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 구두였다.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한 가죽 구두. 그 위로 곧게 뻗은 다리와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이 이어졌다.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길이 갔다.
정하은은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국회의원회관에도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회의실 분위기를 바꾸는 인간들.
당대표. 장관. 기업 총수. 그리고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정하은을 바라보았다. 정하은도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일어났군.”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낯선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길게 늘어선 식탁.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어린 이벨리아. 그리고 식탁 맨 끝에 앉아 있는 남자.
아버지였다.
로세트 가문의 가주, 에드문드 로세트.
기억 속에서도 두 사람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정하은은 눈앞의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좋은 아버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에드문드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뒤에는 중년 남자 둘과 의사로 보이는 노인이 따라 들어왔다.
에드문드는 침대 맞은편에 멈춰 섰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에드문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있나.”
어색했다. 딸에게 하는 말 같지 않았다. 너무 사무적이었다.
“없어요.”
에드문드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의사에게 턱짓했다.
“확인해.”
“예, 가주님.”
노인이 앞으로 나왔다. 손목을 잡고 맥박을 확인했다. 눈동자를 살피고, 빛을 비춰 보기도 했다.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네.”
“속은 메스껍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머리 통증은요?”
“조금 있어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에서 구르셨으니 당연합니다. 다행히 뼈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만, 머리를 부딪힌 흔적이 있습니다.”
“기억은 어떠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의사의 손이 멈칫했다.
“잘 모르시겠다니요?”
“기억나는 것도 있고, 안 나는 것도 있어요.”
“어느 정도까지 기억하십니까?”
정하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말하는 건 위험했다. 정보는 줄수록 약점이 된다.
“이름은 기억해요.”
“말씀해 보십시오.”
“이벨리아 로세트.”
자신의 이름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입에 익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분들은요?”
정하은은 에드문드를 보았다.
“가주님.”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의사의 눈이 흔들렸다. 뒤에 서 있던 중년 남자 둘도 서로를 바라봤다.
정하은은 그 반응을 보고 알았다.
방금 답은 틀렸다.
딸이라면 아버지라 불러야 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이 남자를 아버지보다 가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재밌었다.
아주 조금.
에드문드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감정 없는 눈이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모양이군.”
의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충격 때문일 수 있습니다. 며칠 경과를 지켜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일상생활은.”
“당분간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에드문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그게 전부였다. 이유를 묻지도 않았고, 언제 돌아오는지 재촉하지도 않았다.
정하은은 문밖에서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가주님도 관심 없는데.
적어도 그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찰은 한동안 더 이어졌다. 의사는 팔을 들어 보라고 했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했고, 간단한 질문을 몇 개 더 던졌다. 정하은은 순순히 대답했다.
십여 분쯤 지났을 때, 노인이 뒤로 물러났다.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에드문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중년 남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
에드문드가 그를 바라봤다.
“상단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알고 있다.”
“카이든 도련님도 도착하셨습니다.”
카이든.
그 이름이 나오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은근한 자부심이 떠올랐다.
이벨리아의 기억 속에서 카이든 로세트는 뚜렷하지 않았다. 얼굴은 흐릿했지만 이름은 선명했다.
에드문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문 앞에서 멈춰 정하은을 다시 바라봤다.
“몸이 나으면 나오도록 해라.”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드문드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그대로 방을 나갔다. 의사와 수행원들도 뒤따라 사라졌다.
문이 닫혔다. 정하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주님이라.”
별의별 인간을 다 봤다. 그런데 방금 그 남자는 조금 달랐다.
차가운 게 아니라 무관심했다. 미워하지도, 아끼지도 않는다. 그저 분류한다.
쓸 수 있는 것. 쓸 수 없는 것. 위험한 것. 버릴 것.
아마 이벨리아는 오래전부터 네 번째였을 것이다.
그때 문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와 달리 가볍고 여유로운 발소리였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었다.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하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잘생겼다. 그것도 꽤.
옅은 금발에 나른한 인상. 입가에는 웃음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정하은을 바라봤다.
한참을. 정말 한참을.
“뭐지.”
정하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는 입꼬리만 올렸다.
“말도 하네.”
“…….”
“죽을 줄 알았는데.”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말투가 묘했다. 다행이라는 건지, 아쉬워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벨리아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남자에 대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지?”
남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진짜 기억이 없나 보네.”
남자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 로세트. 네 둘째 오빠. 안타깝게도.”
레온은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이든 형님은 기억해?”
“이름은.”
“그럼 제대로 기억하는 건 아니네.”
레온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로세트 상단의 후계자야. 아버지가 가장 믿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분은 바쁘시지. 상단 회의, 외부 상단 접견, 중앙 쪽 손님들까지. 너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러 올 만큼 한가하지 않아.”
“너는 한가한가 보구나.”
레온은 잠시 정하은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 살아났으니 다행인가.”
전혀 다행으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는 문으로 걸어가다가 잠시 멈췄다.
“참.”
정하은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음부터는 계단에서 떨어질 때 조심해.”
회의가 끝난 뒤, 카시안은 곧바로 항구로 향했다.해가 아직 남아 있어 부두에는 사람이 많았다. 짐을 나르는 인부들 사이로 선원들이 오갔고, 정박한 배마다 수리를 서두르고 있었다.블랙우드의 배는 부두 가장 안쪽에 정박해 있었다.카시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배를 손보는 선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체 옆에서는 선원들이 낡은 판자를 긁어내고 있었고, 갑판 위에는 수선을 기다리는 돛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거기 말고 아래부터 보라니까!”갑판 위에 서 있던 사내의 목소리가 터졌다.판자를 살피던 선원이 고개를 들었다.“아래는 괜찮습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 비켜봐.”사내는 선원을 옆으로 밀어내고 판자를 몇 번 밟았다. 그러다 같은 자리를 다시 눌렀다.“이거 뜯어.”“선장님, 아직은 쓸 만합니다.”“그러니까 뜯으라고. 완전히 썩고 나서 바꿀 거야?”선원이 입을 다물었다.“옆도 같이 열어봐. 여기만 이럴 리 없으니까.”“예.”선장은 몸을 돌리다 갑판 한쪽에 놓인 밧줄을 발견했다.“이건 또 왜 여기 있어?”젊은 선원이 얼른 나섰다.“조금 있다가 돛대 쪽에서 쓰려고 가져다 놨습니다.”“그럼 거기다 갖다 놔야지. 왜 길을 막아?”“금방 옮기려고 했습니다.”“사람 하나 넘어지고 나서 치울 셈이냐. 당장 치워.”선원이 밧줄을 안아 들고 급히 움직였다.“뛰지 마!”선장은 혀를 차며 다시 선체 쪽을 살폈다.“거기 긁고 있는 놈들! 겉만 벗기지 말고 못 박힌 자리까지 확인해! 지난번에도 거기서 물이 샜잖아!”멀리서 대답이 돌아왔다.“보고 있습니다!”“봤으면 썩은 데를 찾아내!”그제야 선장이 부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카시안을 발견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쉰을 훌쩍 넘긴 그는 햇빛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른쪽 눈썹에서 관자놀이까지 이어진 흉터가 주름 사이로 깊게 남아 있었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는 오래된 상처가 겹겹이 보였다.선장은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카시안을 내려다봤다.“웬일이야?”카시안이 배에 오르
정하은은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안 됩니다.”“읽지도 않았잖아요.”“제목을 봤습니다.”보고서 맨 위에는 큼직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남쪽 대륙 원정의 필요성.정하은이 슬쩍 뒤집어 놓았다.“그래도 이야기는 들어봐야죠.”정하은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카시안이 펜을 내려놓았다.“말해보시죠, 부인.”정하은은 뒤집었던 보고서를 다시 돌렸다.“첫 번째.”“예.”“다른 상단이 먼저 항로를 발견할 수도 있어요.”“발견하게 두면 됩니다.”“그 상단이 남쪽에서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찾아내면요?”“필요한 물건이면 그때 가서 사면 됩니다.”“비싸게 팔 텐데요.”“우리는 돈이 많습니다.”“먼저 도착하면 그 돈을 아낄 수 있잖아요.”“위험을 생각한다면 나중에 사는 편이 싸게 먹힙니다.”정하은은 잠시 카시안을 바라보다 다음 장을 넘겼다.“아직 안 끝났어요.”“다행입니다.”“뭐가요?”“저도 아직 차를 다 마시지 못했습니다.”정하은은 카시안의 찻잔을 봤다.절반도 줄지 않았다.“오래 걸릴 줄 알고 천천히 마신 거예요?”“예.”“그걸 또 인정하네요.”카시안은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해보세요.”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폭풍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폭풍이 오는 시기를 피하면 되지 않을까요?”“언제 오는지는 아십니까?”“조사하면…….”“보이지 않는 암초도 있다고 했습니다.”“그건 경험 있는 항해사를 구해야죠.”“그 바다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정하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카시안이 말을 이었다.“거대한 해양 생물이나 촉수가 달린 괴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우리도 무기를 준비해 가야죠.”“바닷속에 있을 텐데, 어떤 무기를 준비하실 겁니까?”정하은은 말문이 막혔다.카시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그렇게까지 가고 싶으십니까?”“네.”“왜요?”이번에는 대답이 더 늦었다.정하은은 창밖을 바라봤다.멀리 뻗은 길 끝으로 마차 한 대
나무판자가 솟구치고 화물이 바다로 쏟아졌다.괴물은 한동안 세이렌호를 뒤흔들었다.그러다 갑자기 그것 하나가 배에서 떨어졌다.나머지도 뒤따라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왜 우리를 놓아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소.”돛대 하나가 완전히 부러졌고, 갑판은 곳곳이 뜯겨 나갔다. 선체 옆 판자도 크게 벌어져 물이 빠르게 차올랐다.선원들은 나무판으로 벌어진 곳을 막고, 틈새를 메우며 밤낮으로 물을 퍼냈다.부러진 돛대 탓에 배는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해류에 떠밀렸다.“그 상태로 계속 떠밀린 겁니까?”카시안이 물었다.“그렇소.”그렇게 사흘인지 나흘인지 흘렀을 무렵, 세이렌호가 모래사장에 걸렸다.선원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배에서 내려왔다.서른다섯 명 가운데 그때까지 죽은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다친 사람은 훨씬 많았다.“그곳에 사람이 있었어요?”정하은이 물었다.에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우리가 먼저 발견한 건 발자국이었소.”모래 위로 맨발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세이렌호의 선원들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 흔적을 따라갔다.숲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창을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그들의 피부는 밤처럼 짙었고, 몸에는 얇은 천과 동물 가죽을 둘렀다.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손을 들어 적의가 없다는 뜻을 보였다.하지만 세이렌호의 선원 하나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는 순간 싸움이 시작됐다.“겁을 먹고 뽑은 거였소.”에드릭이 말했다.“하지만 그들에게는 공격으로 보였겠지.”창이 날아왔다.칼을 뽑은 선원의 어깨를 그대로 꿰뚫었다.검사와 전투 경험이 있던 선원들이 앞으로 나섰다.검사는 상대 한 명을 쓰러뜨리고, 곧이어 날아온 창도 피했다.그러나 옆에서 다른 사람이 달려들자 막지 못했다.“강했어요?”정하은이 물었다.에드릭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강하다는 말로 부족했소.”그들은 숲속을 뛰어다니는 짐승처럼 빨랐다.모래 위에서도 발이 빠지지 않았고, 풀숲에서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창은 길었지만 움직임을 방해하지
남쪽 대륙에 관한 조사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그동안 두 사람 앞에 여러 보고서가 올라왔지만, 확실한 단서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삼십 년이나 지난 흔적이었다.일주일 만에 답이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그날도 정하은은 카시안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단풀 액과 어울릴 만한 재료를 시험하고 있었다.살롱에 내놓을 시원한 차를 만들 생각이었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맛이 나오지 않았다.카시안은 책상 앞에서 막 도착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잠시후 그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남쪽으로 떠났던 배 한 척을 찾았습니다.”정하은의 시선이 곧바로 그에게 향했다.카시안이 보고서를 내밀었다.정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받아 들었다.이십육 년 전, 새로운 교역지를 찾기 위해 남쪽으로 출항한 세이렌호.서른다섯 명이 배에 올랐고, 이 년하고도 석 달 뒤 열세 명이 돌아왔다.보고서 아래에는 귀환 당시 작성된 승선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정하은은 그중 동그라미가 쳐진 이름 하나에 시선을 멈췄다.에드릭 베인.“이 사람을 찾은 거예요?”“그렇습니다.”정하은은 보고서를 한 장 넘겼다.에드릭 베인은 오랫동안 선원으로 일하다 십여 년 전 은퇴했다. 지금은 벨로아 항에서 서쪽으로 이틀가량 떨어진 작은 항구 마을에 혼자 살고 있었다.조사원이 대가를 제시하며 항로에 관해 물었지만, 그는 돈을 거절했다. 대신 자신을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만나서 확인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정하은은 보고서에서 눈을 들었다.“저택으로 데려오는 게 어때요? 직접 만나보고 싶어요.”“알겠습니다. 마차를 보내겠습니다.”에드릭 베인이 블랙우드 저택에 도착한 것은 사흘 뒤였다.마차에서 내린 노인은 생각보다 왜소했다.등은 조금 굽어 있었고, 해진 외투 아래로 드러난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한쪽 다리를 절었으며 왼손의 손가락 두 개는 윗마디가 없었다.희게 센 머리카락 아래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다.짙은 회색 눈동자가 마중 나온 하인과 저택의 입구, 창
“언제요?”“돌아온 뒤 일 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정하은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카시안은 다른 기록을 펼쳤다.“그보다 전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기록이 정확하진 않지만, 출발한 배는 있어도 돌아온 배는 없었습니다.”정하은은 지도 위에서 끊긴 선을 바라보았다.육지에서는 길을 잃어도 돌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마을이 있고, 강이 흐르고, 지나온 흔적이 남았다.바다는 달랐다.사방이 물이었다.지도에 없는 바다에서는 조금의 오차가 며칠 뒤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해류도 모르고, 정박할 항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의 식량과 물이 필요한지도 알 수 없고요.”카시안이 말을 끊었다.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더 밀어붙일 틈은 없었다.정하은은 입을 다물었다.그러나 시선은 지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카시안이 물었다.“무엇을 보고 있습니까?”“남쪽으로 내려간 기록이 있는 지점요.”“방금 설명을 듣고도 갈 길부터 찾는 겁니까?”“실패한 길이라도 기록은 남아 있잖아요.”“실패한 이유를 모르는 기록입니다.”“그러니까 조사해야죠.”카시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정하은은 지도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이 상선은 계절이 언제였어요?”“초여름입니다.”“바람의 방향은요?”“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출항한 항구는?”“남동쪽의 벨로아 항입니다.”“표류한 선원들이 발견된 곳은 서쪽 왕국이고요.”“그 사실만으로 항로를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지금은 못 해요.”정하은이 순순히 인정했다.“그래도 같은 계절의 바람과 해류 기록이 있다면 확인해 볼 수는 있잖아요.”카시안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정하은은 더 묻지 않았다.아직 상인의 말이 사실인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다만 카시안이 가진 정보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블랙우드는 직접 남쪽으로 배를 보내지 않았지만, 다른 상단의 실패 기록은 모으고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시작점은 될 수 있었다.카시안이 지도를 접지 않은 채 말했다.“
정하은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병을 바라보았다.투명한 병 안에는 단풀을 졸여 만든 액체가 절반쯤 담겨 있었다.그녀는 장미차에 단풀 액을 조금 풀었다.은은한 장미 향 뒤로 단맛이 부드럽게 따라붙자 한결 마시기 편해졌다. 하지만 결과물은 설탕물에 향을 더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레몬차도 비슷했다.상큼한 향과 단맛이 어우러지기는 했지만, 특별히 새로운 맛은 아니었다.정하은은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화이트살롱에서 장미차와 레몬차를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해도 손님들의 반응은 뜨거웠다.머리를 손질하러 왔다가 차를 맛본 손님들은 다음 방문에도 같은 차를 찾았다. 어떤 영애는 살롱에서 마신 것과 같은 찻잎을 구해 달라며 사람을 보내오기도 했다.하지만 이제는 손님들에게도 익숙한 차가 되었다.여전히 즐겨 마시기는 했지만, 더는 잔을 들여다보며 차의 이름이나 찻잎을 묻지 않았다.“뭔가 아쉽네.”정하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그렇다고 단풀 액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었다.오히려 반대였다.향이 거의 없어 다른 재료의 풍미를 해치지 않았고, 물에도 잘 섞였다. 적은 양만 넣어도 단맛이 분명하게 느껴졌다.어디에든 쓸 수 있는 재료였다.그만큼 무엇과 섞느냐가 중요했다.살롱에서 내놓는 음료는 대부분 따뜻했다.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차는 본래 따뜻하게 마시는 것이었다.하지만 날이 더워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드레스를 입은 채 땀을 참으며 뜨거운 차를 마시는 영애들을 볼 때마다, 시원한 음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가장 간단한 방법은 얼음을 넣는 것이었다.그러나 여름의 얼음은 비쌌다.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할 만한 시설을 갖춘 귀족가도 많지 않았다. 화이트살롱에서 소량만 내놓는다면 가능하겠지만, 블랙살롱의 여러 지점까지 확대하기는 어려웠다.정하은이 원하는 것은 화이트살롱에서만 맛볼 수 있는 비싼 음료가 아니었다.처음에는 화이트살롱에서 유행을 만들더라도, 나중에는 여러 지점에서 내놓을 수 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