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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샹차이 다다
연분홍빛 치마를 입은 여인이 사뿐히 걸어 나왔다. 가녀린 몸매에 빼어난 미모까지 더해져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김민희는 노부인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노부인, 큰마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러고는 종선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대인께서도 평안하셨습니까?”

종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곁에 있던 유씨가 웃으며 말했다.

“한집안 식구끼리 대인이라니,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느냐. 너보다 한 항렬 위이신 분이니 숙부님이라 부르거라!”

김민희는 곧바로 호칭을 고쳐 다시 인사를 올렸다.

“숙부님.”

하지만 종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종영이 가만있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김민희에게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일일이 평안하셨냐고 물으면서, 어째서 나만 쏙 빼놓는 거야? 나는 잘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거야?”

말투는 잔뜩 토라진 듯했지만, 두 눈은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 있었다. 생기 넘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김민희도 웃으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이제 너를 종영 아씨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왕 부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종영은 턱을 살짝 치켜들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누가 남편 성을 따라 부르래? 난 싫어!”

*

대청에 웃음꽃이 피었다. 종영이 돌아온 덕분에 늘 고요하고 엄숙하던 종씨 가문에도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유씨는 종선과 김민희를 번갈아 슬쩍 살폈다. 김민희는 줄곧 종영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종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종선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도 어려웠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씨가 김민희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에서야 둘째 나리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구나. 어른께 차 한 잔 올리는 것이 도리겠지.”

김민희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처음 종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도 노부인께 차를 올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화가 새 찻잔을 가져왔다.

김민희는 찻잔에 차를 따른 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종선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공손히 찻잔을 받쳐 올렸다.

“숙부님, 차 드십시오.”

종선이 손을 뻗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김민희는 종선이 찻잔을 받아 든 줄 알고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

그런데 찻잔이 그대로 미끄러지더니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진한 찻물이 튀어 종선의 옷자락까지 적셨다.

김민희는 순간 얼어붙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종선의 옷에 묻은 찻물을 닦아 냈다. 그러면서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유씨가 웃으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직 어린 데다 겁도 많은 아이라, 둘째 나리의 위엄에 눌려 찻잔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모양입니다.”

종영은 김민희가 정말 겁을 먹은 줄 알고 종선을 흘겨보았다.

“둘째 오라버니는 왜 늘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계세요? 민희가 놀랐잖아요!”

그러고는 김민희를 돌아보며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오라버니는 사내라 살갗도 두꺼우니, 찻물 좀 튀었다고 데지는 않을 거야.”

김민희는 제 실수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한 터라, 그저 자신이 덤벙대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며 속상해했다.

시녀들은 서둘러 바닥에 쪼그려 앉아 깨진 찻잔 조각들을 치웠다.

그렇게 주위가 어수선한 틈을 타, 종선이 불쑥 손을 뻗어 김민희가 들고 있던 손수건을 가져갔다. 그는 옷자락에 묻은 찻물을 대충 닦아 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별일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먼저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래, 어서 다녀오너라.”

노부인이 손짓하며 대답했다.

종선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려 대청을 나섰다.

그가 김민희의 손수건을 슬그머니 소매 속에 넣고, 손끝으로 천천히 움켜쥐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에 서 있던 월계는 멀어져 가는 종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월계는 김민희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게다가 서 있는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모든 상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종선은 분명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일부러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둘째 나리께서는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걸까?

그 뒤로도 월계는 줄곧 그 일을 곱씹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만 깊어질 뿐,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김민희는 월계가 넋을 놓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월계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종씨 가문의 가족 연회가 참으로 성대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김민희는 다시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으로 시선을 돌릴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듣자 하니 이번 가족 연회를 위해 종선이 특별히 궁중에서 요리사를 불러왔다고 했다. 웬만한 명문가에서도 쉽게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덕분에 김민희와 월계도 오늘은 종영 덕에 귀한 음식을 맛보게 된 셈이었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종선은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였다. 그에게 다시 차를 올리라는 말은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큰집의 첩실 둘 중 이날 연회에 참석한 사람은 여씨뿐이었다.

여씨는 유씨에 비해 집안의 지체가 낮았지만, 노부인의 친정 쪽 친척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노부인과 각별히 가까웠고, 첩실 신분이면서도 안주인인 유씨를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여씨에게는 아들이 없고 어린 딸 하나만 있었다. 그 때문인지 유씨 역시 그녀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도 겉으로는 제법 사이좋게 지냈다.

사실 도성의 다른 명문가들과 비교하면 종씨 가문의 안채는 평온한 편이었다. 여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지저분한 암투도 그리 많지 않았다.

종선이 아직 혼인하지 않아 집안에 여인이 많지 않은 데다, 노부인이 집안일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씨 가문에는 식사 중 말을 삼가야 한다는 식의 까다로운 법도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은 종영이었다. 종영은 여씨와도 곧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특히 재간둥이 종영 덕분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씨는 그런 와중에도 남몰래 종선을 살폈다. 하지만 종선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김민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이,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유씨는 눈을 내리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종선이 김민희의 신분을 알고 나서 마음을 접은 모양이었다. 사씨 가문과의 오랜 인연을 생각해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억지로 갈라놓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종선은 처리할 공무가 남아 있어 일찍 자리를 떴다. 노부인도 굳이 붙잡지 않았고, 종영만 아쉬운 듯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김민희는 종선이 자리에 있든 없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저녁 식사가 끝나고 무심코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으려던 순간, 손수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종선이 자신의 손수건을 돌려주지 않았다!

김민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마 별생각 없이 가져갔다가 돌려주는 것을 깜빡했을 것이다. 일부러 가져갔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종선처럼 지체 높은 사람이 제 손수건을 가져다가 어디에 쓰겠는가.

뒤에 서 있던 월계는 김민희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알아채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씨, 무슨 일 있으세요?”

주위에 종씨 가문 사람들이 있는 터라 김민희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월계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래도 김민희는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곱게 뻗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손수건은 여인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그저 잃어버리는 것이라면 별문제 없겠지만, 혹여 누군가 손수건을 빌미로 헛소문이라도 퍼뜨린다면 큰일이었다.

종선이 그런 비열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여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소문이 얼마나 쉽게 퍼질 수 있는지 김민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종선이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결국 곤란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김민희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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