전 자료.”“어디서 났어요?”“한명금융 내부 프로젝트였으니까.” 그가 너무 태연하게 말해 순간 이해가 늦었다.“내부 프로젝트?”“윤성의 유동성을 끊고, 자산을 분리해 매각하는 구조.” 지후가 화면을 넘겼다. 한명캐피탈과 계열 운용사가 보유하던 채권, 투자자 회수 요청, 거래처 신용한도 축소가 시간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당신이 알고 있었어
지후가 테이블을 돌아 내 옆으로 왔다.“벗어.”“싫어요.”“그 목걸이.”“내 거예요.”“강태윤이 널 묶어 두려고 준 거잖아.”“처음에는 그랬을 수도 있어요.” 나는 목걸이 체인을 손으로 감쌌다.“하지만 지금 차고 있는 건 내가 선택한 거예요.” 지후의 손이 체인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몸을 뒤로 뺐다.“손대지 마요.”“서린아.”“한지후 씨.” 그가 멈췄다.“목걸이를 하고 있다고 내가 태윤의 소유물이 되는 건 아니에요. 벗는다고 당신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그런데 왜 못 벗어?”“못 벗는 게 아니라, 내가 안 벗는 거예요.” 나는 사파이어를 손바닥 안에 감쌌다. 지후의 얼굴이 굳었다.“그 사람은 네 아버지 회사를 무너뜨렸어.”“그것도 확인할 거예요.”“뭘 더 확인해? 문서가 있었잖아.”“문서가 있었다는 것과 당신 해석이 맞다는 건 다른 문제예요.” 숨이 조금 떨렸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나는 태윤이 한 모든 일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를 묶으려 했던 것도, 사실을 숨긴 것도 화가 나요.” 지후의 눈빛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말을 듣자 다시 얼어붙었다.“그건 내가 태윤이랑 직접 끝낼 일이에요. 대신 판단하지 마요.”&ld
저녁이 되자 방문이 열렸다. 지후는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 하나를 들고 있었다. 빛이 바랜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였다. 새것이 아니었다. 오래 보관한 레이스 특유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입어.”“싫어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나한테는 아니에요.” 지후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한숨을 쉬었다.“한 번만 맞춰 줘. 옛날 유럽 드레스야. 너한테 정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또 예전의 나한테요?” 그가 미소 지었다.“가장 아름다웠던 너에게.”“지금의 나는 싫어요?” 질문하자 웃음이 멈췄다.“지금의 너는 너무 많이 다쳤어.”“그러니까 지우겠다는 거예요?”“회복시키는 거야.” 그는 드레스를 침대 위에 펼쳐 놓았다.“오늘 저녁만 지나면 모든 게 정리될 거야. 내일 의사와 이야기하고, 그다음부터는 편하게 지내자.” 내일. 그 말에 배가 긴장했다. 나는 드레스를 바라봤다. 지금 거절해 문이 닫히는 것보다, 지후가 나를 아래층으로 데려가는 편이 낫다. 방 밖 구조를 다시 볼 수 있고, 사람 수와 출입구도 확인할 수 있다.“입을게요.” 지후의 얼굴이 밝아졌다.“정말?”“대신 혼자 갈아입어요.”“그래.” 그가 물러났다. 나는 문이 닫힌 뒤 드레스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