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밤새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유리창에는 아직 빗방울이 남아 있었고, 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들어왔다.
정하은은 햇빛이 닿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달라진 건 없었다.
낯선 몸. 낯선 방. 낯선 이름.
그 모든 것이 아직도 현실감 없이 느껴졌지만, 멈춰 있을 순 없었다.
당황은 짧게. 파악은 길게. 판단은 조용히.
그게 지금까지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정하은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조금 걷었다.
창밖으로 로세트 저택의 일부가 보였다. 넓은 정원. 길게 이어진 마차길. 그 너머로 줄지어 선 창고 건물. 그리고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저택이라기보다 상단 본부에 가까웠다.
하녀와 시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짐을 나르는 인부들, 장부를 든 남자들, 봉인된 상자를 확인하는 점원들, 마차에 물건을 싣는 이들까지 보였다.
돈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하은은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돈이 움직이는 곳에는 반드시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규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새는 구멍이 있다.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정하은은 커튼을 놓고 몸을 돌렸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들어와.”
문이 열리고 마리엔과 리사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식사 카트를 밀고 있었다.
“아침 식사입니다, 아가씨.”
마리엔이 말했다.
어제보다 말투는 공손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했다.
정하은은 식탁 앞에 앉았다.
빵은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과일도 상태가 나아졌다. 차향 역시 짙어졌다.
웃기게도, 어제의 한마디가 효과를 낸 모양이었다.
정하은은 차를 마시지 않고 물었다.
“알아왔어?”
마리엔의 손이 멈췄다. 리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내 방 식사와 차를 누가 정하는지.”
마리엔이 고개를 숙였다.
“주방에서 정합니다.”
“주방 누구.”
“그건…… 주방 전체에서 준비하는 일이라 특정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무난한 대답. 책임질 사람을 지우는 대답.
정하은은 수프 그릇 옆에 놓인 숟가락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은은한 소리가 났다.
“마리엔.”
“예, 아가씨.”
“너는 어제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
마리엔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닙니다.”
“나는 누가 정하는지 알아오라고 했지, 어디서 준비하는지 물은 게 아니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리사가 불안한 듯 마리엔을 바라봤다. 마리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희는 그저 음식을 받아오는 입장이라…….”
“좋아.”
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엔의 표정이 잠깐 풀렸다. 그 순간 정하은이 말을 이었다.
“그럼 받아온 곳으로 가자.”
“예?”
“주방.”
이번에는 두 하녀 모두 당황했다.
정하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가는 게 빠르겠네.”
“아가씨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
“아가씨, 몸도 아직 편치 않으시고…….”
“의사는 큰 이상 없다고 했어.”
“그래도 주방까지 직접 가시면…….”
마리엔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정하은은 그녀를 바라봤다.
“주방에 가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마리엔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대답은 빨랐다. 너무 빨랐다.
정하은은 그걸로 확신했다.
곤란한 일이 있다.
“그럼 가자.”
정하은은 식탁을 지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 아가씨!”
리사가 다급히 불렀다. 정하은은 멈추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셔야…….”
그제야 정하은은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봤다.
얇은 실내복. 방 안에서 입는 옷이었다.
확실히 이대로 나가면 우스울 것이다.
정하은은 방향을 틀어 옷장 앞으로 갔다.
옷장은 컸다. 그러나 안에 걸린 옷들은 이상할 만큼 비슷했다.
눈에 띄지 않는 옷들.
정하은은 옷들을 하나하나 넘기다가 가장 안쪽에서 멈췄다.
짙은 녹색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다른 옷들과 달리 선이 분명했다. 허리선도 또렷했고, 치맛자락도 지나치게 얌전하지 않았다.
이벨리아가 직접 고른 옷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실수로 남은 옷일까.
정하은은 그 드레스를 꺼냈다.
“이거.”
정하은은 드레스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두 하녀가 다가와 옷을 입히려 했다. 정하은은 손을 들어 막았다.
“됐어.”
“예?”
“내가 입어.”
마리엔이 당황했다.
“드레스는 혼자 입기 어렵습니다.”
“그럼 뒤에서 끈만 묶어.”
정하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쓸데없이 손대지 말고.”
두 하녀는 입을 다물었다.
옷을 갈아입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낯선 형태의 의복은 번거로웠고, 코르셋은 불편했다. 그래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하은은 몇 번 실수한 끝에 드레스를 걸쳤다.
마리엔이 뒤에서 끈을 묶는 동안, 정하은은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 이벨리아는 어제와 달랐다. 창백하고 힘없는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짙은 녹색 옷 덕분에 전보다 인상이 또렷해 보였다.
정하은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이제 좀 낫네.”
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에 있던 하녀 하나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시종도 발을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였다.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이쪽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벨리아 로세트가 방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이 집에서는 사건인 모양이었다.
정하은은 천천히 걸었다. 마리엔과 리사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그녀보다 반 걸음 앞서 걸었다. 주방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정하은은 멈춰 섰다.
두 하녀도 멈췄다.
“뒤로.”
마리엔이 멈칫했다.
“예?”
“내 앞에서 걷지 마.”
마리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예.”
정하은은 다시 걸었다.
작은 것부터였다.
권력은 거창한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가 먼저 걷는지. 누가 문을 여는지. 누가 허락 없이 말을 거는지. 누가 누구의 눈을 피하는지.
그 사소한 것들이 쌓여 서열이 된다.
정하은은 그런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사람이 많아졌다. 로세트 저택의 아래층은 위층과 전혀 달랐다.
위층이 가족과 손님을 위한 공간이라면, 아래층은 일하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넓은 홀 옆으로 작은 사무실들이 이어져 있었고, 문이 열린 방 안에는 장부와 상자, 봉인이 찍힌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멀리서는 주판알이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상인가문.
그 말이 이제야 조금 실감났다.
로세트는 단순히 부유한 귀족가가 아니었다.
돈이 지나가는 길목에 앉은 집이었다.
“주방은 이쪽입니다.”
마리엔이 낮게 말했다.
정하은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홀 옆 복도를 지나 주방 쪽으로 향했다.
주방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빵을 굽는 냄새, 고기를 굽는 냄새, 끓는 수프 냄새, 잘린 허브 향이 뒤섞여 있었다.
정하은이 들어서자 주방 안의 소음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칼질 소리가 멈췄다. 냄비를 젓던 손도 멈췄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중 가장 안쪽에서 뚱뚱한 중년 여자가 다가왔다.
흰 앞치마를 두른 여자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로…….”
말끝이 미묘했다.
예를 갖추려 했지만,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
정하은은 그녀를 바라봤다.
“누구지?”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마리엔이 급히 끼어들었다.
“주방장 베티입니다.”
“그래. 베티.”
정하은은 이름을 한 번 입에 올렸다.
“내 방 식사와 차를 누가 정하지?”
베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못 들었나?”
“아닙니다. 다만, 아가씨의 식사는 주방에서 정성껏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성껏.
정하은은 그 단어를 천천히 곱씹었다.
정치판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말 중 하나였다.
정성껏. 최선을 다해. 규정에 따라. 관례대로.
대부분 책임질 사람을 지우기 위해 쓰는 말이었다.
정하은은 주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선반 위에는 여러 종류의 찻잎 통이 놓여 있었다. 향신료 상자도 있었다. 식재료는 많았고, 상태도 좋아 보였다.문제는 어제와 오늘 자신의 방에 올라온 식사였다.구색만 갖췄을 뿐, 로세트 장녀에게 내놓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장부.”베티가 멈칫했다.“예?”“식재료 배정 장부.”주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베티의 표정이 굳었다.“아가씨, 주방 장부는 집사장님의 관리 아래 있습니다. 저희가 함부로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내 방 식사는 어디에 기록하지?”“그건…….”“기록 안 하나?”“그럴 리가 있겠습니까.”“그럼 가져와.”베티는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한 걸음 다가갔다.“베티.”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베티의 눈썹이 꿈틀했다.“로세트가 어떤 집이지?”“예?”“상인가문이지.”“그렇습니다만…….”“상인가문에서 장부를 숨기는 사람은 둘 중 하나야.”정하은은 주방 안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봤다.“도둑이거나, 도둑을 감싸는 사람이거나.”베티의 얼굴이 붉어졌다.“아가씨!”목소리가 높았다.주방 안 사람들 몇몇이 움찔했다. 마리엔과 리사는 숨을 삼켰다.정하은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베티를 조용히 바라봤다.“소리쳤네.”베티의 입술이 굳었다.“저는 그저 억울해서…….”“억울하면 장부를 가져오면 돼.”베티는 말을 잇지 못했다.정하은은 차분하게 말했다.“나는 네가 도둑이라고 한 적 없어. 장부를 숨기는 사람이 그렇다고 했지.”주방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정하은의 시선이 베티에게 고정됐다.“그런데 너는 화를 냈어.”베티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빠졌다.“왜일까.”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정하은은 기다렸다.기다림은 어렵지 않았다. 정치판에서 상대를 몰아붙일 때 가장 중요한 건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침묵을 견디는 것. 상대가 제 발로 빈틈을 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베티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장부는…… 제가 아니라 헬가 님께 있습니다.”헬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유리창에는 아직 빗방울이 남아 있었고, 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들어왔다.정하은은 햇빛이 닿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여전히 달라진 건 없었다.낯선 몸. 낯선 방. 낯선 이름.그 모든 것이 아직도 현실감 없이 느껴졌지만, 멈춰 있을 순 없었다.당황은 짧게. 파악은 길게. 판단은 조용히.그게 지금까지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었다.정하은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조금 걷었다.창밖으로 로세트 저택의 일부가 보였다. 넓은 정원. 길게 이어진 마차길. 그 너머로 줄지어 선 창고 건물. 그리고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저택이라기보다 상단 본부에 가까웠다.하녀와 시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짐을 나르는 인부들, 장부를 든 남자들, 봉인된 상자를 확인하는 점원들, 마차에 물건을 싣는 이들까지 보였다.돈이 움직이고 있었다.정하은은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돈이 움직이는 곳에는 반드시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규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새는 구멍이 있다.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정하은은 커튼을 놓고 몸을 돌렸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똑똑.“들어와.”문이 열리고 마리엔과 리사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식사 카트를 밀고 있었다.“아침 식사입니다, 아가씨.”마리엔이 말했다.어제보다 말투는 공손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했다.정하은은 식탁 앞에 앉았다.빵은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과일도 상태가 나아졌다. 차향 역시 짙어졌다.웃기게도, 어제의 한마디가 효과를 낸 모양이었다.정하은은 차를 마시지 않고 물었다.“알아왔어?”마리엔의 손이 멈췄다. 리사는 눈을 내리깔았다.“무엇을 말씀하시는지…….”“내 방 식사와 차를 누가 정하는지.”마리엔이 고개를 숙였다.“주방에서 정합니다.”“주방 누구.”“그건…… 주방 전체에서 준비하는 일이라 특정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무난한 대답. 책임질 사람을 지우는 대답.정하은은 수프 그릇 옆에 놓인 숟가락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은
정하은은 말없이 레온을 바라봤다.레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열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레온 도련님, 회의실에서 찾으십니다.”“알아.”“그리고 블랙우드 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레온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정하은은 그 이름을 놓치지 않았다.블랙우드.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과 함께 불쾌한 감정이 떠올랐다. 두려움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레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벌써?”“예. 혼담 관련 서류를 가져왔다고 합니다.”혼담.정하은은 그 단어도 놓치지 않았다.레온이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다.“아, 맞다.”그가 느긋하게 말했다.“네 남편 될 사람이지.”정하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레온은 그 침묵이 마음에 드는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기억 안 나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네.”“왜.”“알면 기분 나쁠 테니까.”“누군데.”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로세트의 그림자.”문이 닫혔다.정하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계단. 상단 회의. 카이든. 블랙우드. 혼담. 로세트의 그림자.짧은 시간 동안 나온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차례로 정리됐다. 정하은은 침대 난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폭발로 죽기 전까지 정치판에서 배운 게 하나 있었다.사람은 진실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은 잘 숨기지 못한다.레온은 자신이 살아난 걸 반기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굳이 계단 이야기를 꺼냈다.블랙우드라는 이름에는 이벨리아의 두려움과 체념이 남아 있었다. 혼담 이야기를 할 때 레온은 웃었다.적어도 축복받는 결혼은 아닌 모양이었다.정하은은 침대 난간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이벨리아.너 도대체 뭘 하고 살았던 거냐. 그리고 이 집은 너를 어디로 보내려던 거지.그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아가씨.”아까 들었던 하녀의 목소리였다.“들어와.”문이 열리며 젊은 하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정하은은
문이 열렸다.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 구두였다.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한 가죽 구두. 그 위로 곧게 뻗은 다리와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이 이어졌다.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길이 갔다.정하은은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국회의원회관에도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회의실 분위기를 바꾸는 인간들.당대표. 장관. 기업 총수. 그리고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들.남자는 아무 말 없이 정하은을 바라보았다. 정하은도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일어났군.”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낯선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길게 늘어선 식탁.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어린 이벨리아. 그리고 식탁 맨 끝에 앉아 있는 남자.아버지였다.로세트 가문의 가주, 에드문드 로세트.기억 속에서도 두 사람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정하은은 눈앞의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좋은 아버지는 아닌 모양이었다.에드문드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뒤에는 중년 남자 둘과 의사로 보이는 노인이 따라 들어왔다.에드문드는 침대 맞은편에 멈춰 섰다.“어디 불편한 곳은…….”에드문드가 잠시 말을 멈췄다.“있나.”어색했다. 딸에게 하는 말 같지 않았다. 너무 사무적이었다.“없어요.”에드문드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의사에게 턱짓했다.“확인해.”“예, 가주님.”노인이 앞으로 나왔다. 손목을 잡고 맥박을 확인했다. 눈동자를 살피고, 빛을 비춰 보기도 했다.“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네.”“속은 메스껍지 않으십니까?”“괜찮아요.”“머리 통증은요?”“조금 있어요.”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계단에서 구르셨으니 당연합니다. 다행히 뼈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만, 머리를 부딪힌 흔적이 있습니다.”“기억은 어떠십니까?”“잘 모르겠어요.”의사의 손이 멈칫했다.“잘 모르시겠다니요?”“기억나는 것도 있고, 안 나는 것도 있어요.”“어느 정도까
정하은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정확히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 진심도 연기할 수 있고, 충성도 흉내 낼 수 있다. 필요하면 사랑조차 만들어낼 수 있다.이건 정치판에서 십 년을 구르며 배운 교훈이었다.그래서 정하은은 늘 행동을 봤다. 말보다 중요한 건 선택이었다. 사람의 욕망은 결국 그 선택에서 드러났다.**국회의원회관의 밤은 조용했다.대부분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복도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정하은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손끝으로 두드렸다.사진. 계좌 내역. 녹취록. 문자 메시지. 호텔 출입 기록. 이름이 지워진 증언서 몇 장.이게 공개되면 정치 생명은 끝이었다.“실장님.”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낮게 불렀다.평소라면 큰소리부터 쳤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정하은은 그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물었다.“왜요.”“이번에는 진짜 위험합니다.”“그동안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요?”“농담이 아닙니다.”“제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겁을 먹은 게 뻔히 보였다. 그래도 이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정치판에는 저런 인간들이 많았다.위험한 줄 알면서도 이익이 보이면 끼어든다. 그러면서 자기한테 피해가 오는 건 싫어한다.“의원님은 뭐라고 해요?”“가만히 있으랍니다.”“당대표는요?”“덮으라고 하죠.”“저쪽에서는 뭐라던가요?”남자는 눈을 피했다.“안 그래도 전화가 왔었습니다.”“봐달래요?”“아뇨. 실장님 선에서 멈추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정하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남자는 그걸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정하은이 저런 얼굴을 하면 보통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없던 일이라.”“실장님.”“네.”“이번에는 정말 물러나야 합니다.”“왜요?”“그 사람을 건드리면 우린 다 죽습니다.”정하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다가 서류철을 닫았다.“그럼 덮죠.”남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