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울던 내 뺨을 태윤이 큰 손으로 닦아 주는 듯한, 너무도 제멋대로인 환상에 잠시 빠졌다.
“……하나도 안 변했네.” 베개를 품에 안고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비참하고 욕심 많은 비밀을 어떻게 입 밖에 내겠어. 그때였다. 쏴아……. 정적을 가르는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리는 방 안쪽, 문이 열린 드레스룸 너머의 욕실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샤워? “뭐……?”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식었다. 말도 안 돼. 이 시간에는 회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업무 안내에도 분명 ‘부재 중 청소’라고 적혀 있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계속됐다. 단단한 타일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누군가 저 안에 있었다. 설마…… 태윤이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도망쳐야 한다. 샤워 중인 지금, 소리 없이 빠져나가면 아직 늦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일어나려던 순간. 물소리가 뚝 끊겼다. 방 안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내 거칠어진 숨만 불편할 정도로 선명했다. 끝났다. 나온다. 몸이 굳어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은 안쪽의 뿌연 유리문에 박혀 버렸다. 찰칵. 금속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안에서 천천히 열렸다. 틈으로 쏟아져 나온 하얀 수증기와 함께 습기를 머금은 강한 기척이 방 안의 공기를 밀어냈다. 나타난 사람은 상의를 벗은 태윤이었다. 허리에는 흰 배스타월 한 장만 둘러져 있었다. 대충 쓸어 넘긴 젖은 검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넓은 이마와 곧은 콧날을 지나 깊은 쇄골로 흘렀다. 단단하게 잡힌 가슴과 선명한 복근. 예전의 마른 복학생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단련해 온 성인 남자의 몸이었다. 힘과 자신감이 남아도는 것처럼 보였다. “……!” 목이 막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품에 안고 있던 베개를 방패처럼 가슴에 눌러 붙이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는 당황스러움과 비누 향 사이로 밀려오는 짙은 체취 때문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태윤은 목에 건 다른 수건으로 거칠게 머리를 닦으며 자기 침실에 들어온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나를 내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차갑고 감정을 읽기 힘든 눈. 그런데 그 가장 깊은 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두운 불빛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 저…… 저는……!” 목이 바싹 말라 변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태윤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맞춘 채 다가왔다. 젖은 맨발이 두꺼운 카펫을 밟는데도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리가 좁아질수록 방을 채우고 있던 그의 향이 실제 체온과 젖은 피부의 습기까지 더해져, 도망칠 곳 없이 짙어졌다.물방울이 떨어지는 발이 눈앞에서 멈췄다.
태윤은 나를 벽 쪽으로 몰아세우듯 서더니, 내 품에 안긴 자기 베개를 내려다보고 짧게 코웃음을 쳤다. “……남의 냄새 맡는 게 네 청소 방식이야?” “아니에요! 이건 시트를 갈려고…….” 허둥대며 변명하자 태윤이 얼굴을 조금 가까이했다. “난 그냥 하우스키퍼예요, 그런 얼굴 하고 있네. ……여전히 거짓말은 못 하는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정곡을 찔린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어릴 때 네가 거짓말하면 받던 벌. 기억나?” 생각이 멎었다. 거짓말? 벌? 어릴 때 기억을 뒤졌다.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거나 간지럽히거나, 고작 그런 장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그 시절의 장난기가 없었다. 차갑고 무거운 감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 저 이제 애 아니거든요…….” “그럼 증명해.” 태윤은 짧게 비웃듯 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손을 폈다. 바스락, 얇은 포장지가 스쳤다. 큰 손가락 사이에 선명한 빨간 사탕 하나가 들려 있었다. 태윤은 포장을 벗겨 사탕을 자기 입에 넣더니 빈손으로 내 턱을 받쳐 고개를 들게 했다. “……!” 얼굴이 가까워졌다. 긴 속눈썹, 흔들림 없는 눈, 젖은 입술. 단정한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설마. “입 벌려.” 낮은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싫…….”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태윤의 움직임이 멎었다. 턱을 받치던 손가락도 곧바로 떨어졌다. “……그럼 안 해.” 너무 쉽게 물러나는 게 오히려 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를 노려봤다. “애 취급하지 마.” “안 해. 네가 고르라는 거야.” 그의 입술 사이로 빨간 사탕이 잠깐 보였다.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심장은 시끄럽게 뛰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피하지 않고 턱을 들었다. “……딱 한 번이에요.” 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닿은 입술은 뜨거웠고 딸기와 민트의 단맛이 섞여 있었다. 길지는 않았다. 내가 숨을 삼킨 순간 태윤이 떨어졌고, 입안으로 넘어온 사탕만 유난히 선명하게 남았다. “……달아?” 엄지로 자기 입술을 대충 훔치며 태윤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예전의 다정한 태윤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감정을 읽기 어려운 차가운 남자였다. “……최악이야.” 눈가가 뜨거워진 채 노려보자 짧은 웃음이 돌아왔다. “최고의 칭찬이네. ……뱉지는 마. 내가 주는 보너스니까.” 그는 손끝으로 내 턱을 가볍게 툭 치고 등을 돌렸다. “이제 나가. 곧 외출해야 해.” 넓은 등은 방금 전까지 나를 시험하듯 입을 맞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금세 차갑게 멀어졌다. 이미 관심도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듯했다. 얼굴이 뜨거웠다. 나는 앞치마로 입가를 가린 채 거의 뛰듯 방을 빠져나왔다. 입안에서는 그가 건넨 딸기 사탕이 도망칠 수 없는 단맛으로 계속 녹고 있었다.지후는 예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사건 때 생긴 상처가 얼굴에 남아 있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의자에 앉아 태윤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가 굳었다. 둘은 한동안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먼저 손을 뻗은 건 지후였다.『……왜 왔어.』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태윤도 수화기를 들었다.“네가 불렀잖아.”『내 꼴을 보러 왔나.』“그 목적이면 안 왔어.” 지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잠시 뒤,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서린이는……』 태윤의 손가락이 수화기를 세게 감쌌다.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후가 서린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무사해.” 지후가 눈을 감았다. 몇 초뿐이었지만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한 번만 만나게 해 줘.』 그 말에 속이 다시 거칠어졌다. 예전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내 여자야’라고 잘라 말했을 것이다. 태윤은 한 번 숨을 내쉬었다.“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야.” 지후가 눈을 들었다.“만날지 말지는 서린이 정해.”『……네가 그런 말을 해?』“나도 이상하긴 해.” 태윤이 씁쓸하게 웃었다.“나도 네가 했던 잘못과 닮은 짓을 한 적이 있으니까.” 지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나랑 같은 취급 하지 마.』“같다고 한 적 없어.”
결과가 화면에 뜬 순간, 숨을 참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었다. 강태윤 사내이사 해임안은 부결됐다. 잠시 뒤 여기저기서 박수가 시작됐다.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이겼다. 그 말을 마음속으로 떠올리기도 전에 온몸의 힘이 먼저 빠졌다. 구로구 원룸에서 관리비 고지서를 펼쳐 놓고 한참 계산하던 밤. 태윤이 아무 말 없이 편의점 도시락의 고기 반찬을 내 쪽으로 밀어 주던 모습. 예전에 함께 일했던 가사관리사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작은 협력업체들을 하나씩 찾아가던 날들. 그 모든 장면이 뒤늦게 가슴으로 돌아왔다.“서린.” 태윤이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도 잊은 듯 무릎을 굽혀 내 손을 감쌌다.“몸은 괜찮아?”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이제 와서?”“지금이니까.”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고마워.”“나 혼자 한 거 아니야.”“알아.” 태윤은 뒤쪽에 앉은 협력사 대표들과 베르트랑 측 인사, 법률자문단을 바라봤다.“그래도 네가 없었으면, 나는 중간에 다 부숴 버렸을지도 몰라.”“그러면 곤란하지.”“그래서 이제는 안 그러려고.” 놀랄 만큼 순순한 대답이었다. 태윤은 다시 일어나 마이크 앞으로 갔다.“오늘 의결 결과에 감사드립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현강은 아직 정상화 과정에 있습니다. 자금 문제도, 내부조사도, 오늘 하
박수가 멈추자 한명 측 주주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외부 조사자료의 진위와 법적 의미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동의합니다.” 태윤이 내 휠체어 옆에서 일어나 말했다.“그리고 오늘 안건도 그 조사 결과를 미리 단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는 앞쪽 화면으로 돌아갔다.“오늘 판단해야 할 건 제 이사직 유지가 현강에 이익인지, 그리고 회사가 계속 운영될 수 있는지입니다.” 베르트랑 측 문서가 화면에 표시됐다.“단기 브리지 한도는 최종 계약조건 확인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중장기 지원은 텀시트 단계이고 추가 실사가 남아 있습니다.” 태윤은 일부러 ‘해결됐다’고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적어도 내일 바로 유동성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전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어 협력사 목록이 나타났다. 거래를 유지하겠다고 회신한 회사들. 일부 발주에 선급금 조건을 검토하는 곳. 보유 지분은 작지만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러 온 주주들. 태윤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현강이 흔들리는 걸 알면서도 거래를 이어 가겠다고 해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명 측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소액 거래 몇 건으로 전체 유동성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압니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액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도 거래를 계속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그 신뢰를 숫자보다 작게 취급하지 않겠습니다.” 회의장은 다시
한명 측 주주 대표가 즉시 반박했다.“아직 계약도 체결되지 않은 텀시트입니다. 외국계 파트너의 지원 의사만으로 현강의 리스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맞습니다.” 베르트랑 이사는 담담했다.“그래서 승인 조건과 추가 절차를 명확히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저희는 현강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의 전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당장 자금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단순한 그림으로 해임안을 밀어붙이기 어려워졌다. 그때 뒤쪽에서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서린아.” 나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두꺼운 파일이 놓여 있었다. 최만호가 휠체어를 밀고, 정미숙과 세명의료원 간호사가 옆에 있었다. 태윤이 자리에서 내려왔다.“왔네.” 놀람과 걱정이 동시에 섞인 얼굴이었다.“메시지 봤어?”“회의 들어가기 직전에. 못 막을 거 알아서 박 실장한테 동선부터 확인했어.” 나는 작게 웃었다.“많이 배웠네.” 태윤은 간호사를 봤다.“조건이 어떻게 됩니까?”“90분 이내, 휠체어 유지, 증상 생기면 즉시 이동입니다.” 그제야 태윤이 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무리하러 온 거 아니야. 자료만 전달하고 앉아 있을게.”“알아.” 한명 측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해임 여부를 판단하시는 건 주주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저도 그 판단을 피할 생각 없습니다.” 그는 회의장을 천천히 둘러봤다.“다만 현강의 가치가 오늘 주가와 한명금융의 리스크 재검토 한 줄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화면에 현강 계열사의 주요 기술과 수주잔고, 고용 현황이 표시됐다.“현강이 보유한 회사들 중 상당수는 처음 인수할 때부터 정상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자금이 말랐고, 기술은 있었지만 버틸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윤은 다음 자료를 넘겼다.“그때 저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공장을 닫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든 판단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반발도 샀습니다.” 한명 측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나왔다.“미담을 들으려고 모인 자리가 아닙니다.”“맞습니다.”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숫자를 같이 보여 드리는 겁니다.” 인수 뒤 매출 회복률, 핵심 고객 유지율, 기술인력 잔존율. 무리하게 포장할 수 없는 지표들이 화면에 나왔다.“한명금융과 계약상 분쟁이 있다면 법과 계약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금융사가 리스크를 줄이는 판단도 존중합니다.” 그의 시선이 한명 측 주주 대표에게 향했다.“하지만 그 판단이 시장 전체의 공포로 확대됐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는 사업까지 급하게 잘라내는 선택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한 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도 현금이 없으면 사업은 멈춥니다.”“맞습니다.” 태윤
태윤이 떠난 뒤 나는 세명의료원 담당 의료진에게 먼저 연락했다. 며칠 전부터 혹시 오늘 움직여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상담해 둔 상태였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담당 교수는 조건을 붙였다. 이동 중에는 최대한 기대어 있을 것. 현장에서는 휠체어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체류는 90분 이내. 복통이나 출혈, 어지럼 증상이 있으면 즉시 돌아올 것. 간호 인력이 동행할 것. 나는 조건을 하나씩 확인했다. 무리해서 이기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이를 위험하게 하면서까지 현강을 지킬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자료를 내 손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박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주총장으로 갑니다. 담당 교수 조건 확인했고 간호 인력 동행합니다. 태윤에게도 전달해 주세요. 회의 전이라 못 보면 도착해서 말할게요.’ 잠시 뒤 답이 왔다.‘알겠습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바로 대기실로 이동할 동선 확보하겠습니다.’ 최만호와 정미숙도 이미 준비돼 있었다. 나는 넉넉한 검은 원피스를 입었다. 가방에는 약과 진료 요약지, 그리고 외부 법률사무소의 조사보고서 사본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배 위에 손을 올렸다.“엄마 조금만 다녀올게.” 휠체어에 앉자 정미숙 씨가 얇은 담요를 무릎 위에 덮어 줬다.“아가씨,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돌아옵니다.”“네.” 최 소장님이 문을 열었다.“그럼 가죠. 반격 본부에서 진짜 전장으로.” 피식 웃었다. 원룸 문이 닫혔다. 현강홀딩스 본사 대회의실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주주와 대리인, 기관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