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집사장의 집무실은 홀 안쪽 복도 끝에 있었다.
그는 앞서 걸으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 있었고, 걸음도 아주 조금 빨랐다.
지금까지 이벨리아 로세트라는 이름은 관리하기 쉬운 이름이었을 것이다.
방에 넣어두면 조용했고, 주어진 것을 먹었고, 시키는 대로 입었으며, 불편해도 참았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 이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리하기 쉬운 이름이, 관리해야 할 문제로 변한 것이다.
집사장은 그것을 불쾌해하고 있었다.
좋다.
불쾌함은 감정이다.
감정이 생기면 실수를 한다.
“여기입니다.”
집사장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두꺼운 나무문에는 작은 금속 명패가 붙어 있었다.
집사장실.
집사장은 문을 열었다.
정하은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헬가와 마리엔, 리사도 뒤따라 들어와 문가에 섰다.
방 안은 깔끔했다.
책상 위에는 서류 몇 묶음이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잠금장치가 달린 서랍장이 있었고, 창가에는 작은 응접용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집사장이 정중하게 말했다.
“아가씨, 앉으시지요.”
정하은은 의자에 앉았다. 집사장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정하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
집사장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예?”
“네 이름.”
집사장은 고개를 숙였다.
“오르테스입니다. 아가씨.”
“오르테스.”
정하은은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내가 요구한 장부 보여줘.”
오르테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아가씨, 장부는 열람 절차가 있습니다. 특히 지출 장부는 담당자의 확인과 열람 사유가 필요합니다.”
정하은은 작게 웃었다.
또 절차.
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리한 사람들은 늘 절차 뒤에 숨었다.
절차상 어렵습니다. 검토가 필요합니다. 관련 부서와 협의하겠습니다. 확인 후 답변드리겠습니다.
말은 달라도 뜻은 같았다.
시간을 벌겠다.
정하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내 걸 내가 보겠다는 게 열람 사유야.”
오르테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당자는 누구지? 누구 확인을 받아야 하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택의 지출 장부는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럼 네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네.”
오르테스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규정상 열람할 범위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좋아.”
정하은은 바로 말했다.
“내 이름으로 배정된 것 전부.”
“전부라 하시면 범위가 넓습니다.”
“그래?”
정하은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식사. 차. 의복. 약값. 치료비. 난방. 시녀 배정. 방 관리. 그리고 교육비.”
교육비라는 말에 오르테스의 눈이 흔들렸다.
정하은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걸렸다.
“교육비도 있나 보네.”
오르테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재밌네.”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상단 장부 한 장 넘겨본 적 없다던데, 교육비는 배정되어 있었나 봐.”
오르테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정하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가져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르테스는 벽 쪽 서랍장으로 걸어갔다. 열쇠 꾸러미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골라 자물쇠를 열었다.
안에서 얇은 장부 세 권을 꺼냈다. 그는 장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최근 석 달치입니다.”
정하은은 장부를 내려다봤다.
“왜 석 달치지?”
“우선 확인하기 쉬운 범위부터…….”
“내가 석 달치라고 했나?”
오르테스의 손끝이 멈췄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기간이…….”
“내가 계단에서 떨어진 날 기준으로 반년 전부터 오늘까지.”
오르테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석 달 이전 장부는 별도 보관실에 있습니다.”
“그럼 가져와야지.”
“알겠습니다.”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정하은이 말했다.
“헬가.”
헬가가 움찔했다.
“예, 아가씨.”
“네가 가.”
“제가요?”
“오르테스는 여기 있어.”
정하은은 그를 바라봤다.
“네가 직접 가지러 가는 건 좀 그렇잖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안 보는 데서 장부를 만지게 할 만큼 널 믿지는 않아.”
오르테스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은 자리를 비우는 순간 말을 맞춘다. 장부를 바꿔 끼우고, 불리한 종이를 빼고, 누군가에게 상황을 알린다.
정하은은 그런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보관실은 헬가도 출입할 수 있지?”
오르테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럼 됐네.”
정하은은 헬가를 바라봤다.
“내가 말한 기간의 장부 전부 가져와.”
헬가는 도움을 청하듯 오르테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오르테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
헬가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예.”
헬가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정하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석 달치 장부 중 가장 위의 것을 펼쳤다.
식사비. 차. 의복 수선. 난방용 석탄. 약재. 시녀 인건비. 방 관리비.
그리고.
교육비.
정하은의 손이 멈췄다.
이벨리아 로세트.
개인 교습비.
상업 수리. 기초 회계. 제국 공용어 문서 독해. 항구 거래 관례.
아주 기초적이지만, 상단 사람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이벨리아의 기억에는 그런 수업이 없었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기다렸던 기억은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하녀가 들어와 말한다.
오늘은 선생님께서 못 오신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정하은은 장부를 넘겼다.
같은 항목이 매달 있었다.
개인 교습비. 지급 완료. 서명.
이름 하나가 보였다.
딜런 마크.
정하은은 손끝으로 그 이름을 짚었다.
“딜런 마크.”
오르테스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누구지?”
“아가씨의 개인 교습을 맡았던 선생입니다.”
“맡았던?”
“예.”
“나는 배운 기억이 없는데.”
오르테스는 침묵했다.
정하은은 고개를 들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확인하면 되겠네.”
오르테스의 표정이 굳었다.
정하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딜런 마크를 불러.”
“현재는 저택에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있지?”
“그 부분은 확인이 필요합니다.”
정하은은 장부를 덮었다.
탁.
작은 소리였지만 방 안을 충분히 울렸다.
“오르테스.”
“예.”
“방금부터 네 대답은 전부 같아.”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정치판에서 그런 대답을 하는 사람은 보통 둘 중 하나였어.”
“정치판이라 하시면…….”
정하은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모르거나.”
그녀는 장부 위에 손을 올렸다.
“숨기거나.”
오르테스는 말이 없었다.
정하은은 그 침묵을 받아들였다.
“네가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녀는 오르테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때 문이 열렸다.
헬가가 돌아왔다. 양팔에는 장부 네 권이 안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창백했다.
“말씀하신 기간의 장부입니다.”
헬가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정하은은 쌓인 장부들을 바라봤다.
여기서 전부 확인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 장부들은 내가 가져갈게.”
오르테스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원본 반출은 어렵습니다.”
“그럼 사본을 만들어.”
“사본 역시 승인 절차가…….”
정하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또 절차.”
오르테스는 입을 다물었다.
정하은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오르테스.”
“예.”
“나는 네가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오르테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뜻밖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 집 장부가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 보면, 적어도 네가 무능한 사람은 아니겠지.”
“…….”
“그러니 더 이상 무능한 척하지 마.”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정하은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무능한 사람은 실수할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유능한 사람이 모른 척하는 건, 선택이야.”
오르테스의 얼굴이 굳었다.
정하은은 그를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리엔과 리사가 급히 길을 비켰다.
이번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비켰다.
정하은은 문 앞에서 멈췄다.
“내 방으로 사본을 보내.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오르테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정하은은 고개만 살짝 돌렸다.
“안 보내도 돼.”
오르테스의 눈이 흔들렸다.
“대신 그렇게 되면, 네가 내 장부를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걸로 이해할게.”
잠시 후, 오르테스가 고개를 숙였다.
“보내겠습니다.”
그제야 정하은은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로 나오자 홀 쪽이 소란스러웠다.
하녀와 시종 몇 명이 한쪽 창가에 모여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하은도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택 앞에 검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 훤칠한 키. 햇빛 아래에서도 이상하게 가벼워 보이는 웃음.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정하은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
남자가 먼저 웃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하은은 그 웃음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입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정하은은 가까이에 있던 시종을 바라봤다.
“누구야?”
시종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블랙우드에서 오신 분입니다.”
정하은의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 향했다.
블랙우드.
레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략결혼.
로세트의 그림자.
정하은은 천천히 남자를 훑어봤다.
설마 저 남자가 그 정략결혼 상대인가.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하은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피할 생각은 없었다.
버리는 패라면, 판부터 바꾸면 된다.
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네.”여자들의 목소리가 겹쳤다.정하은은 방금 붙인 머리카락을 다시 떼어냈다.딸각.딸각.이번에는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뒤로 물러났던 사람들이 정하은의 손끝을 따라 가까이 왔다.정하은은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양옆에 붙였다.원래 머리는 뒤로 말아 올리고, 짧은 가닥을 얼굴 옆으로 내렸다.미라가 빗으로 몇 번 정리했다.몇 분 전과 또 다른 모습이 됐다.정하은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이건요?”주방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자기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목덜미 위로 올려봤다.하녀 하나도 같은 행동을 했다.“저도 저렇게 할 수 있습니까?”“머리 길이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요.”“이 색 말고 제 머리색으로도요?”“있어요.”“끝이 더 말린 건요?”“네. 그것도 있어요.”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머리숱이 적은 곳에만 붙일 수도 있어요?”“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까?”“매일 바꿔도 됩니까?”“긴 것과 짧은 걸 같이 써도 돼요?”“저 붉은색 좀 보여주세요.”조금 전까지 식탁 위의 머리카락을 꺼리던 사람들이었다.이제는 상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미라가 머리카락을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이쪽이 더 밝습니다.”“그건 뒤에 붙이는 길이예요.”“끝이 말린 건 눌리지 않게 잡아주세요.”주방 여자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자기 얼굴 옆에 대봤다.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너무 밝아.”“그래?”“붉은색이 더 나아.”“붉은색은 너무 튀잖아.”“그게 좋은 거 아니야?”두 사람은 벌써 자기 물건처럼 고르고 있었다.그렌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탁 한쪽으로 몰리자 접시를 먼저 치웠다.“음식 위로 넘기지는 마세요.”그는 빈 공간을 만들어 상자를 옮겨놓았다.여자들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따라갔다.엘린은 식탁 끝에 기대 서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며칠 동안 자신이 본 건 작은 금속 조각과 머리카락 묶음뿐이었다.정하은이 몇 번 붙였다 떼는 것도 봤다.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며칠 만에 식당 안이 제법 북적였다.그동안 모두 각자 맡은 일로 저택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작은짐 사업은 마일로가 맡았고, 로웬을 비롯한 실무진이 그 일을 도왔다. 카시안과 베라, 야라는 로세트 상단 일로 바빴다. 실렌과 노아도 단풀 마을의 사전 조사를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동쪽 창고에서 지내던 엘린은 그사이 식당을 오가며 블랙우드 사람들과 제법 얼굴을 익혔고, 비를 막는 마차 덮개도 완성했다.그렇게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정하은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베라가 카시안을 봤다.“새 마님은 오늘도 안 오십니까?”“곧 와.”카시안은 정하은의 빈 의자를 당겨놓았다.“오늘은 같이 먹겠다고 했어.”노아가 빵을 뜯다가 고개를 들었다.“새 마님 얼굴 본 지 꽤 된 것 같습니다.”“너도 며칠 없었잖아.”베라가 말했다.“떠나기 전부터 못 뵀습니다.”노아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요즘은 식당에 아예 안 오십니까?”음식을 내려놓던 주방 하녀가 말했다.“그동안은 일하시는 곳으로 가져다드렸어요.”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맞은편의 엘린을 봤다.“엘린은 알고 있습니까?”“뭘.”“새 마님이 그동안 뭘 하셨는지요.”엘린은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알아.”노아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뭡니까?”“곧 보면 알 텐데.”“조금만 먼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안 돼.”노아는 아쉬운 얼굴로 빵을 다시 뜯었다.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먼저 들어온 건 미라였다. 길쭉한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그 뒤로 정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갈색 머리카락이 등을 가득 덮은 채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짙은 갈색 사이에는 조금 밝은 가닥이 섞여 있었고, 끝부분은 부드럽게 말려 있었다.식탁 위의 말소리가 하나둘 끊겼다.평소 입던 드레스에, 분명 같은 얼굴이었다.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노아는 입에 넣으려던 빵을 멈췄고, 베라도 잔을 내려놓았다.정하은은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식당을 가로질렀다. 카시안 옆에 멈춰 선
“버려.”“뭔지는 봐야죠.”베라가 노아를 봤다.“문제는 너 하나로 충분해.”노아는 억울한 얼굴로 정하은을 보았다.“새 마님, 물건은 죄가 없습니다.”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사람이 문제죠.”노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베라가 짧게 웃었다.노아는 못 들은 척 첫 번째 물건을 내밀었다.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이었다. 둥근 나무판 가운데에 얇은 쇳조각이 들어가 있었다.“이건 생선 경매장에서 씁니다.”그가 엄지로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생각보다 크고 또렷한 소리가 났다.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노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이렇습니다.”그가 다시 눌렀다.딸각.몇 사람이 미간을 찌푸렸다.노아의 엄지가 세 번째로 움직이려는 순간 베라가 말했다.“손가락 접어.”노아가 멈췄다.“아직 설명이 남았습니다.”“입으로 해.”노아는 딸각쇠를 정하은에게 건넸다.“경매를 시작할 때도 쓰고, 살 사람이 참여한다고 알릴 때도 씁니다. 생선 공판장이 워낙 시끄러워서 목소리보다 이게 낫답니다.”정하은이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손끝에 얇은 쇠가 꺾였다 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이거 하나면 사람들이 돌아봐요?”“예. 저도 돌아봤습니다.”“그래서 사버렸어요?”“예.”“잘 만든 물건이네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그렇죠?”“소리 한 번에 손님 하나를 잡았잖아요.”노아가 잠깐 생각했다.“저는 손님이 아니라 조사하러 간 겁니다.”“돈을 냈으면 손님이에요.”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아.”노아는 딸각쇠를 바라보았다. 조금 배신당한 얼굴이었다.정하은은 한 번 더 눌렀다.딸각.그렌이 식당 문밖에서 들어오다가 멈췄다.“부르셨습니까?”정하은은 손안의 물건을 내려다봤다.“아뇨.”그렌은 노아를 봤다.“또 뭘 사 왔나 보군.”“또라니요. 오늘 처음 보여드리는 겁니다.”“네가 없는 동안 조용했다.”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딸각쇠를 보류 쪽으로 밀었다.“남
블랙우드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흩어졌다.정하은이 일주일을 줬지만, 정말 일주일을 다 쓰려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첫 번째 물건은 엘린이 온 날 저녁이 되기도 전에 들어왔다.마구간에서 일하는 소년이 작은 자루를 들고 식당으로 찾아왔다. 자루 안에서는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정하은은 자루와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뭘 잡아 왔어요?”“잡은 건 아닙니다.”“그럼 주웠어요?”“샀습니다.”소년은 제법 당당하게 자루를 열었다.안에는 손바닥만 한 잿빛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표면이 거칠고 군데군데 흰 결정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정하은이 하나를 집었다.“돌이네요.”“예.”정하은은 돌을 한 번 뒤집어봤다.“좋아요. 시작부터 예상 밖이네.”소년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말들이 좋아합니다.”“돌을요?”“계속 핥습니다.”정하은은 돌을 다시 보았다.“먹어봤어요?”소년이 손가락 끝을 조금 들어 보였다.“이만큼만요.”“왜요?”“말들이 너무 좋아해서.”정하은은 잠깐 소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해요. 남이 맛있게 먹으면 궁금하죠.”소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짭니다.”“소금이네요.”“예.”“말들이 좋아하고요?”“묶어두면 이것만 봅니다.”정하은은 돌을 자루에 내려놓았다.“좋네요.”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팔 수 있습니까?”“말한테요?”소년이 눈을 깜빡였다.“말은 돈이 없는데요.”정하은이 웃었다.“그러니까 주인한테 팔아야죠.”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말을 키우는 사람이면 삽니다.”“말이 좋아하는 걸 보여주면 더 잘 사겠네요.”“보여드릴 수 있습니다.”“그럼 이거 하나로 며칠이나 먹는지 알아와요.”정하은은 자루 안의 돌을 한 번 더 보았다.“말이 몇 번이나 쳐다보는지도.”소년이 잠깐 멈췄다.“쳐다보는 것도 셉니까?”“좋아한다면서요.”“예.”“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아야죠.”소년은 진지한 얼굴로 자루를 안았다.“세겠습니다.”그가 돌아가자 카시안이 물었
정하은은 조용히 엘린을 보았다.엘린은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그 말은 너무 솔직했다.망하면 바로 들킨다.정하은은 말했다.“망해도 돼.”엘린의 눈빛이 거칠어졌다.“그딴 말 쉽게 하지 마.”“쉽게 하는 말 아니야.”“망하면 욕먹는 건 나야.”“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시킨 거잖아.”곧 마차 한 대가 동쪽 창고 앞으로 들어왔다. 마차에는 빈 나무상자들이 실렸다. 그렌이 물통을 준비했고, 하인 둘이 옆에 섰다.정하은은 뒤로 물러났다.“시작해.”엘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그녀는 바로 감추듯 손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마차 위로 올라갔다. 접힌 나무틀을 펼치고, 짐과 옆판 높이에 맞춰 양쪽 받침의 위치를 조절했다. 틀이 자리를 잡자 기름 먹인 천을 씌우고, 끈을 당겨 마차 옆판 아래에 묶었다.움직임은 빨랐다.끈을 당기고, 고리를 맞추고, 천의 기울기를 보고, 앞쪽을 눌러 고정했다. 그다음 마차 바닥에 받침판을 깔고, 빈 상자들을 올렸다.엘린은 마차에서 내려와 말했다.“물.”하인 하나가 물통을 들었다.“위에서 한 번에 붓지 마.”정하은이 하인에게 말했다.“조금씩. 넓게.”물이 천 위로 떨어졌다.물방울은 천을 타고 양옆으로 내려갔고, 고리 아래 달린 끈을 따라 땅으로 떨어졌다. 짐 위로 떨어지는 물은 없었다.정하은은 마차 안쪽을 봤다.빈 상자들은 마른 상태였다.엘린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그때 그렌이 물었다.“마차가 움직일 때도 확인하시겠습니까?”엘린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정하은은 마차를 보았다.“천천히 움직여주세요. 물은 계속 붓고요.”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하인 둘은 양옆을 따라 걸으며 천 위로 물을 뿌렸다.처음 몇 걸음은 괜찮았다. 물은 그대로 양쪽으로 흘러내렸다.그러나 앞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팽팽하던 천이 순간 들렸다.그 틈으로 물방울 몇 개가 안쪽에 튀었다.“그만.”엘린이 소리치자 마차가 멈췄다.엘린은 말없이 올라가 안쪽 상자를 확인했다
블랙우드 저택의 문지기는 문 앞에 선 여자를 한참 바라보았다.여자는 젖어 있었다.비가 온 것은 아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아직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자의 머리카락 끝과 소매 끝은 눅눅했고, 치맛자락에는 마른 진흙과 새로 묻은 흙이 뒤섞여 있었다.뒤에는 작은 손수레 하나가 있었다. 수레 위에는 천으로 덮은 길쭉한 물건과 낡은 가방 두 개가 실려 있었다.여자는 문지기를 노려보았다.“이벨리아를 보러 왔어.”문지기는 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엘린.”“약속이 있으십니까?”엘린의 입술이 굳었다.없었다.없다고 말하는 순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엘린은 턱을 들었다.“전할 게 있어.”“무엇을 말입니까?”“그 여자가 말한 거.”“부인께서 말씀하신 것 말입니까?”부인.엘린은 그 호칭을 듣고 잠깐 표정이 굳었다. 로세트가 아니라 블랙우드. 정말 그렇게 됐나 보다.“그래. 그 부인이 말한 거.”문지기는 엘린 뒤의 수레를 보았다.“물건입니까?”“물건이든 뭐든, 네가 볼 건 아니야.”문지기는 더 묻지 않았다.“기다려주십시오.”문이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다. 작은 쪽문만 열리고, 안쪽으로 사람이 들어갔다.엘린은 닫힌 문 앞에 남았다.그녀는 수레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지만, 오늘은 그 위에 또 물집이 잡혔다.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동안 수레는 두 번이나 옆으로 기울었고, 진흙에 바퀴가 박혔을 때는 길가의 돌을 주워 받쳐야 했다.엘린은 이를 악물었다.쪽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집사처럼 보이는 마른 남자가 나왔다. 눈썹이 거의 없고,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였다. 손에는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그렌 모트입니다. 부인께 전달했습니다.”엘린은 바로 물었다.“그래서?”“부인께서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그렌은 수레 쪽을 보았다.“물건은 제가 옮기도록 하겠습니다.”“손대지 마.”그렌은 멈췄다.엘린은 수레 손잡이를 더 세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