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녀는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실 끝을 건드렸다.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어머니였다. 연우는 숨을 멈췄다. ‘누군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목소리가 끊겼다. 연우는 황급히 바늘을 움켜쥐었다. “어머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머니!”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연우가 화들짝 돌아봤다. 이현이었다. 그는 연우가 움켜쥔 바늘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할까. 또다시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현이 다가왔다. “손을 펴 봐.” 연우가 망설였다. “이번에는 왜요?” “피가 나.” 그제야 연우는 손바닥이 따끔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바늘 끝이 살을 찌르고 있었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이현이 손수건을 꺼냈다. “놓아.” 연우는 천천히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감쌌다.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검은 비단 위에 금실로 작은 용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왕세자의 물건이었다. “이런 걸 제게 쓰시면…….”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래도 아깝지 않으십니까?” 이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손수건이?” “예.” “네 손보다?” 연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상처가 깊지 않은지 확인하고 천천히 손수건을 묶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연우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 손을 잡으면 꿈속으로 떨어질까 두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손을 놓는 순간이 더 신경 쓰였다. 연우는 황급히 다른 생각을 했다. ‘정신 차리자.’ 이 사람은 세자다. 자신은 대역이다. 그리고 진짜 세자빈은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저하.” “왜.” “세자빈 마마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이현의 손이 멈췄다. “그건 왜 묻지?” “뵙고 싶습니다.” “소명을?” “예.” 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어려워.” “왜요?” “소명이 있는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저는 그분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안 돼.”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하께서도 뵙지 못하십니까?” 이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한참 뒤 대답했다. “나도 허락을 받아야 하지.” 연우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왕세자가. 자신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이상했다. 너무 이상했다. 그때 이현이 낮게 말했다. “소명은 지금 대비전 깊은 곳에 있어.” 연우의 눈이 커졌다. “대비전이요?” “그래.” “왜 동궁전이 아니라…….” “그건 나도 알아내야 할 일이다.” 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소명이 쓰러진 날, 대비마마께서는 왕실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지.” “왕실의 비밀…….” “그리고 그날 이후 내 아내를 데려가셨다.” 연우는 더 묻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해졌다. 이현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또한 누군가에게서 진실을 숨김당하고 있었다. “저하!”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의 내관이었다.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라.” 내관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엎드렸다. “송구하옵니다.” 이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냐.” “분부하신 채씨 집안의 호적을 확인하였사옵니다.” 연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동생은요?” 내관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것이…….” 연우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내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현이 차갑게 말했다. “고하라.” “채씨 집안에는…….” 내관이 마른침을 삼켰다. “딸 하나만 올라 있사옵니다.” 연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라고요?” “호적상 채씨 집안의 자녀는 채연우 한 사람뿐이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제게는 동생이 있습니다.” “낭자…….” “아직 어립니다. 몸이 약해서 약도 먹고 있고요. 오늘 아침에도 제가 직접…….” 연우는 말을 멈췄다. 아침. 분명히 동생에게 약을 먹였다. 그런데 약을 먹일 때 어떤 말을 했지? 동생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흐릿했다. 얼굴은 떠오르는데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손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연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니에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있습니다.” 이현이 내관에게 물었다. “호적은 언제 작성된 것이냐.” “올봄에 갱신된 것이옵니다.” “그전 기록은?” “확인 중이옵니다.” “거주지에는 사람을 보냈느냐.” “예. 다만…….” 내관이 말을 흐렸다. 이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또 무엇이냐.” “채 낭자의 집이 비어 있다고 하옵니다.” 연우의 몸이 굳었다. “비어…… 있다고요?” “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연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동생이 집에 있습니다. 옆집 아주머니께 부탁도 드렸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돌봐 달라고…….” 그녀는 말을 멈췄다. 옆집 아주머니. 그 사람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얼굴마저 흐릿했다. 연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니야…….”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나씩. 아주 천천히. 마치 바느질한 천에서 실을 한 올씩 뽑아내는 것처럼. 이현이 다가왔다. “연우.”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를 봐.”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럼 내 목소리를 들어.”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기억하는 것을 말해.” “…….” “이름이 아니어도 돼. 동생이 어떤 아이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연우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약을…… 싫어합니다.” “그래.” “쓴 약을 먹으면 꼭 엿을 달라고 했습니다.” “또.” “겨울에는 제 이불 속으로 들어옵니다. 손발이 차가워서…….” 눈물이 흘렀다. “제가 바느질할 때 옆에 앉아 실을 감아 줍니다.”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연우는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연우가 숨을 멈췄다. ‘누나,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누나한테 제일 좋은 비단 사 줄게.’ 그 목소리. 그 말투. 연우의 입술이 떨렸다. “연…….” 이름이 떠오르려 했다. “연…….” 그때 손목의 검은 선이 꿈틀거렸다. 뜨거운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연우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이현이 즉시 그녀를 붙잡았다. “연우!” 검은 선이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번졌다. 그리고 피부 위에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첫 번째 기억 회수 완료. 연우는 그것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기억. 회수.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것도 정해진 순서대로. 이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연우의 손목을 살피다가 내관에게 명했다. “의관을 불러라.” “예, 저하!” “그리고 오늘 밤 동궁의 문을 전부 닫아라.” 내관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하?” “누구도 들이지 마.” 이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비전에서 사람이 오더라도.” “하지만…….” “내 명이다.” 내관이 황급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이현은 다시 연우를 바라봤다. 그녀는 손목을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저하…….” “말해.” “저는…….” 연우는 눈물을 닦았다.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동생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릅니다.” “그런데도 가겠다고?” “모르니까 가야 합니다.” 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 제 기억을 가져갔다고 해서 그 아이가 없었던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안 됩니다.”그녀가 급히 은바늘을 움켜쥐었다.“또 기억을 가져가려는 겁니다.”이현은 이를 악물었다.“내 기억인가?”“모르겠습니다.”“그럼 확인해야겠군.”“무슨 말씀을…….”이현이 연우의 손목을 붙잡았다.이번에는 그녀가 피하지 않았다.“연우.”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연우는 숨을 삼켰다.“저하께서요?”“그래.”이현은 그녀의 손목을 조금 더 단단히 감쌌다.“왕세자의 이름. 동궁의 위치. 내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그가 말을 멈췄다.연우는 기다렸다.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네 이름.”연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저하.”“그것만큼은 잊지 않겠다.”그 순간.붉은 실이 다시 나타났다.이번에는 연우의 은바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이현의 손목에서였다.실은 두 사람의 손목을 천천히 감쌌다.연우가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잠깐.”“저하, 위험합니다.”“알아.”“그러니 놓으셔야…….”“네가 놓고 싶다면 놓아.”그의 손에 들어간 힘이 느슨해졌다.연우는 손을 뺄 수 있었다.그런데 그러지 않았다.자신의 손목을 감싼 붉은 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이번에는 연우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놓지 않겠습니다.”이현의 눈빛이 흔들렸다.“정말?”“예.”연우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저하께서 저를 기억하시겠다고 하셨으니까요.”그녀는 은바늘을 들어 올렸다.“저도 저하를 잊지 않겠습니다.”붉은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순간 동궁의 등불이 모두 꺼졌다.하지만 이번에는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다.대신 붉은 달이 떠올랐다.침전의 천장이 사라졌다.벽이 무너지고 바닥이 물결처럼 흔들렸다.연우는 비명을 삼켰다.또다시 꿈이 시작되고 있었다.그때 이현이 그녀를 끌어당겼다.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쌌다.연우의 몸이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저하……!”“움직이지 마.”이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서고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이현은 천천히 장부를 덮었다.“사람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군.”“저하…….”“이름만 지워지는 것이 아니야.”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기억까지.”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채연준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채씨 집안의 거처이옵니다. 나흘 전 약방에서 약을 지어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사옵니다.”“그 약방 주인은?”“아이의 얼굴은 기억하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옵니다.”이현의 손이 책상 위에서 굳었다.연우가 했던 말과 같았다.얼굴은 기억한다.하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현은 천천히 일어났다.“연우에게는 아직 말하지 마라.”최상선이 고개를 들었다.“하오나 저하…….”“아이의 흔적을 더 찾아.”그가 장부를 내관에게 돌려주었다.“그리고 이 기록은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마라. 대비전에도.”최상선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명을 받들겠사옵니다.”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연우는 다시 동궁전 침전으로 불려 갔다.붉은 예복을 입으라는 명령은 없었다.대신 짙은 남색 치마와 연한 상아색 저고리를 입었다. 머리에는 화려한 장식 대신 작은 비녀 하나만 꽂았다.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연우는 면사 끝을 만지작거리며 침전으로 들어갔다.이현은 창가에 서 있었다.검은 곤룡포가 아닌 짙은 먹색의 평상복 차림이었다. 허리에 매달린 장식도 없었고, 머리에는 간소한 관만 쓰고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화려한 장식이 사라지자 그의 체격과 움직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연우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저하를 뵙습니다.”“왔군.”이현이 돌아섰다.“옷은 마음에 드나?”연우는 당황했다.“……예?”“불편한 곳은 없는지 물었다.”“없습니다.”“다행이군.”그는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앉아.”연우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이현은 차를 따라 그녀 앞에 놓았다.연우는 차를 바라보다가 손을 멈췄다.“저
이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당시 왕세자가 하룻밤 사이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다음 날, 죽은 왕세자가 다시 나타났어.”연우의 손에서 바늘이 미끄러졌다.“……다시 나타났다고요?”“살아 돌아온 왕세자는 자신이 죽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신하들도 그를 왕세자로 인정했고, 왕 역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그게 어떻게…….”“하지만 왕세자의 침소를 지키던 궁인 하나가 이상한 말을 남겼다더군.”이현이 천천히 연우에게 몸을 기울였다.“죽은 왕세자와 돌아온 왕세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연우는 숨을 멈췄다.꿈속에서 본 두 번째 이현이 떠올랐다.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치던 남자.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웃고 있던 남자.그들은 분명히 같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그 궁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사흘 뒤 죽었다.”“…….”“그 직후 몽침사에 관한 기록이 사라졌고, 왕실에서는 몽처라는 말을 금기로 삼았다.”연우는 손목의 검은 선을 바라보았다.그것이 조금 전보다 짙어진 것 같았다.“저하.”“말해.”“혹시 백 년 전에도…… 왕세자가 두 명이었습니까?”이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그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연우는 잠시 망설였다.그러나 더 이상 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젯밤 꿈속에서 본 두 번째 저하가…… 현실에도 나타났습니다.”“알고 있다.”“저하께서도 보셨습니까?”“보았지.”연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럼 정말 환영이 아니었군요.”“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이현이 탁자 위에 놓인 몽처의 명패를 바라보았다.“그놈이 사라진 뒤에도 이 물건은 남았으니까.”연우는 명패로 손을 뻗었다.그 순간 이현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건드리지 마.”“왜요?”“아직 무엇인지 모르니까.”“저하께서는 만지셨잖습니까.”“그래서 더 위험한지 알 수 있지.”연우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이현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손을 놓았다.“미안하군.”너무 자연스
왕세자의 침전에 여자를 들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적어도 그 여자가 세자빈의 옷을 입고 있다면.그러나 그 여자가 진짜 세자빈이 아니라는 사실을 왕세자가 알고 있고, 그럼에도 직접 자신의 침전에 머무르도록 명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저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옵소서.”동궁의 수석 내관인 최상선은 이미 세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 오는 시각, 침전 앞에 선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세자빈 마마의 존체를 대신하는 일만으로도 궁법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그런데 정체조차 확인되지 않은 여인을 저하의 침전에 계속 머무르게 하신다면…….”“정체를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이현은 태연하게 답했다.“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옵니다.”“그럼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저하.”“그 여자를 데려온 것은 동궁이 아니다. 그렇지?”최상선의 입이 다물렸다.이현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대비전에서 데려왔고, 세자빈의 예복을 입혔으며, 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침전으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동궁의 법도를 논하겠다는 것이냐.”“소신은 다만 저하의 안위를 염려하여…….”“내 안위를 염려했다면 석 달 동안 내가 잠들 때마다 죽는 이유부터 알아냈어야지.”차갑게 떨어진 말에 최상선의 얼굴이 굳었다.동궁이 고요해졌다.이현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 끝에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밤새 불어온 바람에 처마 끝 풍경이 가볍게 흔들렸지만, 그의 눈에는 그조차 거슬리는 것처럼 보였다.“오늘부터 그 여자는 내 명이 없으면 동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다만 본인이 떠나겠다고 한다면 막지 마라.”“하오나…….”“그리고 누구도 그 여자에게 함부로 손대지 못한다.”그 말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최상선은 오래도록 엎드려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명을 받들겠사옵니다.”내관이 물러가자 이현은 천천히 침전으로 돌아섰다.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사각.사
연우는 움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연우의 어깨에 닿았다. “찾아 주겠다.” 연우의 눈이 커졌다. “……예?” “네 동생.”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찾아 주겠어.” 연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려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그 아이가 정말 있다면 찾아야지.” “저하께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상관이 생겼어.” 이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네가 내 꿈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 기억을 가져간 것이 내 얼굴을 한 놈이라면 더더욱.”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현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입니까?” “오늘 밤부터 내 곁에 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 “네가 기억을 잃는 순간을 확인해야겠어. 그놈이 다시 나타나는지도 봐야 하고.” “하지만 저는 일곱 밤만…….” “일곱 밤.” 이현이 말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네 동생을 찾겠다.”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찾지 못하시면요?” “그때는 네가 떠나도 돼.” “정말입니까?” “왕세자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연우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좋아.” 그는 돌아서려다가 문득 멈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예?” “앞으로 내 앞에서 울지 마.” 연우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울고 싶어서 우는 줄 아십니까?” 이현이 낮게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가 다시 다가왔다. 손가락이 연우의 얼굴 가까이 올라왔다가 멈췄다. 면사 너머로 눈물이 흐른 자리를 바라보던 그는 잠시 망설인 뒤 손을 내렸다. “네가 울면.”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톱으로 실 끝을 건드렸다.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어머니였다. 연우는 숨을 멈췄다. ‘누군가 네 이름을 부르거든…….’ 목소리가 끊겼다. 연우는 황급히 바늘을 움켜쥐었다. “어머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머니!”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연우가 화들짝 돌아봤다. 이현이었다. 그는 연우가 움켜쥔 바늘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할까. 또다시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현이 다가왔다. “손을 펴 봐.” 연우가 망설였다. “이번에는 왜요?” “피가 나.” 그제야 연우는 손바닥이 따끔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바늘 끝이 살을 찌르고 있었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이현이 손수건을 꺼냈다. “놓아.” 연우는 천천히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감쌌다.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검은 비단 위에 금실로 작은 용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왕세자의 물건이었다. “이런 걸 제게 쓰시면…….”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래도 아깝지 않으십니까?” 이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손수건이?” “예.” “네 손보다?” 연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상처가 깊지 않은지 확인하고 천천히 손수건을 묶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연우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 손을 잡으면 꿈속으로 떨어질까 두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손을 놓는 순간이 더 신경 쓰였다. 연우는 황급히 다른 생각을 했다. ‘정신 차리자.’ 이 사람은 세자다. 자신은 대역이다. 그리고 진짜 세자빈은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저하.” “왜.” “세자빈 마마께서는 어디에 계십