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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해각
유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망나니 같은 놈!”

경양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벼루를 내던졌다. 봉현욱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피했다.

“남의 집 규수를 건드려 놓고,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 하다니!”

“제가 건드렸다고 다 책임져야 한다면, 부황께서는 만화루의 제일가는 기녀도 저에게 혼인시켜 주시지 그러십니까!”

봉현욱이 웃으며 말했다.

유시연은 내리깐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자신을 기녀와 나란히 놓는 것 자체가 이미 모욕이었다. 하지만 오늘 봉현욱에게 시집가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기녀보다도 못한 처지가 될지도 몰랐다.

“만화루의 여인들이 어찌 유씨 가문 규수와 견줄 수 있단 말이냐!”

경양제는 이 불효막심한 놈 때문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하오나 소자는 바로 그 만화루에서 저 여인을 품었습니다!”

봉현욱이 눈을 들어 웃으며 유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그리 애를 써서 본왕의 침상에 기어든 목적이 무엇이냐. 설마 네 가문에 전해진다는 보물 지도를 이어받을 자가 없어, 하필 본왕을 택한 것이냐?”

유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경양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녀는 실로 억울합니다. 벗과 차를 마시던 중 누군가에게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이미 현왕 전하의 침상 위였습니다. 소녀의 가문에는 보물 지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사옵니다. 게다가 현왕 전하와 함께 있던 당시 소녀의 옷은 모두 찢겨 있었고, 밖으로 나올 때는 전하의 옷을 걸치고 있었으니, 소녀가 무언가를 몸에 지니고 있을 리는 없사옵니다!”

봉현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이 여인은 제법 눈치가 빨라 그의 말을 빌려 보물 지도와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해 버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혹여 이 여인 몸에서 보물이라도 나올까 싶어 원앙이 수놓인 속옷까지 다 찢어 봤지만 아무것도 없더군요. 보물은커녕 골칫덩이 하나만 떠안았으니, 저는 못 합니다. 데려가고 싶은 자가 있으면 데려가라 하십시오!”

경양제가 벌컥 화를 냈다.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일은 네가 저질러 놓고서! 오늘 너는 원하든 원치 않든 반드시 혼인을 해야 한다! 여봐라, 유씨 가문 처자를 현왕부로 보내고, 사람을 붙여 현왕을 지키게 하라. 오늘 밤 안으로 혼례를 치르도록 하라!”

“오늘 밤이라고요?”

봉현욱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도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여 밤이 길어지면 또 무슨 변고가 생길까 저러시는 것일까?

“좋습니다. 기어이 저 여인을 소자 이불 속에 밀어 넣으실 작정이시라면, 나중에 후회 마십시오!”

봉현욱은 몸을 일으켜 투덜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 밤 혼례를 치르고, 내일 밤엔 들판에 시체나 내다 버려야겠군!”

“네 이놈……!”

경양제가 화가 치밀어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가, 바닥에 아직 무릎 꿇고 있는 유시연을 알아채고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저 못난 놈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거라. 지금 회임한 몸이니, 저 녀석도 함부로 너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시연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겉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함부로 어쩌지 못할 것이라니. 경양제는 제 아들의 냉혹함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봉현욱이 경용궁을 나서기 무섭게, 뒤에서 누군가 황급히 쫓아왔다.

봉현욱의 눈빛에 언뜻 웃음기가 스쳤으나, 몸을 돌릴 때는 어느새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복 대감, 무슨 일인가?”

“현왕 전하, 폐하의 구두 전갈이옵니다!”

서복이 웃으며 살짝 몸을 숙여 다가오더니, 나직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봉현욱이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서복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좋다. 부황의 체면을 봐서 받아들이지. 그 여인을 거두겠다!”

밤이 깊어지자, 현왕부 곳곳에 붉은 등롱과 길상을 뜻하는 오색 비단이 내걸렸다. 유시연은 몸에 잘 맞지 않는 혼례복을 입은 채 가마에 올라, 가마꾼들에게 실려 거리를 한 바퀴 돈 뒤에야 왕부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혼례를 알리는 폭죽 소리나 징과 북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실부인으로 봉해졌다면서도 혼례를 이리 대충 치르니, 그 자체로 이미 황당하고 기이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유시연은 그런 것에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쥔 붉은 면사를 꼭 움켜쥔 채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봉현욱의 태도를 보아하니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현왕부에 자리를 붙일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가마가 마침내 왕부 안까지 들어섰다. 천지신명께 절을 올릴 차례가 되었는데, 방 안에서 난데없이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시연이 의아해하며 혼례를 돕는 여인에게 물었다.

“어찌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입니까?”

혼례를 돕는 여인이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왕비마마, 전하께서 오늘 밤 급한 일이 있으셔서 오시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탉으로 전하를 대신하여 왕비마마와 함께 맞절을 올리라 명하셨습니다!”

유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수탉이 신랑을 대신하다니?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일을 용케도 생각해 내다니......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으니,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냥 자신의 부군이 한 마리의 닭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차라리 열흘이고 보름이고 밖에서 실컷 놀다 돌아오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자신도 왕부 안에서 자리를 잡을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급한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다던 신랑은, 바로 그 순간 만화루에서 귀족 자제들과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술이 세 차례 돌고 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취기가 올라 여인들을 끌어안은 채 음탕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국공부의 참화를 언급했다. 그는 한껏 달아올랐던 흥이 식은 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국공부의 큰아씨로 말하자면 도성 제일의 미인이자 이름난 규수였는데, 그리 방탕한 성품일 줄은 누가 알았겠나!”

소칠은 저도 모르게 느긋이 술잔을 기울이는 현왕 쪽을 살폈다. 감히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못했다.

“그러게 말일세. 온 가문이 몰살당하던 그 밤에, 어디서 외간 남자와 놀아나고 있었다지 뭔가! 그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뛰어 들어올 때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내 옷을 걸치고 있었다니까.”

그 외간 남자인 봉현욱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옷이 눈에 익던가? 본왕의 옷과 비슷하지 않던가?”

좌중이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그가 농담을 하는 줄로만 여겼다.

“현욱, 자네 참 재미있구먼!”

연후부 세자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유씨 가문 규수로 말할 것 같으면 심성이 곱고 단정하며 예의를 아는 데다, 비파 솜씨 하나만큼은 그야말로 천지를 울리고 귀신도 눈물짓게 할 정도인데, 도무지 그리 단정치 못한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네. 혹 누군가에게 모함당한 것은 아니겠나?”

진옥은 유시연의 온화하고 아름답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도무지 그런 여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옥세자,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속을 알 수 없다 하지 않던가. 자네가 못 봐서 그렇지, 유시연 그 몸매는 홍분루의 제일가는 기녀보다도 요염하더군.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정도였네. 그때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아는가, 저것이 내 밑에서 그리 울어 준다면야 원이 없겠다 싶었지!”

봉현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그날 밤 자신의 품 안에서 절박하게 애원하며 눈물을 흘리던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에 서늘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젓가락을 슬쩍 튕긴다는 것이, 그만 그자의 눈알에 정확히 박혀 버렸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왁자지껄하던 좌중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봉현욱에게로 쏠렸다.

눈빛이 몽롱한 것이 제법 취한 기색이 역력한 봉현욱은, 나머지 젓가락 한 짝을 든 채 순진무구한 얼굴로 웃었다.

“어, 젓가락이 어디 갔지? 왜 날아갔지? 아이고, 다리가 달렸나 보군.”

소칠은 순간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래도 명색이 왕비마마인데, 어찌 감히 누군가 함부로 입에 올리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좌중의 눈초리가 절로 실룩거렸다. 옥세자는 재빨리 하인에게 눈짓을 보내 그자를 끌어내게 했다.

봉현욱은 원래부터 속내를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감정이 순식간에 바뀌어도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다친 자 또한 고작 칠품 말단 관리 집안의 자제에 불과했으니, 크게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연회는 다시 이어졌지만, 봉현욱은 별안간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전하, 어디 가십니까?”

“오늘 밤 이 몸이 혼례를 치른다지 않느냐! 집에 가서 초야나 치러야겠다!”

좌중은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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