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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Author: 정하은

1화

Author: 정하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13:43:49

정하은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 진심도 연기할 수 있고, 충성도 흉내 낼 수 있다. 필요하면 사랑조차 만들어낼 수 있다.

이건 정치판에서 십 년을 구르며 배운 교훈이었다.

그래서 정하은은 늘 행동을 봤다. 말보다 중요한 건 선택이었다. 사람의 욕망은 결국 그 선택에서 드러났다.

**

국회의원회관의 밤은 조용했다.

대부분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복도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하은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사진. 계좌 내역. 녹취록. 문자 메시지. 호텔 출입 기록. 이름이 지워진 증언서 몇 장.

이게 공개되면 정치 생명은 끝이었다.

“실장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낮게 불렀다.

평소라면 큰소리부터 쳤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정하은은 그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물었다.

“왜요.”

“이번에는 진짜 위험합니다.”

“그동안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요?”

“농담이 아닙니다.”

“제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겁을 먹은 게 뻔히 보였다. 그래도 이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치판에는 저런 인간들이 많았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이익이 보이면 끼어든다. 그러면서 자기한테 피해가 오는 건 싫어한다.

“의원님은 뭐라고 해요?”

“가만히 있으랍니다.”

“당대표는요?”

“덮으라고 하죠.”

“저쪽에서는 뭐라던가요?”

남자는 눈을 피했다.

“안 그래도 전화가 왔었습니다.”

“봐달래요?”

“아뇨. 실장님 선에서 멈추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정하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자는 그걸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정하은이 저런 얼굴을 하면 보통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

“없던 일이라.”

“실장님.”

“네.”

“이번에는 정말 물러나야 합니다.”

“왜요?”

“그 사람을 건드리면 우린 다 죽습니다.”

정하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류철을 닫았다.

“그럼 덮죠.”

남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봤다.

“정말요?”

“그래요.”

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정하은은 그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람은 이상했다. 자신이 원하던 답을 들어도 불안해했다. 특히 정하은 같은 사람이 순순히 물러설 때는 더 그랬다.

“못 미더우세요?”

“정말 덮는 겁니까?”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남자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가 돌아간 뒤에도 정하은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계는 밤 열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정하은은 서랍을 열어 검은색 USB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평범했지만 안에 들어 있는 자료는 평범하지 않았다.

조금 전 남자에게 덮자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다만, 오늘은 아니었다.

정하은은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내일 오전 9시.]

수신인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정하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다. 누군가는 의원이 되고, 누군가는 감옥에 간다.

정치는 결국 순서의 문제였다.

그리고 정하은은 그 순서를 정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정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정하은은 정의를 믿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좋은 정치인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채 3년을 가지 못했다.

처음 배신한 사람은 상대 당 의원이 아니었다.

같은 편이었다.

두 번째도 같은 편이었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그때 정하은은 깨달았다.

정치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진실이 바뀌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정하은도 바뀌었다.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이기는 쪽에 섰다. 살아남는 쪽에 섰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승진은 더 빨라졌다.

서른둘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보좌관들은 그녀를 실장이라 불렀고, 의원은 비서실장이라 불렀고, 기자들은 그림자라고 불렀다.

정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문득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정하은이 모시는 의원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예, 의원님.”

“아직 안 갔나?”

“정리할 게 좀 있어서요.”

“그 자료는?”

“처리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은아.”

의원이 낮게 불렀다.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이름을 부를 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가끔 네가 무섭다.”

정하은은 웃었다.

“새삼스럽게요.”

“사람 하나 망가뜨리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해.”

“그럼 하지 말까요?”

“그건 또 아니지.”

정하은의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역시 정치인이었다. 더럽다고 욕하면서도 필요하면 쓴다. 싫어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의원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보자.”

“예.”

전화가 끊겼다. 정하은은 잠시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돌렸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또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정하은은 화면을 잠시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하은은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은 씨.”

낯선 목소리였다. 그런데 처음 듣는 목소리 같지 않았다.

“누구시죠?”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정하은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이죠?”

“당신 찾기까지.”

“누구냐고 물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모르겠죠.”

“뭘요?”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을 싫어하는지.”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망가뜨린 정치인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부족했다. 기자도 있었고, 기업인도 있었고, 검사도 있었다.

그중 누가 원한을 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여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 차례예요.”

그 순간 정하은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벽이 무너지고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사무실 전체가 흔들렸다.

무언가가 날아와 정하은의 몸을 덮쳤다.

의식이 멀어졌다. 소리도, 빛도 전부 뒤섞였다.

정하은은 쓰러지는 순간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누가.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가벼웠고, 무엇보다 너무 아팠다.

정하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천장에는 금빛 장식이 둘러져 있었고, 얇은 휘장이 침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순간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파왔다.

머릿속에 낯선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전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정하은은 이를 악물었다. 정치판에서 별의별 일을 겪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고통이 조금 가라앉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벽에는 값비싼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가구 역시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묵직했고, 카펫은 발이 푹 잠길 정도로 두꺼웠다.

최소한 돈 없는 집은 아니었다. 아니, 돈이 너무 많은 집이었다.

정하은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모르는 여자가 있었다.

아름다웠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긴 머리, 가는 턱선과 차분한 눈매. 하지만 어딘가 병약해 보였다.

정하은은 거울 속 얼굴을 한참 보다가 자신의 뺨을 만졌다. 촉감도 진짜였다.

꿈이 아니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이벨리아 로세트.

그리고 계단.

누군가에게 밀리던 감각.

정하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누군가 말했다.

“안에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굳이 뭘 그래. 깨어났으면 부르겠지.”

곧이어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장녀 아가씨인데.”

“장녀면 뭐해. 가주님도 관심 없는데.”

“맞아. 상단에서도 아무 일 안 맡기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지내는 거지.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정하은은 조용히 문을 바라보았다.

짧은 대화였지만 얻은 정보는 적지 않았다. 장녀. 가주의 무관심. 상단에서도 아무 역할이 없는 여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정하은은 침대 가장자리에 다시 앉았다.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 상황도 모르고 움직이는 건 정치 초년생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녀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얼굴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무 힘도 없는 여자. 누군가가 죽이려 했을지도 모르는 여자.

정하은은 낮게 중얼거렸다.

“재밌네.”

그때 문밖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복도 끝에서 걸음소리가 다가왔다. 무겁고 일정한 걸음.

정하은은 고개를 들었다.

누가 오는지는 몰라도, 문밖의 사람들을 입 다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곧 걸음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문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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