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잣거리로 들어선 쿠란은 모화관에서 느꼈던 이질적인 분위기를 다시 한번 마주했다.백성들은 그를 스쳐 지나가면서도 곁눈질을 했고,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이상하다….'변방에서는 이런 시선을 보내는 자가 없었는데.쿠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하지만 그의 눈과 귀는 이미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소문을 좇고 있었다.몇 분을 더 걷던 쿠란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그곳은 한양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주막 앞이었다.쿠란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순간 멎었다.백성들은 그를 한 번 훑어본 뒤, 마치 피해야 할 사람이라도 되는 듯 슬그머니 양옆으로 몸을 비켰다.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쿠란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던 담벼락에는 커다란 벽보 한 장이 붙어 있었다.‘무슨 글이지…?’쿠란이 담벼락에 붙은 벽보를 한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옆에서 백성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저게 오늘 붙은 벽보라더라.”“거란족 사신이 조선 사람을 죽일 뻔했다잖아.”“그래서 다들 저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거지.”쿠란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그 순간 쿠란의 머릿속에 저잣거리에서 시비를 걸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이유도 없이 길을 가로막고, 거란족 사신단을 향해 끊임없이 모욕을 퍼붓던 모습.그때는 단순한 취객의 행패인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처음부터 우리를 모함하려 했던 것이었군.거란족 사신단을 흉악한 오랑캐로 몰아세우려는 계략이었다.'쿠란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고, 주먹을 쥔 손등에는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그는 벽보를 거칠게 담벼락에서 뜯어냈다.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족장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쿠란은 벽보를 움켜쥔 채 서둘러 모화관을 향해
-수양대군의 집 사랑채-사랑채에는 등잔불만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문밖에는 심복 무사들이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었고, 방 안에는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대신 몇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한 채, 무거운 침묵만이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다들 와 주어 고맙네.”수양대군은 둘러앉은 대신들을 천천히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오늘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거란족 사신단 맞이하는 일 때문이네.”그 말에 대신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그 일이라면 이미 금성대군이 전하의 명으로 변방으로 가지 않았습니까”한 대신이 조심스럽게 묻자, 수양대군은 말없이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왕께 올릴 상소문일세.”대신이 두루마리를 펼치자 수양대군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번 거란족 사신단을 궁에서 맞이할 사람은 금성대군이 아니라 나, 혹은 자네들 가운데한 사람이 되어야 하네.수양대군의 말이 끝나자 사랑채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대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끗 바라볼 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이윽고 수양대군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대신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대군마마의 뜻은 충분히 헤아리겠사옵니다."그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두루마리를 내려다보았다."허나 그 일이 어디 그리 쉽겠사옵니까.""이미 금성대군께서 변방까지 나가 거란족 사신단을 맞이하고 계십니다.사신단 또한 금성대군의 얼굴을 익혔을 터이니, 지금 와서 접대하는 사람을 바꾸려 한다면오히려 의심을 사 자칫 거란족이 조선을 불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수양대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것이네.금성대군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그리고 물러나게 할 명분은 내가 만들었네”“그게 무엇입니까?”“백성들의 눈과 입을 이용한 것이네.”수양대군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마 지금쯤 저잣거리 곳곳에는 벽보가 붙고, 그 내용을 본 백성들이 소문을 퍼
저잣거리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자, 낮에 거란족 사신단에게 시비를 걸었던 왈자패들이 하나둘 외진 골목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곳에는 낮에 문지기 장정들에게 돈을 건네며 일을 맡겼던 삿갓 쓴 사내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시킨 대로 거란족 사신단을 확실히 도발했습니다."왈자패 두목이 낮게 말했다."다만 끝에 정체 모를 스님들이 나타나 일을 막았습니다.그건 괜찮은 겁니까?"사내는 담담하게 웃었다."상관없다.호법승이라 해도 결국 승려다. 함부로 사람을 해치거나 먼저 칼을 휘두르지는 못한다.그들의 계율이 스스로를 묶고 있으니.“"그럼 우리 일은 끝난 겁니까?"문지기 장정이 묻자 사내는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아직 아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오늘 낮 저잣거리에서 벌어진 일을 이 벽보에 적어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마다 붙여라.“그 말에 왈자패 두목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거드름을 피웠다.“좋습니다.헌데 이번 일까지 하면 품삯은 더 얹어 주는 거겠지요?”사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너희가 한동안 노름판을 전전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챙겨 주지.”그 말에 왈자패 두목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는 두루마리를 품속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소.그 약속, 꼭 지키시오.”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다시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그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의 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자 왈자패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가자.오늘 밤 안에 저잣거리 곳곳에 이 벽보를 붙여 버리자.”그들은 두루마리를 품에 감춘 채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저잣거리와 주막 입구를향해 흩어졌다.그리고 몇 초 뒤.골목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호법승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연장자인 스님이 말없이 손짓을 하자 호법승들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내 그들은 서로 다른 골목으로 흩어져 조금 전 왈자패들이 사라진 방향을 뒤쫓기 시작했다.발걸음은 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 조용
변방을 벗어나자 풍경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끝없이 이어지던 설원 대신 연둣빛 새싹이 돋아난 들판이 펼쳐졌고, 길가의 나무에는 작은 꽃망울이 하나둘 피어오르고 있었다.겨우내 움츠렸던 대지가 천천히 숨을 돌리는 듯했다.변방에서 두터운 모피를 걸쳤던 백성들 대신, 이곳 사람들은 한결 가벼운 옷차림으로 길을오가고 있었다.“족장님, 조선 땅은 참 신기합니다. 변방에 있을 때만 해도 우리 거란처럼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벌판이었는데, 보십시오. 벌써 저렇게 연둣빛이 올라오고 있습니다.”족장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뒤 담담히 말했다.“원래 조선은 지역마다 계절의 차이가 크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무 놀랄 것은 없다.”쿠란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족장을 바라보았다.“조선에 대해서도 제법 알고 계시는군요.계절마다 풍경이 달라진다는 것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족장은 옅게 웃었다.“별것 아니다. 어릴 적 변방 백성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원래 내가 이것저것 궁금한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지.”앞서 말을 몰던 금성대군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귀에 담았다.'역시 예사 인물이 아니다.''보기보다 식견이 넓고, 사람을 다루는 법도 안다.거기에 호기심까지 많다…. 이 사람이라면 조선을 적으로만 보지는 않을 수도 있겠군.'금성대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전하… 어쩌면 거란의 족장은 조선에 있어 예상보다 훨씬 든든한 패가 되어 줄지도모르겠습니다.'“이제 여기서 조금만가면 저잣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여독을 풀고 가면될 뜻 한데 어떻습니다.”금성대군이 말을 족장 옆으로 살짝 옮긴 후 족장에게 의견을 묻자 족장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도록 하지”반시경을 더 가니 나온 저잣거리는 시장통과 맞물려 있어 꽤나 씨끌벅쩍한 곳이었다.그래서인지 거란족 사신단의 구경거리도 제법 있는 곳이라 다들 구경하기 바빴다.“여기 저잣거리는 다른 곳과 다르게 시장 활성화 제법 잘 된 곳이라 좀 복잡해 볼일겁니다.”
금성대군은 음식을 먹는 내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하루빨리 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이 주막은 북방을 오갈 때마다 여러 번 들렀던 곳이었다. 지금까지는 오늘처럼 괜한 시비를 거는 손님이 나타난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래서 일부러 이곳을 사신단의 식사 장소로 정한 것이기도 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한 소란이 벌어진 탓에 주막 안의 분위기는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혹시라도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금성대군은 슬며시 거란족 사신단을 바라보았다.이번에는 족장이 말렸다고 해도, 부하들까지 끝까지 참아 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 작은 다툼 하나가 조선과 거란 사이의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었다.“입에 맞지 않소?”“예?”금성대군의 굳은 표정을 눈치 챘는지 족장이 먹던 음식을 놓고는 굳은 얼굴의 의중을 묻자얼른 굳은 얼굴을 바꾸고는 음식을 마저 먹었다.아까 일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족장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나도 거란의 족장이 되기 전에는 북방의 작은 부족에서 말을 몰고 짐승을 사냥하며 살아가던 사람이었소.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지금은 이렇게 수많은 부족과 병사들을 이끌고 있지만 말이오.”뜻밖의 말에 금성대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이곳 변방의 백성이었다고...?'족장은 그런 금성대군의 표정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쉽게 하지 않았으니까.”
허름한 주막 뒤편.기름등 하나가 희미한 불빛을 내뿜는 방 안에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있었다.방바닥에는 엽전과 몇 냥짜리 은전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술 냄새와 담배 연기가 뒤섞여 방 안을 가득메우고 있었다."한 판 더!""이번엔 내가 가져간다!"사내들은 쌍륙패를 굴리거나 투전패를 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이긴 자는 술잔을 높이 들고 웃었고, 진 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엽전을 다시 끌어모았다.문가에는 칼을 찬 장정 둘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혹시라도 포졸이 들이닥치면 바로 사람들을 흩어 보내기 위해서였다.“누구시오? 노름하러 온 거요?”삿갓을 눌러쓴 사내가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정들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며 물었다.사내는 말없이 삿갓을 벗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호패를 꺼내 잠깐 보여 준 뒤, 엽전이 묵직하게 담긴 주머니 하나를장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이건 착수금이다.”장정의 눈빛이 달라졌다.사내는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안에 들어가 싸움깨나 하는 왈자패 몇을 골라라.며칠 안으로 거란족 사신단이 이 길을 지나간다. 그때 어떤 식으로든 시비를 걸어라.”내의 말에 장정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싸움만 벌어지면 된다.일이 끝나면 약속한 돈의 두 배를 주겠다.”'두 배.'그 한마디에 장정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좋소. 하지만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니고 거란족 사신단이오. 일이 커질 수도 있으니, 두 배를 주겠다는 약속만은꼭 지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