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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Author: 정하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14:22:52

정하은은 주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선반 위에는 여러 종류의 찻잎 통이 놓여 있었다. 향신료 상자도 있었다. 식재료는 많았고, 상태도 좋아 보였다.

문제는 어제와 오늘 자신의 방에 올라온 식사였다.

구색만 갖췄을 뿐, 로세트 장녀에게 내놓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장부.”

베티가 멈칫했다.

“예?”

“식재료 배정 장부.”

주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베티의 표정이 굳었다.

“아가씨, 주방 장부는 집사장님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저희가 함부로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방 식사는 어디에 기록하지?”

“그건…….”

“기록 안 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가져와.”

베티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하은은 한 걸음 다가갔다.

“베티.”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베티의 눈썹이 꿈틀했다.

“로세트가 어떤 집이지?”

“예?”

“상인가문이지.”

“그렇습니다만…….”

“상인가문에서 장부를 숨기는 사람은 둘 중 하나야.”

정하은은 주방 안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도둑이거나, 도둑을 감싸는 사람이거나.”

베티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가씨!”

목소리가 높았다.

주방 안 사람들 몇몇이 움찔했다. 마리엔과 리사는 숨을 삼켰다.

정하은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베티를 조용히 바라봤다.

“소리쳤네.”

베티의 입술이 굳었다.

“저는 그저 억울해서…….”

“억울하면 장부를 가져오면 돼.”

베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하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도둑이라고 한 적 없어. 장부를 숨기는 사람이 그렇다고 했지.”

주방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정하은의 시선이 베티에게 고정됐다.

“그런데 너는 화를 냈어.”

베티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빠졌다.

“왜일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하은은 기다렸다.

기다림은 어렵지 않았다. 정치판에서 상대를 몰아붙일 때 가장 중요한 건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

침묵을 견디는 것. 상대가 제 발로 빈틈을 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베티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장부는…… 제가 아니라 헬가 님께 있습니다.”

헬가.

새 이름.

정하은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 넣었다.

“헬가는 누구지?”

“식기와 물품 배정을 관리하는 분입니다.”

“식재료도?”

“일부는요.”

“마리엔.”

마리엔이 움찔했다.

“예, 아가씨.”

“헬가를 불러.”

“지금요?”

“그래.”

마리엔은 베티를 힐끗 보았다.

“왜.”

마리엔의 얼굴이 굳었다.

“아닙니다.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마리엔이 급히 주방을 나갔다.

정하은은 그동안 주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리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리사가 허둥지둥 의자를 가져오려 하자, 정하은은 손을 들어 막았다.

“됐어.”

리사가 그대로 멈췄다.

“이미 늦었어.”

정하은은 차갑게 덧붙였다.

“주인이 주방 한가운데 서 있는데 아무도 의자를 권하지 않았다. 이것도 기억해두지.”

베티의 얼굴이 더 굳었다.

잠시 후, 복도 쪽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중년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허리춤에는 열쇠 꾸러미가 걸려 있었고, 손에는 기록판이 들려 있었다. 옷차림은 하녀보다 단정했고, 태도는 주방 사람들보다 더 딱딱했다.

여자는 정하은을 보자마자 멈칫했다.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가씨.”

마리엔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헬가 님입니다.”

헬가는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식기와 물품 배정을 맡고 있는 헬가입니다.”

정하은은 그녀를 바라봤다.

“장부.”

헬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떤 장부를 말씀하시는지요.”

“내게 배정되는 식사, 차, 식기, 세탁, 난방, 의복. 전부.”

헬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그런 것은 집사장님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익숙한 말투였다.

정중하게 거절하는 말. 상대를 만만하게 볼 때 자주 쓰는 방식.

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헬가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그럼 집사장에게 가자.”

헬가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예?”

“네 권한이 아니라며.”

“그건 그렇습니다만, 굳이 아가씨께서 직접…….”

“또 그 말이네.”

정하은은 천천히 주방 사람들을 둘러봤다.

“내가 직접 움직이면 곤란한 사람이 많은가 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헬가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아가씨께서 아직 회복 중이시니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걱정.”

정하은은 그 단어를 낮게 반복했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이 집에 이렇게 많았나?”

헬가의 입술이 굳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면 앞장서.”

헬가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하은은 한 걸음 다가갔다.

“헬가.”

“예, 아가씨.”

“네가 장부를 숨기는 게 아니라면, 집사장에게 가는 걸 두려워할 이유도 없겠지.”

헬가의 눈동자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정하은은 그 흔들림을 보며 생각했다.

이 집에는 숨기고 싶은 장부가 있다.

“앞장서.”

헬가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안내하겠습니다.”

주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정하은은 몸을 돌리기 전에 베티를 바라봤다.

“베티.”

베티가 움찔했다.

“예, 아가씨.”

“내일 아침부터 내 방에 올라오는 차는 오늘 주방 선반 맨 위 오른쪽에 있던 통에서 내.”

베티의 얼굴이 굳었다.

정하은은 방금 전 주방을 둘러보며 보았던 찻잎 통을 떠올렸다. 낯선 글자로 적혀 있었지만, 다른 통들과 따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은 당일 구운 것.”

“예.”

“과일은 잘린 것 말고 통째로.”

“예.”

“그게 어렵다면.”

정하은은 무심하게 말했다.

“누가 안 된다고 했는지 말해.”

베티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정하은은 그제야 주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공기가 달라졌다.

이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저 멀리 있던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는 속도가 어제보다 빨랐다. 시종들은 길을 비켜섰다.

정하은은 헬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마리엔과 리사는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두 사람의 발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복도 끝을 돌아 넓은 홀로 들어섰다.

홀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상단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떤 이는 서류를 들고 뛰었고, 어떤 이는 봉인된 상자를 확인했다. 먼지 묻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누군가에게 도장을 받아내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경비병들이 짐마차 통행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정하은에게 모였다.

이번에도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그들의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만 있지 않았다.

놀람. 불안. 그리고 아주 작은 경계.

좋다.

정하은은 그 시선들을 받아내며 걸었다.

그때 홀 한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맑고 가벼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조롱은 선명했다.

“이벨리아가 행차라도 하시나?”

정하은은 걸음을 멈췄다.

홀 한쪽에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부채로 입가를 가린 여자였다. 밝은 금발은 정성껏 말려 있었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예쁘다.

그리고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헬가가 작게 말했다.

“아가씨, 저분은…….”

정하은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굳이 지금 들을 필요는 없었다.

기억은 없지만, 몸은 반응하고 있었다. 이벨리아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두려움. 수치심. 오래 눌러온 감정.

정하은은 그 감각만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이벨리아가 피하던 사람이다.

젊은 여자는 한 걸음 다가왔다.

“정말 머리를 다친 모양이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주제도 잊은 걸 보니.”

홀 안의 공기가 굳었다.

헬가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마리엔과 리사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정하은은 여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물었다.

“누구지?”

여자의 웃음이 멈췄다.

홀 전체가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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