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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명하는 밤

Auteur: 花柳響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8-02 00:14:12

 어두운 방 안에서 펜끝이 서류 위에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서명하면 돌아갈 수 없다.

 알고 있는데도 손가락이 떨렸다.

 검은 잉크가 내 생활을 휘감는 덩굴처럼 보여 시야가 흔들렸다.

 공식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다. 회사가 정한 상주 근무시간, 휴게시간, 업무 범위, 긴급 연락 절차가 적혀 있었다. 정상적인 계약이라면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태윤의 ‘추가 요청사항’이 놓여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직접 적힌 문장이 계속 눈에 걸렸다.

『내가 부르면 와. 시간 핑계 대면서 또 사라지지 마.』

 24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정식 조항은 아니었다. 회사 서류에도 분명히 업무시간과 휴식시간이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알 수 있었다.

 태윤이 원하는 건 청소와 세탁만이 아니다.

 내가 자기 시야 안에 머무는 것. 예전처럼 마음대로 등을 돌리고 사라지지 못하게 하는 것.

 법률 문장보다 더 노골적인 독점욕이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

 쉰 목소리가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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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제125화 해임안 부결

     결과가 화면에 뜬 순간, 숨을 참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었다. 강태윤 사내이사 해임안은 부결됐다. 잠시 뒤 여기저기서 박수가 시작됐다.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이겼다. 그 말을 마음속으로 떠올리기도 전에 온몸의 힘이 먼저 빠졌다. 구로구 원룸에서 관리비 고지서를 펼쳐 놓고 한참 계산하던 밤. 태윤이 아무 말 없이 편의점 도시락의 고기 반찬을 내 쪽으로 밀어 주던 모습. 예전에 함께 일했던 가사관리사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작은 협력업체들을 하나씩 찾아가던 날들. 그 모든 장면이 뒤늦게 가슴으로 돌아왔다.“서린.” 태윤이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도 잊은 듯 무릎을 굽혀 내 손을 감쌌다.“몸은 괜찮아?” 처음 한 말이 그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이제 와서?”“지금이니까.”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고마워.”“나 혼자 한 거 아니야.”“알아.” 태윤은 뒤쪽에 앉은 협력사 대표들과 베르트랑 측 인사, 법률자문단을 바라봤다.“그래도 네가 없었으면, 나는 중간에 다 부숴 버렸을지도 몰라.”“그러면 곤란하지.”“그래서 이제는 안 그러려고.” 놀랄 만큼 순순한 대답이었다. 태윤은 다시 일어나 마이크 앞으로 갔다.“오늘 의결 결과에 감사드립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현강은 아직 정상화 과정에 있습니다. 자금 문제도, 내부조사도, 오늘 하

  •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제124화 확인된 자료 위에서

     박수가 멈추자 한명 측 주주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외부 조사자료의 진위와 법적 의미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동의합니다.” 태윤이 내 휠체어 옆에서 일어나 말했다.“그리고 오늘 안건도 그 조사 결과를 미리 단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는 앞쪽 화면으로 돌아갔다.“오늘 판단해야 할 건 제 이사직 유지가 현강에 이익인지, 그리고 회사가 계속 운영될 수 있는지입니다.” 베르트랑 측 문서가 화면에 표시됐다.“단기 브리지 한도는 최종 계약조건 확인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중장기 지원은 텀시트 단계이고 추가 실사가 남아 있습니다.” 태윤은 일부러 ‘해결됐다’고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적어도 내일 바로 유동성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전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어 협력사 목록이 나타났다. 거래를 유지하겠다고 회신한 회사들. 일부 발주에 선급금 조건을 검토하는 곳. 보유 지분은 작지만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러 온 주주들. 태윤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현강이 흔들리는 걸 알면서도 거래를 이어 가겠다고 해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명 측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소액 거래 몇 건으로 전체 유동성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압니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액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도 거래를 계속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그 신뢰를 숫자보다 작게 취급하지 않겠습니다.” 회의장은 다시

  •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제123화 계약이 아닌 가능성

     한명 측 주주 대표가 즉시 반박했다.“아직 계약도 체결되지 않은 텀시트입니다. 외국계 파트너의 지원 의사만으로 현강의 리스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맞습니다.” 베르트랑 이사는 담담했다.“그래서 승인 조건과 추가 절차를 명확히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저희는 현강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의 전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당장 자금이 끊겨 회사가 멈춘다’는 단순한 그림으로 해임안을 밀어붙이기 어려워졌다. 그때 뒤쪽에서 휠체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태윤이 고개를 들었다.“……서린아.” 나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두꺼운 파일이 놓여 있었다. 최만호가 휠체어를 밀고, 정미숙과 세명의료원 간호사가 옆에 있었다. 태윤이 자리에서 내려왔다.“왔네.” 놀람과 걱정이 동시에 섞인 얼굴이었다.“메시지 봤어?”“회의 들어가기 직전에. 못 막을 거 알아서 박 실장한테 동선부터 확인했어.” 나는 작게 웃었다.“많이 배웠네.” 태윤은 간호사를 봤다.“조건이 어떻게 됩니까?”“90분 이내, 휠체어 유지, 증상 생기면 즉시 이동입니다.” 그제야 태윤이 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무리하러 온 거 아니야. 자료만 전달하고 앉아 있을게.”“알아.” 한명 측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제122화 마지막 설명

    “해임 여부를 판단하시는 건 주주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저도 그 판단을 피할 생각 없습니다.” 그는 회의장을 천천히 둘러봤다.“다만 현강의 가치가 오늘 주가와 한명금융의 리스크 재검토 한 줄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화면에 현강 계열사의 주요 기술과 수주잔고, 고용 현황이 표시됐다.“현강이 보유한 회사들 중 상당수는 처음 인수할 때부터 정상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자금이 말랐고, 기술은 있었지만 버틸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윤은 다음 자료를 넘겼다.“그때 저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공장을 닫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든 판단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반발도 샀습니다.” 한명 측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나왔다.“미담을 들으려고 모인 자리가 아닙니다.”“맞습니다.” 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숫자를 같이 보여 드리는 겁니다.” 인수 뒤 매출 회복률, 핵심 고객 유지율, 기술인력 잔존율. 무리하게 포장할 수 없는 지표들이 화면에 나왔다.“한명금융과 계약상 분쟁이 있다면 법과 계약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금융사가 리스크를 줄이는 판단도 존중합니다.” 그의 시선이 한명 측 주주 대표에게 향했다.“하지만 그 판단이 시장 전체의 공포로 확대됐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는 사업까지 급하게 잘라내는 선택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한 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도 현금이 없으면 사업은 멈춥니다.”“맞습니다.” 태윤

  •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제121화 내 발로 들어간 주총장

     태윤이 떠난 뒤 나는 세명의료원 담당 의료진에게 먼저 연락했다. 며칠 전부터 혹시 오늘 움직여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상담해 둔 상태였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담당 교수는 조건을 붙였다. 이동 중에는 최대한 기대어 있을 것. 현장에서는 휠체어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체류는 90분 이내. 복통이나 출혈, 어지럼 증상이 있으면 즉시 돌아올 것. 간호 인력이 동행할 것. 나는 조건을 하나씩 확인했다. 무리해서 이기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이를 위험하게 하면서까지 현강을 지킬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자료를 내 손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박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주총장으로 갑니다. 담당 교수 조건 확인했고 간호 인력 동행합니다. 태윤에게도 전달해 주세요. 회의 전이라 못 보면 도착해서 말할게요.’ 잠시 뒤 답이 왔다.‘알겠습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바로 대기실로 이동할 동선 확보하겠습니다.’ 최만호와 정미숙도 이미 준비돼 있었다. 나는 넉넉한 검은 원피스를 입었다. 가방에는 약과 진료 요약지, 그리고 외부 법률사무소의 조사보고서 사본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배 위에 손을 올렸다.“엄마 조금만 다녀올게.” 휠체어에 앉자 정미숙 씨가 얇은 담요를 무릎 위에 덮어 줬다.“아가씨,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돌아옵니다.”“네.” 최 소장님이 문을 열었다.“그럼 가죠. 반격 본부에서 진짜 전장으로.” 피식 웃었다. 원룸 문이 닫혔다. 현강홀딩스 본사 대회의실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주주와 대리인, 기관투자

  •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제120화 주총 전날의 공포

     태윤이 내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무서워.” 그가 낮게 말했다.“내일 현금이 모자라면,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은 끝났다고 볼 거야.”“응.”“주총까지 가면 더 심해질 거고.”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메시지 하나. 또 하나. 화면에 최만호의 이름이 떴다.‘구로 정밀부품 대표님, 편지 받으셨습니다. 기존 납품 계약 끊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어 정미숙의 메시지가 왔다.‘베르트랑 이사님 측 비서실에서 공식 자료 검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현강 해외사업팀과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번호에서 문자와 메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윤서린 님. 예전에 현강이 저희 회사를 인수하지 않고 운영자금만 넣어 준 덕분에 공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투자 여부는 별도 검토가 필요하지만, 납품과 거래는 계속하겠습니다.’‘강 대표에게 전해 주세요. 다음 달 발주 물량 일부는 선급금 조건으로 조정할 수 있는지 내부 검토하겠습니다.’‘저희가 가진 현강 주식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번 임시주총에는 직접 참석하겠습니다.’ 나는 한 줄씩 읽다가 눈가가 뜨거워졌다.“서린아?” 태윤이 몸을 일으켰다. 휴대전화를 건넸다.“네가 예전에 살려 둔 사람들이야.” 그는 화면을 오래 봤다.“내가?”“응. 다 기억하고 있더라.” 태윤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편지 보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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